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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뉴스는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독자 모임을 열었다. 슬로우뉴스 인기 콘텐츠 ‘제네바 오전 8시’ 인터뷰이(interviewee)이자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저자인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대담자로 나섰다. 2000년부터 국제노동기구(ILO)에 근무하고 있는 그는 스위스 제네바 주민이다. 독자 30여명은 일자리와 노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기록하며, 궁금한 것을 물었다. “좋은 일자리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이상헌이 말하는 ‘좋은 일자리’ 조건은 네 가지.

  • 첫째, 산업 안전 문제. 일하다가 죽거나 다친다면 일하는 목적이 사라진다.
  • 둘째, 생활 가능한 수준의 소득 보장.
  • 셋째, 노동 존중. 일 때문에 차별과 모욕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 넷째, 일하는 사람의 목소리. 위험한 상황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 두려움 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 모임에서 나온 질문과 대답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이 지난 6월 6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13차 국제노동컨퍼런스에 참여해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ILO 제공.

제네바의 청소 노동자는 누구인가.

— 노동에 대한 한국사회 인식이 많이 개선됐다 생각하지만, 과연 세계 속에선 어느 위치인지 궁금하다.

“26~27년 전 처음 ILO에 입사했을 때 한국 이미지와 위상을 생각하면, 지금은 상전벽해 수준이다. 예전엔 편견 가득한 질문에 대응하기 바빴다. 지금 한국은 문화·경제적으로 부러움의 대상이다. 평균임금과 고용 수준을 봐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노동 질과 분배 문제는 뒤떨어졌다. ‘한국 노동시장은 경직돼 있다’고 말하지만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유연하다. 플랫폼 배달 노동 만큼 유연한 일자리가 있을까? 노동시장 격차가 매우 커서 ‘평균’이 의미가 없다. 나는 평균을 보지 말고, 가장 어려운 계층의 처지를 개선하는 게 정책 목표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케이팝(K-Pop), K-컬처 이야기 많이 한다. 한국의 노동 문제도 잘 해결해 ‘K-노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 한국의 산재 사망사고는 하청업체 노동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제도 문제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외주화하고 회피할 유인을 갖는다. 제도와 정책은 유인을 통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개별 기업 이윤 추구를 막겠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기업이 그런 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손실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하청 문제에서 관대하다. 외국에도 2차 하청까지는 있다. 하지만 3, 4차로 내려가는 일은 드물다. 하청이 만연한 데도 규제는 없는 현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산업재해 문제를 국정 과제로 전면에 내세우는 건 반가운 일이다. 정부 부처 스스로 산재를 막기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고민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한국의 다단계 하청 문제는 지난 20년간 고질이 됐다. 어떻게 해결하는 게 최선인가?

“다단계 하청 구조에 대한 규제가 엄격하게 이뤄져야 한다. 1차 하청까지는 용인하되, 2차 하청은 매우 예외적으로만 인정하고, 그 이하 하청은 금지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다소 거칠고 급진적일 수 있으나 그만큼 노동 현실이 위태롭다. 흥미로운 해법이 나오지 않으니 좀 더 근본적 사고를 해볼 필요가 있다. 하청 제도를 없앤다고 해서 고용 총량이 줄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청이 다단계로 이뤄질수록 거래 비용은 점차 증가한다. 하청 구조를 끊어내면 거래 비용을 내부화할 수 있고, 아낀 재원으로 일자리 질을 개선하거나 고용을 늘릴 수 있다. 지난 20년간 하청 문제를 논의했으나 바뀐 게 없다면, 이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다.”

— 제네바에서 아침마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은 주로 누구인가? 청소 노동자 임금만으로는 비싼 주거비로 유명한 스위스에 살기 어려울 텐데, 청소 노동은 누가 맡고 있는지 궁금하다.

“제네바 사람들은 청소에 중독돼 있다.(웃음) 아침부터 저녁까지 청소한다. 길거리도 매일 물 청소를 한다. 청소하는 사람은 스위스 기준으로 저소득층이다. 포르투갈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많다. 대부분 시청과 구청에서 뽑은 정규직이다. 제네바에서 청소업은 공공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한두 달 여름 휴가를 떠나면, 일시적으로 비정규직을 채용한다. 한 달 최저임금이 4500스위스 프랑(CHF) 정도다. 우리 돈으로 600만 원이 넘는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거주하기엔 부족한 돈이다. 다만 대부분 부부가 같이 일하기 때문에 청소를 한대도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정규직이기 때문에 여러 보장을 받는다. 노조도 있다. 청소 기계를 아주 잘 다뤄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반쯤 엔지니어다. 고용의 질을 높이면, 그만큼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청소 기계를 들인다거나 노동자를 훈련시키는 식이다.”

