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예능의 인기가 여전하다. 심지어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6주 연속으로 동 시간대 예능 시청률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아빠! 어디가]도 시즌2에 대한 우려를 딛고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당연히 이를 둘러싼 논쟁과 논평도 이어졌다.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라는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그렸다는 우호적 평가에서부터, 현실의 아빠들을 괴롭힌다, 돈 많은 연예인이나 할 수 있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은근히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등 비판도 많다.
그런데 어딘가 허전하다. 이 글은 그 허전함의 정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다.
나는 아빠다
나는 이제 막 돌이 되는 딸 아이 아빠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온통 주변엔 아빠들이다. 페이스북 타임라인도 아들 바보 딸 바보들의 자랑으로 가득하다. (내가 제일 심하다.) 흥미로운 건, 요즘 아빠들이 육아에 참여하는 비중이 과거와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내 주변인들의 지역적/계급적/세대적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내 주변의 아빠들은 부부가 맞벌이하든 하지 않든, 육아에 관심 없고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지 않는 아빠는 그야말로 ‘개념 없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렇다고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들이 필요 이상으로 괴로움을 토로하지도 않는다. 여기저길 돌아다녀도 아기띠를 하고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들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빠 육아 전성시대: ‘스칸디 대디’ 가설
미디어를 보면, 그야말로 ‘아빠 육아’의 전성기다. 육아와 자녀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빠를 의미하는 ‘스칸디 대디’(Scandi Daddy, 육아에 적극적인 북유럽 아빠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나 친구 같은 아빠를 의미하는 ‘프랜디’ 같은 용어들은 등장한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느낌이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조금씩 등장하던 ‘아빠 육아’에 대한 강조는 2013년도를 넘어오며 본격적으로 전면화하고 있는 듯하다. [0~3세 아빠 육아가 아이 미래를 결정한다]라는 어느 책 제목은 아빠들이 마주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최근 ‘스칸디 대디’ 열풍에 관해 이런 가설을 세워 본 적 있다.
- 대전제: 맞벌이하지 않고는 자신이 누려왔던 경제적 풍요를 더는 누릴 수 없게 된 세대가 등장했다.
- 이 세대 남성은 여성의 경제력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직장 여성’ 선호 성향을 가진다.
- 기업은 고학력 여성 인력을 점점 더 필요로 한다.
- 사회 전체의 성장 동력은 약화해 돌봄 노동의 외주(어린이 집)를 대폭 늘리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 이런 조건들이 맞물려 벌어지는 현상이 ‘아빠 육아’ 열풍은 아닐까.
요즘 아이를 가진 아빠들이 육아에 상당한 관심을 두는 것이, 단순히 ‘개념 있는’ 아빠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뭔가 기존 모델로는 지탱 불가능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을 해결해보려는, 자구적 노력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예전 아빠 모델에 대한 반성
여러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최근의 ‘아빠 육아’ 열풍에는 기존의 아빠 모델, 즉 교육을 여성에게 맡기고 자신은 돈벌이에 열중하는 방식 자체가 더는 유효하지 않는다는 반성이 자리하고 있다. 남성이 그렇게 ‘돈벌이’에 집중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게 자녀의 ‘성공'(그게 어떤 의미이든)을 위한 유일한 전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 그런 방식으론 다시는 과거의 속물적 성공도, 대안적 의미의 성공적인 삶과 가정생활 그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빠 육아가 대세가 된 건 요즘 세대 아빠들이 착해서, 혹은 양성성을 갖춘 세대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기존 육아모델의 실패를 절박하게 바라본 세대의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이런 요즘 아빠들의 현실을 고려할 때, 최근 육아 예능의 흐름에서 흥미롭게 해석할 부분이 있다. 바로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차이가 그것이다. 김유곤 PD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듯이 [아빠 어디가]는 그야말로 “낀 세대”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아빠들의 변화는 또 다른 생존 전략
기존 양육 모델을 믿고 10여 년 동안 달려왔는데, 가족 안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낀, 패러다임 전환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세대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에 가깝다는 말이다. 여기서 캠핑은, 그 전환을 그나마 덜 고통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리추얼’이다. 적어도 주말을 이용해서, 가족을 위한 이벤트로, 여가 일부로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아빠의 경제력도 필요하고, 아이들도 캠핑을 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뒤여야 한다.
- 리추얼(ritual): 무엇인가를 위해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儀式)과 같은 일. 예) 철학자 칸트의 규칙적인 산책.
