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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바그다드, 니스, 베를린… 잊을 만 하면 테러 사건이 터집니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지 20년을 바라보지만, 문제는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그 중심에 이슬람이 있습니다. 이 연재는 4편에 걸쳐 테러와 폭력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로서 이슬람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를 그 뿌리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필자)

그들은 왜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

  1. 이슬람과 문명화
  2. 옆집 아저씨가 총을 드는 이유
  3. 지하드의 광시곡
  4. 분노의 지리학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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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모스크바 테러, 뭄바이 테러, 샤를리 엡도 테러, 파리 테러, 니스 테러, 그리고 베를린 테러에 이르기까지. ‘이슬람’ 하면 사람들은 흔히 ‘테러’를 연상한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든 옳지 않다고 생각하든 말이다.

평행선 속의 초승달

그렇다면 이슬람과 테러를 연결하는 건 온당한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여겼다. 이슬람은 본질에서 칼의 종교이고, 그 시작부터 폭력과 연관이 있었다. 그 신도들이 다른 이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우리는 이들을, 에드워드 사이드 덕분에, ‘오리엔탈리스트'[footnote]’서구(인)의 시각’으로 ‘동양’을 수동적 객체로 ‘타자화’하는 사람.[/footnote]라고 부른다.

한편 이에 반발한 다른 주장도 나왔다. 이슬람은 테러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몇몇 극단주의자들이 문제지 다수 무슬림들은 평화를 사랑한다. 이슬람을 테러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문화적 편견을 버리지 못한 무지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슬람 모슬렘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은, 주로 이 두 가지 시각 사이를 오갔다. 한쪽에서 이슬람을 야만과 폭력의 종교라고 비판하면 다른 쪽에서 코란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이교도에게도 자비를 베풀라는 구절을 찾아와서 이에 반박한다. 그러면 또 평범한 무슬림들이 저지르는 명예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반대편에서는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무함마드의 말을 근거로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한다는 것으로 맞서는 식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주장 모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 있는 두 가지 시각이 계속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는 두 시각이 지적하는 바가 미묘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 vs. 反오리엔탈리즘

오리엔탈리스트는 이슬람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어떤 종교가 폭력성을 내재적 본질로 한다는 주장은 너무 순진하다. 그렇다면 예수의 평화와 사랑을 전파하는 복음으로 시작된 기독교는 어떻게 십자군과 마녀사냥으로 대변되는 칼과 불꽃의 종교가 되었다가 어떻게 다시 평화의 종교로 되돌아올 수 있던 것인가?

이언 모리스는 “각 시대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라고 했다. 문화는 그것이 기초하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에 따라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기독교가 그랬다면 이슬람교라고 못할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소위 축의 사상이라고 하는 고등종교들은 권위의 근원이 신성왕권에서 제도화된 법의 통치로 이행하는 시대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제도화된 국가의 통치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문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붕괴하자 이들 축의 사상은 “2차 축의 사상”, 개인의 평온과 구원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와 초기 기독교의 형태로 변화했다. 축의 사상으로 인해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이슬람 또한 특정한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산물이지 이슬람 때문에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명저 중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을 남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년~2003년)
20세기 최고의 명저 중 하나인 [오리엔탈리즘]을 남긴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년~2003년)
하지만 反오리엔탈리즘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다. 그들이 ‘이슬람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다’를 넘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문제의 원인이 아닐지 몰라도 분명 이슬람은 문제다. 글로벌 테러 지수의 상위권을 채우는 나라들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1. 이라크
  2. 아프가니스탄
  3. 나이지리아
  4. 파키스탄
  5. 시리아
  6. 예멘
  7. 인도
  8. 소말리아
  9. 리비아
  10. 태국

태국을 빼면 전부 이슬람교도가 사회 다수 혹은 최소 절반을 차지하는 나라들이다. 이슬람이 여기서 테러와 어떤 관련도 없다고 한다면 순전히 우연이란 말인가? 반오리엔탈리스트들은 여성 할례를 두고 이슬람의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전 이슬람 시대의 악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프리카를 넘어 동남아시아에서도 여성 할례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슬람이 여기서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빈곤과 폭력, 억압 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분명 현대 이슬람 세계 대다수는 그런 문제에 신음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슬람은 ‘문제’다. 그런데 이슬람에 문제가 없다고 반론을 펼치니까 두 주장이 서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선 두 가지 전제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이슬람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지만, 현대 세계의 분명한 문제다. 더불어 이슬람 때문에 명예살인, 테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슬람은 이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그리고 이슬람을 문제로 만드는 진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시작으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왜 생겨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퍼져나갔는가?