— 제네바는 청결하고 깨끗한 도시지만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는 조용한 도시로 알고 있다. 강철 멘탈이 아니면 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오늘 들었던 질문 가운데 가슴에 가장 와닿은 질문이다.(웃음) 일상에 큰 변화가 없다. 오후 4시가 되면 해가 지고, 생활이 단조롭다. 일부 젊은 층이 정신적으로 불안과 우울을 느끼기도 하고, 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자살률은 한국보다 훨씬 낫다. 한국에서 자살은 먹고 사는 문제, 물질적인 조건과 관련이 크지만 스위스에서 그런 이유로는 굉장히 드물다.”

— 11년 전 인터뷰에서 한국은 패자부활전도 예측 가능성도 없는 사회라고 말했다. 집단적 시스템이 잔인하고, 개인이 노력해도 그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지금 한국 위상은 세계적으로도 크게 높아졌다. 지금은 어떤 생각인가?

11년 전에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여전히 패자부활전은 없다. 한번 떨어지면, 한번 넘어지면, 실패와 실수를 회복하기 어렵다. 그건 여전하다. 하지만 예측 가능성에 관해서는…. 예측 가능성이 생기긴 했는데, 개인이 노력하면 그 노력의 대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라기보다 그 정반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겠구나, 여기에서 탈락하면 내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겠구나…. 그런 절망의 예측 가능성은 생긴 것 같다.”

— 예측 가능성도 패자부활전도 없는 한국 사회의 ‘잔인함’이 다이나믹한 에너지를 만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데, 장기적으로 잔인함을 제거하면서 역동성 같은 긍정적 속성은 유지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 역동성은 상위 5%의 역동성, 그리고 5%를 꿈꾸는 상위 20%의 치열한 경쟁이 만들어내는 역동성이다. 나머지 80%는 그런 역동성이 아주 부족하다. 한국 사회 역동성이 현재 한국을 이끈 힘이라면, 이제 상위 20%가 아니라 여전히 잠재력이 높은 80%에서 숨겨진 에너지를 끌어낼 정책과 방법론이 필요하다.”

여의도를 가득 채운 ‘다이내믹’ 한국의 참여민주주의. 출처 블루스카이.

퇴근 후 카톡 금지해야 하는가? “자기 주도 노동이 아니라면”

— 다소 멍청한 질문을 던지겠다. 직장 동료나 부하 직원에게 오후 7시 넘어 카톡 메시지를 보내는 게 반노동 행위인가? 많은 이가 워라벨을 말하지만 나는 워크 이즈 라이프(Work is life)다. 나는 기자로서 눈만 뜨면 기사를 생각한다. 밥 먹고 술 먹고, 사람 만나는 거 모두 일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일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이세돌이 하루종일 바둑을 두고, 임윤찬이 하루종일 피아노를 치듯 말이다.

“카톡 보내시면 안 된다.(웃음) 중요한 질문을 주신 것 같다. 우리는 ‘노동 시간 규제’라는 표현을 쓴다. 자기 노동 시간을 본인이 통제하지 못하고 타자가 통제하는 상황일 때 ‘규제’라는 개념이 적용된다. 본인이 자기 시간을 통제할 수 있고 일에 성취를 느낀다면, 마음껏 해도 된다(참고: 노동시간 주권). 예를 들면 통제된 공간에서 규율에 따라 8시간 일하는 것과 자영업자처럼 8시간 혼자 일하는 것과는 정신·신체적 위험도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규제는 전자에 하는 것이다. 후자는 규제도 힘들고 의미도 없다. 카톡은 타인의 노동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다.(웃음)”

