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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며 참 실망도 많이 하고 펑펑 울기도 했다.

같이 울어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 대해 끝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왜 이런 걸까?’ 지난 몇 주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계속하는 고민은 이렇다.

‘과연 우리는 바뀔 수 있을까?’

분명히 시위는 하고 있고, 여론은 좋지 않고, 대통령은 사과랍시고 뭔가 말하긴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정체한 느낌이다. 며칠 전 시위에서 사람들이 그다지 모이지 않은 것을 보고 난 지난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집회를 떠올렸고, 광우병 사태를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의 승리라고 불리는 87년 6월 항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후 당선된 노태우도 떠올렸다.

87년 6월 항쟁, 직선제 개헌 그리고 노태우 (사진: 출처 불명)
87년 6월 항쟁, 직선제 개헌 그리고 노태우 (사진: 출처 불명)

‘과연 우리나라는 바뀔 수 있을까?’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과대평가

현재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범주화가 쉽지 않지만, 정부의 뻘짓에 화가 많이 나서 촛불을 들었거나 들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두자)은 스스로 능력과 의견 표출 방법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의 ‘합법적’ 통제 범위

포털을 포함한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과 광장에 모여서 시위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가 쳐 둔 테두리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인터넷은 국내용 인트라넷에 가깝다. 포털의 힘은 여전히 강하다. 네이버는 여전히 검색 점유율 70%를 상회한다(2013년 12월 기준).

정부는 여론을 통제하려고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Eric Drooker CC BY
Eric Drooker CC BY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터넷 서비스 중에 겨우 페이스북과 트위터 정도가 정부에 의한 ‘직접적’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이다(간접적으론 여전히 통제 범위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여론 수렴 창구로서의 역할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국정원 및 알바들의 조작질 외에도 트위터 자체의 사용자가 생각 외로 적고, 페이스북은 거대한 국내용 유머 사이트화 하는 게 현실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한편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대안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의 정치적 잠재력이 오프라인에서 제대로 발휘된 사례는 아주 드물다. 커뮤니티 자체도 그 테두리 안에서 회원들끼리만 소통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커뮤니티에서만 고여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프라인 시위

오프라인 시위도 마찬가지다. 경찰이 울타리를 둘러친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시위한다. 그리고 물론 대부분 언론은 이에 대해 보도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야 정부와 기득권층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세월호 유족들의 KBS 항의 시위 모습
세월호 유족들의 KBS 항의 시위 모습

2. 과소평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여기에는 속이는 자와 속는 자만 있어.”

그의 말인즉슨,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속이는 자는 기득권 세력이며, 속는 자는 국민이라는 거다. (그 표현을 빌리면) 현 기득권 세력과 집권 여당으로 구성한 정경언(정치경제언론) 복합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국민을 “속여서” 표를 얻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그럼 속고 있는 국민에게 어떻게 깨달음을 줄 것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고)
‘우리가 가르쳐주면 되지!’ (라고 답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오만한 답변에서 출발한다. 민주당이 매번 티파티(미국의 보수주의 정치운동) 같은 일견 ‘멍청한’ 이익집단에 쩔쩔매는데도 이런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다. 미국 민주당은 오만하다. 그 잘나고 똑똑한 도시 사람들이 하는 말을 골수 공화당 지지자들은 절대 듣지 않는다. 오히려 티파티에서 악의적으로 선동하는 “오마바의 중간이름이 후세인이니까 오바마는 테러리스트다.” 따위 말에 솔깃하여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다.

우리나라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단순히 ‘속고 있는 불쌍한 노인들’이라는 생각에 방법론적인 고민을 충분히 하지 않은 채 다가가면 그저 욕만 듣고 반발만 살 뿐이다. 매해 명절날 각자의 고향 집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대화를 떠올려보시라. 평생 믿어온 ‘인생의 진리’를 누가 허물려고 든다면 우선 드는 감정은 반발과 분노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3. 정치세력의 부재

세월호 참사에서 실종한 정당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새정치뭐시기라는 정당은 어디에 갔는가?

