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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자로 발매된 ‘한겨레21’을 받아보았다. ‘대선 특집 9호’, 1161호였다. 표지 위쪽에 적힌 글자가 “‘박정희 세대’가 바라본 촛불 대선”이었다. 표지 아래쪽에는 이보다 더 큰 글자로 “촛불이 대통령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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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대담 

길윤형 편집장은 ‘만리재에서’(한겨레21에서 해당 호의 기획 의도를 독자에게 전하는 편집장의 이야기가 담기는 고정란)에서 이렇게 적었다.

“(…….) 또 하나는 386세대의 맏형인 ‘80학번’ 대담입니다. 김현대 선임기자는 2009년부터 대학 동기들이 만든 산행 모임 ‘정담80’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50대 후반이 된 김 선임기자 또래는 박정희 대통령의 쿠데타와 함께 태어나 가장 민감한 청소년기를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 지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 1980년 ‘5월의 봄’과 ‘광주의 학살’을 목격했고, 전두환 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

길윤형 편집장은 이런 ‘80학번 대담’ 소개에 앞서 다른 대담을 하나 더 소개했다.

“두 개의 대담을 준비했습니다. 첫 번째는 새 대통령을 위한 ‘전문가 대담’입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신진욱 중앙대 교수,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에게 새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전문가 대담보다 분량 많은 80학번 대담

길윤형 편집장은 ‘만리재에서’에서 ‘전문가 대담’과 ‘80학번 대담’을 같은 비중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실제 지면에서는80학번 대담’이 ‘전문가 대담’보다 더 크게 실려 있다.

커버스토리인 “촛불이 대통령에게” 중 하나에 해당하는 ‘전문가 대담’은 44~47쪽 ‘표지 이야기’로 네 쪽이 실렸다. 반면 “‘박정희 세대’가 바라본 촛불 대선”에 해당되는 ‘80학번 대담’은 60~66쪽 ‘특집’으로 일곱 쪽 실렸다. ’80학번 대담’ 분량이 세 쪽 더 많다.[footnote]참고로 두 대담의 정확한 분량(공백 포함한 글자 수)을 비교하면, ’80학번 대담’은 8,973자, ‘전문가 대담’은 6,931자다. ’80학번 대담’이 약 2,000자 정도 많다. (편집자) [/footnote]

‘80학번 대담’이 과연 이렇게 비중을 크게 차지해도 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내용을 보아도, ‘전문가 대담’은 그래도 읽을거리가 있지만, 정담80 구성원들의 ‘80학번 대담’은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그만일 정도다. 게다가 문재인 관련 언급은 제3자가 보아도 부정적으로 편향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크게 다루었을까? ‘대학 동기들의 산행 모임 정담80’ 구성원을 ‘박정희 세대’의 대표로 보지 않았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사 가치 설정이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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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담80’은 어떤 산행 모임일까?

63쪽 상자기사에는 ‘정담80’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문패는 “서울대 동기생들의 산행 모임 ‘정담80’”이고 제목은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한 오랜 벗”이다.(현재 온라인 버전 제목은 “80년 서울의 봄 함께한 벗들”이다. 온라인 버전에선 제목이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기사를 보면 이들은 서로 외로울 때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2009년 ‘정담80’이란 산행 모임을 시작해 10명 남짓이 매달 한 차례 만나 오고 있다. 1961년생(재수를 했으면 1960년생이겠지), 1980년 서울대학교 입학, 전두환에 맞선 학생운동 경력이 이들의 정체성이다. 또 그 구성원 가운데 한 명이 ‘한겨레21’ 선임기자 김현대다.

더불어 그이들의 현실태를 해당 지면에서 찾아보면 이렇다.

  • 김현대는 기자다.
  • 유종오는 회계사다.
  • 문선유는 중견기업 간부다.
  • 천낙붕·정기동은 변호사다.
  • 윤정수는 중소기업 대표다.
  • 박종덕은 부동산정보회사 대표다.
  • 김상현은 협동조합 이사장이면서 사진작가다.

이들은 또 “각자 고향의 산을 찾아가는 1박 2일 순례”를 즐기는 한편 “대학교수 친구의 [파우스트] 명강의 푹 빠져드는” 호사도 누린다.

