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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바그다드, 니스, 베를린… 잊을 만 하면 테러 사건이 터집니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지 20년을 바라보지만, 문제는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 이슬람이 있습니다. 이 연재는 4편에 걸쳐 테러와 폭력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로서 이슬람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를 그 뿌리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필자)
그들은 왜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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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를 처형하고, 서구 방송을 검열하며, 인터넷조차 통제하는 신정국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서 전설적인 영국 밴드 퀸(Queen)의 히트곡인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만큼은 검열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보컬 중 하나인 프레디 머큐리가 이란인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그랬을까?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세간에는 주로 그 곡의 가사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쉽게 와서 쉽게 가는 인생, 저를 놓아주면 안 되나요?
“알라의 이름으로!” 안 돼, 우린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Easy come, easy go, will you let me go?
Bismillah! No, we will not let you go!

그들의 목소리
“비스밀라(Bismillah)”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고자 하는 바로 그 말이다. 바로 “알라의 이름으로”. 이란 당국은 이 가사로 이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판단하여 방송과 발매를 허용했다고 한다. 이 설의 진위와는 관계 없이 나는 이 노래가 수많은 지하디스트(Jihadist; 이슬람 성전주의자)가 ‘비스밀라’를 외치며,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펼치는 성전(聖戰)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듣기에는 최고로 적합한 노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알라의 이름으로”라고 하는 가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사 내용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사람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어 그의 영혼을 둘러싼 재판이 시작되고 화자는 자신을 놓아달라고 애원하며 후에는 분노로 절규하지만 끝내는 체념한 듯이 “아무 상관 없다”고 하며 노랫소리는 잦아든다.
‘왜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라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 앞선 두 글에서 나는 왜 이슬람 세계에서는 폭력이 빗발치는지 그 이유를 살펴봤다. 이슬람은 아랍 사회가 건조기후에 적응하며 발생한 종교로, 통치 권력의 근간이 확실한 정주형 영토 국가가 들어서기 어려운 곳에 최적화돼 있었다. 이슬람은 나이지리아에서 인도네시아와 카자흐스탄까지 뻗어 나갔다. 그중 면적으로 봤을 때 이슬람권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아도 무방한 이 대건조지대(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까지 펼쳐져 있는 지역)의 사회들은 근대화에 직면해서 큰 도전을 맞게 되었다.
취약한 생태자원과 인구폭발이 맞물리자 발생한 농촌붕괴, 영토국가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온존한 다양한 ‘하위 국가 정체성'(subnational identity)간의 갈등이었다. 이로 인해 몇몇 국가들이 사회적 긴장을 끝내 해소하지 못하고 전쟁터로 변하거나 심지어 붕괴하는데, 이는 곧 폭력을 억제하는 리바이어던(국가)이 취약해지거나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상위 권위가 없어지자 사람들은 그들과 풍습이 다르거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건방지게 서구 문명에 타락한 자들을 기꺼이 징벌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슬람 세계에서 폭력이 빗발치는 이유다. 전통시대에 이슬람은 이런 사태에 취약할 개연성이 높은 사회들로 퍼져나가기 좋은 종교였던 것이다. 공유하는 환경이 같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답만을 내려준다. 알카에다를 넘어섰다고 하는 IS의 시대에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 그 이름, 오사마 빈라덴은 결코 붕괴하는 농촌이나 도시의 슬럼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교육까지 착실히 이수한 미래가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또한, 2005년에 발생한 런던 테러의 범인은 영국에서 자란 무슬림 2세대, 3세대의 소행이었다. 누구도 런던을 건조기후라고 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나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폭탄을 만들고 총을 들게 하였으며 군중을 향해 트럭으로 돌진하게 만들었는가? 이런 행동은 이성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고 각지의 미군 기지에 폭탄이 터지며 국경을 오가며 벌어지는 총격전의 파노라마는 마치 하나의 랩소디(rhapsody; 관능적이면서 내용이나 형식이 자유로운 환상적인 기악곡. 광시곡)처럼 들린다.
