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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가 살아나고 있다. 소비자 기대지수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소비자기대지수는 계엄이 발발한 지난해 12월 88.2로 최저점을 기록한뒤, 올해 4월 93.8로 상당기간 100이하에 머물렀다. 6개월 뒤 경기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가구가 그렇지 않은 가구 보다 많았다는 의미다. 대선 국면으로 접어든 5월에는 소비자기대지수가 101.8로, 긍정적 전망 우세로 역전되었다. 6월 전망(108.7)은 더욱 밝아졌다.

새정부에 대한 기대감과 정책 변화에 대한 기대 심리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윤석열 정부는 과도하게 긴축재정을 고수하다보니 이전 정부에 견줘 정부 지출 증가율이 낮아지면서 내수가 크게 위축됐다. 내수 부진은 세수 감소로 이어졌고, 세수 부족은 다시 지출 제한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2023년 이후 계속됐다. 반면, 이재명 정부는 정부 재정의 역할 확대를 공언했다. 재정이 ‘마중물’ 역할을 해 내수를 부양하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드러냈다.

문제는 돈이다. 재정 지출은 필요하지만, 돈을 무한정 찍어낼 수는 없기에, 결국 세금을 더 걷거나 부채를 추가로 발행해야 한다. 그러나 증세도, 국채 발행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크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기금 여유 재원을 활용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돈은 많은데 못 쓰는 기금의 역설

국가에 돈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일부 기금에는 ‘놀고 있는’ 돈이 많다. 기금은 특정 목적에 따라 조성된 ‘돈 주머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고용촉진기금은 장애인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조성된 기금으로, 장애인 의무 고용률을 충족하지 못한 사업주가 낸 부담금으로 운영된다.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따르면 50명 이상을 고용하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근로자 중 3.8%, 민간기업은 3.1% 이상의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한다.

의무고용률을 채우지 못한 사업주가 낸 부담금은 장애인 고용을 촉진하는 기금으로 활용된다. 이를테면 장애인 의무 고용 비율을 초과 달성한 기업에 주는 각종 지원도 여기에서 나간다. 제도만 놓고 보면 합리적이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장애인을 덜 고용한 기업에서 돈을 걷어, 더 많이 고용한 기업을 지원하니 국민 세금 없이도 장애인 고용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의무 고용을 달성하지 못해 부담금을 내는 기업은 많지만, 초과 고용으로 지원금을 받는 기업은 적다. 지난해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장애인 고용 의무가 있는 민간 기업 중 58%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외에도, 최저임금의 약 70%수준인 부담금을 내는 것이, 최저임금을 주고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보다 더 경제적이라는 인식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고용촉진기금, 이동권에도 쓸 수 있다면

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업이 낸 부담금이 쌓여간다. 장애인 고용촉진 기금에서 놀고 있는 여유 재원만 5500억원이다. 별도로 공공자금관리기금을 통해 일반회계에 빌려준 돈도 7000억원이나 된다. 합치면 1조원이 넘는 막대한 자금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쌓아만 두고 있는 셈이다.

기금의 목적인 장애인 취업을 지원하기 위한 지출을 장애인 이동권 등 여러 방면으로 확장해 적극적으로 쓰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이동권이 고용가능성을 좌우한다”는 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실제 출퇴근, 근무 중 이동 등에도 기금을 쓸 수 있도록 할 때, 장애인 고용률도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국민의 추가 증세 부담없이, 기존 기금의 여유분만 잘 활용해도 수천억 원 규모의 정책 집행이 가능하다.

장애인 이동권 운동의 상징인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제공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력기금, 시대 변화를 반영해 역할 전환해야

전력산업기반기금(전력기금)도 마찬가지다. 전기요금의 3.7%를 부담금으로 적립해 형성된 이 기금은 과거에는 도서·산간 지역의 전력망 구축에 쓰였다. 그러나 현재는 전기 공급 인프라가 대부분 구축됐다. 전기료 상승으로 수입은 느는데 마땅히 쓸 곳은 없어지다보니 올해 전력기금 여유 재원이 약 1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은 전력망 공급이 아니라 기후위기가 더 큰 문제로 부각되는 시대다. 전기 등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전력기금을 기후 대응을 위한 여러 정책에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전력기금은 올해 기후대응기금에 2,000억 원을 전출했다. 앞으로 더 많은 기금을 기후 대응에 활용해야 한다.

전력기금은 전기요금의 3.7% 부과하는 준조세다. 대신증권 블로그.

기후위기 대응, 탄소중립 등을 위한 별도의 ‘기후대응기금’도 있다. 2022년 신설된 이 기후대응기금에도 상당한 여유 재원이 있다. 기후대응기금으로 올해 일반회계에서 1조 3천억 원이 전출됐다. 하지만 지출되지 않은 여유자금이 2,000억 원 이상 남아 있다. 기후대응을 위해 전력기금, 기후대응기금이 있지만 충분한 지출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2025년 7월, 울산에는 기상관측 사상 최악의 폭우가 쏟아졌고, 올해 7월은 118년 만에 가장 더운 7월로 기록됐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며 정부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40% 감축하고,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NDC)를 세우고 있다.
기후위기를 상징하는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말처럼, 기후 위기 대응 지출은 늦을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여유재원을 쌓아둘 이유가 없다.

