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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과 더불어 세계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사 AMD의 로고
인텔과 더불어 세계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사 AMD의 로고

2014년 벼랑 끝에 선 AMD

한때 라이벌인 인텔보다 앞서 64bit 범용 CPU를 발표하며 64bit CPU의 표준을 정립했던 AMD. 하지만 2014년 AMD는 그저 낮은 가격 제품을 근근이 팔아가며 인텔보다 몇 단계 뒤처지는 기술과 성능을 보여주는 ‘한물간’ 기업이었다. 당장 기업 정리 절차를 밟아도 놀랍지 않은 위기 상황.

게다가 신임 CEO가 된 리사 수는 기존 경영자들보다 더 답과 멀어 보이는 존재였다. MIT 공학박사 출신이었던 리사는 그 경력의 대부분을 IBM 연구실에 틀어박혀 소자 물리학의 세계에 바친 전형적인 외골수 타입의 엔지니어로 평판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 굴지의 마이크로프로세서 회사였던 AMD는 이제 내리막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상태였다. 레노버를 세계적인 PC 제조업체로 끌어올렸던 흥행의 마술사 ‘로리 리드’가 3년 전인 2011년 AMD를 맡았을 때 이미 더 떨어질 게 없어 보이던 주식가치는 그로부터 반 토막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희망 없어 보이는 AMD가 택한 새로운 CEO는 40대의 아시아인이자 여성인 ‘리사 수’ 박사였다. 경영의 고수들이 손을 썼어도 살릴 수 없었던 회사는 이제 뭔가 화제라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일까?

‘구원투수’로 등장한 리사 수

그러나 리사 수를 실제 가까이에서 겪어봤던 몇 주주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IBM 연구소 내에서 단순한 개발자의 시각이 아닌 산업계를 주도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내세우며 IBM 이 유지하던 구형의 알루미늄 접합기술을 구리로 대체해 큰 효율을 갖고 왔으며 이후 프리스케일 사로 자리를 옮겨 해당 회사가 통신프로세서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회사의 기술과 수익을 동시에 끌어올린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AMD의 새로운 CEO가 된 '리사 수'
AMD의 새로운 CEO가 된 ‘리사 수’

리사 수는 언제나 잘 드러나지 않는 분야에서 묵묵히 힘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AMD가 계속된 인텔과의 데스크톱 프로세서 경쟁에서 실패하고 동시에 NVIDIA와의 GPU 전쟁에서도 고배를 마시고 있었던 2013년, 게임 콘솔 하드웨어 시장의 큰손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와 소니가 자사의 핵심 CPU로 AMD 칩을 택하게 한 것이 리사 수였다.

AMD 의 x86프로세서, 재규어. 리사 수는 이 프로세서로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득했다. 출처: Anandtec.com
AMD 의 x86프로세서, 재규어. 리사 수는 이 프로세서로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득했다. 출처: Anandtec.com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4 게임기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4 게임기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ONE 게임기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ONE 게임기

화려한 숫자 놀음의 경영진들이 여러 사업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인수 합병에 골몰하는 것과 달리 리사 수는 기술에 근거해 다른 회사들을 놀랍도록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나갔다. 게임 하드웨어 분야에서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는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가 각각 차세대 게임기를 위해 똑같은 AMD의 재규어 CPU를 선택한 것은 우연의 기적이 아닌 리사 수의 마법이었다.

출처: amd.com
출처: amd.com

리더십까지 갖춘 타고난 공학도

10살 때부터 친오빠가 망가뜨린 리모컨 자동차 키트를 분해해 수리하는 재능을 보였던 리사 수는 MIT에 입학하면서부터 반도체 기술에서 자신의 능력을 더욱 위력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항상 타인을 압도하기보다 그 타인을 돕거나 보조하는 성격이었던 리사 수는 AMD에 입사해서도 스포트라이트의 뒤편에서 AMD의 생명줄을 이어붙이고 있었지만 2014년 그는 경영 전면으로 나서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CEO가 된 리사 수는 이전까지 날짜를 말하지 않던, 혹은 그럴 수 없던 경영진과 달리 2년이라는 기한을 힘주어 말하며, 2016년 안에 새로운 구조의 CPU와 그래픽 하드웨어 기술로 AMD는 다시 경쟁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을 한다.

2년 뒤인 2016년 6월 타이베이에서 개최되는 컴퓨텍스 행사 2일 차, 많은 기자의 관심이 AMD의 새로운 차세대 그래픽 기술 발표회에 쏠리기 시작했다. ‘폴라리스’라는 코드 네임으로 불리는 AMD의 새로운 GPU[footnote]GPU: 그래픽 프로세서 유닛의 약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제어하고 연산처리하기 위해 CPU와 별도로 설계 제조된 그래픽영상 처리만을 위한 연산장치. 그래픽 카드의 핵심 칩이기도 하다.[/footnote] 기술이 현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리사 수가 약속한 2016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AMD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연이은 사업전략 실패로 앞날이 불투명하던 AMD를 2년 만에 리사 수가 성장이 가능한 기업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출처: Barron.com
출처: Barron.com

2016년의 AMD는 여전히 회계상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태였지만 매출은 분기당 20%씩 올라갔고, 주식 가치는 2015년에 비해 150% 이상 상승했다. CPU 시장에서 인텔이 무려 87%의 점유율을 보이고, GPU 시장에서는 엔비디아가 80%를 점유하는 가운데에서도 매출을 올리면서 재무구조가 튼튼해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던 것이다.

