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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바그다드, 니스, 베를린… 잊을 만 하면 테러 사건이 터집니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지 20년을 바라보지만, 문제는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 이슬람이 있습니다. 이 연재는 4편에 걸쳐 테러와 폭력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로서 이슬람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를 그 뿌리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필자)

그들은 왜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

  1. 이슬람과 문명화
  2. 옆집 아저씨가 총을 드는 이유 
  3. 지하드의 광시곡
  4. 분노의 지리학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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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이 화포와 예니체리로 유럽에서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고, 유럽의 상인들이 와서 사파비조의 궁정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그 순간은, 하룬 알 라시드 시대 이래로 이슬람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황금기였다. 대략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슬람은 ‘화약제국 시대'(Gunpowder Empires)에 접어든다.

Ottoman Army artillerymen, 1788 (Wien Museum)
Ottoman Army artillerymen, 1788 (Wien Museum)

“가능한 세계 중 최선”

이 시대는 말 그대로 유럽 상인들이 판매해주는 고성능의 화약 무기를 바탕으로 유목 세계를 제패하고 안정적인 영토 국가를 수립하게 되는 시대였다.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이 바로 대표적인 화약제국이었다. 후에는 러시아와 청 또한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되어 유목민들의 땅을 점차 밀어낸다. 이제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문명이 총체적으로 붕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비록 여전히 아프간의 무장집단이 델리의 술탄을 시해하고 옥좌를 훔쳐가는 일이 가끔 벌어지긴 했어도).

그 와중에도 이슬람은 상인과 그 뒤에 따라온 수피들이라는 비국가행위자의 노력으로 끊임없이 확장해 갔다. 나이지리아 북부에서 상인 네트워크 덕택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부족집단들은 국가 형성 과정에 이슬람 레토릭을 활용하여 남부의 부족들을 상대로 성전을 개시하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사실상 구대륙(아프로-유라시아)의 대부분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문명화가 될 것이었다.

악바르(اکبر) 치세 당시 구르칸군의 포병대를 묘사한 그림. (출처: 1913년 존 바이엄 리스턴 쇼(John Byam Liston Shaw) 작, '악바르의 모험(The Adventures of Akbar)' 수록)
악바르(اکبر) 치세 당시 구르칸군의 포병대를 묘사한 그림. (출처: 1913년 존 바이엄 리스턴 쇼(John Byam Liston Shaw) 작, ‘악바르의 모험(The Adventures of Akbar)’ 수록)

바다에서 가끔 날파리처럼 포르투갈 함대가 내륙의 막대한 부의 일부의 부스러기만을 챙겨가는 귀찮은 일들이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볼테르가 쓴 [캉디드]에 나오는 팡글로스 박사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Best of All Possible Worlds)”[footnote]”Tout est pour le mieux”[/footnote]이라고 말하는 낙천주의자다.

이슬람 화약 제국에 있어서 그 시대는 그야말로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이었다. 물론, 상업은 때로는 위축했고, 농촌에서는 산적떼와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의 반란이 가끔 일어났으며, 궁중의 하렘에서는 온갖 암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불운과 참상과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이슬람 세계는 안정적이었던 것이다.

전쟁의 신이 바꿔놓은 세계

사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이제는 유럽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볼테르가 태어나고 5년 뒤인 1699년에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들에 거의 최초로 패배를 당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가?

처음에는 늘 그랬듯이 유럽인이 뒤처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에겐 거대 제국이 없었다. 합스부르크가 유럽을 통일하여 하나의 거대한, 생산적인 유럽 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처럼 보였으나 이들은 빠르게 팽창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양적으로 팽창하는 것과는 무언가 다른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형태의 국가로, 다시 말해 질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한 바로 그 무기, 유럽인이 동쪽에서 받아와 다시 동쪽에 되돌려준 화약이 문제 해결의 열쇠였다. 스탈린은 “포병은 전쟁의 신이다”라고 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신이 유럽이라는 지리적 공간을 통해서 기지개를 켜게 된다.

포병 대포

산맥과 숲, 강과 습지대, 어지러이 놓여 있는 반도와 섬으로 구성된 유럽에는 하나의 패자가 모든 것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선가는 세력균형을 도와주는 세력이 갈등을 종식하는데 훼방을 놓곤 했다.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고, 17세기에 군사혁명이라는 형태로 유럽 각지가 무한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되자 이 경향은 훨씬 심해졌다.

그러나 상황은 중세 때와는 무언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무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이들이 점차 조금 더 큰 덩어리로 흡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군사적 경쟁은 해가 갈수록 격렬해졌다. 17세기 마운더 극소기[footnote]마운더 극소기(Maunder Minimum): 1650년~1700년경 태양의 상대 흑점 수가 비정상적으로 적어진 시기를 말한다. 영국의 천문학자 마운더의 이름을 따왔다. (참고: 위키백과)[/footnote]로 대변되는 태양 활동의 극적인 축소와 함께 찾아온 기후적 위기 그리고 전쟁으로 유럽에서 수백만 명의 인명이 죽어갔다.

