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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미국 기행문 [아메리칸 버티고]의 초반부에는 뉴욕시에 있는 한 감옥 시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가 나온다.

“뉴욕시 안에 별개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이 섬은 어느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뉴욕 시민들도 이곳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화요일 아침 5시, 퀸스 거리의 어느 다리(공식적으로는 그 어느 곳과도 연결되지 않는 까닭에 당연히 이름이 없다) 입구에서 ‘뉴욕 시 교도부’ 소속의 마크  J. 크랜스턴과 면담을 가졌다.”

– 베르나르 앙리 레비, 김병욱 역, [아메리칸 버티고], 2014, 황금부엉이, 41쪽.

Daniel, "Alcatraz", CC BY NC ND
Daniel, “Alcatraz”, CC BY NC ND

a0103757_496b7e6ba7dc1공공연한 비밀장소, 앨커트래즈 감옥

“어느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그 어느 곳과도 연결되지 않는 까닭에 당연히 이름이 없”다는 글귀가 특히 마음을 잡아끌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이 영화 [더 록]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앨커트래즈를 방문하며 남긴 부분이었다.

레비는 사실 이 감옥시설을 둘러싼 역사 속의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예를 들어 인디언 코뮌(다양한 부족 출신으로 구성된 89명의 인디언들이 1969년에 제안했던 것)이나, 그곳을 거쳐 갔던 유명 범죄자들의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갈수록 더 대담하고 환상적이며 기발해진, 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 탈옥 기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레비는 이러한 경험 속에서 미국과 유럽 사이의 간격을 발견한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감옥도 사회의 일부이지만, 미국에선 “공간이 이중화”되므로 “배척하고 추방하는 권력 모델”이 그대로 고착화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뉴욕시의 감옥에서 그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마치 손으로 만지듯” 보았다는 것, 그리고 앨커트래즈에 대한 그의 단상을 읽으면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이중화된 구역이 하나 있잖은가? 군부대가 아니면서도 지도에 나오지 않는 곳, 사람들이 다가서면 경찰들이 먼저 와 겹겹이 에워싸는 곳, 민간인들과는 철저하게 격리된 곳. 북악산 아래 근사하게 자리한 대한민국 권력의 심장부 말이다. 여전히 청와대는 어느 지도에서도 볼 수 없는 ‘공공연한 공적 비밀 장소’다.

청와대, 분명히 있지만 없는 곳

다시 레비의 글귀를 보자. 뉴욕시의 감옥을 가리켜 그는 이렇게 묻는다.

“이곳은 섬인가, 도시인가? 세상의 끝에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중심에 있는가?”

물론 그가 둘러본 앨커트래즈나 라이커스 감옥을 청와대를 이런 식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분명히 앨커트래즈건 라이커스건 그것은 사회의 법 체계를 어긴 사람들을 일정 기간 수감했거나 혹은 수감하는 시설이고, 청와대는 법 체계를 포함한 모든 사회의 체제를 총괄하는 책임권한을 일정 기간 위임받은 자가 기거하는 시설이다. 또한 (앨커트래즈는 다르지만) 라이커스 감옥의 경우는 뉴욕 시민들이 ‘있는지조차 모를’ 시설인 데 반해 청와대는 거기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아는 시설이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지도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과 감옥시설에 대한 레비의 서술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심스럽게 그 접점을 말해보자면 주변화, 시쳇말로 해서 ‘왕따’ 정도가 되는 건 아닐까?

청와대는 뻔히 거기에 있는 줄 알면서도 지도에는 '청와대'라고 표시되지 않는다.
청와대는 뻔히 거기에 있는 줄 알면서도 지도에는 ‘청와대’라고 표시되지 않는다.

대통령, ‘왕따’의 정치학 

알다시피 우리의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한 이후 지속해서 허튼소리를 해왔다. 그가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진단은 아마 파벌을 막론하고 상당한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묘한 그의 성정(이것도 성정이라면)은 세월호 침몰사고가 일어난 뒤 더욱 심화한 듯하다.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대국민담화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대국민담화 (2014년 5월 19일) (사진: 청와대)

“유족들이 바라는 점을 최대한 반영할 것”이며 “언제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유족들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던 그는 청운동 앞에서 며칠째 밤샘 농성을 벌이는 유족들을 ‘왕따’시키고 자갈치 시장으로 나들이를 가기도 했었다. 전에는 ‘특별법은 국회의 일’이라며 자신이 한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특별법 제정과 관련된 모든 책임영역에서 자신을 소외시켰다. 아니, 털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그전으로 가자면, ‘세월호 사고를 둘러싼 일련의 일들에 대한 공직자들의 책임을 엄중히 묻겠’다 선언함으로써 자신을 그 모든 책임으로부터 밀어냈다.

결과적으로 이런 대통령의 행보는 자신을 제외한 공직자들을 왕따시키고, 국회의원들을 왕따시키고, 나아가서는 국민들을 왕따시켰던 것이 아닐까? 자신을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을 주변화시킴으로써 자신만이 대한민국의 중심에 서듯 말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는 실질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에 해당하기에, 그 자신이 왕따를 당한다는 것은 성립 불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일 그가 주변화된다면 오히려 그를 제외한 이 나라의 다른 모든 이들이 주변화되는 역설을 불러오는 결과가 되는 것 같다.

있지만 보이지 않는 청와대 혹은 대통령

누구나 그것이 거기에 있음을 알고는 있으나 지도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 대통령이 보여주는 행보와 너무나 닮아 있지는 않은가? 대한민국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루는 모든 자와의 단절을 자행하는 그의 모습은 대통령이란 지위에 대한 그 자신이 지닌 이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앨커트래즈와 라이커스 감옥에 대한 레비의 단상을 읽으면서 다가왔던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청와대’라는 이미지와의 기시감은 아마도 이점으로부터 연유하는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도 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단독의 원인에 기인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대중의 정치적 성향의 변화와 같은 것들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양상조차도 그러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사회단위에서 그것을 파악해야 하는지는 사안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어떤 현상 내지는 사건을 사회의 총체적 모습으로부터 주변화시키고 예외적인 일로 간주할 때, 해당하는 사안의 본질적인 모습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때때로 예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 예외조차도 어쩌면 일정한 단위사회의 전체적인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지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레비가 제시하고 있는 앨커트래즈와 라이커스 감옥의 주변화된 모습은 미국사회가 내장한 경직된 도덕주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고 국가에 대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우리 대통령의 행보-지도상에 보이지 않는 청와대 또한 그의 경직된 이념성을 보여주는 단초라 할 수 있겠다. 주체성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것의 경직성에서는 차이가 없으리라 보인다. 또한 , 사회의 총체성을 은폐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만적 전술이란 점에서도.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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