최대의 유산 ‘문명화’

이슬람을 문제라고 선언하긴 했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갖는 의의와 유산은, 다른 대부분의 사회 제도나 문화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에서부터 긍정적인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슬람의 확산은 인간 역사의 많은 사건이 그렇듯이 그 유산을 어느 하나라고 확답하기 힘들 만큼 복합적인 성격을 띤다.

이를테면 인도에서 이슬람 확산은 이슬람을 받아들인 지역에서 카스트 제도의 해체를 가져오기도 했고, 인도양 무역에서 인도의 주도권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 이는 아대륙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정치적으로 가장 격렬한 단층선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7세기 아랍 군대가 페르시아와 시리아, 이집트를 동시에 석권한 것은 이집트와 시리아에 있어서는 유럽 쪽 지중해 세계와의 연결을 끊어버린 재앙이기도 했으나 그간 단절되어 있었던 페르시아와의 통합으로 새로운 이슬람 문명을 만드는 주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슬람 태양 여명

이런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수많은 의의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전근대 시기에 수많은 비국가 사회를 국가 사회에 포섭시킨 일종의 ‘문명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기 0년을 전후로 하여 유라시아 양쪽 끝에는 로마와 한이라는 고전시대의 거대제국들이 등장하고 지역적으로 문명의 확산이라는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충분하지는 못했다. 지금이야 유라시아를 넘어 남극을 제외한 모든 곳이 국가 사회의 범위지만, 당시에는 여전히 대다수 지역이 국가 사회로 포괄되지 못하는, 유목, 수렵채집, 원시농업 등에 의존하는 전문명(pre-civilization) 혹은 반문명(half civilization)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런 지역들이 기후변화와 그로 인해 초래된 기근으로 한과 로마로 쇄도해왔고 고전시대는 마침내 붕괴하고 말았다.

쇠퇴와 몰락은 문명의 주변 지역을 문명화시키는 부수적인, 그러나 매우 중요한 파급효과를 낳았다. 로마와 한이라는 국가들이 주변 야만인들과 싸우면서 야만인들이 문명을 모방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도 하였고 대규모 이주를 통해 섞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 사회가 만들어내는 중력장에 이끌려 들어갔다. 이 과정은 유라시아 바깥을 넘어 아프리카까지 퍼져나갔다. 이 과정은 이후 전통적인 문명화 과정 대신에 새로운 차원의 ‘문명화의 사명’을 띠고 각지로 문명을 퍼트리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19세기에 끝나게 된다.

아랍 이슬람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 이슬람이었다. 물론 기독교 문명권은 중세온난기의 힘을 빌려 동유럽, 북유럽, 러시아에 이어 그린란드까지 문명사회를 확대하기도 했고 중화제국도 그 거대한 중력장을 통해 더욱 많은 지역을 천자의 관료제 아래에 포섭시켰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근본적으로 생산성 높은 농경이 퍼져나간 곳들이었다. 이동생활을 유지하고 부족적 전통이 강한, 현대에도 문명화시키기에 가장 어려운 지역에 이들 유럽과 중화 문명이 확산되는 건 이들 문명인, 정확히는 러시아인들과 중국인들이 현지인들을 문명화시키는 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이주를 시작한 17세기 말부터였다.

무법지대를 문명세계로

그러나 이슬람은 무법지대를 최소한의 법과 문명세계의 상식이 통하는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범위도 실로 광범위했는데 서쪽과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지리아와 수단 북부,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와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역, 그리고 동쪽 끝에는 인도네시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이집트에서 페르시아까지 이어지는 핵심부를 중심으로 만들고 주변부 세계를 통합하면서 이들 사회를 국가 사회로 통합해내었던 것이다. 모로코 출신의 위대한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는 몽골 제국이 제공해준 치안 질서 속에서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각지를 유람하였다. 그러나 치안을 제공한 것은 몽골이었지만, 그 안의 문화와 규범을 제공해준 것은, 바로 이슬람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척박한 사막과 광대한 대양 바깥에 있는 사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슬람의 시작을 보아야 한다. 바로 아라비아 사회가 이슬람을 어떻게 수용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서양 핵심부에서 가장 선진적인 두 지역인 지중해 동부와 페르시아는 헬레니즘 시대에만 해도 하나의 세계였다.

이슬람 여자

그러나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가 형성되고 지중해 동부가 로마 제국에 끌려들어 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의 중동 땅이 반으로 조각나버린 것이다. 이 라이벌 관계는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로 계승되어 더욱 격렬해지는데 가장 큰 피해자 중 하나는 동방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이었다. 과거에 로마, 이집트와 페르시아, 인도를 연결하며 높은 수익을 올리던 상인들은 두 국가의 국경지대가 황폐해지면서 새로운 무역로를 물색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무역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곳이 바로 이슬람 세계의 성도가 된 메카였다. 상업네트워크에 종사하기 쉬웠던 아랍 유목민들은 집약적 농경전통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지만, 무역 결절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상업과 도시의 전통을 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아라비아 반도는 국가 사회에 본격적으로 포섭되지 못했던 사회라 두 제국의 전쟁이 불러일으킨 참화를 피해갈 수 있어서 더 유리했다.

