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 개헌을 위한 상상력: 한상희∙행인 인터뷰 (총 2편)

대통령 임기나 권력구조 변화라는 ‘정치권’ 이슈에만 주목하지 말자.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 권력의 뿌리에 해당하는 주권자 국민의 삶과 일상만큼 중요한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 그 일상을 바꿀 개헌, 새로운 시대 변화에 맞는 헌법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정치권 거대 담론에 치이고, ‘그들만의 헌법’에서 소외된 채 메말라 버린 국민의 정치적 상상력을 일상에서 숨 쉬게, 노래하게, 그리고 춤추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헌법은 그저 막연한 추상이 아니다. 그 한 줄이 우리 삶, 일상의 디테일을 구체적으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그 헌법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무엇을 꿈꿀 수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헌법적 상상력은 무엇인가.

한상희 교수와 윤현식 박사(‘행인’)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자.

개헌을 위한 상상력,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1. 적정 임금

한상희: 비정규직 문제나 고용안정, 그리고 이에 터 잡은 최저임금 대신에 적정 임금에 관한 좀 더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생활임금이라고도 한다. 이 개념은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보장했던 제헌헌법에서 읽을 수 있다. 기업 내지는 작업장이 자본의 전유물이 아니라 노동자, 소비자 등 다양한 생활 관계가 구성되는 일상의 공간으로 이해한 것이기도 하다. 최근 상법이 주주자본주의 일변도로 개정된 것은 이런 면에서 너무도 아쉽다. 참여연대는 ‘일할 권리’와 함께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총 반응이 좀 미지근해서 아쉽다.

💡 적정 임금과 헌법 제32조 제1항: 적정 임금은 노동자와 그가 부양하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동시에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의미한다. 현행 헌법 제32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 증진과 적정 임금 보장에 노력해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최저임금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편집자)

2. 청년 주거권

한상희: 청년 문제에 관한 담론은 그때그때 사정이나 형편에 따라 급조된 내용이 많다고 느낀다. 한국 청년은 기본적으로 가장 큰 자산인 ‘부동산’에 접근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을 헌법적 권리와 연결하면, 주거권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시민사회가 먼저 ‘청년 주거권’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를 청년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역할을 정치와 언론이 해야 한다.

💡 ‘청년’ 주거권과 헌법 제35조 제1항: 집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그 사회에 관한 소속감이 집을 소유한 사람보다 낮다. 이 당연한 상식은 다양한 사회조사를 통해 입증된다. 특히 집을 갖지 못하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청년이 국가와 사회에 느낄 소속감이 얼마나 연약한 것일지를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현행 헌법 제35조의 제1항은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편집자)

3. 58년 개띠 여성

행인: 나는 소속된 정당에서 별도로 무슨 대안이나 될 것처럼 독립적인 청년 정책을 내는 것에 대해 그다지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정당들이 청년 관련 정책을 마구 쏟아냈고, 청년 정치인 발굴한다고 나이 젊은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박근혜가 발굴해 키운 청년이 손수조와 이준석이었는데, 이준석이 지금 여당 대표도 해보고 대선후보로까지 등장했다. 이런 희귀한 사례 말고는 청년 정치인 대다수가 한 때 반짝 소모품으로 소비되다 사라졌다. 

세대론 자체를 매우 경계하는 입장이지만, 2012년 총선 직후 나는 기왕에 세대를 앞에 내세우는 정책을 만들려면 ‘58년 개띠 세대 여성’의 문제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2년 당시는 58년 개띠 세대, 55년부터 60년까지의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가 5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어가는 시기였다. 불과 4~5년 뒤부터 이 세대들이 은퇴를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세대는 매우 독특한 세대인데,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선진국을 만들어낸 세대다.