— AI가 우리의 고통스럽고 귀찮은 일을 해결해준다면, 사람은 좀 더 창의적이거나 자기 주도적이고 신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동은 고통이고 안 하면 좋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데 있어서 AI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난 AI를 통한 일터 통제에 관해 문제의식이 강하지만, AI는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문제를 해결할 잠재성 있는 도구라고 본다. ILO의 경우 보스(Boss)의 연설문을 쓰는 일이, 시간은 많이 들지만 성취와 보람은 매우 적은 일 가운데 하나다. 보스가 준비한 연설문대로 연설한다는 보장도 없다.(웃음) 그래서 요즘은 거의 다 AI를 활용한다. AI로 주요 업무 시간을 줄이는 만큼 나머지 시간은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최근 AI 논의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초급(Entry-Level, 엔트리 레벨) 직무의 기회, 즉 ‘첫 직장’을 가질 기회가 사라지는 현상이다. 사회 초년생은 첫 직장을 통해 경험을 쌓고 노동 숙련을 높인다. 그 진입로가 AI로 인해 닫히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에 가서 대기업 인사들에게 물어보면 ‘그건 우리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다’라거나 ‘답이 없는 문제’라는 답변을 듣는다. 기업들이 엔트리 레벨 채용을 건너뛰고 경력직만 뽑는다면, 점점 더 채용 풀이 줄어들 것이다. AI를 잘 활용해 계속 혜택을 볼지 아니면 AI가 노동 양극화를 가속화할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 참고: AI 시대의 노동.

— 문재인 정부 때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는 과정에서 자영업자들의 반발이 격화됐고 사회적 갈등이 고조됐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갈등은 을과 을의 대결 아닌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프랜차이즈 자영업자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본사가 정해주는 가격·비용 구조에서 오직 인건비만이 가변 비용 항목이다. (재료·원료비 등) 나머지 비용은 고정돼 있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그 충격이 고스란히 자영업자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왜 프랜차이즈 자영업자는 인건비만 조정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한국 프랜차이즈는 ‘독점’ 구조다. 미국보다도 훨씬 더 독점적이다. 이 구조를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이 있어야 자영업자에게도 숨 쉴 공간이 생길 것이다. 한국 프랜차이즈는 (가맹점주들로부터 받는) 수수료가 굉장히 높다. 프랜차이즈 독점적 관행에 브레이크를 걸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어떻게 자영업자를 지원할지 고민도 요구된다.” ⇨ 참고: 프랜차이즈, 을들의 전쟁.

슬로우뉴스는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독자 모임을 열었다. 슬로우뉴스 콘텐츠 ‘제네바 오전 8시’ 인터뷰이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대담자였다. 사진=슬로우뉴스.

적기 놓친 이주노동자 대응책…“사회적 비용 불가피”

— 소비자로서 쿠팡 로켓배송을 거부해야 하는가?

“로켓배송은 민노씨(슬로우뉴스 편집장)와도 ‘제네바 오전 8시’에서 치열하게 논쟁한 주제다(쿠팡 방정식, 문제는 다시 로켓 배송이다). 과거 ‘산업 안전’은 제조·건설업 문제였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 혁명이 우리를 일깨운 교훈 중 하나가 서비스 산업에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배달업은 4차 산업혁명을 통해 가장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진 산업이다. 이제는 전통적 해법 말고 변칙적 대안이 필요하다. 당국의 근로 감독 중요하지만 서비스 산업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소비자다. 벌금 1000만 원 때리는 정부보다 말 한마디, 글 한 줄 남기고 물건을 사지 않는 소비자가 더 무섭다. 이런 힘을 활용해야 한다.”

— 나를 포함해 쿠팡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불매 운동에 참여할 유인이 있을까?

“어려운 건 사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 서비스 시장은 매우 독점적이다. 불매 운동은 한 회사 물건을 사지 않는 대신 다른 회사 것을 사는 행위다. 외국에 비해 서비스 산업이 독과점이다 보니 불매 운동을 통해 소비자가 감내해야 할 고통과 불편이 훨씬 크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소비자 운동이 중요하다는 얘기도 된다. 여기서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독과점 구조 노예가 된다. 개인적으로 로켓배송이 생존 문제와 연결돼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상품이 매우 급히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 편리함이 일상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 한미 관세 협상에서 조선업은 한국의 중요한 카드였다. 하지만 산업 이면을 보면,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의 하청 노동자를 사실상 대체했다. 법무부가 이주 노동자에 발급하는 비자(E7)를 확대해 국내 노동자들과 시민사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주 노동자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한국은 이주 노동자 문제를 제때 대처하지 못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정치적 비용을 치를 것이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 노동자 규모는 공식적으로 100만 명이 넘는다. 예전에는 공장 외곽 지역 또는 농촌 지역에서나 봤는데, 지금은 도시로 진출해 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보니 이주 노동자가 홀 서빙을 하고 있었다. 정식 취업 비자를 받지 못한 이들까지 합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한국노총, 민주노총 조합원을 다 합치면 240만 명 정도다. 이주 노동자가 잠재적으로 200만 명 이상 되는 건 시간 문제다. 이들은 이미 한국 노동시장 피라미드의 바닥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필요하다. 함께 살아갈 사람들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이주 노동 관리 정책이 시급하다. 이민청이 필요하다. 모든 부처들이 결합해 이주 노동자 통합 서비스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반응이 썰렁하다(웃음). 정치적으로 어려운 주제라서다. ⇨ 참고: 노인∙이주노동자 묶는 마스터플랜이 필요하다.

