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제네바 오전 8시]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박사와 나누는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제네바 오전 8시

1. 노동시간 주권: 잡과 업무의 차이

수치화된 경제보다는 노동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을 바라보려 애쓰는 이상헌 박사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25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매주 혹은 격주, 제네바 시각 오전 8시에 만나 이야기합니다.

이 글은 2023년 7월 14일 인터뷰를 정리했습니다.


2018년 ILO 총회(ILC) 모습. ILO 제공. Crozet / Pouteau 촬영. 2018년 5월 31일.

민노: 국제노동기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나요.

이상헌: 제가 학부에선 정치경제학, 마르크스 등에 관심이 많아서 석사를 그걸로 했고, 박사까지 갔죠. 그런데 제가 결혼을 일찍했어요. 첫째가 박사 과정에서 태어났는데, 건강이 좋지 않았죠. 국내에선 힘들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생각지도 않게 영국 유학을 가게 됐어요.

아이가 아파서 결정한 유학도 결과적으론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다. 은사이신 김수행 선생님이 없었다면, 유학은 가지도 못했을 거다. 그 밖에 직장생활에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도움받고 있다.

이상헌, 2014년 인터뷰 중에서

민노: 네, 2014년 인터뷰 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진보한다”

ILO… 우연한 인연, 마약 같은 매력


이상헌: 공부는 빨리 끝냈어요, 상황이 급했으니까. 그리고 한국으로 바로 오려고 하니까 몇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었어요. 우선 외국 사정을 좀 더 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고요.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라 한국에 바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세 번째는 학교에만 있다보니까 좀 지친달까, 너무 학문적으로만 매몰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고민하던 차에 박사 과정 중에 국제노동기구 ‘연구 용역’을 했어요. 박사를 마무리할 즈음에 앞서 용역 주셨던 분께서 ILO에서 한번 일해보겠느냐고 했죠. 당시에는 제가 좀 래디컬했기 때문에 좀 꺼렸죠. ILO는 개량주의 집단이니까(웃음), 원래 제2인터내셔널에 대항해서 만든 자본주의 대안 단체가 사실 ILO였던 거잖아요. (웃음)

그래도 현실 노동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고 싶어서 들어갔어요. 한 2년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죠. 처음에는 좀 고생을 했어요. 국제기구라는 게 낯설 뿐만 아니라 언어 문제도 있고, 정치의 과잉이랄까, 외교의 과잉이랄까…

민노: 정치의 과잉, 외교의 과잉이요?

이상헌: ILO는 UN 기구니까 상당히 외교적인 곳이면서 노사정 협의를 하다 보니까 외교의 과잉화, 정치의 과잉화 같은 현상이 있어요. 그게 처음에는 좀 힘들었어요.

정치의 과잉, 외교의 과잉 같은 게 있어요(잉?!) 줌을 통해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이상헌 박사.
참고: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국제노동기구(ILO)는 1919년에 설립된 유엔(UN) 산하 노동분야 전문 국제기구로 총 187개 회원국이 활동 중이고, 우리나라는 1991년, 15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현재(2022년 기준) 총 192개의 협약과 206개의 권고를 채택했다. 이 중 기본협약(또는 핵심협약: Fundamental Conventions)과 우리나라 비준 여부는 다음과 같다(참고: 고용노동부 등).

1. 강제노동에 대한 협약(제29호) → 2021년 비준.
2.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제87호) → 2021년 비준.
3. 단결권 및 단체 교섭에 대한 원칙 적용에 대한 협약(제98호) → 2021년 비준.

4. 동일가치 노동에 대한 남녀 노동자 동등보수에 관한 협약(제100호) → 비준 완료.
5. 정치적 견해표명, 파업참가등에 대한 강제노동 철폐에 관한 협약(제105호) → 2023년 현재 비준하지 않음.
6. 고용 및 직업상 차별대우에 관한 협약(제111호) → 비준 완료.
7. 취업 최저연령에 관한 협약(제138호) → 비준 완료.
8.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폐지에 관한 협약(제182호) → 비준 완료.
9. 산업안전보건과 작업환경 (제155호) → 최근 2022년 제110차 총회에서 선정. 비준 완료.
10. 산업안전보건 증진체계 (187호) → 최근 2022년 제110차 총회에서 선정. 비준 완료.

참고로, 2022년 12월 기준, OECD 38개국 중 10개 기본협약을 모두 비준한 국가는 13개국이다.