건조기후가 초래한 취약성, 국가의 붕괴, 민족 분절화 같은 것들이 이 유혈낭자한 광시곡을 설명해줄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행위자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총을 드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테러의 전장에 나가고 그것을 어떻게 의미 짓는가를 알아야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발표된 지 40년이 넘었지만, 보헤미안 랩소디가 이래서 필요하다. 이 노래에는 살인자의 자기 고백과 회한, 두려움과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우리가 지하디스트에게서 들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자기 고백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편에서 내 나름대로 들어본 ‘지하디안 랩소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너희는 우리에게 모욕감을 준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에 이전부터 단골로 자주 오던, 키가 크고 날카롭고 오뚝한 코가 인상적이던 아주 잘생긴 청년이 생각난다. 그는 오므라이스를 주문할 때 햄을 꼭 빼달라고 늘 신신당부했다.
이쯤에서 짐작하겠지만, 그는 파키스탄 출신의 무슬림이었다. 그는 어머니 식당 바로 옆 연탄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원래는 고향에서 경찰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말투도 차분하고 한국말도 굉장히 잘했다. 그는 돈을 벌어 고향에서 목장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당시는 내가 역사나 지리에 막 관심을 두기 시작하던 때여서,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다.
“어떤 나라가 제일 싫어요?”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응? 그런 거 딱히 없는데?”
그리고 문득 머리에서 전구가 켜진 듯이 “아!” 하고 탄성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실 나는 ‘인도’를 의도하고 질문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때는 딱히 의아하지 않았는데, 이슬람 세계에서 이스라엘이 공공의 적 취급 받고 있던 것쯤은 당시에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물어본다.
‘왜 그는 인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말했을까?’
이스라엘은 파키스탄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데도 파키스탄과 카쉬미르를 놓고 다투고 전쟁까지도 수없이 치렀던 인도를 제치다니? 그의 의견이 당연히 전체 파키스탄인을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모종의 함의를 지닌다. 노무현 시대였던 당시, 한국인에게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어디냐”라고 물었다면 대부분은 일본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한 국가이기 때문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공동체가 그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막대한 피해를 입고,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고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파키스탄과 지리적 공간은 물론이고 같은 언어마저도 공유하지 않는데 파키스탄 사람인 그가 가장 싫어하는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답한 것은 그가 내집단(內集團)[footnote]내집단(內集團): 가치관과 행동 양식을 공유하며 애착과 일체감을 느끼는 집단. 다른 집단에 배타성을 가지는 심리적인 집단.[/footnote]으로 여기는 공동체가 단순히 파키스탄 국경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단순히 자신을 파키스탄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더 큰 무언가의 일부, 초국적 신앙공동체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무슬림이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1988년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는 또 다른 의미 있는 사례다. 이 책은 무함마드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국가에서 불태워졌다. 몇몇 국가에서는 번역자가 살해당하거나 테러를 당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방글라데시, 수단 등 무슬림이 다수인 나라는 물론이고 일본, 이탈리아까지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이란의 호메이니는 살만 루슈디를 죽여야 한다는 ‘파트와'(이슬람식 판결. 법적 판결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진다)를 내놓았다.
2005년 덴마크 일간지 윌란스 포스텐이 무함마드의 터번을 폭탄으로 바꾸어놓은 만평을 게재하자 이슬람 세계 각지에서 엄청난 소요가 일어났다. 무슬림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불타고 있는 덴마크 국기를 볼 수 있었다. (참고: 윌란스 포스텐 무함마드 만평 논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내집단이 있으며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 본성 때문에 내집단이 공격당하면 마치 자신이 공격당한 것처럼 분노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내집단 바깥의 문제에는 소홀해진다. 한국인은 세월호에 분노하지만, 방글라데시의 라나 플라자 붕괴 사고나 중국의 원저우 열차 사고에 대해서는 세월호만큼 분노하지 않는다.
