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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박사를 만났습니다.

공식 직함은 국제노동기구(ILO) 부사무총장 정책특보. 하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해 ‘편지’ 쓰는 그는 열여덟 문학청년입니다. 사람과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 세계를 움직이는 경제의 원리와 현상을, 마치 딸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친근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이상헌 박사. 그가 쓰는 글은 다양한 분야에 펼쳐져 있지만, 글 모두에는 사람을 향하는 따뜻한 가슴이 있습니다.

슬로우뉴스에 ‘제네바에서 보낸 편지’를 연재하고, 한겨레21에 ‘이상헌의 이상(理想)한 경제학’을 연재하는 탁월한 이야기꾼 이상헌 박사에게 그가 살아온 여정과 글쓰기, 그리고 ‘이상(異常)한 대한민국’에 관해 물었습니다.

  • 2014년 7월 18일 오후
  • 서울 압구정동 인근의 식당과 카페 [/box]

– 자기소개 부탁.

업무상 만나는 사람에겐 특별히 나를 소개할 필요가 없고, 그 밖에 사회적인 사교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아서 자기소개가 좀 어색하다. 내 아내가 나보다 훨씬 더 유명해서 ‘아무개 남편’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웃음)

– 아내가 더 유명하다?

전업주부인데, 커뮤니티 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미시유럽’이라고 유명한 커뮤니티인 ‘미시USA’와 비슷한 성격의 커뮤니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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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과 대신 경제학과를 선택한 이유

– 경제학에는 특별히 뜻이 있었나. 

고등학교 때는 국문과에 가려고 했다. 부모님과 선생님도 내가 국문과 가는 걸 합의한 상태였다.

– 하지만 결국은 경제학과에 갔다.

문제는 학력고사 성적이 나온 뒤였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수 있는 성적. – 편집자) 성적이 나오니까 부모님과 선생님께서 돌변하셨다. (웃음) 그래서 국문과에 가려고 가출했는데, 가출한 곳이 하필 외가였다. 당장 외할머니께서 집에 연락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대학 진학 협상이 시작됐다.

– 협상 결과는? 

나는 국문과를 고집했고, 부모님과 선생님께선 당연히 ‘법대’ 진학을 원하셨다. 그래서 이웃집 형이 중재역을 맡았다. 부모님께는 ‘상헌이가 경제학과에 가도 고시 봐서 고급공무원으로 입신양명할 수 있다’고 꼬셨고, 나에겐 ‘국문학과가 아니더라도 경제학과에 가면 인간과 사회를 풍부하게 공부할 수 있다’고 꼬셨다. 그래서 결국 경제학과에 갔다. 지금 생각하니 속았다. (웃음)

– 돌아보면 어떤가. 경제학은 적성에 맞았나.

경제학은 수학과 통계가 중요한 학문이다. 수학도 좋아하는 편이어서 배우는 건 별문제가 없었다. 배우다 보니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아서 계속 했다. 직업적인 적성으로 봐도 괜찮았던 것 같다.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운명의 페이지는 문학이 아닌 경제학을 펼쳤다.
문학을 하고 싶었지만, 운명의 페이지는 문학이 아닌 경제학을 펼쳤다.

문학은 삶의 입체성을 드러낸다

– 이 박사 글에는 문학적 감수성이 배어 있다.

외국에 있으니 한글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래서 계속 글을 쓴다. 어릴 적 꿈은 문학이었는데 직업적으로 문학과는 점점 더 멀어지니까. 이중의 갈증이 있는 셈이다. 직업적으로 멀어지고, 공간적으로도 한글과 멀어지니 그 이중의 갈증이 더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 문청(문학청년) 시절과 지금은 글쓰기가 많이 달라졌나.

대학 때 내가 쓴 글을 모은 ‘문집’을 누가 선물했는데, 깜짝 놀랐다. 지금 쓰는 글이랑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좋게 보면 한결같다. (웃음) 내 속에 있는 내 사유와 논리 구조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다. 사실을 구성하는 방식이랄까, 그런 게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나쁘게 보면, 사람이 발전이 없다. (웃음)

Alexandre Dulaunoy, CC BY SA https://flic.kr/p/eewWz
Alexandre Dulaunoy, CC BY SA

– 문학평론가 김현은 “나는 18살에서 단 한 살도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4.19세대로서의 정체성이랄까. (주: 김현은 42년생) 

나에게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김현의 4.19는 아무래도 80년대 민주화운동이다.