각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

그러나 모든 비국가 사회들은 일정한 부를 축적하면 조직적으로 도전받을 수밖에 없다. 우선 계층분화로 사회통합이 약화하면서 내부 갈등이 심해졌다. 또 부족과 혈연을 공유하지 않는 외지인이 몰리는 도시를 관리하는 것은 기존 부족들의 조악한 갈등 관리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두 가지 문제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도시 빈민 문제였다. 당시 메카는 이들 빈민이 쿠라이쉬 부족의 기득권에 저항하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메카에서 교역을 통해 축적된 부, 즉 기회는 초기 농업 사회가 확대되고 도시들이 건설되면서 만들어낸 도전과 유사한 도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무함마드는 이 도전을 놀랍도록 잘 활용했는데,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교의를 제시하여 아래로부터 아랍인을 통합하고, 위로부터 법과 시스템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질서를 부여했다. 부족적 갈등으로 얼룩져있고 비잔티움과 페르시아 사이에서 용병으로 참가하거나 대리전쟁이나 하던 아랍인은 무함마드의 이슬람 공동체와 그의 카리스마 아래에서 그 전과 비교하면 훨씬 단결된 무장조직으로 변모했다.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 (14세기 그림)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 (14세기 그림)

무함마드 사후에 이 기세는 약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세졌다. 이후 이슬람 공동체는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행정조직을 이어 받은 칼리프 국가로 이행했으며 아랍인 대다수가 국가 사회에 포섭되었다.

이슬람은 얼핏 보면 무함마드라는 개인이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여 만들어낸 것 영적 움직임인 것 같이 보인다. 물론 그런 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슬람 또한 근본적으로는 당시 존재하던 사회적 도전에 아랍인이 대응한 하나의 방식이었다. 일반화하면 농업 사회라는 안정적 기반이 부재하거나 미약한 상황에서, 농업 외적인 요인으로 증대한 사회적 복잡성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시스템으로서 초기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동의로 권력을 만들어내고, 위에서는 시스템을 구성원에게 강제하는 데 필요했던 논리가 바로 이슬람이었다. 마치 거대한 수리통제 체계를 관리할 관료제가 특징인 중국의 논리가 옥황상제를 위시한 천상의 관료제였고, 자그마한 지역을 기반으로 극히 분권화되었으나 문화적으로는 초국가적이었던 유럽의 정치지형에 최적화된 인민 통제 시스템이 가톨릭 교회였던 것처럼 말이다. 각 시대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상을 얻는다.

문명화의 최전선

이슬람이 중세 이래로 계속하여 아프로-유라시아 비국가 사회들을 성공적으로 국가 사회의 내부로 포괄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그 비국가 사회들이 이슬람이 태동하던 아랍 사회와 비슷한 사회적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화한 국가의 관료 행정 체계가 작동하기 힘들었던 유목사회도 인구 증가로 인한 고충을 덜기 위하여 문명 세계와 다양한 형태로 얽혀 들어갔다. 그리고 이들 사회를 규율하기 위한 최적의 문명사회 논리는 이슬람이었다.

키예프 공국이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에 울루스가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각각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빗대어 봤을 때 최적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교구를 설치하고 농민들을 빡빡한 사회적 규율로 묶어내던 가톨릭의 방식, 천자가 있는 수도로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강력한 관료제를 자랑했던 중국의 방식이 통했을 리가 없다.

이슬람 문명화

이슬람은 현지 부족장, 토착 유력자들의 야만적인 논리를 어느 정도 존중해주었다. 그럼에도 이들 야만인은 이슬람을 통해서 문명 세계의 세련됨과 부에 지속해서 접근하고 흡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거기에 이슬람은 토착민들에게 자율성도 부여해주었다. 이슬람에서 합의하는 정말 기본적인 교리들만 채택하면 그 이후는 어느 정도 지역 사정에 맞춰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유연성은 이런 모호한 지역들에는 정말 최선의 종교나 다름없었다.