몇몇 새누리당 의원들이 ‘망언’과 ‘유언비어’로나마 이름을 알리려고 이토록 노력하는데, 야당 정치인들은 모두 모여 손에 손잡고 어학연수라도 간 것인가? 국회에서 최근 통과된 법들을 보면 딱히 국회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텅 비어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온라인 일정표 (이미지: 새정치민주연합 홈페이지)
텅 비어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온라인 일정표 (이미지: 새정치민주연합 홈페이지)

이제 여름이 다 되어가는 데 야당 국회의원들은 하루빨리 동면에서 깨어나 일어나 뭐든 하길 바란다. 박근혜 퇴진하라고 목소리라도 내란 말이다. 정치인은 자기 부고 기사 외에는 뭐든 이슈를 만들어 신문에 깔리는 것이 좋다는 말도 있지 않나?

정치인들이 앞에 나서서 대안을 제시하며 계획을 짜고 힘을 모아주지 않는다면 결국 장수 없는 오합지졸 군대가 되고 말 것이다. 대학생이 행진을 제안하고 계획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왜 대학생이 전면에 나서야 하는가?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제안한 용혜인 씨 (사진: 딴지일보 좌린 @zwarin)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을 제안한 경희대 4학년 졸업반 용혜인 씨 (사진: 딴지일보 좌린 @zwarin)

만약 국민이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을 생각이라면 버리길 바란다. 국민은 그렇게까지 멍청하지 않다.

4. 위기의식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며 목소리를 높이면 그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낀다.

어버이 연합(일명 ‘가스통 할배’)의 원동력도 사실 LPG가 아닌 이 위기의식이 아닐까 싶다. 쉽게 보면 ‘어린 것들이 간이 부어서 어른들한테 대든다’라는 꼰대스러운 감정일 수도 있고, 조금 더 고차원으로 보면 그들의 청춘으로 기억되는 순간을 젊은 세대가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공포일 것이다.

‘유신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말, 얼핏 들으면 이해할 수 없지만, 작년에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짧은 영상을 보면서 느꼈다. 지난날에 관한 기억은 일단 아름답고 그립다. 그리고 그 기억이 흔들리면 내 인생이 흔들린다. 나의 과거와 인생과 청춘을 이 ‘빨갱이’들이 몰려와서 허물려고 한다는 위기의식이 그들을 뭉치게 한다.

그래서 총리까지 지낸 김황식은 “박근혜 대통령을 지키자”는 구호로 선거 홍보 문자질을 한 바 있다. 이것은 그들 세대를 위한 외침이자 존재론적 의미를 담은 구호다. 그리고 박근혜는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내 뜨겁던 시절이 단순히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이라 불린다고 해도 참고 넘어갈 수 있는가?’ 하고 묻고 있다.

사진: 어버이연합 홈페이지
사진: 어버이연합 홈페이지

5. 지역감정

내가 사는 여기 캐나다 깡촌에도 한국인들이 산다. 그리고 우연히도 대부분 대구 출신이다.

하루는 베트남 식당에서 국수를 말아 먹다가 “의료 민영화 같은 소리 하네!”라고 화낸 적 있다. 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한마디가 주위를 얼어붙게 했다.

어른들 대부분은 새누리 지지자다. 어린 친구들도 ‘새누리가 좋은 것 아니냐’고, ‘형도 혹시 빨갱이냐’고 나에게 묻곤 한다. 뭐 어릴 때 이민을 왔으니 어린 친구들이 잘 모르는 건 그러려니 하는데, 어른들도 캐나다에까지 와서 출신 지역에 따라 정치적 성향이 갈리는 것은 좀 이해할 수 없다. 이만큼 지역감정은 뿌리가 깊다.