– 좋아하는 문학 장르나 작가는.

소설보다는 시를 좋아했다. 김수영과 정희성 시인을 좋아한다.

김수영 정희성
김수영과 정희성 (사진 출처 미상)

– 김수영 시인의 어떤 점이 좋은가.

그의 ‘찌질함’이 좋다. 김수영을 좋아하는 분들은 보통 그의 참여적인 경향(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 대표시 ‘풀’과 같은)을 좋아하는데, 나는 김수영의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좋다. 한마디로 이 위대한 시인은 참 찌질하다.

– 정희성 시인은.

정희성 시인의 시는 삶의 구체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 민족이고, 참여고, 순수고를 떠나 따뜻하다. 슬프고 어둡지만, 따뜻하다.

노을 강가 강
nachans, CC BY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 1978)

다 읽고 나면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지만, 시 속에 등장하는 그 사내도 이 시를 통해서 위로받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 문학이 여전히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문학은 삶의 다양한 면을 다양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왜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줄까. 불쌍해서도 있겠지만, 문학의 역할은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진심으로 우러나는 인간적인 감정과 연민은 삶의 입체성에서 생긴다.

– 입체성?

언론도 방송도 특별한 목표 속에서 한 인간의 일면을 비춘다. 이 인터뷰조차도 ‘이상헌’이라는 사람의 일면을 비추는 측면이 있다. 물론 그 모습도 나이긴 하지만. 문학은 존재의 다면성, 삶의 입체성을 비춘다.

– 지난 80년대 운동방법론에 대한 문제의식인가.

문학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으면 빨리 무너지는 것 같다. 메시지를 너무 앞에 세우고, 사람을 뒤에 세우면, 그 뒤에 달려가는 사람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담론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화폐 중심으로 사고한다는 거다. 시장 경제뿐만 아니다. 권력의 문제, 언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삶을 어떤 특정 영역,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짜 맞춰서 바라본다. 이런 기존의 담론 질서를 뛰어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입체적인 삶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 ‘문학의 죽음’,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자본주의의 마법에 걸려 잊었던 것들을 드러내고, 드러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문학은 여전히 혁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문학의 역할은 그런 진실을 드러내는 것, 거기까지다. 그 뒤에 그 발가벗은 진실 위에서 공감하고, 연대하는 걸 정치가 해야 하고, 다양한 사회 세력이 해야 한다. 지금은 양쪽 다 안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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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 거기까지다. (출처: Hartwig HKD, CC BY ND)

친구의 죽음 그리고 80년대에 관하여

– 앞서 말했듯, 당신의 청년 시대를 지배한 건 80년대 학생운동이다. 

아직도 그런 감성이 남아 있는데, 80년대 학생운동은 추상적이었다고 본다. 그래도 지금은 그나마 개인적으로 그런 추상성을 조금은 구체화하려고 노력한다.

– 80년대 학생운동을 추상적이라고 인식하게 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 

고등학교 친구가,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원양어선을 탔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이념과 사상, 그리고 인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당시 많이 좌절했다. 내가 그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었다. 뭔가 구체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내 친구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이 사상이고, 운동이 무슨 소용인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게 한 사건이다.

– 원양어선 친구 사건에 관해 좀 더 들려달라.

친구가 배를 탔고, 돌아오지 못했다. 마치 세월호 사건과 비슷하다. 선원들이 전원 구조됐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오보였다. 검찰에서도 조사를 진행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너무 화가 나서 해운항만청에 고등학교 친구들 대여섯 명이 함께 쳐들어갔다. 그 일로 나는 수배상태가 됐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 능력에 대한 한계를 느꼈다. 감정과 의욕만 앞서고…… 좀 더 인내하고, 끈질기게 준비하면서 기다렸다면 좋았을 텐데……

친구가 죽었다. 학교 시절에 공부 잘하던 모범생이던 내가, 대학의 꿈을 진작에 버렸던 그와 친구는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술집에서 만났고 그러다가 친해진 그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그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시민아파트에서 살았다. 그 아파트의 공동화장실에서 나는 다시 쫄았다. 그곳에서 살아온 그가 경외로웠다. 그는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나의 아버지처럼 배를 탔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내 친구도 그의 어머니가 그 붕어빵 같은 월급봉투를 매달 받는 것을 즐겁게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가 월급봉투 한번 나오기도 전에, 필리핀 근해에서 배가 침몰하면서 죽었다.