한국 실업률 2.5%는 국제적 기준에서는 대단한 수치다. 완전 고용에 가까운 노동시장이다. 역설적으로 ‘쉬었음’ 청년은 50만 명이 넘었다. 좋은 일자리가 없는 탓이다. 노동시장에서의 청년 공백을 이주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임금은 더 낮아질 것이고 일자리는 하향 평준화할 것이며, 청년 입맛에 맞는 일자리는 점점 더 사라질 것이다. 정치적 마찰은 불 보듯 뻔하다.

한국은 역사를 통틀어 외국 사람을 데려와 일을 시켜본 경험이 없다. 이주 노동에 관한 DNA가 전혀 없다. 역사적 경험이 수백 년, 수천 년인 유럽도 이미 난리인데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수백만 이주 노동자와 수천만 한국인이 부딪혔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준비가 필요하다.”

— 우리나라가 참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건, 가장 약한 사람들이 처우가 열악한 돌봄 시장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2030 여성이 어린이집 등 육아 돌봄 영역에서 일하고 있는데 월급은 굉장히 열악한 데다가 노동 강도는 매우 세다. 고령층 돌봄에 종사하는 이들은 고령의 여성 노동자들이다. 이 시장에 특혜를 줘서라도 대기업이 진입할 수 있도록 하고, 규모의 경제를 일으켜 임금을 높이고 고용 질을 제고한다면 체력 좋은 남성들도 돌봄 노동시장에 진입할 유인이 생기지 않을까? 각자 집에선 아이 하나도 버거워하면서 출산, 육아 경험이 없는 유치원 선생님한테 아이 20명을 돌보라고 하는 건 가혹한 일 아닌가?

“돌봄 노동을 전문직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저임금에,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의 선의에 의존해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의 돌봄 서비스 위탁은 예산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저임금 일자리를 양산하는 구조를 고착화한다.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체계다. 돌봄 노동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만들면 안 된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직업으로 격상해야 한다. 대기업에 맡길 건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운영할지 고민해야 하지만, 규모의 경제를 통한 질적 개선에는 100% 동의한다.

돌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했을 때 무엇을 제공한다는 것인지, 개인과 국가는 어떤 의무가 있는지, 자원을 어떻게 동원하고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이 과정에 기업 역할은 무엇인지 체계적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 참고: 이주노동자 차등적 최저임금으로 돌봄노동 해결은 불가능하다.

— 과거 인상적인 페이스북 페이지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성매매 노동자입니다’였다. 게시물에 달린 비난 댓글 중 하나가 ‘너희는 불법적인 일을 하면서 인권을 찾느냐’였는데, 나는 그들이 불법적인 일을 하지만 노동자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법이든 아니든, 그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권리가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 다른 예를 들면, 이주 노동자 가운데 미등록 노동자도 있다. 미등록 노동자가 지게차에 묶여 인권 유린을 당한다면 미등록이니까 괜찮다, 정당하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나? 성매매도 마찬가지다. 불법 여부를 떠나 한 사람이 서비스를 제공했고 그 서비스 혜택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엄연하게 거래 관계가 성립한다고 봐야 한다. 그 관계에서 노동자 권리가 보장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이 지난 6월 6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13차 국제노동컨퍼런스에 참여해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ILO 제공.

“배민 B마트 일하는 나, 설국열차 흑인 소년 같아.”

  • 마지막은 후원 독자가 미리 전달한 사전 질문 중 하나다. 길지만, 플랫폼 노동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글이라서 인용한다.

인문학 석사를 나와 회사를 다니다가 퇴사하고, 배민 B마트(편집자 주 : 주문 후 1시간 내 식료품 및 생활용품을 배달하는 ‘배달의민족’의 퀵커머스 서비스) 크루로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앱으로 편하게 주문하는데 현실은 사람이 물류 창고에서 뛰어다니면서 주문서대로 물건을 피킹(picking)해 포장한다. 기술과 현실 사이 격차에서, 일할 수 있는 몸은 한정돼 있다. 힘과 체력이 있어야 하며, 여성보다는 남성이면서, 20대를 선호하며 최대한 젊어야 한다. 좁은 통로를 뛰어다닐 수 있게 뚱뚱하면 안 되고 장애인이면 안 된다. 어쩌면 다쳐도 괜찮다고 웃을 순진함까지 필요해 보인다.

