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에서 비롯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언어의 형식과 의미를 잇는 원리는 자의성(arbitrariness)이었습니다.
언어의 자의성
시니피앙(significant; 기표)과 시니피에(signifié;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책상이라는 물리적 대상과 /책상/이라는 음성이 짝이 되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책상/이라는 소리를 통해 책상이라는 대상을 떠올릴 수도 없겠죠.
즉 보통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쓰는 가구를 /책상/으로 부르느냐 /desk/라고 부르느냐는 이들 음성이 가리키는 대상의 특성과는 관련이 없는 사회적인 규약(convention)이라는 것입니다.
언어마다 약속이 다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약속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국제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언어인 에스페란토의 예에서 보듯 약속의 체계를 아예 새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상은 소쉬르의 언어관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상식’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소쉬르가 기호(sign)의 형식과 의미가 맺는 관계를 자의성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한계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근본적인 원리가 있다고 해서 개별 언어에 있어서 극도로 자의적인, 즉 어떠한 동기도 없는(unmotivated) 요소들과 상대적으로 자의적인 요소들을 구별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기호는 완벽히 자의적이다. 이에 반해 어떤 기호에서는 자의성의 부재(不在)가 아닌 다양한 수준의 자의성이 발견된다. 이런 기호는 다른 기호들에 비해 동기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중에서
이 구절에서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에 편차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의성을 의미와 형식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기본원리로 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관계가 자의적이지만은 않다는 점을 명확하게 한 것이죠. 인지언어학자들은 소쉬르가 주목했던 ‘자의성의 다양한 수준’이라는 주제를 좀 더 파고듭니다. 언어의 다양한 영역에서 자의적이지 않은 요소들, 즉 언어현상의 동기화된 측면들(motivated aspects)을 보여주는 데 더욱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부바-키키 실험
사실 본격적인 인지언어학 이론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리-의미’의 자의적 연결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예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부바-키키(Bouba-Kiki) 실험이 대표적인데요. 아주 간단한 실험이니 여기에서 해보도록 하죠. 여러분들께서는 다음 두 그림 중에서 어느 쪽이 부바(Bouba) 혹은 키키(Kiki)라는 이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나요?
한 실험에 의하면 95% 이상의 응답자들이 왼쪽을 키키(Kiki), 오른쪽을 부바(Bouba)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부바(Bouba)와 키키(Kiki)의 음성이 도형의 선택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피험자들의 선택이 50:50으로 갈려야 하지만 응답 결과는 압도적인 쏠림으로 나타났던 것이죠.
뒤집어 말하면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오른쪽 이미지와 뾰족하고 날카로운 왼쪽 이미지가 부바(Bouba)와 키키(Kiki)라는 이름을 선택하는 데 명백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결과에서 언어의 의미(도형의 시각적 특성)가 언어형식(Bouba와 Kiki라는 발음)에 영향을 끼쳤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자의성과 동기화: 언어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논쟁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리 대수야’하며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위 실험의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언어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자의성과 동기화라는 개념은 핵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생성문법에서 언어의 형식은 내용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문법 구조(syntactic structure)는 자체의 논리로 구성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형식체계로서 구조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인지언어학은 언어의 의미와 구조가 유기적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가정 위에 서 있습니다. 아울러 이 과정에 언어적 요소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체적 특성, 주의(attention)와 지각방식,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encyclopedic knowledge) 등이 개입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지언어학자들은 ‘동기화’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개념을 채택하고 있습니다만, 라덴(Radden)과 판터(Panther) 의 견해에 따라 볼까요?
[box type=”info”]언어 근원(linguistic source)이나 언어 독립적 요인(language-independent factors)들이 언어표현의 특정한 속성의 원인이 된다면, 그 언어표현은 ‘동기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언어현상이 다른 언어적/비언어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일정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면, 그 현상의 배후에는 언어적/비언어적 동기가 있으며, 동기화 되었다(motivated)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box]
이번 연재에서는 언어의 자의성과 동기화의 개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동기화된 언어현상의 다양한 예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그동안 아래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왜 인류는 10을 기본단위로 하는 셈법을 가장 널리 채택하고 있을까요?
- 왜 “Huh?”와 같은 표현은 거의 모든 언어에서 발견되는 것일까요?
- 단어의 길이와 의미의 복잡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참고문헌
- 송현주 (2010). 동기화를 고려한 어휘교육. 어문학교육 41. 7-32.
- Ramachandran, VS & Hubbard, EM (2001). “Synaesthesia: A window into perception, thought and language”. 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 8 (12): 3–34.
- Radden, G. & Panther, K. (2004). Introduction: Reflections on motivation. In Radden, Günter, and Klaus-Uwe Panther, eds. Studies in Linguistic Motivation. Cognitive Linguistics Research 28, 1–46. Berlin and New York: Mouton de Gruyter.
- Saussure, Ferdinand de. 1995 [1916].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Paris: Payot [English translation: 1968.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New York, Toronto, London: McGraw-Hill].
글을 읽으면서 한 실험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얼굴은 팀, 어떤 얼굴은 밥으로 여긴다는 것 말이죠.
http://link.springer.com/article/10.3758/BF03194119#page-1
흥미롭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