민노: 그런 점이 힘드셨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오래 버티셨습니까? (웃음)

이상헌: 운이 좋았는지 리서치를 제대로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이런 프로젝트 하나 하고, 저런 프로젝트 하나 하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오래 있게 됐어요. 한국에 갈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왜 못 갔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노동시간 문제에 관해 연구하고, 그다음에 임금 문제 이런 걸 하면서 ILO에서 주요 보고서를 새로 만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적어도 2, 3년마다 큰 프로젝트를 했어요. 그런 게 마약처럼 일하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매일매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죠. 관료적이고, 외교적이고… 약간 보수적인 분위기도 있고… 매일매일 마음은 복잡한데, 길게 보면 항상 뭔가를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어서 계속 있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너무 멀리 와버려서… 지금이 벌써 25년째 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퇴직은 언제 할지 그게 문제가 됐죠.

민노: ILO는 정년이 몇 살인가요?

이상헌: 제가 들어올 때는 62세였고, 지금은 65세로 늘었어요.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65세지만, 62세에도 퇴직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놨어요. 저는 좀 일찍 할까 고민 중인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민노: 앞서 ‘마약’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요.

이상헌: 우리는 아카데미 연구가 아니라 정책 연구를 하니까요. 그 연구 결과가 뭐랄까 전파가 잘된다고 해야 할까요? 잘 전달이 되죠. 각 나라가 노동 정책을 쓸 때 내가 연구한 결과를 사용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내 연구 결과로 해당 국가나 관심 있는 국가들을 설득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내가 직접 수행한 정책 연구가 어떤 국가의 정책 변화에 실질적으로 연결되는 게 보여요. 노동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선 솔깃하다고 할까요. 그런 매력이 있죠.

민노: 네,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습니다.

세계 임금 보고서와 소득주도성장론


이상헌: 그리고 제가 운이 굉장히 좋게, 뭔가를 새롭게 해야 하겠다고 했을 때 ILO에서 계속하게 해줬어요. 굉장히 어려운 주제임에도 하도록 했죠.

민노: 어떤 주제였나요?

이상헌: 제가 가장 먼저 한 게 노동시간 연구였는데, 노동시간을 어떻게 줄일 것이냐는 문제를 연구했는데, 기존의 다른 국제기구들, 가령 OECD나 IMF, 월드뱅크, 그밖에 조금은 보수적인 관점을 가진 정부기구들이나 연구기관을 상당히 비판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에 ILO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걸 계속 지원해 주고, 논문이나 책을 다 발행할 수 있게 밀어줬어요.

민노: 그렇군요. 노동시간 연구가 첫 번째였군요.

이상헌: 그리고 두 번째 큰 프로젝트가 지금은(‘지금에 와서는’이라는 의미) ILO가 자랑하는 ‘세계 임금 보고서’라는 게 있어요. 그걸 제가 시작했어요.

지금은 ILO을 대표하는 주력 보고서 중 하나로 위상이 높아진 ‘글로벌 임금 보고서’

민노: 아! 그러셨군요.

이상헌: 당시에는 ILO 내부에서 임금 문제를 다루는 게 금기였어요. 왜냐하면 ILO는 노사정 기구라서 사용자 그룹이 사보타주(태업)를 심하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데 임금 문제 논의에 관해선 사용자 그룹이 워낙 거부감이 있었죠. 그래서 임금 관련 연구를 하고 거기에 걸맞은 위상으로 ILO 주력 보고서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걸 내면 좀 안정적으로 임금과 관련된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정책 논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해서 아이디어를 냈는데, 당시로선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결국 했어요. 지금 ‘국제 임금 보고서’(Global Wage Report)는 ILO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보고서 중 하나가 됐죠.

민노: ILO의 ‘국제 임금 보고서’에 그런 숨겨진 사연이 있었군요. 그 최초 발안자가 이상헌 박사이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이상헌: 소득주도성장론, 그 프로젝트도 제가 시작한 건데, 처음엔 내부에서 반대나 걱정이 많았죠.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분배 개선을 본격적인 의제로 삼는 거라서요. 특히 사용자 단체나 정부 쪽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어요. 하지만 결국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돼서 잘 발표했고, 한국(문재인 정부)에서 일부 수용하기도 했죠. 물론 제대로 수용되지 못해 아쉬움이 크지만요.

민노: 그렇군요.

이상헌: 그리고 G20과 같은 세계적인 논쟁의 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정책의 장에 ILO 사무총장을 보좌하면서 논쟁 게임을 많이 했기 때문에(참고로 이상헌 박사는 고용정책국장 전에 ILO 사무총장 특별보좌관 역임. 편집자)… 그것도 물론 힘들고 우리가 밀리는 싸움이기는 한데 (웃음) 그래도 뭔가 노동 이슈를 계속 푸시할 수 있어서 그런 것도 재미있었어요.

2019 오사카 인텍스 G20 정상회의.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첫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문체부 제공.

민노: G20은 어땠나요?