지역감정이라는 편견이 정치적 판단, 사회적 현안에 관한 정책적 판단력까지 완전히 장악해버린다.

6. 정치혐오

나는 ‘허경영’을 기억한다. 처음엔 그의 말도 안 되는 개드립에 놀랐고, 선거 후에 그가 10만 표 가까이 득표했다는 것을 보고 더더욱 놀랐다. 선거를 안 했으면 안 했지 귀찮게 투표장까지 가서 허경영에게 투표한 9만 7천 명을 나는 ‘정치혐오세력’이라고 본다. 얼마나 정치를 혐오하느냐면 ‘귀차니즘’을 이겨낼 만큼 혐오한다.

그리고 안철수 새정치 열풍의 배경에도 정치혐오세력이 한몫했다고 본다. 실체 자체가 불분명한 ‘새정치’란 말 하나로 정치경력이 전무한 사람을 대선후보로, 제1야당 대표로 만들어 놨다. 흔히 ‘부동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정치 혐오세력이다. 정치에도 옳고 그름이 있고, 법에도 좋은 법과 나쁜 법이 있으며, 정치인 중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새끼가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이번 세월호 사건 이후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추모제와 시위가 반반 섞인 듯한 집회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슬픔이란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고, 그 감정이 모두 분노로 바뀌는 순간 집회의 성격은 확실히 반정부 집회가 될 것이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이 빠져나갈 것이다. ‘아이씨 또 정치야?’ 하고 말이다. 정치와 삶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에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는 사회에선 건강한 정치세력이 생겨날 수 없다.

7.8. 유체이탈과 자기 모멸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정몽준 의원의 재수생 아들은 세월호 사태에 관해 국민을 “미개하다”고 표현했다. 그 엄마는 그런 자식을 두둔하는 듯 말했다.

YouTube 동영상

이런 비하 발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주 볼 수 있다. 서울 소재 모 대학의 교수 역시 국민은 미개하다고 트위터에 당당히 올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대통령이 세월호 주인인가? 왜 유가족은 청와대에 가서 시위하나, 유가족이 무슨 벼슬 딴 것처럼 쌩 난리친다. 이래서 미개인이란 욕을 먹는 거다” (김XX 교수) 

결국 여론의 뭇매를 맞고 그는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대한민국과 자신을 분리하고, 공동체 성원과 자신을 분리하는 말을 한다. 쉽게 말해 왜곡된 선민의식이고,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유체이탈’ 화법이다.

유체이탈 화법의 대표격은 역시나 박근혜 대통령이다. 자신이 공무원의 수장이면서 ‘세월호 대처 못 하면 공무원들 옷 벗을 각오하라’는 대책 같지도 않은 대책을 내는가 하면, 경기 침체 원인을 세월호에 돌린다. 경기 침체 원인은 세월호의 침몰이 아니라 정부의 총체적인 무능력과 무책임 때문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장 무거운 책임자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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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지도층이라는 것들의 ‘유체이탈’ 화법의 본질이 뻔뻔함이라면, 이런 뻔뻔함에 대한 무력감과 좌절감으로서 네티즌의 온라인 활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국민의 정서 가운데 하나는 자기 성찰로서의 죄의식에서 훨씬 더 나아간 폭력적인 ‘자기 모멸’이다.

유체이탈과 자기 모멸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정확하게 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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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 (그림: 왼쪽 메스트로 l 오른쪽 버크, 위키백과 공용)

9. 허위의식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못하게 하는) ‘허위의식’(虛僞意識, 독일 Falsches Bewußtsein)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친다.