동시에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들로부터 봉양받지 못하는 최초의 세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세대 중에서도 여성은 주로 가사노동을 전담하며 상당수가 전업주부로 중년기까지를 보내다가 남편 은퇴 후 생계전선으로 내몰리게 되는 세대가 될 것이었다. (과도한 단순화일 수 있으나) 이런 특수성을 가진 ‘58년 개띠 세대 여성’은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와 연결되니 이들의 삶을 정책의 화두로 놓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맨 앞에 내세우고 그 내용을 새로운 헌법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른 입장도 나름의 이유를 들어 개헌할 때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온갖 이해관계를 모두 포함해서 한꺼번에 깨끗하게 개헌 한다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청년이나 노인 같은 세대 사안, 젠더 사안, 소수자 사안, 남북 관계, 경제 구조, 생태와 환경, 거기에 더해 요즘 이야기되는 동물이나 자연물 등의 다양한 계층과 존재의 이해를 담은 제헌에 가까운 헌법 개정은 어려울 것으로 본다. 

2012년 54세였던 58년 개띠 여성은 이제 만 67세가 됐다. 세월은 너무 빨리 흘렀지만, 아직 살날이 평균 수명으로만 봐도 20년 넘게 남았다. 그 남은 세월, 잘 견딜 수 있을까?

💡 58년 개띠 여성과 헌법 제34조 제3항: 현행 헌법은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제34조 제3항)고 규정한다. 행인이 지적한 58년 개띠 여성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과 연관 맺고 확장한다.

  1. 여성이 그동안 전담하다시피 한 돌봄노동을 제도권 노동으로 편입하는 문제
  2.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노인 돌봄의 문제: 여성은 남성보다 더 평균적으로 오래 산다.
  3. 시혜적 단순 ‘공공근로’를 넘어서 전문성을 살리는 다양한 공공 일자리의 창출 필요성. 이에 관해선 이상헌 제네바 인터뷰( ‘이제 일자리가 사람을 찾아올 때’) 참고할 것. 물론 이는 노인 전반에 해당하는 문제다. (편집자)

4. 동물권

한상희: 에콰도르 헌법은 ‘자연은 재생산의 권리를 가진다’는 규정을 담았다. 그런 걸 한국 헌법에 넣자고 하면 대부분 반대할 것 같다. 만약 동물권이 개헌 논의에 포함된다면, 그건 마치 동물에 대한 ‘은전’이나 ‘시혜’처럼 취급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자연의 권리나 동물권 등이 헌법에 규정된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삶에 관한 새로운 성찰의 준거로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지구라는 생활공간, 생태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인자들 중의 하나인 인간의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인: 동물권이라고 했을 때 어디까지가 동물권인가. 그 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은유로서 동물의 권리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법적으로, 규범적으로 그 권리를 행사하는 건 동물일까, 사람일까? 예를 들어 사람에게 서식 환경을 침해당한 동물로부터 피해를 당했을 때 동물의 권리는 어디까지 보장될 수 있나? 이 문제를 합의할 수 없는 사람은 헌법적 권리로서 동물권에 반대할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권리도 그렇다. 에콰도르 헌법의 ‘자연 재생산 권리’는 현실적으로 자연의 재생권이 아니라 대대손손 거기에 터 잡고 사는 선주민들의 문화와 역사,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성격이 더 강하다. 자연 자체에 권리를 부여한다는 건 결국 그 선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겠다는 의미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논의의 의의가 생략된 채 다른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된다. 동물권이나 자연권을 바로 헌법 규정에 넣는다는 것은 상당한 진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5. 성평등: 양성 패러다임은 이미 깨졌다

행인: 개헌 논의에도 계층이나 계급적 권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가령 현행 헌법에서 혼인은 양성평등에 기반한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은 성에 기반한 혼인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뀐 상태다. 사람들이 이 부분에 관해 관심이 많은데 헌법에는 이에 관한 규정이 없다. 하지만 그런 권리가 개헌에 반영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거다. 차별금지법도 십수 년을 방치하고 있는 정치권이 이걸 헌법에 냉큼 집어넣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같은 환경에서는 어떤 가치가 헌법에 반영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기득권 계층과 계급의 이해가 반영되고, 다만 아주 예외적으로, 기득권의 입장에서 ‘이것쯤은 해줘도 되겠네’ 정도만 반영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걸 넘어서려면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런 공간이 열려야 한다. 헌법은 피를 먹고 자란다. 우리 헌법이나 남미의 헌법 같은 경우에도 그 헌법은 혁명의 열매인 셈이다. 그래서 헌법은 빨간색이다.