– 이상헌, ‘월급봉투’ 중에서

내 친구는,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배를 탔다. 하지만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내 친구는,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배를 탔다. 하지만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좀 더 전략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했을 것 같다. 물론 한계가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 질문을 좀 바꿔서, 지금 만약에 그런 일을 친구가 당했다면.

우선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 같다. 그리고 언론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겠지. 무엇보다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긴 호흡으로 싸움을 준비할 것 같다. 지금은 살면서 쌓아온 인적 자산과 약간의 물질적인 여유가 있으니, 그런 방식을 생각해 보겠다.

– 원양어선 탔던 친구의 죽음은 당신 삶에 어떤 의미로 남았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르다. 하지만 늘 그때 일을 떠올린다. 원망과 후회로 떠올린다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떠올린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걸 떠올리나.

세상 살다 보면 경쟁이 치열해질 때가 있지 않나. 나도 그게 옳다고는 본다. ‘아, 내가 잘 돼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문득, ‘나는 지금 단순히 그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일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그 친구를 떠올린다. 그러면 욕심이 사라진다.

사람은 자아라는 것의 허상에 휘둘려서 살아간다. 나도 그런 욕심이 있다. 그럴 때면 ‘대학교 3학년’ 때로 돌아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좀 더 구체적인 걸,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면 자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사무실 생활도 평안해지고, 일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 우리나라 사람들, 언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다고 보나.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부족하다. 특히 이른바 좌파가 더 그런 것 같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주장을 담은 체화물로 보면 공격하기가 쉽다. 인간을 인간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어떤 특정한 주장을 펴는 체화물로 보고 정형화하면, 그렇게 이념화한 도구로만 이해하면, 결국은 껍데기뿐인 주장만 남는다. 그런 생각을 예전부터 했다.

인간을 주장을 담은 체화물로만 보면 껍데기만 남는다. ( misspixels, CC BY NC ND)
사람을 주장이나 정보를 담은 체화물로만 보면 껍데기만 남는다. (출처: misspixels, CC BY NC ND)

– 그 관성을 깨뜨리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자는 생각이다. 나를 앞세우는 방식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문제를 풀어가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관계’를 중심으로 놓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게 무슨 갑을관계나 뇌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좀 더 따뜻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을 주장을 담은 체화물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특히 지위가 낮고, 어려운 사람에게 더 그래야 한다. 좀 더 이해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에 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

– 당신이 보기에 우리나라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인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그럼 어느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냐, 뭐가 정상적이냐고 하면 말하긴 어렵지만, 사회가 건전하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건가. 모든 인간에 대한 존중, 배려가 기본인 사회를 말하는 거 아닌가. 그게 오늘날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닌가 싶은데, 어느새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사회 같다. 인간에 대해 예의조차 음모론적으로 바라본다.

–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음모론으로 바라본다?

세월호에 관해 이것을 하자, 저것을 하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른바 세월호 특별법이다. 그 특별법은 대한민국 사회가 세월호 유가족에게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인간적인 예의’에 속한 일이다.

구글 세월호 특별법
세월호 특별법은 여전히 난항이다. (2014년 8월 13일 현재)

– 특별법을 바라보는 어떤 입장이 문제라고 보나.

일부 언론과 여당마저 ‘유가족 뒤에 뭐가 있을 거야’라는 식의 음모론으로 접근한다. 달리 말하면, 세월호 문제를 인간에 관한 예의가 아니라 정략적인 당파성의 문제로 접근한다.

– 그런 시선의 가장 큰 문제는 뭘까. 

사람은 파면 다 나온다. 앞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층성, 입체성을 말했는데, 생각해보라.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인간 내면에는 단 1%라도 속물적인 생각들이 머물 수 있다. 당장 장례는 어떻게 치를까, 부족한 장례비용은 어떻게 충당해야 하지, 그게 인간이다. 누구나 그렇고, 그건 당연한 거다.