이슬람권을 둘러싼 의문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대개 내집단 의식은 국경을 넘어가지 않는다. 넘어가면 그 의식은 곧바로 희미해져서 사실상 의미가 사라진다(유럽 연합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어째서 이슬람만큼은 그토록 거대한 초국적 정체성이 정서적인 강렬함마저도 제공해줄 수 있는가? 무슨 이유로 그들은 덴마크 보수 일간지의 만평에 분노하는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만약 아프리카의 모 나라에서 중국 기업의 전횡에 분노한 아프리카인이 공자 학당을 불태웠다고 해보자. 한국이나 일본, 베트남에서 그런 시위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 흑인이 경찰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당할 때 브라질 흑인이 들고일어나지는 않는다. 이집트에서 콥트교도들이 탄압받는다고 에티오피아의 이집트 대사관이 불타는 일도 없다. 오직 무슬림들만이 국경과 민족을 넘어서 그들의 초국적인, 전 세계에 걸친 15억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내집단 의식을 가진 것 같다.
다른 곳의 이야기
그런데 유럽 여러 나라는, 가까이는 수백 년 사이에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나날이 침략을 일삼는다. 그들은 경쟁심을 키워 조금도 숨길 생각이 없다.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어느 곳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과 사람이 다 함께 분노하게 되었다.
이에 하늘이 매듭을 짓기 위해서, 험준한 산자락에 있는 조그만 나라 아프가니스탄으로 하여금 강대국 러시아를 물리치게 하였다. 누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겠는가? 이것은 알라의 권능에 순응하고 지하드에 임했을 때 비로소 얻어낼 수 있는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규탄하는 한 지하드 전사의 글처럼 보인다. 수많은 아랍 전사가 가본 적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험산 준령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 무적의 붉은 군대와 맞서 싸웠다. 이것은 무슬림이 가진 초국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흔한 사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은 실제로 존재하는 글이 아니다. 내가 다른 글을 보고 살짝 고유명사만 바꾼 글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백 년 사이에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나날이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심을 키워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다. 그중에서도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인한 해악이 서구나 동아 어느 곳에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과 사람이 다 함께 성을 내게 되었다.
이에 하늘이 한 매듭을 짓기 위해 동해 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섬나라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 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으니, 누가 능히 이런 일이 있을 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답하는 이치이다.”
이 글의 제목은 ‘동양평화론’이고, 지은이 이름은 안중근이다.
문명의 해체, 리바이어던의 도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여순 감옥에 갇히고, 사형당하기 전 옥중 생활을 하며 집필한 것이 바로 ‘동양평화론'(1910)이다. 동양평화론은 러시아를 필두로 한 서양 세력이 동양을 위협하기에, 동아시아 각국이 힘을 합쳐 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문명 개화한 일본이 선봉을 맡아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를 패퇴시킨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굉장히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변심하여 동아시아를 지배하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양 세력이 다시 침입해와 동양인들을 무찌르고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이 그 세력을 동쪽으로 옮김)을 완결시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서 경종을 울린 것이다. 이것이 동양평화론의 골자다.
‘동양평화론’은 마치 1978년 이집트의 사다트를 암살시킨 이슬람주의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이슬람주의 조직원들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타협했다는 이유로, 전체 무슬림과 아랍 민중의 배신자라는 이유로 당시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했다. 사실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은 4번에 걸쳐 처참한 패배로 끝난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종결짓는 이집트 입장으로 보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집트인이고, 수니파 이슬람교도였던 사다트를 암살했다. 신앙 공동체의 적인 이스라엘과 타협했기 때문이었다. 사다트는 ‘등 뒤에 비수를 꽂은’ 인물이었다.

안중근으로 하여금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찬미하게 한 그것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행동대원을 분노하게 한 그것과 같다. 바로 초국가적 정체성이다. 안중근과 같은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동아시아의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 조선이나 청, 일본을 넘어서는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후에 이것은 일본의 주도하에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일본 제국의 개전 및 동원논리로 활용된다.