살아남고 싶으면 국가 밑으로 오라

무한 전쟁은 곧 무한한 자금을 요구했다. 조직되고 훈련된 병사들을 동원하고 기술적으로 더 효율적인 무기를 만드는 것은 기존의 국가 예산으로 감당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다.

사실 해결책 자체는 간단했다. 세금을 더 많이 걷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는 기존의 주먹구구식 조세제도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과제였다. 제대로 세금을 걷으려면 인구와 생산량을 파악하기 위한 국가 관료제가 확충되어야 했다. 하지만 사회의 각 집단들에게는 쓸데없이 돈을 많이 걷어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 존재했다. 무한 전쟁이 무한 자금을 요구했듯이 더 많은 과세는 더 많은 정당성을 요구했다.

이 간극을 최초로 해소한 것은 영국의 명예혁명이었다. 권력이 우리 안에 갇히게 되었고 사람들은 권력을 믿고 돈을 더 내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전쟁을 위해서 영원히 갚지 않아도 될 수준의 돈을 대부해주었다. 영국은 이 돈을 해군에 들이부었다. 피프스(Samuel Pepys, 1633~1703) 제독은 “돈이 없으면 많은 것이 망가지는데, 특히 해군이 그렇다”라고 했다. 하필이면 해군인 이유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두 번째 방편이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Dutch Attack on the Medway, June 1667 by Pieter Cornelisz van Soest, painted c. 1667.
Dutch Attack on the Medway, June 1667 by Pieter Cornelisz van Soest, painted c. 1667.

향신료와 은, 후에 설탕과 노예를 장악하는 것이 곧 국가의 승리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 쉽게 말해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부가 필요했다. 그 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해졌다. 괜히 17세기의 한 시가 영국의 옥좌에는 “권력과 부”가 있다는 묘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변방 영국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세계제국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무한 전쟁의 주기를 더욱 발전시켰다. 작은 나라들이 정리되어 가면서 민족 국가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 민족 국가들은 도전에 제때 대처하지 못하면 에스파냐처럼 낙후된 상태로 뒤처지거나 심하면 폴란드처럼 나라를 잃을 수도 있었다. 마침내 1700년대가 되면 전쟁은 지구 상 모든 곳에서 벌어지게 된다. 독일의 평원, 북아메리카의 숲, 인도의 바닷가가 모두 전쟁터였다.

그리고 이 토너먼트의 승자가 되기 위해 영국은 근대 국가로 나아갔으며, 영국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들도 근대 국가가 되어야 했다. 근대 국가가 됨은 곧 추상적인 시스템이 지역 유력자와 같은 중간의 매개자 없이 개개인을 직접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을 의미했다. 그래서 피와 강철의 폭풍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유럽에는 얼굴 없는 관료들이 나라의 모든 국민의 신원과 직업을 파악해서 문서로 보관하고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리바이어던: 폭력의 집행자, 평화의 수호자

피와 강철을 대가로 역설적으로 유럽의 근대 국가들은 안전을 얻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이전부터 늘 있던 과정이었다. 이언 모리스가 그의 저서 [전쟁의 역설] (원제: War! What is it good for?)에서 밝혔듯이 전쟁을 통해 각 집단은 더 큰 사회로, 국가로 나아가 ‘리바이어던’을 불러냈다. 리바이어던은 구성원의 자유를 일정 부분 억제했지만, 안전을 제공했고, 그 안전 위에서 번영이 시작되었다. 한나라와 로마 제국이 건설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고 야만인의 반격으로 잃게 된 것들도 바로 그것이었다.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651)의 표지.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 41장에 나오는 바다 괴물의 이름으로, 인간의 힘을 넘는 매우 강한 동물을 뜻한다. 홉스는 국가라는 거대한 창조물을 이 동물에 비유했다.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651)의 표지.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 41장에 나오는 바다 괴물의 이름으로, 인간의 힘을 넘는 매우 강한 동물을 뜻한다. 홉스는 국가라는 거대한 창조물을 이 동물에 비유했다. 표지에는 인민이 뭉쳐서 만들어낸 거대한 인간형의 존재가 산 너머에서 도시를 굽어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홉스가 국가를 ‘인조인간’, 즉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인간적인 존재로 기술한 것을 형상한 것이다. (참조: 위키백과, ‘리바이어던’)
하지만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의 근대 국가들은 로마와 한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 ‘다른 점’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사파비, 무굴이라는 화약제국들은(그리고 청 제국과 도쿠가와 막부도) 결국은 로마와 한, 마우리아와 같았다. 물론 이스탄불에서는 커피와 담배가 있었고, 무굴의 궁정에서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유럽의 화약이 있었다는 점이 그 이전 로마와 파탈리푸트라의 시대와는 다른 점이었지만, 결국 권력이 운영되는 방식은 다를 수가 없었다.