6. 퇴근 후 카톡 받지 않을 권리 !

한상희: 남미 국가들은 혁명을 거치면서 헌법 조문이 굉장히 길어졌다. 400조가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영미와 유럽의 헌법은 사회적 엘리트가 자신의 결정권을 확보하기 위해 헌법을 추상화하고, 관념적으로 체계화하는 역사적 경향성이 있다. 그런 이유로 헌법이 모든 법의 상위법이지만, 그 추상성으로 인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율배반이 나타난다.

반면, 남미는 다양한 계층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헌법에 반영했다. 칠레 같은 경우엔 2019년 헌법 개정안에 ‘작업시간 외에 연락받지 않을 권리'(digital disconnection)를 넣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퇴근 후 카톡 받지 않을 권리’다. 그렇게 헌법에 구체적으로 어떤 권리를 기본권으로 넣으면, 관료와 같은 행정 권력은 물론이고 기업도 함부로 그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우리도 다양한 계층이 각자의 목소리를 한 마디씩이라도 넣을 수 있으면 좋겠다.

퇴근 후에는 카톡 문자 받지 않을 권리!

7.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한상희: 지난 코로나-19 상황에서 서울시가 긴급생활지원금을 책정하면서 서울시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 적 있다. 서울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똑같이 생활하는 서울 주민임에도 국적이라는 형식적인 구획을 이유로 코로나-19의 고통 속에 외국인들을 내팽개친 것이다.

다문화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의 공간은 나와 그들이 더불어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헌법이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칠레가 헌법 개정을 하면서 “보충성에서 연대성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었다. 모든 면에서 동일한 인간들이 동일한 생활 규율이라는 환각 속에서 각자도생하게끔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이런저런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어 살아가는 공동의 삶을 일구어나가는 헌법을 지향한 것이다.

폭염, 한국인 노동자는 단체협약에서 정한 대로 오전 근무만 했지만, 외국인 노동자는 종일 근무해야 했다. 그리고 일하러 간 첫날 목숨을 잃었다.

행인: 헌법 개정을 한다면 이런 문제가 개헌 사안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예컨대 현행 헌법은 기본권의 주체가 모두 “국민”이다. 우리 헌법 기본권 조항 중에 명시적으로 “국민”이 주어로 등장하지 않는 조항은 제28조(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 제29조(공무원. 공무원법상 예외적으로 외국인이 공무원이 될 수 있음), 제33조(근로자), 제36조(개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본권은 “국민”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적 인권이다. 이주노동자 또는 이주민에게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들이 거의 다다. 그렇다면 기본권 향유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누구나”로 되어야만 한다. 거기에 더해서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권리 보장이 헌법에 규정될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의 내용 중에 헌법의 규정으로 못 박을만한 내용들이 상당하다.

8. 노동권에서 일하는 사람의 권리로

행인: 헌법 제32조의 ‘노동권’은 임노동에 국한된 범주적 한계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범주가 필요했던 투쟁의 역사가 있음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노동권’을 ‘일하는 사람의 권리’로 표현한다는 건 한자어를 순화하는 차원을 넘어 범주의 확장이라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가령 ‘돌봄노동’이라던가 혹은 ‘그림자 노동’을 보상이 필요한 권리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림자 노동이 되었든 돌봄노동이 되었든 일하는 사람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가 주어져야 한다는 기본적 원리에 동의한다. 더 나가 돌봄 노동 또는 그림자 노동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의의를 임노동의 한 형태로 유형화하는 선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돌봄노동이나 그림자 노동은 최저임금 선에서 얼마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일하는 사람의 권리’보다는 헌법 제34조(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차원에서 돌봄 그 자체를 구체적인 국가의 의무로 헌법에 규정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한 사회가 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일’이라 인정하면,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는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가 된다. 그와 동시에 돌봄노동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해서 보상해야 한다.”

이상헌,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2025.

에필로그: 여기가 로도스다! 이제는 직접 뛰어들자!

