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리포트] 한류 스타들의 일탈? 자본과 권력의 구조적 유착을 봐야 한다.
영국의 공영 방송 BBC가 한국 K-팝의 그늘을 조명했다.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이라는 다큐멘터리다. 5년 전 사건을 다룬 영상에 페이지뷰가 1000만 뷰에 육박한다는 건 세상의 관심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건을 외부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다음은 6월6일 방송된 ‘내 그럴 줄 알았다: 뉴스AS’를 중심으로 추가 취재한 내용을 정리한 기사입니다. ‘내그알’의 이재석 기자와 안귀령 앵커, MBC 이문현 기자와 함께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아직 끝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애초에 이 사건은 단순한 연예인 범죄 사건이 아니다. 연예인 몇 명이 처벌받고 끝났지만 현장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여전히 여성들이 약물을 이용한 성폭행 위험에 노출돼 있는데 경찰은 손을 쓰지 않고 있다.
- 솜방망이 처벌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윗선은 밝혀지지 않았다.
세 문장으로 정리해 보자.
- 첫째, 그들만의 왕국이었다.
- 둘째,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 셋째, 떠들썩했지만 달라진 건 없다.
- 우리는 1번을 기억하지만 2번을 깊게 파고들지 못했고 3번은 우리가 간과했던 부분이다.
새롭게 알려진 사실.
- 구하라(걸그룹 카라 멤버)가 핵심 제보자였다. 강경윤(SBS 기자)의 요청을 받고 최종훈(FT아일랜드)에게 전화해서 뒤를 봐준 경찰이 누군지 확인했다.
- 기자들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 있었다. 첫 보도를 했던 기자는 온갖 욕설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고 두 차례나 유산을 했다.
- 피해자의 증언도 있었다. 그날따라 빨리 취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정신 차려 보니 침대였고 강간을 당하고 있었다. 보내달라고 사정하니 사진을 찍고 풀어줬다. 경찰에 신고했는데 합의한 관계 아니었냐며 묵살했다. 약물 강간이 왜 신고가 어려운지 그리고 피해자들이 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설명해 준다.
- 강경윤과 박효실(스포츠서울 기자)은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 불의에 맞선 시민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구하라와 포렌식 업체의 제보가 아니었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폭행 피해자(김선교)의 제보도 있었다.
- “그때 물뽕도 뭐 이게 마약이다, 이런 뉴스가 나왔지만 아직도 똑같이 저희 클럽에서 쓰고 있고요.” 강남 클럽 종사자의 말이다. 달라진 게 없다는 이야기다.
본질은 이것이다.
- 이 사건은 일부 연예인들의 성 추문 사건이 아니다.
- 승리와 정준영이 유명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라 경찰의 비호를 받을 만큼의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죄다.
- 버닝썬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버닝썬 이전부터 벌어졌던 사건이고 버닝썬이 문을 닫은 뒤에도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사건의 발단.
- 버닝썬이라는 강남의 클럽에서 폭행 사건이 있었는데 신고받고 온 경찰이 피해자를 체포했다(2019년). 폭행 피해자가 언론에 제보했지만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 2016년 정준영 불법 촬영물(몰카) 사건이 먼저였다. 처음에는 단순 몰카 사건 같았고 경찰이 뭉개면서 흐지부지 종결되는 것 같았다. 포렌식을 맡겼는데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 그런데 3년 뒤 이 포렌식 업체가 정준영 파일(2015~2016년 정준영과 승리의 대화)을 방정현(변호사)에게 제보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 퍼즐처럼 맞물린 세 가지 사건이 드러내는 것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버닝썬 게이트’라는 말이 은폐하는 것.
- 버닝썬은 승리가 운영했던 클럽 이름일 뿐이다.
- 버닝썬 폭행 사건이 발단되긴 했지만 강남 클럽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는 물뽕과 강간, 불법 촬영물 범죄 가운데 일부가 드러난 것뿐이다.
- 애초에 버닝썬이 문 닫는 걸로 끝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사건의 결말.
- 승리는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지만 항소심에서 1년 6개월로 줄었다.
- 최종훈은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특수 준강간 혐의였는데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형량이 줄었다.
- 정준영은 1심에서 징역 6년, 2심에서 5년으로 줄었다. 합의가 되지 않았다.
- 셋 다 만기 출소했다.
- 약물을 사용한 성폭행 사건이라면 미국에서는 징역 30년 이상을 받았을 거란 말이 나온다. (한국 형법이 병과주의가 아니라서 그렇단 분석도 있다.)