그 제국들의 사회발전 수준이 그 한계를 드러냈다. 그 한계란 수도의 미약한 중앙관료조직이 지방의 유력자들과 불완전한 타협을 통해서, 영역 내의 농민들과 상인들에게서 인적, 물적 자원을 불완전하게 동원하는 것이어서 국가의 운영원리가 한치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전히 국가의 권력은 지방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지 못하였고 그 생산력 또한 마찬가지라 경제와 사회는 잠깐 풍요로워졌다가 인구가 늘어난 상태에서 기후가 변덕을 부리면 다시 기근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유럽은 국가의 운영방식을 질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물론 명예혁명 다음 날부터 이 모든 일이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거시적 변화가 그렇듯이 유럽에서도 이 변화는 천천히 벌어졌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유럽의 농민들은 풍족하게 먹을 수 없었고 전염병이 돌면 수백명 수천명이 죽는 일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무언가는 바뀌었는데 바로 폭력에 의해서 사망하는 사람의 수가 극적으로 줄었다는 데 있었다. 확대된 관료제와 늘어난 국가의 통제역량은 리바이어던의 힘을 일신시켜주었던 것이다. 결투로 대변되던 명예를 중시하던 문화는 차츰 사라져 갔다. 스티븐 핑커는 그의 놀랍도록 두꺼운 책인 (그러나 읽을 가치는 충분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이 과정을 입증하는 각종 통계자료들을 보여준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중세 말부터 살인율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지만, 17세기가 되자 극적으로 떨어진다. 1350년 영국의 귀족 남성들의 25%가 폭력으로 사망했지만, 1750년이 되자 이 비율은 5% 아래를 밑돌았다. 그리고 스탈린이 말한 “전쟁의 신”을 지휘하던 장교였던 진짜 전쟁의 신,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고 가자 유례없는 국제적 평화와 함께 훨씬 강력한 리바이어던도 출현했다. 이 모든 과정은 내부폭력을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국가가 없어진 자리에서

이는 이슬람 세계 혹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많이 보이는 일상적 폭력은 선진 사회의 과거 모습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적 복수와 폭력이 횡행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들을 폭행하는 것은 과거만 해도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뉴스에 나오겠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뉴스는 아니었을 것이고 혼란하던 후삼국 시대에는 그냥 늘 있는 일이었다.

유럽에서 국가의 진화(진화라는 용어가 남용되고 있지만, 이 과정은 다윈주의적 과정을 따르기에 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는 폭력의 연쇄를 끊는 고리가 되어주었다. 안정된 국가권력이 폭력을 억제하기 시작하자 상업은 더욱 부흥했다. 국가는 신용을 제공해주었고, 구성원 간의 신뢰가 쌓이자 거래비용은 감소했다. 성장을 가로막는 ‘착취적 제도’에서 창조적 파괴를 유지하는 다원적 정치 질서를 유지하되 신뢰와 안정을 제공해주는 강력한 중앙집권정부가 이를 보증해주는 ‘포용적 제도’로의 이행 과정이었다.

유럽, 그리고 국가의 진화
유럽, 그리고 국가의 진화

국가는 이를 바탕으로 후에 국민교육을 제공했고, 민족주의를 고취해 공통의 정체성을 주조해내기 위해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표준어는 ‘총을 든 방언’에 불과했으나 곧 민족정신을 함양한 것으로 신성화되었으며 자국의 역사는 선량한 피해자들과 영웅적인 군사적 지도자의 이야기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서 테러의 진짜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 만연한 테러와 국내 폭력은 국가가 붕괴했고 중앙정부가 신뢰 있는 행위자로 기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붕괴하거나 제대로 수립되지 못한 곳은 전근대의 만연한 폭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인구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어 있고 관료들은 부패해 있으며 의지조차 없다.

베버는 근대 국가의 본질을 폭력의 독점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곳은 지역의 유력자들, 마을의 촌로들이 자의적으로 폭력을 사용하곤 했다. 이런 곳에서 상호신뢰와 거래비용의 감소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은 테러의 진짜 원인일 수가 없다. 이슬람이 있건 없건 정부가 붕괴한 바로 그곳에서 테러는 일어난다.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역기능적 사회, 바로 그곳이 폭력의 온상이다. 마오쩌둥이 종식한 1840년부터 1949년의 백년환란 시기의 중국, 내전 중인 콜롬비아, 콩고민주공화국, 그리고 1990년대의 러시아와 구소련권이 그러했다.

