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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합니다.

– 위키백과, ‘메멘토 모리’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로서의 시간, 다른 하나는 희생으로서의 공간. 적어도 마르틴 부버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세월호는 기도의 시간이며 희생의 공간입니다.

더불어 세월호는 죽음의 기억입니다. 세월호는 도저한 절망의 바다입니다. 그 끝 간 데 없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뻔뻔하게도 희망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게 살아 있는 사람의 의무니까요. 끝끝내 살아남은 자의 천형이니까요.

그러니 지난 1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생으로 남아 있는 동안, 세월호는 우리에게 끝없이 질문할 것입니다. 아직 당신은 인간인가, 우리는 사람인가, 우리는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소망하고, 그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소망하기 때문에 그래서 희생할 수 있는 공동체인가.

우리, 아직, 인간으로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건가, 세월호는 잔인하게 질문할 겁니다.

우리가 그 질문을 잊어버리는 날, 그 죽음을 기억하는 걸 멈추는 날, 우리는 우리의 몸뚱이에 붙은 인간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이름을 지우고, 우리의 삶(生)이 죽음과 기억에 기대어 있다는 진실을 외면하며, 결국은 매일매일의 습관적인 욕망만이 살아남은 죽음의 날들을 이어가겠죠. 그리고 결국 사라질 겁니다.

저는, 뻔뻔하게도, 그날이 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세월호

세월호 기록하기 

성수대교가 그랬고, 삼풍백화점이 그랬듯, 세월호는 사회 곳곳의 부실이 하나로 겹쳐진 사건이었습니다.

세월호와 네 개의 타임라인: 최초 9시간 동안의 기록은 두고두고 가슴을 치게 했습니다. 아이들을 살릴 기회는 여러 번 있었고, 번번이 그 기회를 놓쳤습니다. 정부의 무능과 허술한 위기관리 시스템을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세월호 현장에서 실종자 가족 대표는 분노했지만, 정부는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라고 냉정히 돌아섰습니다. 세월호 시신이 안치된 인근 병원에서는 엘리베이터 안 시신 방치에 분노하는 유가족의 오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세월호 이전과 그 이후로 대한민국은 나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선 세월호 유가족 특별법에 ‘의사상자 지정, 특례입학’ 있다는 루머를 퍼뜨렸습니다. 유가족의 손을 잡고,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유가족을 색안경 끼고 바라봤습니다. 정말 이제 아무도 없었습니다.  악몽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슬픔으로 깊게 잠긴 2014년, 하지만 우리가 “세월호의 아이들” 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느새 해가 바뀌고, 어느새 다시 1년입니다. 세월호는 아직 그 바다에 잠겨 있는데, 이토록 미친 듯 잔인한 사회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피해자답게 눈물만 흘리라 강요하는”것만 같습니다.

세월호 몽구

세월호 이해하기 

우리는 세월호라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은 어쩔 수 없이 원망이 터졌습니다. 아이들을 두고 도망간 선장에 대한 원망이 터졌습니다. 어른으로서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세월호의 비극은 다른 나라의 슬픔까지 불러왔습니다. 라나 플라자 붕괴 사고가 어찌 해결됐는지 돌아봤습니다. 피해자와 유가족은 여전히 슬픔 속에 살고, 그 해결 아닌 해결은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멀리 터키 광산에서 또 다른 세월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95년 삼풍백화점 참사가 있었던 때 먼 나라에서 받았던 위로도 떠올렸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일, 함께 슬퍼하는 일이 점점 사라집니다. 살벌한 경쟁에 치여 나만 잘살면 그만이지. 우리 가족만 잘살면 장땡이지. 편협한 이기심이 싹트고,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 편협한 이기심이 세월호의 비극을 자라게 한 토양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우리는 여전히 “천 명의 구경꾼“에 불과했는지도 몰라요.

그런 사회에서 정의가 어떻게 세워지고, 평등이 어떻게 구현되며, 사랑이 어떻게 실현되겠습니까. 정부와 공무원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이장덕과 같은 훌륭한 공무원으로 오히려 죄인으로 만든 사회는 아니었는지 되돌아봤습니다. 용기 있는 공무원 죽이는 사회는 아니었는지 반성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 바깥에서 세월호의 비극이 도둑처럼 들지 않는 건 이제 분명해 보였습니다. 세월호가 남긴 가장 어려운 숙제는 바로 우리 교육의 현장에 있지는 않을는지요? 현직 교사는 세월호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해 선생님이 거꾸로였어”

“거꾸로 된 건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https://www.facebook.com/leepary
“거꾸로 된 건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우리는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가 인간보다 돈이 우선하는 전도된 사회, 거꾸로 된 사회의 비극이라는 건 자명해 보였습니다. 그런 사회를 방치하고, 조장한다면, “참 나쁜 대통령”이겠죠. 그리고 우리는 그런 대통령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사과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누구를 향한 사과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40년 전 육영수 여사를 죽인 한마디도 “가만히 있으라” 였다는 걸 상기했습니다. 청와대는 거기 있지만 거기 없습니다.