- 경찰총장(‘경찰청장’이 아니라 ‘경찰총장’으로 불림, 편집자)이라고 불렸던 윤규근(당시 강남경찰서 총경)은 대기발령 조치 됐다가 경찰병원 총무과장으로 좌천, 올해 2월 송파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가 BBC 보도로 다시 논란이 되자 서울청 치안지도관으로 발령됐다. 직권 남용 등 혐의를 받았지만 벌금 2000만 원에 그쳤고 경찰 차원의 징계는 없었다.
- 강경윤은 “그 카톡을 생각하면 아직도 막 심장이 아픈 느낌이 든다”고 했다. BBC와 인터뷰한 피해 여성은 “언젠가 정의가 실현될 거라는 생각을 기대를 하진 않고 있다”고 말했다.
좀 더 들어가 보자.
- ‘버닝썬 뒤에 숨겨진 비밀’의 저자 이문현(MBC 기자)은 버닝썬 사건 보도 이후 “처음으로 기자가 된 걸 후회했다”고 했다. 이렇게 탈탈 털어 보도했는데도 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까 하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취재를 더 열심히 했으면 바뀌었을까 후회도 많이 했다고 한다.
- 다음은 ‘뉴스 AS’에서 소개한 이문현의 취재 후기를 정리한 것이다.
- 폭행과 협박이 동반돼야 강간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물뽕은 폭행과 협박 어떤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 물뽕(GHB, 감마 하이드록시낙산)은 무색 무취 무미의 중추신경억제제로 12시간이 지나면 모두 소변으로 배출돼서 검출할 수 없다는 게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결론이었는데 전문가들은 모발에서 잔류 성분을 추출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했다.
- 독일에 가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묻는 말에 답도 하고 걸어 다닐 수도 있지만 완전히 기억이 끊긴 상태였다.
- 버닝썬 이전부터 하룻저녁에 수천만 원을 쓰는 VIP들에게 물뽕에 취한 여성 고객들을 갖다 바치는 이른바 강간 상품을 판매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진을 찍고 신고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 보도 이후 국회에서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형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년 된 문제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 25년 된 문제가 됐다. 승리와 정준영 등이 체포된 뒤 여론의 관심이 빠르게 식었기 때문이다.
- 경찰이 성범죄 수사에 물뽕 지침을 넣은 것이 그나마 성과였다. 성범죄 신고가 들어오면 약물 투약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두기로 했다.
- 이런 사건도 있었다. 한 고등학생이 어머니에게 훔친 돈 1800만 원을 들고 버닝썬에 와서 돔페리뇽 수십 병을 마셨다. 어머니가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아들을 꽁꽁 묶어서 싣고 갔다. 강남 경찰서에 신고했다는데 MBC가 확인해 보니 놀랍게도 신고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버닝썬은 문 닫을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영업 정지를 맞은 적 없다. 목격자도 있고 버닝썬 대표가 경찰에 돈을 건넸다는 진술도 있었는데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 경찰과 강남 클럽의 구조적인 유착이 핵심이지만 윤규근 외에 아무도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총장이라는 네이밍이 워낙 강렬해서 화제가 됐지만 윤규근은 몸통이 아니었다.
BBC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
- K-팝 팬덤의 추악한 이면을 들췄지만 핵심은 부와 권력의 유착이다. 유명한 연예인이라서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경찰을 움직일 수 있는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범죄였다.
- “깊숙이 들어가야 나오는 룸”은 아직도 있고 승리와 정준영 외에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 조직적인 성범죄와 은폐, 고급 클럽과 경찰의 유착을 파고들지 않고 한류 스타의 일탈로 취급한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생각해 볼 지점.
- 첫 번째 질문은 BBC가 할 수 있었던 보도를 왜 한국 언론은 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 상을 받고 나면 끝나는 기사가 많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어야 하는데, 자, 이제 다른 거 찾아봅시다 하고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구조적으로 한 언론사 특종을 다른 언론사가 따라가지 않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 이문현도 “출입처가 바뀌면서 추가 취재를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연예인 사건에 매몰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고 했지만 실제로 기사에 대한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 두 번째 질문은 그래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무엇을 할 것이냐다.
- 의제 설정이 언론의 힘이고 동력이다. 사실이 갖는 힘이 있고 이게 여전히 왜 중요한지 설득하려면 후속 보도가 받쳐줘야 한다. 공영 언론과 독립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자들의 사명감도 필요하다.
- 분노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차갑게 기억하고, 계속해서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고 의제를 제안하고 끌고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