폭력이 만연한 이슬람 국가들은 대체로 이런 특징을 공유한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정부가 붕괴하자 기존의 사회집단 간의 갈등이 폭발하여 테러와 폭력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사드 정부의 붕괴가 시리아에서 가져온 참상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목도할 수 있다. 나이지리아도 마찬가지고, 아프가니스탄도 그렇다. ‘왜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라는 질문에서 ‘왜 총을 드는가’라는 질문에는 따라서 이렇게 답할 수가 있다. 그곳에는 제대로 국가가 기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슬람은 왜?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숱한 국가 중에서 이슬람 지역만 이렇게 신뢰성 있고 안정적인 국가가 자리잡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유럽이 리바이어던을 진화시킨 그 과정이 비유럽권 사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유럽은 경쟁을 통한 주기적인 군사적 혁신과 경제적 성장을 통해 국가 자체의 역량을 일신하는 데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전근대 국가가 이런 근대 국가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의 결과는 파멸이었다. 물론 기세등등한 화약제국들이 처음부터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건륭제는 “천조대국은 모든 물산이 넘쳐 없는 것이 없다. 굳이 외방과 교역할 필요가 없다”라고 매카트니를 물리쳤다. 하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모든 물산이 있다는 천조대국에도 매카트니가 진상한 정교한 기계식 손목시계는 없었다.

Sachin Sandhu, CC BY https://flic.kr/p/58CCzq
Sachin Sandhu, CC BY

그것이 차이였다. 기계식 손목시계를 만드는 근대 유럽은 전쟁 무기도 놀랍도록 더 잘 만들어냈다. 이 차이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졌고, 아시아로 본격적으로 무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자 모든 국가들이 유럽인의 군홧발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가 되었다. 1453년에 유럽은 이제 끝날 것처럼 보였으나 그로부터 정확히 400년이 지나자 유럽인들은 대양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의 아메리카 후손들은 오히려 유라시아의 반대편 끝인 도쿄만에 흑선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미개’했던 이 비서구 국가들은 화약 무기의 도래 이후 유럽을 규정하던 군사적 경쟁의 논리를 빠르게 내재화했고, 새로운 경주의 후발주자로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곳은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였다. 동아시아는 유럽에 비해서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의 폭력은 더 적었다. 전근대에 이미 동아시아는 비교적 선진적이고 정교한 관료 시스템, 인민 통제 시스템을 갖추었기 때문에 근대적 행정조직으로의 전환이 더 쉬웠다. 즉,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중국이 중심이 되는 안정적인 국제 체제가 낳은 수백 년 간 안정화된 국경선 때문에 인구집단 사이의 충돌도 적었다.

한편, 이슬람 국가들은 이런 근대 국가로의 전환에 대체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을 제외하고서는 제대로 성공한 국가가 없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하지만 개발에 실패한다고 해서 곧바로 사회가 붕괴하고 폭력이 난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할 질문은 왜 그러면 그런 실패 국가들 중에서 이슬람 국가가 그토록 많이 보이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이전에 살펴보았던 핵심 요소인 지리가 중요해진다.

분노의 지리학

하름 데 블레이는 [왜 지금 지리학인가]에서 테러와 지리의 관계를 기후로 추정했다. 이 책의 이전 판본은 다른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그 제목이 [분노의 지리학]이다.

분노의 지리학 왜 지금 지리학인가
왜 지금 지리학인가(2015년 출간), 분노의 지리학(2007년 출간)

테러의 원인이 기후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 국가 실패와 사회 붕괴의 원인이 기후라고 하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이유는 특정 기후대에 내재하고 있는 취약성에 기원한다. 경작 가능한 면적이 넓지도 않고, 그조차도 제한된 수자원으로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도 같은 건조기후대에서는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힘들다.

하지만 근대 의학의 보급은 이들 지역에도 인구폭발로 이어졌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이집트의 인구는 1950년 약 2천만 명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8천만 명에 이르렀다. 비슷한 시기 시리아의 인구는 500만 명도 안 되는 수준에서 2천만명으로 늘어났다. 다른 많은 지역에서 개발정책은 실패했으나 이들 지역은 그 취약한 생태자원 때문에 그 정책의 실패가 한결 치명적이었다. 인도도 개발이 실패하여 가장 많은 빈곤 인구를 생겨났지만, 사회가 붕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조기후대가 대다수인 아랍 중동 지역의 농촌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20세기 말부터 변하기 시작한 지구의 기후는 중동 지역에 특히 치명적이었다. 강수량은 더욱 줄어들고 감당할 수 없는 과밀한 농촌 인구는 도시로 밀려 들어갔다. 그러나 도시에 딱히 대안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랍 이슬람 모스크

아랍 국가의 개발 정책 실패는 제조업에서 특히 두드러졌기 때문에 도시에도 일자리는 없었다. 이들은 사회적 불만 세력이 되었다. 밀레니엄의 끝을 전후로 하여 많은 아랍과 중동 각국 사회의 분노는 99도까지 끓어오르게 되는데, 어떠한 우연적인 사건으로 이 물이 100도에 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갈라진 백성들과 실패한 국가

사회의 물질적인 기반에 취약성을 제공한 것에 더해서, 산악이 많고 건조하여 집약적인 농경이 이루어지지 않던 중동의 지리는 또 다른 폭력의 연결고리를 제공해주었다. 바로 민족 분절화(fractionalization)였다. 사회붕괴와 만연한 빈곤으로 확산된 분노는 분절화된 민족들 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사회의 신뢰를 계속 악화시켰다.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숱한 국내 테러(domestic terror)는 바로 이 둘의 합작품이다.