그리고 유럽 또한 이런 것이 있었다. 어떤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든 간에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 위에서 전 대륙적 호응을 얻었다.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해방해야 한다는 대의가 수많은 청년을 전쟁터로 이끌었고, 그들의 탐욕과 잔학성을 정당화시켜주었다.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서양 문명이 꽃피운 곳을 수호해야만 한다며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죽었다. 20세기까지도 이런 생각들을 확인할 수 있다. 빌헬름 2세는 안중근과 반대되는 말을 주장했다. 바로 황인종들이 유럽 문명을 침몰시킬 것이기에 유럽 국가들끼리 협력해야 한다는 ‘황화론’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 지금은 어떤 동아시아인이나 유럽인도 저런 행동을 진지하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이제 누가 일국 총리를 암살하려고 전쟁터에 뛰어들겠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그럴까? 나는 과거 초국가적 정체성은 상당히 보편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 세계와 유럽이나 동아시아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후 두 사회가 그런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바라보아야 할 것은 정체성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냐는 것인데, 나만의 모델을 한 번 제시해보겠다.
지역사회, 국가, 그리고 문명
정체성 범주는 공간적으로 세 층위로 구분된다. 하나는 가장 미시적인 단위인 지역사회이다. 옥스퍼드의 진화생물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 사진)는 과거 인류가 구성해온 자연적인 규모의 집단, 모두가 서로를 알고 서로 간의 관계도 파악할 수 있는 집단의 규모를 150명이라고 했다. 개인의 이동성(mobility)이 유례없을 수준으로 확대한 산업화와 운송 혁명 이전에 사람들 대부분은 마을의 150명 범위 안에서만 사회적 관계를 맺고 지냈다. 사실 이는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페이스북 계정에서 활발히 교류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친구가 많아도 150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가장 미시적인 범주가 한 개인이 가지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기초를 이룬다.
그보다 더 큰 단위는 민족주의다. 이때부터는 실질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와 역사와 문화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대체로 국가와 연동하며 여러 지역사회를 포괄한다. 대체로 현대 사회는 지역사회 정체성에 더하여 이 국가 정체성이 기본이 된다. 그리고 지역 사회 공동체 간의 갈등은 때로는 더 큰 적이 나타났을 때 이 국가적인 내집단 의식으로 봉합된다. 이런 이유로 전날에 서로 주먹다짐을 한 사이였더라도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모두가 한국 국가대표를 응원했을 것이라고 무리 없이 추정할 수 있다.
그걸 넘어서 초국가적 정체성, 혹은 문명적 정체성이라고 할만한 게 있을 것이다. 안중근이 생각했던 동양평화론, 니에레레가 주창한 범아프리카주의, 유럽 연합은 모두 이 정체성을 기반으로 나온 것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상대적인 유사성을 기준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남을 속한 공동체를 구분한다. 안중근이 보기에는 같이 한자를 공유하고 공자가 쓴 경전을 읽는 일본인이 생긴 것도 다르고 동양 고전도 모르는 유럽의 백인보다 훨씬 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국가와 문명 사이에서: 동아시아, 유럽, 이슬람
한나라와 로마 제국이 보편 문명의 표준을 유라시아 양편에서 확립하자 대체로 개인의 정체성은 이 세 범주 사이의 비율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을 예로 들어보자. 중세 유럽은 흔히 크리스천돔(Christiandom)이라고 불리었다. 중세 유럽 국가는 확고한 영토국가라기보다는 몹시 복잡한 위계로 구성된 귀족들의 연합체에 가까웠다. 이런 곳에서는 국가 정체성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었다. 고정된 실체로서 국가가 존재하지를 않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이들은 자신을 자신이 속한 장원의 농노 혹은 기사로 규정했다. 이는 지역 사회의 정체성이었다. 거기에 더해 크리스천돔의 기독교인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모두 무슬림 혹은 이교도들의 ‘잘못된 믿음’과 대비되며 모두가 로마 교황청이 교구를 통해 지시해주는 사회적 관습과 의례를 따르기 때문에 하나였다. 이를테면 그린란드의 바이킹 사회는 북쪽의 이누이트와 자신을 대비하면서 자신을 크리스천돔의 문명화된 민족이라고 여겼다. 그들에게는 덴마크 왕국보다 로마 교황이 보내주는 주교가 더 중요했다.