한편으로, 돈보다 인간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과는 상관없이 정부와 공무원에 대한 불신을 민영화 땔감으로 쓰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 자식 잃고 아비들의 눈물을 만났고, 세월호의 그늘에서 더 슬프게 눈물짓는 베트남 할아버지의 슬픔도 목격했습니다.

언론, 그 야차의 모습

세월호의 침몰을 보도하는 언론은 저널리즘이 아닌 反저널리즘이었습니다. 야차가 된 언론을 기억하자고 우린 말했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열 가지 이슈도 함께 기억하자고 우리는 말했고, 세월호에 대한 슬픔이 일상을 마비시키는 엄숙주의로 작용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한편 정부부처들은 사고 당시에는 없었던 컨트롤 타워를 미디어 영역에 새로 만든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세월호 이슈에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응은 ‘정부 험담은 우리가 막는다‘는 졸렬한 것이었죠. 그런 와중에 세월호 이슈에 대한 언론 통제 의혹이 있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진도체육관 동영상 삭제를 둘러싸고 루머가 돌기도 했죠.

언론은 무너지고, 정부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데만 열중하는 동안 카톡을 비롯한 메시지 서비스들을 통해 세월호 특별법 카톡 ‘루머’가 돌았습니다. 우리는 어찌 그리 잔인할까요. 우리 자신을 탓하며 우리는 그 루머에 대처하는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심재철 세월호 카톡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는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이 2014년 7월 18일 지인들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의 일부. (출처: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원회)

세월호를 실천한 사람들

대한민국은 세월호 이전, 세월호 이후로 나눈다고 우리는 다짐했습니다. 사람이 돈보다 중요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더는 부끄러운 어른으로 남지 않겠다고, 더는 비겁하게 숨어 있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다짐은 쉽습니다. 실천은 어렵습니다. 용혜인 씨는 그 실천을 몸소 보여준 가장 대표적인 대학생입니다. 용혜인 씨는 당당하게, 정부야말로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용혜인 씨는 결국, 경찰에 연행당하며 “이게 나라입니까?” “우리가 국민입니까?”라고 절규했습니다. 우리는 법정에 선 혜인 씨를 위해 탄원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용혜인,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 제안자

엄마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사태 해결 못 하면, 우리 어떻게 이 땅에서 아이들을 키우겠습니까?” 엄마들은 말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은 KBS 항의 시위를 벌이며 자신의 진실을 “국민에게 꼭 알려달라” 고 외쳤고, 세월호 참극 해결을 촉구하는 교사선언도 있었습니다.

세월호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르는 유민아빠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고, 보수언론은 유민아빠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민아빠는 그저 한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유민아빠였죠.

세월호 1년,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오늘로 세월호 1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그 고민은 지난 1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1년, 아니 세월호와 같은 비극이 더는 발행하지 않는 그날까지 멈춰져선 안 될 것입니다.

안전사고의 예방과 대처를 인센티브로 접근하자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4단계 접근법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이후 경기 위축 ‘시나리오′를 통해 경제 전반의 문제를 살펴봤고,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해 과연 해경 해체가 답인가? 라고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사건 후속 조치 현재 상황
세월호 사건 후속 조치 현재 상황 (2014년 8월 25일 기준)

무엇보다 공무원 조직의 문제를 심도 있게 성찰했습니다. 철밥통이 과연 잘못이냐고 질문하고, 좀 더 실천적으로 공직 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회의하기도 했죠.

분명한 건 이겁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세월호 1년, 우리는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여러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일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어느새 세월호 1년입니다. 세월호 1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세월호 2년, 세월호 3년, 세월호 4년, 세월호 5년…. 조금씩 조금씩 세월호의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그 날들 동안, 한 세월호 언니가 말한 것처럼, 세월호의 아이들을 다시 만나는 그날, “떳떳하게 얼굴 볼 수 있는 어른”, 그런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월호. 일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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