폴 콜리어는 [전쟁, 총, 투표]에서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이 섞여 있는 것이, 집단 간 상호 신뢰를 감소시켜 민주적 선거와 책임성 있는 정부의 정착을 어렵게 만든다고 통계적으로 입증했다. 근대 국가는 일종의 신뢰에 기반한 집합재이자 공공재인데,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거나 인종 혹은 민족이 다를 경우 신뢰 수준이 낮아진다면 이것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폴 콜리어, 전쟁 총 투표

가장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루어내어 강력한 리바이어던을 키운 두 지역, 유럽과 동아시아는 모두 상대적으로 단일한 민족 국가(Nation State)를 기초로 한 곳이었다. 동아시아는 집약적 쌀농사, 전근대 국가치고는 상대적으로 인민통제에 유능했던 정부와 관료조직이 합심하여 일찍부터 민족 분절화 요소를 제거했다. 조선은 여진족들을 몰아냈고 일본은 에조를 동화시켰으며 중국은 용광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유럽은 조금 달랐다. 유럽은 처음에 이야기한 대로 산이 많고 다양한 민족 집단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경향이 강했다. 유럽은 400년에 걸친 전쟁을 통해서 이를 정리하고 단일한 민족 덩어리들로 통합해내었다. 이 과정에서 학살, 인구이동, 강제동화 등이 이루어졌으며 레벤스라움[footnote]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은 189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독일 내에 존재했던 농본주의와 연관된 식민 이주 정책의 개념과 정책 자체를 의미한다. 이 정책을 변형한 형태 중 하나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나치 독일이 지지한 정책이었다. (참고: 위키백과, ‘레벤스라움’)[/footnote]을 향한 히틀러의 열망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마지막 편린이었던 것이다.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인 중동은 서로 다른 이 두 과정 중 어느 것도 거치지 않았다. 이곳은 집약적인 농경 전통이 있어서 민족 국가의 원형을 제공해주는 족류(Ethnie; 같은 족속에 속하는 부류)의 근간이 견고하고 상대적으로 단일하지 않았다. 또한, 근대 국가로 응축되어 수백 년의 전쟁을 통해 이를 정리하는 과정도 겪지 않았다. 엄청나게 다양한 민족, 부족, 종파를 느슨하게 묶어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들이었다. 이것 또한 기본적으로 지리의 문제였다. 중동 사회는 전근대에도 강력한 정부구조가 제대로 뿌리 박지 못했다.

가장 강력한 행정조직과 군사력을 뽐내던 오스만 제국만 해도 제국의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원인 이집트를 몇백 년 전부터 이집트를 다스리던 맘룩 조직을 통해서 대리통치를 맡기던 실정이었다. 이는 중국에서 장강 하류를 지방 영주에 맡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고도화되지 못한 농경 사회, 그리고 여전히 강력한 사회경제적 힘을 지니고 있던 유목 전통이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유럽과 동아시아는 조금 더 뿌리 깊은 농업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과정은 달랐지만, 후에 국가적 정체성으로 대륙을 재편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중동은 그럴 수 없었다. 각지의 지방 유력자들을 파괴하고, 국가 행정 중심의 시스템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소련과 중국의 지배와 같은 예외가 아니고서야 모두 실패했다.

민족 분절화는 어떻게 갈등으로 이어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 각국은 양차 대전의 결과로 독립했다. 문제는 그 기반, 역사적인 실체나 지리적인 뿌리가 몹시 취약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국가 운영의 파행이었다. 기존의 지방 유력자들 사이의 정치적 타협 위에 관료제의 핵심 직책들을 분배했다. 특히 그중 군권을 놓고 경쟁이 치열했다. 이런 경향이 가장 심한 곳은 생태적으로 가장 한계에 몰린 지역인 소말리아, 예멘, 리비아였으며 시리아와 이라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립 이후 이들 지역도 여느 문명권과 다르지 않게 민족주의의 폭풍이 몰아쳤으나 흥미로운 건 이곳의 폭풍은 국가적 정체성에 기반한 폭풍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1967년(제3차 중동전쟁, 일명 ‘6일 전쟁’, ‘6월 전쟁’)까지 중동을 지배한 이념은 ‘아랍 민족주의’였다. 이집트 민족주의나 시리아 민족주의는 나세르의 카리스마적 지도력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시리아와 연합해 아랍 민족주의를 고취한 가말 압델 나세르(1918년~1970년, 출처: Stevan Kragujević, CC BY SA 3.0, 위키미디어 공용)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A7%90_%EC%95%95%EB%8D%B8_%EB%82%98%EC%84%B8%EB%A5%B4#/media/File:Stevan_Kragujevic,_Gamal_Abdel_Naser_u_Beogradu,_1962.jpg
시리아와 연합해 아랍 민족주의를 고취한 가말 압델 나세르(1918년~1970년, 출처: Stevan Kragujević, CC BY SA 3.0, 위키미디어 공용)