다들 AI의 찬란한 미래만 보는데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만 하는 노동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어리고 작고 마른 흑인 소년이 맨 앞 머릿칸 바닥 아래서 끊임없이 노동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여기서 일하는 내가 마치 그 소년 같다.

노동 사각지대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만두기 혹은 적응하기 뿐이다. 동시에 ‘도시 하층민 중에 하층민의 직업’이란 생각이 들어 자괴감도 심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고 들어 차마 그만두지도 못하고 있다.

첫 번째 질문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 노동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열악해지는 것 같다. 왜 여전히 많은 기술 담론은 인간 노동을 해방시킬 것처럼 이야기할까?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기까지 적어도 몇 년은 걸릴 것 같은데, 이 시간 동안 육체 노동자 임금이나 대우가 더 열악해질까?

두 번째 질문이다. 사람이 직접 뛰어 다니는 B마트 같은 노동 구조는 언제까지 지속 가능한가? 이런 형태의 플랫폼 노동은 산업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재편되거나 보호 받을 수 있을까?

이상헌: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좋지 않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기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 눈에 갑자기 반짝반짝 빛이 난다. 기술에 환호하고 열광적이다. 반면 플랫폼 노동자 모임 등에 가보면 발전하는 기술에 아주 힘겨워한다. 4차 산업혁명을 통해 가장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 배달업과 창고 관리업이 과거와 다른 점은 육체마저 노동자 본인이 통제할 수 없고, 알고리즘에 내맡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기술 본연의 모습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기술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특정 기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 구조가 문제다. 기술이 태어날 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앞서 돌봄 노동 이야기를 했는데, 돌봄 노동과 AI 기술을 접목한 연구도 많고, 실제 로봇 등 기술 도움을 받을 방법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자금이 이쪽으로 흐르지 않는다.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어느 분야에 활용할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가 과제인 셈이다. 기술 변화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중간 일자리다. 중간이 사라지면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위로 가든지, 밑으로 가든지. 그냥 밀고 올라갈 수는 없다. 시간과 돈을 들여 일자리를 잃은 사람을 훈련시키고 투자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밑으로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지난 15년 우리는 기술 변화, 디지털 혁명을 이야기했고, 노동자 교육과 숙련노동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교육·훈련 투자는 기업, 정부 모두 다 줄었다. 우리 노동시장이 양극화한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배민 B마트와 관련) ‘1시간 배송’ 아이디어를 누가 만들어 냈을까? 내 생각엔 독과점 플랫폼들이 경쟁하다가 좀 더 우위를 점하기 위해 고안한 아이디어라 본다. 소비자가 반드시 한 시간 안에 배송 받길 원한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을 테니까. 새벽 배송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그 경쟁 과정에서 나온 작품일 것이다. 노동자의 노동 강도를 더 높이는 방식으로, 노동 통제를 더 강화하는 방식으로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이를 막는 방법은 결국 규제뿐이다. 못하게 막는 거다. 가장 근원적인 방법이다. 궁극적으로 플랫폼으로 배달할 때 지켜야 할 기본적 룰을 정해야 한다. 배달 시간을 놓고도 사회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노동 시간을 규제하듯 같은 방식의 규제가 필요해 보인다.”

이상헌은 누구.

  • 경남 삼천포 출생. 부산서 중고교 다닌 뒤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서 경제학 공부.
  •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박사. 2000년부터 스위스 제네바 소재 ILO에 근무.
  • 근로 시간과 임금, 노동시장 정책 등 다양한 주제를 연구.
  • ILO 회원국 경제정책 수립 및 이행에 많은 기여. ILO가 주창하는 임금주도성장의 이론적 토대 마련.
  • 지난 30년간 연구 논문과 저서를 꾸준히 발표. 세계임금보고서(Global Wage Report), 세계고용사회전망(World Employment and Social Outlook), ILO 노동세계 모니터(ILO Monitor on the World of Work)를 비롯한 ILO의 주요 보고서 주도.
  • 책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2015), ‘같이 가면 길이 된다’(2023),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2025)를 냈다. 초교 동창인 아내 옥혜숙과 ‘우린 열한 살에 만났다’(2022)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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