– 그런데?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 사람들(세월호 유가족)은 순수하게 슬퍼하는 게 아니라 돈 문제를 걱정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바라본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적인 예의를 벗어나는 음모론적이고, 정략적인 시선이라고 본다.

심재철 세월호 카톡
세월호 국정조사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는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이 2014년 7월 18일 지인들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의 일부. (출처: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원회)

– 슬퍼도 돈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지. 당연한 거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가 ‘정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율배반적이다. 자기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는 “순수한 슬픔”, “순수한 마음” 같은 걸 강요한다. 이율배반이다. ‘월급’에 대한 태도도 그런 이중 잣대가 강한 것 같다.

– 세월호에 관해 좀 더 듣고 싶다. 

가령, 뺑소니를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피해자 가족이라면 가해자를 잡아달라고 노력하지 않겠나. 가해자를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겠나. 그 뺑소니를 세월호로 확대하면, 세월호는 모든 사회 성원과 정부와 언론, 우리 사회의 모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연루된 최악의 뺑소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뺑소니 피해자 가족이 가해자를 잡아달라고 경찰에 요구하고,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요청하는 일이 이상한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 세월호는 그 뺑소니 가해자 중에 국가(정부)도 있는 특별한 사건이다. 그래서 특별법이 필요하다.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정부 일각과 여당,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을 ‘슬픔을 위장한 이익집단’인 것처럼 본다. 그런 시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 인간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다.

패자부활전 없는 경제 시스템 

–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뭐라고 생각하나.

불평등이다. 차별이다.

공정하지 않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월급을 받는다. 불평등이 심화해서 사회적인 긴장 비용이 늘어난다. 경제의 효율성과 안정성 문제에서도 문제가 있을 만큼 심각하다. 소득분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소득을 보장할 수 있을까. 가장 큰 경제문제이자 우리 사회의 화두다.

–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나.

비정규직 문제다. 명백한 차별이다.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가장 큰 문제다. 기업이 너무 많이 가져간다. 그만큼 일반 노동을 해서 먹고 사는 일반대중이 가져가는 몫이 작아진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가져가는 파이가 점점 더 줄어든다. 삼성과 현대기아차와 같은 특정한 극소수 재벌에 몰린다.

kosis

– 청년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청년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다. 평생 복구가 불가능하다. 청년 시절의 10년은 영원히 복구가 불가능하다. 평생을 주기로 연구 조사한 결과들을 보면, 청년 시절에 기회를 얻지 못한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

– 패자부활전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패자부활절은 소득만 놓고 보면 없다. 현재 시스템은 한 번 패자는 영원한 패자다. 지금 당장 고생해서 문제가 아니다. 이것도 문제는 문제지만, 한 번 기회를 잃으면 평생 복구가 불가능한 시스템이 더 문제다.

– 그럼 일단은 기회를 얻은 계층은 안전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언제든 낙오할 수 있는 위험이 너무 많다. 40대 중반에 정리해고가 될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다.

– 이른바, 명퇴 뒤에 ‘통닭집’ 문제…… 어떻게 보나.

문제는 한 번 그 길로 들어서면, 그런데 여기서도 실패하면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국은 소득 수준과 비교하면 자영업자 비중이 너무 높다. 20%를 훌쩍 넘는다. 소득 수준에 비해 10% 포인트 정도 높다.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자영업자 비중이 낮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한국은 높아진다.

국가별 자영업주 비중

– 그 이유가 뭔가.

소득이 불안정해서 그렇다. 차라리 통닭집이라도 차리면 지금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이지만, 한국인이 먹을 수 있는 통닭은 한정돼 있다. 경쟁이 치열하다고 통닭 먹을 위장이 늘어나진 않는다.

– 통닭집도 통닭집이지만, 이미 포화상태라는 카페도 계속 늘어난다.

자영업 시장의 규모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 시장 내부에서의 이동은 가능하겠지만, 전체 파이가 늘어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자영업 시장의 파이가 커질 가능성은 아주 낮다.

– 자영업자 문제의 해법은.  