박정희 세대는 ‘서울대 바깥’에 더 많다

1961년에 태어났지만,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 대신 곧바로 노동자나 농민이 되어 20대를 민주화운동에 바친 ‘박정희 세대’도 나는 많이 안다. 아울러 서울대를 비롯한 이른바 명문대학이 아닌 대학에 들어가 민주화를 위하여 학생운동을 벌였던 ‘박정희 세대’들도 당연히 많이 있다.

굳이 ‘서울대학교’를 넣어야겠다면 다른 4년제 대학교와 2년제 전문대학도 넣어야 맞다. 당시 대학진학률 20% 어름을 고려한다면 대학 가지 않고 노동자나 농민 또는 그밖에 다른 신분으로 20대를 보내며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도 포함시켜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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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결론삼아 말하자면, 서울대 또는 서울대로 대표되는 서울 소재 이른바 명문대학 출신이 아닌 대졸자와 고졸자와 중졸자와 국졸자들은 모조리 울타리 바깥으로 쫓겨났다. 덧붙여 여성들도 쫓겨났고(정담80은 전부 남자다.), 서울 또는 수도권이 아닌 비수도권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쫓겨났다. 짐작건대 정담80은 전부 서울 또는 수도권에 거처나 일터가 있다.

학번은 대학 들어간 사람한테만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오래전부터 ‘학번’에 대해 반대해 왔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학번’은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있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 들어간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말이 ‘학번’이다. 이렇게 해서 ‘학번’은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편타당한 일반적인 정상이라 여기게 만든다.

우리나라 인구 중 학번이 없는 사람 비율
여전히 우리나라엔 학번 없는 국민이 더 많고, 특히 박정희 시대를 온몸으로 겪은 국민 중에는 학번 있는 이보다 학번이 없는 이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세상에는 언제나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대학 가지 않은 사람은 “학번이 어떻게 돼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학번’은 이처럼 대학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을 보편타당하지 않고 별난 비정상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이 알게 모르게 소외당하고 배제당하고 차별받는다.

이른바 명문대 출신들로 가득한 서울 매체들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겨레를 비롯해 서울에 본사를 둔 다른 모든 신문·방송·통신들은 기자 대부분이 서울 소재 이른바 명문대학 출신으로 채워진 지 오래되었다.”

‘한겨레와 서울에 본사를 둔 다른 모든 신문·방송·통신들’에 지금 위와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런 매체에서 일하는, 서울대를 비롯해 서울 소재 명문대학을 나온 기자들은 자기네와 달리 비수도권 비명문대학을 나온 기자들을 거의 볼 일이 없다. 이들은 자기가 나온 대학 정도는 다른 사람들도 다들 나왔으리라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일반화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이런 정도 대학은 나와야 보편타당하고 일반적인 정상이라 생각하기 쉽다는 얘기다.

이런 정도 대학도 아니면 그게 무슨 대학이냐고 여기는 경향이 뿌리 깊다는 말이다. 이런 관념 덩어리는 의식에도 박혀 있고 무의식에도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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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 전후에 찍은 사진인 듯하다. ‘한겨레 21’ 해당 기사에서 재인용.

물론 훨씬 고약한 경우도 있다. 자기 출신 대학만을 갖고 아무 근거 없이 우월의식을 품는 기자도 있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그 배타성이 뒤로 숨어 있지만, 뒤의 경우는 그 배타성이 노골적으로 전면에 드러나 있기 십상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배타성이 뒤에 숨어 있을 때이다.

한겨레 구성원들은 이 쪽팔림을 알까?

이런 것이 이번에 한겨레21이 서울대 출신 산행 모임 ‘정담80’, ‘80학번 대담’을 특집으로 꾸리는 ‘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일으킨 근본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겨레21 직전 편집장 안수찬 기자가 페이스북에서 적절하지 못한 표현으로 속마음을 밝힌 글도 못지 않은 참사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개인의 사적인 사건일 뿐이라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한겨레21 또는 한겨레라는 조직이 조직적으로 의도적으로 벌인 공적인 사건이다. 조금 범위를 넓혀서 말해도 괜찮다면,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이번 한겨레21 참사가 보여주는 바는 이렇다. 한겨레뿐 아니라 서울 본사 매체 소속 기자들 눈에는 우리 사회 일부 극소수인 서울대 또는 이른바 명문대 출신만 보이고, 그 밖에 있는 대다수 사람은 이미 안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겨레 구성원들이 이번 한겨레21의 ‘80학번’ 대담 특집 ‘참사’를 제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그게 정말 쪽팔리는 노릇이었음을 좀 깨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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