반면, 육아 현장 자체에 직접 침투해서 그들의 고행(?)에 직접 접근하는 [슈퍼맨이 돌아왔다]와는 접근하는 지점이 미묘하게 다르다. [아빠 어디가]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더 많은 내면 인터뷰가 들어가는 건 우연이 아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빠들은 좀 더 전면적인 ‘전환’을 요구받는다.
내면 인터뷰는, 이러한 현실에 적응해 가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리추얼이다. 따라서 이 인터뷰에는 요즘 아빠들이 처한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가 담기게 된다. 아빠들의 속 얘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육아’(育兒)는 ‘육아’(育我)다
최근 ‘육아는 육아다’란 말이 소셜 서비스에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아이를 기르는 ‘육아(育兒)’는 나를 성장시키는 ‘육아(育我)’라는 거다. 흥미로운 건, 이 표현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아빠들의 발언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테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캐치프레이즈는 “아이와 아빠가 함께 크는 성장 스토리”다. ‘나를 성장시키는 것으로서의 육아’는 양육에 참여하는 아빠들에게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감동 코드다.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 요즘 아빠들이 옛날처럼 아내에게 육아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런 ‘고행(?)’에 자연스럽게 적극적으로 참여했을까? 이미 오랫동안 엄마들은 육아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 설령 육아가 ‘나를 성장시키’지 못하더라도, 육아는 해야 하는 것이었다. 모성 이데올로기는 이런 선택에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 그렇다면 아빠들은 자신을 육아의 현실로 이끌 동력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여기에 나름의 정당화 기제가 필요한 거다. 육아는 현실이고, 실상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굳이 아내를 부재 상태에 놓는 것은, 아빠들이 이런 현실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일 거다. 심지어 이건 함께 노는 캠핑도 아니고, 그냥 아이를 키우는 현실이니까. (물론 방송 텍스트 자체가 현실을 온전히 반영한다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제시되는 대표적인 정당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아빠가 양육에 참여하면 애가 더 잘 커요. (성격, 학업, 창의성 등등)
- 육아에 참여하면 당신도 더 좋은 인간이 될 거에요. ‘육아는 육아다’는 여기서 해당하는 명제다.
특히 ‘육아는 육아다’는 이야기가 최근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 자체는 흥미롭다. ‘자아의 성장’이란 현대 사회의 개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테마다. 자기계발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성장’의 수단 아닌가. 혹시 아빠들은 ‘육아’마저도 일종의 ‘자기계발’의 맥락에서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경험이란 의미에서 말이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긍정하든 부정하든 무엇인가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지는 과정임엔 분명해 보인다.
부성의 재구성, 아빠들은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나?
따라서 나는, 최근 육아 예능을 논할 때 ‘부성의 재구성’이란 측면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고 생각한다.
아빠의 육아가 출연자들의 언어에서 어떻게 정당화하고 장려되는지. 오히려 그 담론의 구조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가정 안에서 ‘아빠’의 위상에서 양육에의 참여는 과거보다 훨씬 중요한 위상을 갖는다. 이제 아빠는 유일한 경제적 부양자가 아니다. 그런 경우더라도 여성보다 결코 잘나서 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성이란 이유로 집안에서 대우받을 어떤 이유도 찾기 어렵다. 기존의 가부장적 태도를 유지하다간 결혼 자체가 어려운 게 요즘 결혼 ‘시장’이다.
기존 아빠가 산업사회 가부장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면, 지금은 그 조건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감히) 아이 양육에 참여하지 않는 아빠는 어떤 방식으로 가정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상황에 적응하는 요즘 아빠들은 그런 현실을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을까? 어쩌면,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어찌 보면 그런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답을 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제가 봐도 아빠 예능이 성공한 이유는 사실 [아빠 어디가]의 첫 장면이 보여준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색했던 아버지의 자식들의 모습. 성동일도 그렇고, 안정환도 그렇고, 아빠들의 아빠들은 이미 가족이 아닌 ‘가족’이 된지 오래였지요. 그리고 그런 아빠들을 보면서 지금의 아빠들은 가족에게 소외된다는 막연한 공포가 있었을겁니다. 누구에게는 현실이었고, 누구에게는 멀지 않은 미래였겠지요.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아빠가 아이랑 친해질려면 어렸을때부터 함께 해야 해요. 하는 조기교육적 관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리츄얼이라는 말도 좋습니다만, 부성이라기보다 아버지들의 가부장적 태도를 버린다는 점에서 “부성의 재구성” 이라기보다는 집을 나간 탕자의 비유처럼 [돌아온 아버지]라는 말이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글을 잘 쓰셔서 고개 끄덕이며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