고용 시장이 안정되어야 한다. 자영업이 비정상으로 늘어나는 건 해고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인력 감축이다. 어떤 기업이 수익률을 10%를 목표로 삼았다고 치자. 그 수치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겠지만, 그 수단이 통하지 않으면, 인력 감축의 유인 요소가 커진다. 그렇게 쫓겨나면 자영업의 무한 경쟁에 내몰린다. 물론 기대를 품고 자영업에 진출하겠지만, 확률적으로 성공 가능성은 점점 낮아진다. 자영업자가 늘면 늘수록 실패 가능성은 비례해서 높아진다.

– 기업, 노동자(노조), 정부 중에서 비정규직 및 자영업 문제 해법의 칼자루는 누가 쥐고 있나.

정부다. 노조는 현재 조직률이 10%에 불과하다. 기업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할지가 중요한 이유다. 정부가 정확한 비전을 가지고 방향을 잡아주면, 기업이나 노조가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 결성률 추이

현재 한국 경제 시스템의 조건을 고려하면, 정부의 주도권 확보가 아주 중요하다. 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직접 노동자의 소득을 보전해줄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실질적인 사회 보장제도와 소득 이전 정책, 사회 보조금 정책이 필요하다.

– 자본과 노동, 그 힘의 균형은 깨졌다고 보나.

힘의 균형은 깨졌다. 그래서 정부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노조가 다시 힘을 모은다고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선 그럴 가능성도 낮다.

– 노조의 힘은 왜 약해졌다고 보나.

거칠게 말하면, 산업구조가 변화했고, 비정규직이 확대했다. 더불어 노조의 전략 실패도 한 원인이라고 본다.

– 대기업 위주 노조의 노동운동은 전략적으로 실패했다고 보나.

실패라고 단정하기엔 성급하지만, 아주 큰 한계를 보이고 있다. 현재로선 뚜렷한 해법도 보이지 않는다.

(黨)은 있지만 정(政)이 없다

– 한국 정치의 문제는 뭐라고 보나.

‘당'(黨)은 있지만 ‘정'(政)이 없다. 정치가 뭔지 왜 정치인지 무엇을 위한 정치인지가 굉장히 모호해졌다.

당은 있지만 정이 없다.
패거리는 있지만, 정치는 없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앞서 이야기한 ‘인간에 관한 예의’로 돌아가서 설명해보자. 다양하고 다층적인 욕구를 가진 인간이 서로 섞여서 집단으로 공동체로 살아가는 게 사회고, 그래서 이들의 권리와 의무, 욕구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게 정치다. 즉, 정치는 사회의 ‘조정 메커니즘’을 담당한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애당초 ‘왜 정당이 필요한거지?’라는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전체적으로 방향감을 상실했다.

– 피할 수 없는 경향이겠지만, 이미지 정치의 폐해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때가 되면 선거가 열리니 투표를 하긴 해야 하는데, 나도 내가 왜 저 정당에 투표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심정적인 차원에선 이미지를 좇아 투표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쁘게 보면 인기투표다. 이미지 정치의 취약함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타 정치인’에 편승한 정치 행태는 일시적으로 정서적인 빈곤함을 채워주지만, 그 폐해와 위험은 동시에 커진다.

높은 교육 수준, 이제 민주주의 ‘굿 뉴스’ 아니다

– 얼마 전 ‘T.K.’ 인터뷰에서 던졌던 질문이다. 우리나라는 교육수준도 높고, 민주화운동 역사를 보더라도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정치는 개판인가.

한국의 교육 수준은 상당히 높다. 그건 정확히 맞는 말이다. 시민의식도 높다. 그런데 정치는 왜 개판일까? 나는 한국의 높은 교육 수준이 한국 정치발전의 큰 원동력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어떤 사회의 높은 교육 수준은 민주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인 건 맞는데, 충분조건은 아니다.

–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교육 수준이 높다고 민주주의가 꽃피는 건 아니다. 민도가 높은 사회에선 수용하는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교육 수준이 낮을 때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사회 대다수가 읽을 수 있고, 수용한 정보를 해석 가능한 수준의 사회에선 다른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정보의 생산과 소비, 그 유통의 메커니즘이 중요해진다.