이상헌: G20은 워낙에 경제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하드코어 경제학자들이 논의를 주도하는 장인데,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노동 문제를 잘 몰라요. 노동 문제를 꺼내면 되게 싫어하고. 여하튼 그런 분위기에서 꿋꿋하게 우리 노동 이슈를 밀어붙이는… 그래서 힘든 건데… 그래서 오히려 계속하는 것 같아요. ‘마약’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다가도 조금 지나면 뭘 또 해야겠다는 생각이 나요. 마약이 맞네, 마약이 맞는 것 같아요. (웃음)

노동시간의 ‘타이밍’과 ‘컨트롤’에 관해서


민노: 이상헌 박사께선 노동시간을 줄이자고 하시는데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워크홀릭 아니세요? (웃음)

이상헌: 약간 그렇긴 하죠. 그런데 꼭 저희 아내처럼 이야기하시네요. (웃음) 제가 노동시간 열심히 연구하고 있을 때 와이프가 했던 말이 그거였어요. 남의 노동시간 가지고 이렇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데 정작 당신 노동시간이나 좀 잘 챙기라고. (웃음)

민노: 그러셨군요.

이상헌: 노동시간을 연구하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노동시간의 길이. 두 번째는 언제 노동 하느냐는 타이밍의 문제. 그리고 노동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지. 이 세 가지죠.

민노: 아, 단순한 길이가 아니라 타이밍과 컨트롤!

이상헌: 저는 노동시간의 길이는 좀 긴 편인데, 타이밍과 컨트롤에서 좀 더 유리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죠. 타이밍과 컨트롤 권한이 있어서 그런 면에서는 좀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버티는 것 같아요, 사실은 좀 힘들었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여기에서는 일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한국에서처럼 그렇게 살인적으로 일하지는 않아요.

민노: 노동시간의 타이밍과 컨트롤은 노동 주체에게 미치는 심리적인 육체적인 영향이 꽤 클 것 같습니다.

이상헌: 아주 크죠. 그렇지 않다는 연구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 연구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노동시간을 줄이기 힘든 상황이라면 노동자가 언제 일할 수 있을지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을 조금 더 준다든지 아니면 그 시간 내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통제하지 않고 스스로 본인이 통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시간당 일하는 사람이 느끼는 스트레스 수준이 노동시간에 관한 타이밍과 통제권에 관한 권한을 주면 많이 떨어지죠.

민노: 일견 놀랍고, 또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결과네요.

이상헌: 네, 그렇죠. 그러니까 8시간 노동을 똑같이 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타이밍이나 컨트롤에 관한이 어느 정도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경우에는, 제가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생산성이 높다는 거죠. 생산성이 높아지거나 시간당 느끼는 스트레스 레벨이 떨어지는 효과가 있다는 건 연구의 80% 이상은 그런 결론을 말하고 있어요.

민노: 굉장히 중요한 지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선 노동이라는 건 통제받는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잖아요. 노동이라는 거는 누군가가 나에게 지시하는 것, 내가 주도하지 못하는 것, 내가 주체가 아니고, 객체화되는 것.

이상헌: 지금 말씀하신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또 굉장히 어렵기도 해요. 왜냐하면 돈 받고 일한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내가 한 달에 300만 원을 받고 일한다 그러면, 300만 원어치 일하는 내 노동(몸)을 파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8시간 일한다고 하면 8시간 일하는 동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기업이 결정하고 거기에 따른다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노동 계약의 암묵적인 전제잖아요. 그러니까 아주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옛날 노예 제도는 24시간 노예였지만, 지금 보통 고용계약이라는 건 주어진 노동 시간 내에서 노예 역할을 하는 거예요, 사실. 원래 컨셉이 그거죠.

민노: 네, 현실적으로는 그렇죠. 맞는 말씀입니다.

노동시간 주권: 그들의잡 v. 우리의업무, 그 차이


이상헌: 그러니까 노동자가 자유롭다고 하는 건 업무 시간이 끝났을 때 자유롭다는 얘기죠. 물론 지금은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무튼 노동시간의 통제와 자율성은 그 자체로 좀 긴장 관계가 있죠. 당연히 왜냐하면 사람이 자유로운 시민으로 살면서 노동하는 거기 때문에 아무리 고용 계약의 논리가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 자유로운 사고… 이런 걸 완전히 없앨 수는 없잖아요. 없애서도 안 되는 거고요. 그게 본원적인 긴장 관계가 항상 있는 건데, 역사적으로는 그런 노동자들이 가진 힘, 노동을 컨트롤할 수 있는 힘, 이걸 점차 높여 오는 게 사실 자본주의의 역사이기도 해요.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아요. 항상 어렵게 싸워야만 조금 조금씩 얻는 과정이라서요.

민노: 그렇죠.