국가에 기반한 정체성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안전과 번영을 담보해주는, 상호신뢰를 제공해주고 거래비용을 감소시켜주는 근대 국가의 포용적 제도로의 전환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슷하게 민족 분절화 경향이 심했던 케냐와 탄자니아는 재밌는 비교 사례다. 독립 직후 이 두 나라는 상이한 길을 걸어갔다. 케냐의 국부 케냐타 대통령은 자본주의에 기반한 개발정책을 펼쳤고, 이후 델 모이의 폭정이 있긴 했지만, 케냐는 동아프리카에서 나쁘지 않은 개발성적을 거두고 있다.

반면 탄자니아의 국부인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경제보다는 정치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케냐타 대통령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정책을 펼쳤는데 바로 공통의 탄자니아 정체성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들이었다. 사회주의자였던 니에레레는 집단농장을 만들고, 아프리카 최초로 식민 지배자의 언어가 아닌 스와힐리어(탄자니아에서 널리 쓰이던 언어)를 국어로 전국에 보급시켰으며 교육과 인프라 건설에 주력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사회주의가 으레 그랬듯이 그들의 사회주의 개발모델인 ‘우자마’의 운명은 결국 실패였다. 탄자니아의 소득은 케냐보다 떨어졌으며 결국 후에 탄자니아는 우자마를 버리게 된다.

줄리어스 니에레레 (1922년 4월 13일 ~ 1999년 10월 14일)
줄리어스 니에레레 (1922년 4월 13일 ~ 1999년 10월 14일)

하지만 이후 다른 일이 벌어졌다. 케냐는 공통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후 민주적 선거 제도가 도입되자, 루오족과 칼렌진족 등이 종족 정체성에 기반하여 투표하였다. 정부의 책임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집권 정당은 뇌물을 써서 투표자들을 매수하려고 했고, 반대 부족들은 협박을 통해서 자신들의 후보를 찍으라고 강제했다.

반면 탄자니아는 그런 종류의 무력충돌이 없다. 폴 콜리어는 [전쟁, 총, 투표]에서 이 두 국가를 소개한 연구를 언급한다. 유사한 종족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케냐와 탄자니아의 마을들을 비교한 연구였는데, 탄자니아 마을들은 유의미하게 공공재가 더 잘 공급되었다. 이 모든 것은 폭력이 일어나는 빈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케냐는 GTI 18위로 상위권에 위치해있지만, 탄자니아는 44위로, 세계 표준으로 보자면 높은 수준이긴 하지만, 케냐에 비하면 유의미하게 적다. 특히 탄자니아의 소득이 케냐보다 낮은 것을 고려하면 이 차이는 니에레레와 케냐타로 발생한 경로의존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폴 콜리어폴 콜리어(사진)는 탄자니아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민족의식은 땅과 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리더십에 의해서 나온다.” 분명 탄자니아는 출발지점이 케냐와 비슷했지만, 니에레레라는 정치적 리더십의 존재로 민족 분절화를 피할 수 있었다(개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런 정치지도자의 등장은 어느 정도 우연에 의존한다.

아랍 국가들 또한 각자의 니에레레들을 갖고는 있었다. 따지고 보면 카다피는 리비아의 니에레레였고 후세인도 그러했다. 그러나 아랍 국가 대다수는 니에레레와 같은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많은 경우 이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이나 종파를 지지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을 결집시켜 반대파를 탄압했다. 비교적 국민 다수를 단일 정체성으로 묶어낼 수 있던 터키와 이란만이 이런 과정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쿠르드족의 테러를 겪어야 했다.

퍼펙트스톰

아랍의 다수 국가가 이런 수순을 밟고 있는 가운데 앞서 언급한 사막의 저주는 시간표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개발은 실패했고 사회적 갈등의 씨앗은 뿌려져 있었으며 농촌은 궁핍해져 가고 도시에는 빈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정치적 격변이 뒤따랐고 외세가 개입했다. 이후 과정들은 여러분이 익히 아는 대로다.

레바논은 내전으로 무너졌고, 이란에서도 도시 빈민이 주축이 되어 샤 정부가 붕괴되고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자 공산주의 쿠데타가 일어났던 아프가니스탄이 술렁였다. 곧이어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고 레바논에서 단련된 전사들이 무신론을 신봉하는 붉은 제국을 물리치기 위해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으로 달려갔다.