한상희: 개헌은 ‘도구’이고, ‘수단’이다.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헌법은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지 그것을 목표로 삼는 건 아니다. 물론 현실 권력은 물론 극소수 정치와 기업이 가지고 있고, 정치는 실질이 아닌 명분 싸움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내가 참여하는 시민단체 ‘참여연대’는 ‘권력구조 개편’이 아니라 ‘정치체제 개편’이라는 방법론으로 개헌에 접근한다. 왜냐하면 헌법 조문을 살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정치권력에 들어와서 해야 할 것, 빼야 할 것, 그런 것들을 만들어놓고, 시민사회에 그 의제와 문제의식을 던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인: 광장에는 민주주의의 목소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는 계엄 지지파가 상당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청년도 많았다. 물론 내 주변에는 그런 청년은 극소수이긴 하다. 그래서 주관적으로는 현재의 청년 담론이 다소 부풀려진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인터뷰 시점을 고려할 것. 편집자).

광장에서 사람들이 개헌을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016년-2017년 촛불시위는 박근혜 탄핵 이후에 제도정치권의 권력재편으로 수렴됐다. 당시 촛불의 방향은 ‘헌정질서의 회복’이었지 헌정질서의 전복이 아니었다. 딱 박근혜 이전의 정치질서를 회복하는 수준에서 광장의 열기가 멈췄다. 

2024년-2025년 광장은 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응원봉이며 깃발로 표현됐다. 그게 좀 상징적이라고 본다. 2016-2017의 촛불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탄핵 외의 다른 이야기들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면, 2024-2025의 광장에서는 모든 이야기와 주체에 대한 연대와 환대라는 뭔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다만 개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광장의 목소리를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라고 등치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개헌이 개혁의 귀결이냐 아니면 개혁의 출발이냐, 이 두 가지를 구별하려는 시도가 있다. 개헌이 개혁의 귀결이라면 당장 필요한 건 개혁의 공간, 즉 장기적으로 개헌을 준비하는 공간을 지금 열어야 한다는 거다. 개헌이 개혁의 출발이라면 일단 성문의 헌법 규정을 먼저 바꿔놓고 시작하는 게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런데 후자에 중점을 두게 되면 87년 헌법 개정 당시와 같이 정치권의 논의로 개헌이 끝나버릴 위험이 있다. 개혁의 출발로 개헌을 본다고 할지라도,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참여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개헌의 시간과 공간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헌법 조항을 바꾸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헌법의 조문만 바꾸는 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수십 수백 개의 깔끔한 개헌안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형식일 뿐이고, 그 형식이 실질을 담고 있는지와는 다른 이야기다. 개헌이 국민의 바람과 가치와 목소리가 담기는 ‘공간’이라면 그것은 목표가 될 수 있다.

내가 지역정당(운동)을 하는 이유는 ‘마이크’를 보수 양당으로부터 가져오는 근거와 명분을 ‘지역정당’이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제는 공직선거법만 바꿔도 된다고 했다가 막판에 대선이 코앞에 오니까 개헌 사항이라고 말을 뒤집은 적 있다. 현실 정치가 그 모양이다. 

그래서 개헌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예 헌법에 못을 박아 놓으면 일이 되지 않겠냐는 거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헌법에 못 박는 것도 헌법 현실이 바뀌고 그래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당위가 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그래서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되기 전까지는 싸워야 하고, 싸우는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 공간이 바로 개헌이 이루어지는 ‘로도스’다.

한상희(왼쪽), 윤현식(‘행인)
💡 여기가 ‘로도스’(Rhodus)다!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어야 할 순간을 비유하는 말. 고대 그리스 이솝 우화에 나오는 표현인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에서 뛰어라”(“Hic Rhodos, hic saltus”)에서 유래했다. 한 멀리뛰기 선수가 로도스 섬에서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고 허풍을 떨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보라”고 말하며 그 허풍을 지적했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이 표현을 인용했고, 현대에 와서는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줘라’, ‘핑계 대지 말고 실명을 증명해라’는 의미로 쓰인다. (편집자)

관련 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