가까운 과거 참여정부 시절을 떠올려 보자. 종부세 정책 발표 다음날부터 조중동은 “세금 폭탄”이라는 타이틀로 국민의 계급적 허위의식을 자극했고, 그 선동의 틀짓기에 걸려든 대부분은 세금 ‘폭탄’과는 별 관계없는 소시민이었다. 로또 당첨금에 관한 세금을 올리겠다고 하자 많은 이들이 마치 자신이 다음 주에 당첨이라도 될 것인 양 반대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미국은 어떤가. 미국 중산층은 미국 경제를 받치는 버팀목이었다. 최근 이혼을 경험하고 뒤이어 직장을 잃은 후 일용직 노동자가 된 내 백인 친구를 보며 미국 백인 중산층의 몰락을 바로 곁에서 체험한다. 미국 중산층은 몰락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이 기득권층에 유리한 정책을 펼치며 중산층 이하의 계층에 불리한 사회 여건을 만들어 가도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나는 중간이 아니라 중상인데?’라며 그 정책에 반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점점 더 사회는 20:80, 아니 1:99의 사회를 향해 가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20과 1에 속한다고 착각하거나, 앞으로는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그러는 사이에 정경언 복합체는 세월호의 분노를 민영화를 위한 ‘땔감’으로 쓰려는 ‘창조경제’스러운 담론화 작업에 한창이다.

영국의 민영화 과정 (이미지: [45년의 시대정신](켄 로치, 2012) 중에서 발췌)
영국의 민영화 과정 (이미지: [45년의 시대정신](켄 로치, 2012) 중에서 발췌)

10. 싸움에 대한 저항감 / 교양의 억압

언젠가부터 시위 때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시위는 사진기로 밤거리의 촛불을 찍으면 참 예쁘다는 것 빼곤 딱히 위협적이지 않은 시위가 되어 버렸다. 물론 폭력 시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촛불’은 붉은 악마 티셔츠와 별반 다르지 않고, 그 촛불이 의미하는 건 ‘우리는 교양있는 시민이야’라는 자신을 향한 안도감은 아닌지 의심한다. 어쩌면 ‘촛불’은 시위 자체의 의미 전달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광주의 ‘이제는 횃불이다’도 촛불이 더 커졌다는 것 외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말이 안 통하는데 이쪽에서만 교양있게 대화로 합시다? 저쪽은 손발 다 쓰면서 럭비 하는데 이쪽에선 발만 쓰는 축구 하는 격이다. 싸움에 대한 저항감, 그 이면에 있는 교양의 압박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폭력 시위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끝으로, 글을 쓴 진짜 이유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나라)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글을 쓴 이유는 따로 있다. 너무 무기력과 좌절에만 빠져 있지 말고, 너무 감정에만 빠져있지 말고 변화의 가능성과 그 방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는 거다. 비판은 얼마든지 환영한다. 그리고 그 비판들을 모아서 제발 아이들이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줬으면 한다.

여러분,
제 글이 그저 헛소리라는 걸 몸소 증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sewol
“거꾸로 된 세상에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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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1. 질문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은 밝지 않습니다. 저 또한 무척 회의적이고, 님의 분석과 성찰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질문을 바꿔보죠. ‘우리는 바꿀 수 있을까’ ,’진실로 바꾸고 싶은가’, 그리고 ‘무엇을 바꿀까’
    역시 답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다릅니다. 전자의 질문이 기대, 객관, 성찰의 태도에서 나왔다면 후자의 질문은 주체, 능력, 의지의 자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쉽사리 낙관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객관적 힘을 간과한 채 삶의 주인되는 열정만을 호소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포기할 수 없고, 무엇인가 하나씩 해나가면서 작은 변화를 만들고 큰 변화의 (결정적) 계기를 일구어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제까지의 의미있는 변화와 역사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간디도, 루터 목사도, 유월 항쟁도, 노무현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님이 열거한 다양한 접점과 전선에서 패배하면서,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모색하고 행하는 것에서 바꿈에 대한 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끝내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밑질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교훈으로 혹은 간접 경험으로 남아 의미있는 거름으로 쓰일 수 있고, 그 모색과 행함(여기에는 님의 고민과 성찰도 포함합니다)이 그 사람 자신은 변하게 한다는 분명한 진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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