미국의 CIA는 소련을 막기 위해 이들을 지원하였는데 이때 미국의 친구로 지냈던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오사마 빈 무함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이었다. 그는 소련을 무너트리고 뒤이어 미국도 무너트리고자 했고, 2001년 9월 11일에는 현대 세계의 두 상징이나 다름 없는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을 모두 타격하여 전 세계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사마 빈라덴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
오사마 빈라덴 (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

붕괴로 향하는 뜨거운 바람

부시는 붕괴하는 농촌과 만연한 도시의 실업자 청년에 주목하지 않고, 한 줌 지하디스트에 주목했다.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다음 해인 2002년, 웹 연구를 바탕으로 “척도 없는 네트워크(scale-free network)”의 구조를 밝혀낸 복잡계 물리학자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Albert-Laszlo Barabasi)는 다른 접근법을 제안했다. 네트워크는 자기조직적(self-organizing) 성격을 갖고 있고 이들 지역의 빈곤과 실업이 자기조직화를 위한 자양분이 되어준다. 따라서 테러를 없애기 위해선 중동 사람들이 테러리스트 조직에 자원하는 진짜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을 창시해 현대 네트워크 이론의 선구자로 불리는 A. L. 바라바시 (출처: World Economic Forum,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https://en.wikipedia.org/wiki/Albert-L%C3%A1szl%C3%B3_Barab%C3%A1si#/media/File:Albert-Laszlo_Barabasi_-_Annual_Meeting_of_the_New_Champions_2012.jpg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을 창시해 현대 네트워크 이론의 선구자로 불리는 A. L. 바라바시 (출처: World Economic Forum, CC BY-SA 2.0, 위키미디어 공용)

그러나 부시는 기어이 바라바시의 기념비적인 저서 [링크] (원제: Linked: The New Science of Networks, 2002.)가 출간된 다음 해인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여 “알 수 없는 미지의 것(Unknown Unknowns)”을 폭발시켰다. 이라크 정부가 붕괴되자 수십만 난민들이 주변 국가로 몰려갔다. 붕괴된 국가 속에서 온갖 폭력과 테러가 들끓었다. 그 와중에도 무바라크와 아사드, 벤 알리, 그리고 카다피 같은 아랍 독재자들은 견고한 것처럼 보였다. 이슬람 혁명과 테러와의 전쟁에도 스러지지 않은 우리들이다. 무엇이 문제겠는가?

하지만 4천 500년 전에, 그리고 3천 200년 전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붕괴시킨 적이 있는 기후는 이번에도 이들을 붕괴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시작은 러시아였다. 2010년과 2011년 러시아를 강타한 폭염과 가뭄은 세계 곡물 시장을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밀 값이 폭발하여 도시 빈민들에게 저가로 공급해줄 빵이 동난 것이다. 결국, 튀니지의 과일상, 부아지지의 분신이 모든 아랍을 불태워버렸다. 벤 알리가 무너지고 카다피가 살해당했으며 무바라크는 퇴진했다. 그 악당 동료 중에서 오직 아사드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가뭄

그러나 이것은 책임성 있는 정부, 법의 지배로 통제되는 권력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2011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아랍의 봄을 약속해주지 못했다. 아랍의 겨울은 조금 더 맞는 표현이지만 내 생각엔 작금의 상황과 그렇게 맞는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 민족, 종족, 종파 간 분절화가 극심한 데다가 권위주의 정부가 사회적 자본과 신뢰라는 공공재를 구축하지도 않은 곳에서 리바이어던이 붕괴하자 찾아온 것은 뜨거운 여름의 지옥이었다. 시위, 진압, 테러, 전쟁, 반란, 기근, 난민, 인신매매, 마약,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참함이 지금 중동에서 구현되고 있다.

옆집 아저씨는 왜 총을 들까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총을 드는 이유’이다. 한 사람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끝나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끼리 왜 총을 들고 서로를 말살시키려고까지 했느냐고 유고슬라비아 사람에게 물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야 티토 시절에는 골목마다 경찰이 우리를 보고 있었으니까요.”

옆집 아저씨는 경찰이 사라질 때 총을 든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쏘기 위해서.

총

이슬람과 테러가 연관을 가지는 건 바로 여기서이다. 북아프리카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건조기후 지대(Great Arid Zone)은 생태적인 취약성, 기후로 인해 조성된 민족적 분절화 경향과 매우 관련이 높다. 책임성 있는 정부가 등장하지 못하고 민족, 부족, 종파의 차이를 이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지도자는 사회 신뢰를 깎으며 이것은 국가 내부의 잠재적 갈등의 불씨가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20세기 후반의 기후변화와 그간 일어난 인구폭발은 국가를 파국으로 몰아갔다. 7세기 아랍 사회는 건조기후대에서 다른 사회들과는 다른 경로로 늘어난 사회적 복잡성을 관리하기 위해 이슬람을 만들었다. 이는 아랍을 뛰어넘어 중동을, 그리고 세계 각지를 국가 사회로 포괄해나갔다.