세계 CPU 시장의 87%를 점유한 인텔
세계 CPU 시장의 87%를 점유한 인텔

그런 AMD는 2년 동안 CEO가 호언장담했던 새로운 기술은 베일 속에 가린채 보이지 않는 상태임에도 회사의 사기는 급상승했고 주주들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취임 당시 세계 500대 기업에서 유일한 여성 CEO였던 리사 수는 그 특이점 외에는 경영자로서 별다른 능력을 보이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에 시달렸지만, 그 편견을 딛고 놀라운 저력을 보여준 것이다.

소탈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좌중 앞에 직접 선 리사 수는 재무나 경영의 이야기가 아닌 순수한 기술 이야기로 AMD의 폴라리스와 새로운 모바일 APU[footnote]APU: 억셀러레이티드 프로세싱 유닛(Accelerated Processing Unit)의 약어로, CPU와 GPU를 하나의 칩으로 구성한 고도의 집적 처리장치. 크기와 전력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종합적인 성능은 별개의 CPU와 GPU에 비해 낮은 편.[/footnote]에 대해 입을 열었다. Radeon RX480으로 발표된 새로운 GPU는 이전의 제품보다 2.8배의 성능과 전력절감을 보여줬으며, 새로운 APU는 모바일 분야에서 더 낮은 전력소비와 안정성을 보였다.

할 이야기가 다 나온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CPU 이야기는 없었지만 지난 2년간의 AMD가 보여준 행보와 리사 수의 지도력은 의심할 나위 없이 AMD의 미래를 밝혀주고 있었다. 그러나 리사 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때 혁신의 대명사 같았던 주문 하나를 외쳤다.

출처: hardwarezone.com
출처: hardwarezone.com

One More Thing!

‘원 모어 띵’(ONE MORE THING!)

애플의 창업자이자 CEO였던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새로운 제품과 기술을 발표할 때마다 좌중을 충분히 만족하게 한 다음에도 선물처럼 슬쩍 던지던 ‘원 모어 띵’은 언제나 더 폭풍 같은 화제와 놀라움을 던져주곤 했다.

그런 스티브 잡스의 유머 감각을 이어받았던 것일까? 리사 수 역시 마치 별거 아닌 듯 ‘원 모어 띵’을 외치며 사람들에게 던진 것은 5년 만에 완전히 새롭게 만든 CPU 아키텍처 ‘ZEN’이었다.

‘AMD의 2016년이 좋았나? 아직 여러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셈’이라며 자신만만하게 손으로 들어 올린 CPU는 경쟁사인 인텔에 몇 세대나 뒤처져있던 기술 공정을 완전히 따라잡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혁신적인 구조로 이뤄져 있는 놀라운 개념의 산물이었다.

출처: hardwarezone.com
출처: hardwarezone.com

다시 2016년 12월, AMD는 ‘라이젠’이라는 정식 브랜드 이름으로 그들의 새로운 프로세서를 발표했다. 인텔의 최신 고성능 CPU를 상대로 맞불을 붙이듯 벤치마크 테스트를 공개 중인 ‘라이젠’은 현실 세계에서 만나기 어려운 소설이나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몇 년 동안 거대한 시장 점유율을 보이는 최고의 라이벌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해산을 눈앞에 둔 컴퓨팅 기술 기업이 40대의 아시안 여성 공학도 출신 경영자를 맞아 2년 만에 건실해진 회계장부와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기술을 갑자기 선보인다는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으며 2016년 IT 세계 틈바구니에서는 더욱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라이젠 리사 수

2017년이 더욱 기대되는 리더 

사람들은 흔히 여성이라는 성별에 대해서, 공학도라는 전공에 대해서, 아시아라는 인종적 특성에 대해 편견을 갖고 그의 잠재력이나 전망에 대해 깎아내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리사 수는 그런 모든 불합리한 시선을 딛고 새로운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

AMD가 과연 인텔과 엔비디아를 상대로 얼마나 위력적인 제품들을 내놓을지 아직 그 본격적인 승부는 펼쳐지지 않았지만 2017년 IT 업계 특히 CPU와 GPU 분야에서 계속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 리사 수의 활약에 업계가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일종의 경외감에 가깝다.

더 많은 인재가 리사 수의 뒤를 이어 성별과 인종의 장벽을 넘어 그들의 능력을 펼칠 2017년이 되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아래 동영상은 멜린다 재단의 ‘천장 없애기 컨퍼런스’에 참여해 여성들에 대한 산업사회의 장벽과 편견에 관해 이야기 중인 리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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