메카 방향으로 절을 하라는 것, 한 달은 낮에 굶어야 하는 것, 자선세를 내야 하는 것은 농경 주기와 관련하여 계속 빡빡한 사회적 규범들을 주입해왔던 동서 유라시아의 양 끝에서 볼 수 있던 문명화 논리, 각각 기독교 및 유교와 차별화되는 간편한 것이었다. 게다가 메카로 일단 한 번은 와야 한다는 규정은 상업 네트워크로의 접속을 개방하는 것이어서 상업 중심의 비국가 사회들에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이슬람의 관용

반오리엔탈리스트들이 즐겨 말하는 이슬람의 관용이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이해가 되어야 한다. 무슬림이 정말 평화로워서 관용을 베푼 것일까? 로마인들은 툭하면 콜로세움에서 사자 밥 주기 쇼 같은 걸 하고 중국인도 참 창의적이고 기상천외한 형벌을 만들어내는 폭력배였지만, 적어도 이들은 극한의 환경에 어울리는 극단적인 폭력과 야만성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성문화된 법전이 있었고 그에 맞춰서 법리가 있던 곳들이었다.

흔히 친이슬람 학자가 옹호하는 것처럼 이런 이들보다 아랍인이 평화를 사랑해서 관용을 베푼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는 확산할 때마다 두 가지 상황에 직면했다.

첫째, 자신보다 더욱 문명화의 역사가 길었던 곳들을 정복했을 때였다. 이 시대는 압바스 칼리프 시대에 종료되었는데, 그들은 비국가 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전환하기 위하여 국가 사회의 새로운 통치 노하우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즉, 무턱대고 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현지 문명을 존중하고 협력을 받아내야 했던 것이다. 아랍인이 관용을 베풀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나중에 아랍인이 충분히 문명화하고, 문명세계의 규범을 다룰 능력이 생기자 조로아스터교도들과 기독교, 유대교도들은 결코 이전과 같은 존중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슬람 기독교

둘째, 압바스 시대가 몽골의 정복으로 끝나고 세계화의 시대가 열렸을 때, 새로운 비국가 사회를 국가 사회로 포섭해가는 과정이 있었다. 여기서는 무리하게 국가 사회의 논리, 즉 그들 입장에서는 이슬람의 논리를 강제할 능력도, 필요도 없었다. 우선 이런 곳들로 이슬람의 확산을 이끈 사람들은 정치권력과 군사력이 아니라 상인들과 그들의 네트워킹 능력이었다.

이슬람은 여명기에 아랍인을 포섭하던 방식대로 인도네시아의 자바인과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인을 포섭하면 그만이었다. 현지 권력에 무리하게 도전하는 건 애초에 이슬람의 방식이 아니었고,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현지 권력들이 이슬람을 믿을 이유도 없었다. 이슬람의 관용이라는 것도 이슬람 세계의 확산 과정에서 발생했던 사회경제적 기회와 도전에 대처하던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때 거기’의 유일한 선택지 이슬람

이슬람은 국가와 비국가의 경계가 모호한 곳에 적합했다. 이는 정교한 농경적 전통을 확보한 사회에서는 이슬람을 받아들인 곳이 전무하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footnote]터키와 같이 인구학적 대변동을 겪은 사회, 혹은 농촌사회와 유리된 상업도시가 정치적 권력을 확보하던 인도양 사회는 이 경우의 예외다.[/footnote]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와 동아프리카에서 끼쳤던 영향과 비교하면, 이베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에서 매우 제한적인 영향만을 끼쳤다. 심지어 사방이 이슬람으로 포위된 에티오피아에서도 이슬람은 장벽에 부딪혔다(물론 포르투갈 상인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한 것도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초승달의 동진은 동아시아에서도 초원지대가 끝나는 하서회랑(황하 서쪽의 길고 좁은 복도 형태의 지형)이 나오면서 귀신같이 중단되었다. 그곳들은 이슬람보다 더욱 체계적인 사회 규율의 논리가 작동하는 곳이었다. 역으로, 중국과 러시아라는 농경제국들은 화약 무기를 본격적으로 구비하자 내륙에서 이슬람을 계속 밀어낼 힘도 갖게 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베트남과 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국가 사회가 지속해서 비문명, 비국가 사회를 파고들면서 확장하던 근세까지는 관용과 포용의 방식은 이슬람에 놀라운 이점으로 작용했다. 무수히 많은 야만 사회에 고대 서양 문명의 총아가 집약된 이집트-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의 전통이 흘러들어 갔으며, 야만 사회의 이국적 산물이 페르시아의 교역 중심지와 승리의 도시인 카이로로 집결했다.

이들은 중심부의 무슬림 상인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안겨주었고, 현지 사회들도 이슬람 세계와의 애매한 연대에서 각종 정치적-경제적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체계적이고 조직화한 방식이 아닌 현지 지방 권력들과의 타협을 통해 문명과 국가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던 바였고 그들이 유일하게 택할 수 있던 선택지였다.

무슬림 이슬람 여성

그러나 이런 이슬람의 문명화 방식은 근대로 들어와서 엄청난 재앙의 연쇄를 낳는 가장 직접적인 전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이슬람을 둘러싸고 있는 폭력을 규정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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