– 정보 메커니즘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이를테면, 서로 절연한 두 가지 채널로 정보를 생산하고, 그 정보를 소비한다. 정보 메커니즘이 분리된 사회다. 소위 ‘보수’의 그것과 ‘진보’의 그것이 서로 다르다. 누가 생산하는가. 누가 소비하는가. 누가 유통하는가. 이 생산과 소비, 유통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쉽게 말해서 조중동을 읽는 사람과 한겨레나 경향을 읽는 사람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두 진영 모두 교육 수준은 높을 수 있다.

– 사회 교육 수준과 정치 성숙도는 별개일 수도 있다? 

한국의 교육 수준이 높아진 건 정치 발전에 더는 ‘굿뉴스’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계층의 보수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세요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에 등장한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주세요”라는 플래카드. 여당의 지방선거 전략은 정책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박근혜 지키기”로 올인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게 먹혔다.

이미지 정치, 결국 돌고 돌아 ‘동전 던지기’

– 한편으로, 왜 사회의 교육 수준은 높은데 이미지 정치는 더욱 기승일까?

정보 진영의 간격이 커지면, 두 채널의 정보 메커니즘의 힘이 승부를 결정한다. 결국, 정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힘 센 놈이 이긴다.

아무리 많은 정보가 쏟아져도 무용지물이다. 정치는 실종하고, 무리만 있기 때문이다(‘당’은 있는데, ‘정’은 없다.) 즉, 정책적인 선명성이 없고, 언론도 제대로 정책적인 차별성을 부각하기보다는 그저 이미지만 좇는다. 막연한 이미지가 득세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철학 없고, 실체 없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득세한다.

– 그런 이미지 정치의 결과는 무엇인가.

가령, 예를 들면,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한다면서도 박근혜가 세월호 사태 해결을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물어보면 아무 말도 못한다. 그런 수준에서 대통령과 자신의 일치화가 진행한다.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 한국 정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것 같다.

정치 행위라는 게 얼마나 극단적으로 변질할 수 있는지를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것 같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에 진짜 정치는 없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정치 행위를 강요받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선거 때마다 투표하라고 하고, 그렇게 교육받았으니 투표는 하지만, 어떤 정책과 어떤 철학으로 투표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피상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그렇다. 어쨌든 민주주의 해야 한다고 하고, 그러니 투표도 해야겠는데, 시민의 교육 수준은 높아서 차마 “동전 던지기”식 투표를 스스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왜? 쪽팔리니까. 그래서 ‘철학’과 ‘정책’이라는 제대로 된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고(그런 정보를 생산하지도 않으니까), 그저 막연한 이미지를 받아들인 뒤에 그 이미지를 ‘정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로 자신의 투표행위를 정당화하고, 스스로 핑계로 삼는다.

결국, 자존심 때문에 거부한 ‘동전 던지기’식 투표 행태와 다르지 않다. 먼 길을 돌아서 결국은 ‘동전 던지기’식으로 투표하고, 정치행위를 한다.

동전 던지기
결국 돌고 돌아서 ‘동전 던지기’식으로 투표하고, 정치행위 한다. (출처: jeff_golden, CC BY SA)

변화의 열망은 있지만 그릇이 없다

–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변화에 관한 열망이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각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변화에 대한 열망은 아주 높은 편이다. 오히려 서구인들은 자신의 삶을 이미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라서 변화의 가능성과 폭이 아주 좁다. 우리는 그 변화에 관한 열망의 폭도 넓고, 전방위적이다.

하지만 그 열망이 너무 개개인에게 머물고 있다. 그걸 묶어주고, 사회화하는 매개들, 그릇이 없는 것 같다. 그 점이 몹시 아쉽다.

– ‘그릇’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변화의 열망을 담아낼 수 있는 그 ‘그릇’이 바로 정치와 사회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의 역량이다. 한국 사회는 그게 무너진 것 같다. 그래서 쉽게 좌절하고, 우울해진다. 변화의 열망을 충족할 수 없으니 더 극단적으로 우울해지고, 개개인의 생활이 그 형태만 남긴 채 내용 없이 껍데기로만 남는다.