이상헌: 그래서 노동시간에 관한 논문에서 제가 쓴 적 있는데요. ‘노동시간 주권’이라는 표현을 되게 좋아하긴 해요. 그러니까 노동시간 내에서 어느 정도의 권리를 확보하느냐는 것이 아마 앞으로도 계속 두고두고 굉장히 중요한 쟁점이 될 것 같아요.

민노: ‘노동시간 주권’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국제간 비교 수치나 통계 등이 연구된 게 있나요?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떤 나라는 좀 더 더 주도적으로 자신의 노동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있을까요?

이상헌: 직접적으로 비교한 건 없고요. 표준화된 지수로 한국은 몇 등 이렇게 돼 있는 거는 현재 없어요. 그 대신 노동시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조사는 있어요. 바로 직접 비교하는 건 아니고, 한국의 노동 관련 연구를 보면 노동시간에 관한 연구가 있고, 그 세부 내용을 보면 노동시간을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는지, 재량권은 얼마나 있는지 찾아볼 수 있어요. 그걸 유럽에서도 하고, 한국에서도 4~5년에 한 번씩 조사하는데 그걸 대략 비교해 보면 한국이 아무래도 많이 떨어지죠.

민노: 그렇군요.

이상헌: 아무래도 외국은 위계적인 게 훨씬 덜하고, 그러니까 뭘 시키고, 탁탁탁 하고, 그런 게 훨씬 덜하고, 두 번째는 한국 우리 보통 이제 일자리가 뭐냐고 하면 영어로 ‘잡’(job)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잡을 ‘업무’라고 번역하기는 하는데 한국에는 사실 그 개념이 잘 적용이 안 되요.

민노: ‘잡’을 ‘업무’라고 번역해도 그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요?

이상헌: 여기서 ‘잡’은 뭘 해야 할지가 정확하게 정해져 있어요. 그래서 ‘잡 디스크립션'(job description; 업무 명세)이라고 하면, 한국은 이걸 업무 명세라고 해야 하나, 그 범위에서 벗어나는 일을 시키면 안 돼요. 그런데 한국은 아예 그런 게 없든지 있더라도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정의돼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시켜도 되는 거예요.

이 이미지는 대체 속성이 비어있습니다. 그 파일 이름은 plan-5659443_1280-918x800.jpg입니다

민노: 업무 범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는 거군요. 거기는.

이상헌: 여기 노동자들은 자기 업무 범위가 정해져 있으니까 그 테두리 내에서 자기 업무를 지킬 수 있죠. 그래서 뭘 엉뚱하게 시킨다든지 그런 경우에는 못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못한다고 하기가 좀 힘들잖아요. 워낙에 분위기도 좀 그렇고요. 하지만 여기에는 그런 게 노동시간에 완전히 반영돼 있어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여기에서는 밤에 일을 한다든지 이런 경우에는 밤에 일 못한다, 내일 일하겠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국에선 그런 게 좀 힘든 거죠. 공장 같은 경우에 갑자기 예정에도 없이 야근하게 된다든지 그런 일이라도 여기에선 적어도 며칠 전에 알려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선 점심 먹고 나서야 오늘 야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근하게 된다든지… 그런 차이는 확실히 많이 나는 것 같고요.

사고냐 산재냐, 노동자 본인 과실이 많은 (숨겨진) 이유


이상헌: 사실은 그런 게 스트레스나 산업재해와도 관련이 있어요.

민노: 아, 네. 그렇죠. 그럴 것 같습니다.

이상헌: 여기에선 일이 너무 힘들고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노(No)’라고 말하고, 지시한 업무는 내 업무 범위를 넘은 거라고 항의할 수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게 힘들죠. 한국에선 그렇게 쉽게 못 한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게 부당하다고 항의하면 하청업체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지고요. 실제로 기업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에게 그런 의식이 약간 내재화돼 있어요.

민노: 내재화…

이상헌: 내가 만약에 여기서 ‘노(no)’라고 하면,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말하면, 혹시 내 일자리가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죠.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그런 게 내재화돼 있어서 사실 산재 사고가 상당 부분 노동자 본인 과실이에요. 그게 순전히 이 사람이 어리석기 때문에 생긴 과실이냐면, 그게 아니라 이런 억압적이고 전체적인 기업 문화가 어느 순간 노동자에 내재화돼 있어서 그런 실수가 생기는 거죠.

민노: 노(No)라고 말할 수 없는 기업 문화가 산재를 만들고, 노동자 과실을 만든다?

이상헌: 한 노동자를 생각해보세요. 정말 순식간에 일반 산재 사고가 되기도 하고, 노동자 본인 과실이 되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고를 산재사고다, 아니면 노동자 과실이다 이렇게 잘라서 말하기 힘든 게 현재 상황이고, 산재나 노동시장 관련해서 상황이 어려워진 이유인 것 같기도 하고요. (계속)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