30년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으로 단일한 크리스천돔은 깨진 대신 유럽이 신교와 구교로 나뉘게 된 것이다. 신교 혹은 구교 역시도 초국적 정체성이었고, 각 나라는 이 두 세력으로 나뉘어 17세기의 기후적 악조건 속에서 말 그대로 30년 간 참혹한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이는 두 번째 층위의 정체성, 즉 국가적 정체성의 부상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미 프랑스는 구교 국가이면서도 신교의 편에 서서 구교 국가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30년 전쟁 이후에 등장한 베스트팔렌 체제가 각 국가 내부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게 되었고, 국가주권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국제질서 내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뒤이어 나폴레옹 전쟁과 민족주의의 폭풍까지 거치자 문명적 정체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촘촘한 정부 행정 조직이 비인격적 권력을 통해 추상화된 개인의 삶에 개별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리바이어던이 도래했다. 그리고 동원을 가능하게 할 정체성의 기반으로 민족과 국민이 등장했다. 민족 혹은 국민(Nation)은 지역 공동체보다는 추상적이고 거시적이어서 막대한 풀(pool)이 되어주나 ‘문명권’보다는 구체적인 것이었다. 국가 중심의 논리는 이제 너무나 강력해져서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히틀러마저도 독일이라는 국가의 전략적 이익을 위하여(대실패로 드러났지만) 열등한 황인종인 일본인과 손을 잡았다.
동아시아에서도 상대적으로 이런 이행이 쉬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럽보다 더 쉬웠다. 동아시아에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인구 집단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영토국가는 베스트팔렌 체제 한참 전부터 있었다. 일본은 잠시 분열되긴 했으나 이내 16세기면 통일 국가를 세웠다. 한반도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그 실체가 뿌리부터 흔들린 적은 없었고, 중국도 훨씬 더 격동적이긴 했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여기서도 비슷하게 베스트팔렌 체제가 자리 잡을 무렵에 근대 국가의 기원이 뿌리를 완전히 내렸다. 각각 청과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였다. 동아시아에서는 국가적 정체성이 대체로 다른 지역들보다 더 강했다. 유럽 열강이 동아시아로 쇄도해올 때는 일부 지식인은 동양평화론을 이야기하기도 했으나 이내 국가적 경쟁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 동양이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서양 세력을 끌어들였다. 공산주의를 택한 동양인은 소련을, 자본주의를 택한 동양인은 미국을 택했다. 동아시아에서 문명 정체성의 해체와 국가 정체성의 부상은 이렇게 완료되었다.
이 두 지역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 과정을 완수할 수 있던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다. 바로 리바이어던. 강력해진 리바이어던은 동원력을 늘리기 위해서 국가의 경계 내에서 자신들을 남들과 구분했다.