복권기금, 안정성 명분 아래 쌓인 여유자금

복권기금(국가가 운영하는 복권사업에서 발생한 수익금을 국민 복지와 공익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기금)도 상황이 비슷하다. 특히 연금복권(당첨금을 일시불이 아니라 매달 연금처럼 장기간에 걸쳐 분할 지급하는 방식)에는 약 7,000억 원이 적립돼 있다. 향후 지급할 연금 당첨금의 현재가치 전액이 적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금복권은 해마다 안정적인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라서,지급액 전액을 적립할 필요가 없다. 즉, 미래에 발생할 당첨금 중 일부는 미래에 발생할 수익금으로 지급하면 된다. 굳이 전액을 적립하지 않고 지급액 중 일정 비율만 적립하고 나머지는 복권기금의 고유 목적 공익사업으로 돌려 지출할 수 있다.

스포츠토토와 국민체육진흥기금, 독점 구조의 한계

상황이 가장 심각한 것은 국민체육진흥기금이다.국민의 체육활동을 촉진해 건강한 삶과 건전한 공동체를 목적으로 조성된 이 기금의 주요 재원인 스포츠토토 수입은 매년 6조 원이 넘는다. 이 수익은 전액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독점 관리하고 있다. 로또복권보다 규모가 더 큰 스포츠토토의 수익을 체육 분야로 한정해 쓰려니 쓰지 못하고 적립되어 있는 돈이 많다. 현재 여유 기금이 5,000억 원, 별도로 공공자금관리기금에 예치한 자금이 7,000억 원이다.

상황이 이런데, 스포츠토토 수입을 굳이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독점해 스포츠 관련 사업에만 쓸 필요가 있을까? 국민 건강, 보건 등 영역을 넓혀 스포츠토토 수익금을 지출하면 어떨까?

또한, 로또 등을 통해 적립된 복권기금이 매년 관행적으로 국민체육진흥기금에 약 1천억 원이나 투입된다. 가뜩이나 돈이 많아 주체를 못하는 국민체육진흥기금에 복권기금을 추가 전출 할 필요는 없다. 1천억 원의 재원을 다른 공익 목적 사업에 활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30조 원이 놀고 있는 주택도시기금

여러 기금 중 여유 기금이 가장 많이 쌓여있는 것은 주택도시기금이다. 무주택 서민의 주거안정과 도시재생 활성화를 위한 정책기금인 도시정책기금의 주요 재원은 국민주택채권이다. 우리가 부동산을 매입할 때 강제로 사야 하는 국공채가 국민주택채권인데, 금리는 고작 1%다. 금리가 너무 낮으니 매입한 사람은 손해지만 저리 채권을 판매하는 주택도시기금은 앉아서 돈을 버는 셈이다.

1%로 조달한 돈을 LH 등에 2% 이자만 받고 빌려줘도 주택도시기금은 1% 금리차액을 누릴 수 있다. 봉이 김선달도 울고갈 방법이다. LH 등은 주택도시기금에서 빌린돈으로 임대주택을 공급한다. 문제는 LH 등 필요한 곳에 빌려주지도 않고 놀리고 있는 여유 돈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현재 주택도시기금의 여유 분은 무려 20조원에 이른다. 별도로 공공자금관리기금을 통해 일반회계에 빌려준 돈만 약 10조원이다. 임대주택 등 주거복지를 위해 국민들에게 강제로 국공채를 사도록해 만든 기금에 천문학적 돈이 쌓여 있지만, 현실은 주택공급 사업에는 손 놓고, ‘돈놀이’만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점은 돈놀이 하면서 생긴 이자가 임대주택 융자사업을 통해 버는 돈보다 적다는 것이다. 임대주택을 공급하지 않고 돈놀이를 하는 것이 주택도시기금의 재정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런데, 굳이 여유자금을 축적하고 돈놀이를 할 필요는 없다. 이처럼 한쪽에서는 정책에 필요한 돈이 부족한데, 몇몇 기금에서는 돈이 남아 돈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엄청난 비효율이 발생한다. 적극적으로 기금 여유재원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재정 칸막이 허물기, 정부 의지가 열쇠

장애인고용촉진기금, 전력기금, 기후대응기금, 복권기금, 주택도시기금 등 일부 기금에 쌓여있는 수천억 원에서 수십조 원 규모의 여유 돈을 국가 전체를 위해 사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칸막이’를 무너뜨려야 한다. 한쪽에서는 돈이 부족하고 한쪽에서는 남아도는 상황은 국가 전체 재정 효율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증세나 국채 발행과 같이 국민의 부담이 크고, 또 국민 설득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 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이미 있는 기금 재원을 효율적으로 재배분하는 것이다. 용도를 확장해 적극적 지출을 해야 한다. 결국 문제는 정부의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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