열망은 있지만 그걸 담을 그릇이 없다. (사진: debaird™-CC-BY-SA)
열망은 있지만 그걸 담을 그릇이 없다. (출처: debaird™-CC-BY-SA)

– 대한민국은 불행하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전 세계 꼴등에 가깝다. 삶에 만족한다는 비중이 30% 정도다. 스위스는 약 70%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국민은 자기 삶이 어떻게 진행할지 대충 예상한다.

행복지수 삶 만족도 지수
우리나라의 행복지수(삶 만족도)는 역시 전 세계적으로도 낮은 편이다. (재인용 출처: Better Life Index)

– 예견 가능성이 높을수록 행복하다는 건가.

좀 미묘한 건데, 사람은 자기가 닮고 싶은 대상을 정하고, 그 롤모델과 자신이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기대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불행해진다. 물론 기대 수준이 높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가 있고, 노력해서 그런 기대를 성취할 수 있는 사회라면 행복지수는 높아진다.

– 그런데 한국사회는 노력해도 ‘성취’가 불가능하다?

그렇다. 한국 사회를 보라. 사람들과는 변화의 열망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혼자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외로워한다. 답답하고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 한국사회는 예견가능성이 없다?

유럽 사람들에게 ’10년 뒤에 니가 뭘 할 것 같니?’라고 물으면 대부분 대답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을 확답을 못 하고, 대답하더라도 자신 없어 한다. 우리나라는 그만큼 불확실성이 높은 나라다.

– 왜 우리 사회는 예견 가능성이 없을까.

우리 사회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내가 저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스스로 확신할 수 없는 사회다. 개인의 노력을 사회가 도와주는 메카니즘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 사람 여자 소녀 불안

당신은 행복한가

–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행복한 것 같다. 내가 노력한 것도 있지만, 운이 좋은 것 같다. 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 와이프는 초등학교 동창인데, 결혼 생활도 아주 순탄했다.

– 유학을 떠날 때 아주 힘든 상황이었다고 안다.

아이가 아파서 결정한 유학도 결과적으론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다. 은사이신 김수행 선생님이 없었다면, 유학은 가지도 못했을 거다. 그 밖에 직장생활에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도움받고 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진보한다" https://slownews.kr/20467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진보한다”

– 행복의 비결은 있나.

비결은 모르겠다. 노력은 많이 하는 편이다.

– 위기는 없었나.

7년쯤 전에 우울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몇 달 동안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 마침표를 찍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때 삶의 태도가 바뀐 것 같다. 욕심도 많이 사라지더라. 그때는 굉장히 심각했다.

– 위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나는 진급도 아주 빠른 편이었고, 순탄했다. 국제기구에서 한국사람으로서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5, 6년 정도 지나니까, ‘아, 이제 자리를 잡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좀 행복해도 되겠네, 생각했는데, 바로 그때 우울증이 오더라. 스스로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왔는데, 악셀을 떼니까 바로 그때 문제가 생긴거다.

되돌아보니 내 자아(我)가 비추는 모습(像)에 대한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계속 노력을 했겠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해야지. 그래서 나를 참 스스로 압박했구나 싶다.

Ananth BS, CC BY
Ananth BS, CC BY

– 어떻게 극복했나.

내 사무실이 10층이다. 사무실 유리창으로 밖을 보면 잔디 마당이 있다. 그게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이 참 위험하다고 하더라. 내 삶은 이것으로 끝인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문장 하나 쓰기도 어려웠던 시기였다. 몇 달 동안 한 문장도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정신력으로 몰아붙여서 다 됐는데, 오히려 그때는 그게 화를 불러온 것 같다. 우울증을 극복하는 첫 번째 단계는 스스로 문제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거다. 그렇게 심각한 두세 달을 넘기고, 한 1년 정도 시간을 두고 극복했다. 무엇보다 내 지난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과정 자체가 큰 도움이 됐다.

– 이상헌 박사 글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다. 끝인사 부탁한다. 

그런가? 나는 독자가 없는데. (웃음) 나 스스로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진 않는다. 분석하는 글도 그렇다. 내 생각을 타인과 나누고 싶다는 것도 있겠지만, 결국은 내가 쓰는 글은 내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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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이상현 선생님, 열혈 독자지만 숨은 독자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건필하십시오. 좋은 글 항상 고맙게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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