로빈 던바는 [멸종하거나 진화하거나]에서 왜 온대 지역의 언어가 열대 지역의 언어보다 더 지리적으로 넓은 면적에 분포해있는지에 대한 재밌는 가설을 소개해준다. 바로 열대 지역에는 없는 고위도의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교역이 필요했고, 그 교역에서 거래비용의 감소를 위해서 언어적 차이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정체성 공유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적응된 것이리라. 교역에 개방적이고 이슬람 문명 공통의 문법을 잘 내면화한 곳은 무역 네트워크의 접속이 용이해 거래비용을 줄여 번영할 수 있고, 주변의 경쟁 도시(혹은 국가)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슬람 네트워크와 폭력의 네트워크
무엇이 원인이 되었든지 한 가지는 명확하다. 바로 이 문명적 정체성 때문에 지하디스트가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를 외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들은 서구 문명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공유한다. 때로 이 문명적 정체성은 내부의 갈등 때문에 축소하기도 한다. 순니와 시아라는 정체성은 이슬람 세계 안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단층선이다. 하지만 이 또한 국가적 정체성을 초월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느슨하면서도 거대한 네트워크는 상품 무역이나 발명 혹은 아이디어의 전파에 매우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네트워크는 동시에 폭력과 증오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국가가 붕괴하여 사적 폭력과 테러가 빗발치는 ‘테러의 인큐베이터’가 네트워크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면 더더욱 그렇다.
바로 그 때문에 이슬람의 폭력은 국경과 대륙의 경계가 없다. IS가 시리아에서 공격을 받으면 다음 날 프랑스에서 폭탄이 터진다. 건조기후와 일종의 불완전한 문명화가 만들어낸 정체성의 불균형은 이슬람의 폭력을 확산시키는 데 공헌한다. 이것으로 현대 이슬람의 초국가적 폭력을 설명할 수 있다. 다시 역사를 보자.
본격적인 지하드 전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붉은 군대와 싸우면서 성장했다. 그들은 무신론을 신봉하는 붉은 제국이 전체 이슬람 세계를 위협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며 각지에서 몰려왔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 아프가니스탄에 계속 남아서 탈레반 정권과 협력하기도 했지만, 몇몇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것이 건조 기후 대가 아닌 동남아시아 등지에도 테러가 빈발하는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다. 굳이 이 나라들 내부적으로 사회가 취약해지거나 붕괴하지 않아도 좋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붕괴한 실패 국가들에서 폭력의 연쇄가 이들 나라에 도달하는 과정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 몇몇은 풍요롭게 살지도 모르지만, 이들이 메카로 하지(Haji; 성지순례)를 가서 만나고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역시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 재화, 비만, 질병이 네트워크로 전염되듯이 폭력과 억압의 관념과 사슬도 네트워크를 통해 전염된다.

실제로 동남아시아의 토속 전통과 어느 정도 공존하던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교가 중동의 그것에 한층 더 가까워진 것 또한 네트워크 상에서 두 노드(node; 네트워크상의 연결점)간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에 기인한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중동과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 운송이 전례 없이 확대되자 아랍에서 수학하고 온 무슬림이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을 더 표준적이라고 여겨지는 중동의 이슬람처럼 바꾸자고 나선 것이다. 후에 이는 중동과 교류를 이어갈 만한 재력이 있던 도시의 중산층 이상 계급인 산트리와 그럴 능력이 없는 내륙 농민들인 아방안의 갈등으로 이어진다. 유혈사태가 초래되었음은 너무 당연하여 말할 것이 없다.
이는 중앙아시아 사회의 상대적 안정성도 설명해준다.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은 건조지대 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통치를 보여준다. 소비에트 연방은 강력한 근대국가의 강력한 경찰력과 행정력을 남겨준 것에 더해서 중앙아시아 사회의 전통적인 네트워크를 모조리 파괴해버렸다. 과거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교육받고 이스파한과 바그다드로 여행을 떠나서 그곳에서 폭력의 연쇄를 익혔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 이후의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러시아어로 교육 받고 현대적인 도시민들이 사는 (그리고 인구부양력에 훨씬 여유가 있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로 여행을 떠나 문명적 에티켓을 배웠을 것이며 그들의 조상이 알고 지내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다른 가족들은 기억에서 잊혔을 것이다. 결국, 폭력의 원인은 이슬람이 아니라 건조기후에 존재하는 과포화 상태의 인구이며 그들의 폭력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이슬람인 것이다.