20세기 중동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건조기후에서 발생한 사회적 위기에 7세기와 달리 제대로 대처해내지 못했다. 국가는 붕괴했고 테러가 빈발하고 있다. 이슬람과 테러가 ‘상관관계’를 갖는 이유는 결국 지리 때문이다. 같은 지리가 두 개의 다른 현상을 파생시킨 것이다.

이집트 아랍 북아프리카 중동

절반의 대답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이야기는 애초에 설정한 질문의 딱 절반만 대답해준다. ‘왜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에 대한 대답은 ‘왜 알라의 이름인가?’에 대한 답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나는 앞서 어느샌가 ‘이슬람권’이라는 이름을 ‘중동’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썼다. 상당히 혼동되어 쓰이고 있긴 하지만, 이 미묘한 차이는 중요하다.

사실 중동 밖에 무슬림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고, 이들은 중동과 생태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이 판이하게 다르다. 건조기후가 아닌 곳이 많기에 그중에서는 국가가 붕괴하지 않은 곳이 다수다. 이를테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탄자니아의 니에레레와 마찬가지로 단일한 인도네시아 정체성을 주조해내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2016 국제 테러리즘 지수(GTI)를 보면, 인도네시아의 테러지수는 38위로 탄자니아(49위)보다도 높다. 왜 국가도 붕괴하지 않고 유의미한 경제성장도 이루어내는 인도네시아에서 ‘알라의 이름으로’ 테러가 빈발할까?

세계 테러리즘 지수 (2016)
세계 테러리즘 지수 (2016)

또 다른 의문도 생긴다. 마지막까지 유목민들이 남아 있던 카자흐스탄의 테러리즘 지수는 94위로 훨씬 부유하고, 책임성 있는 정부를 가지고 있으며, 민족적으로도 더 단일한 프랑스(29위)와 비교해도 상당히 낮다. 왜 프랑스에서는 무슬림 국가이자 국토 전체가 반건조기후에 가까운 카자흐스탄보다도 ‘알라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총격사건이 많을까? 카자흐스탄은 그렇다 치고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하고, 카자흐스탄과 비교하면 훨씬 빈곤한 타지키스탄(56위)보다도 더 많은 테러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2009년 승객과 승무원 290명을 태우고 암스테르담에서 디트로이트로 향하던 노스웨스트 항공 253기를 착륙할 때 폭파하고자 했던 우마르 파루크 압둘무탈랍은 ‘farouk1986’이라는 아이디로 이런 글을 남겼다.

“위대한 성전이 펼쳐져, 무슬림들이 승리해 세상을 지배할 것이며 다시 한번 위대한 제국을 수립하리라!”

그들은 어떻게 국경을 초월하는가

이는 내가 지금까지 설명해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서 일어나는 테러, 즉 국내 테러(domestic terror)와는 전혀 다른 테러였다. 파루크는 나이지리아 태생이었다. 분명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혼란한 국가 중 하나이며, 2억 명에 가까운 그 인구는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반분된다. 북부는 생태적 재앙에 직면해 보코하람이 준동하는 상태고 민주정부는 얼마 전에야 우여곡절 끝에 기능하던 상태였다.

이렇게 보면 내가 지금까지 펼친 가설로 설명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파루크의 테러는 이것으로 설명될 수가 없다. 파루크는 빈곤에 신음한 청년도 아니고 실업자도 아니었다. 파루크의 아버지는 타임지에서 선정한 “아프리카의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로, 라고스에 위치한 나이지리아 최대 은행 ‘퍼스트뱅크’ 은행장을 지냈으며 경제장관까지 했었다. 그 자신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공학을 전공한 전도유망하고 유순한 청년이었다. 그가 대체 왜 알라의 이름으로 비행기를 폭파하려고 한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내가 설명한 건조기후로 초래된 생태자원의 한계, 민족 분절화,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국가실패는 “왜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라는 문제를 절반만 설명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왜 알라의 이름인가?’에 대한 답이 이슬람이 문제가 되는 진짜 이유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더불어 세계인의 가시 범위에 잘 들어오지 않는 국내 테러(domestic terror)와 달리 터지기만 하면 세계를 주목시키는 초국가 테러(transnational terror)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래, ‘주목’. 이게 중요하다. 2008년, 뭄바이에 잠입하여 200명에 가까운 시민을 살상한 테러 조직 ‘라쉬카르 에 타이바'(Lashkar-e-Taiba)의 담당자는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에서 학살을 자행한 테러범에게 순교할 시점을 이렇게 알려왔다고 한다.

“언론이 몰려오고 있어!”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 테러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 테러

바로 이것이 그 해답을 알려줄 열쇠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역시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슬람이 결국 어떤 종교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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