“언론이 몰려오고 있어!”라는 카쉬미르 테러리스트들의 환호는 그래서 중요하다. 많은 지하디스트가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서 미군에 무고하게 공습당하는 마을을 생중계로 바라보며 이라크로 싸우러 갈 결심을 굳혔다. 언론은 이슬람 네트워크를 통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지리적 경계와 한정된 네트워크를 넘어서 폭력의 연쇄를 이어가게 만들 최고의 도구인 것이다.
스탈린은 언론을 두고 “우리 당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날이 갈수록 강해져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의도치 않지만 CNN, BBC, 알자지라는 모두 지하디스트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준 것이다. 이 네트워크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네트워크를 끊어낸 중앙아시아에서도 공산주의 통치가 끝나자 새로운 네트워크들이 재조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죠
이제 마지막 의문으로 돌아가자. 왜 니스와 베를린에서는 단순히 트럭 하나로 그토록 많은 인명이 죽은 것이고 파리에서, 브뤼셀에서 총성과 비명이 들린 것인가?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극우 정당들의 훌륭한 소재가 되는 초국가 테러의 정체는 무엇인가? 왜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
국내 테러는 생태 위기와 민족 갈등이 초래한 국가의 붕괴가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이슬람 네트워크를 통해서 확산된다. 유럽이라고 그 예외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유럽 사회의 무슬림은 테러의 자양분이 되기에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다고 봐야한다.
우선 이들은 지역 사회 정체성이 거의 없다. 난민 혹은 이주민의 자식이 부모 세대의 고국에서 기대할 수 있던 (그마저도 해체되어 가는 중이었지만) 공동체 내부의 상호부조를 받을 수는 없다. 이는 개인의 발달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주디스 해리스는 그의 저서들에서 사실상 개인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은 부모의 양육이 아니라 유전과 또래의 상호작용과 자기평가라고 했다. 유전은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 차치하고, 또래 내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적응하지 못한 경험이 누적되면 이들이 어떤 식으로 자기평가를 할지는 자명하다.

거기에 더하여 이들은 국가적 정체성 또한 극히 미약하다. 하다못해 시리아에 사는 수니파나 시아파 아랍인은 ‘내가 시리아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파리나 브뤼셀에 산다면 뭐라고 답할까? 프랑스인이나 벨기에인이라고 선뜻 답할 수 있을까.
특히 프랑스는 소수자 탄압 정책으로 이들이 이민 국가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키워나가는 것을 사실상 방해했다. 오히려 이들은 국가 내부에서 새로운 종류의 하위 국가 정체성(subnational identity)를 키워가고 있다. 박해 받고 소외당하고 배제된 자들이라는 그런 생각 말이다. 이제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이슬람 세계의 일원이라는 극히 막연한 정체성만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정체성이 선택지에서 사라진 이상 이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가장 막강한 요소로 부상하게 된다.
벨제붑의 악마
잠깐 다시 노래 얘기. ‘보헤미안 랩소디’의 노래 끝부분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벨제붑(Beelzebub)이 나를 위해서 악마를 곁에 두었다.”
그리고 21세기 신세대 지하디스트들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 이전과는 다른 것이 또 하나 더해지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수에즈 운하가 한 역할,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알 자지라가 한 역할을 뛰어넘어 유례없이 생각을 공유하고 전파할 수 있는 도구가 등장하게 된다. 그것을 우리는 인터넷이라고 부른다.
IS 이전과 IS 이후가 다른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인터넷과 SNS의 영향력은 분명 그 차이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이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어차피 인간은 그런 존재라고 하지만 그 순도는 훨씬 강해질 수 있다. 인터넷이 일종의 촉진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 장면을 상상해보자. 세상이 자기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유럽 빈민가의 한 청년이 지하디스트가 모이는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몇 번 채팅을 해보는데 사람마다 자신과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고 유사한 분노도 공유한다. 그리고 그들은 같이 니스 테러 영상을 보며 통쾌함을 느낀다. 테러를 종용하는 연락책이 접근해 관련 지식을 친절히 알려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하드의 광시곡(Jihadian Rhapsody)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들이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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