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통령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에 출입한 게 1년 남짓이다.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파견 왔을 때부터 줄곧, 나는 결국 ‘문재인당’을 취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시간이 날 때 대강이라도 지금의 생각을 정리해두고 싶다.
문재인을 향한 질문들
취재의 중심에는 늘 문재인이라는 기본상수가 있었고, 대부분의 취재는 그에 뒤따른 변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잘할 때도, 그가 못할 때도 그는 민주당 취재의 항성이었고, 이슈와 인물들은 ‘반문’, ‘비문’ 또는 ‘친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위성, 행성, 혜성 같은 존재들이었다. 지도부에서 점지해준 대로 이재명 선수의 마크맨이 되었을 때도, 이재명이 나의 취재의 주연인 것과 무관하게, 이 시장과 관련한 취재는 대부분 ‘대항마’로서의 존재감에 대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선이 끝나고 지난 며칠, 무언가가 쑥 빠져버린 느낌은,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지난 1년 민주당 출입기자로서 내가 써온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문재인에 대해서 쓰는 일은 거의 대부분 나의 손을 떠났다. 기분이 이상하다. 허탈감이랄까. 1년 전에 썼던 글들을 살펴보면, 정치 무식자로서 가졌던 의문들이 모두 문재인을 향해 있다.
‘정말 광주가 문재인을 싫어하나?’
‘친문패권은 실재하나?’
‘문재인이 정말 대통령감인가?’
정치부에 오기 전엔 마음에 품어본 적도 없는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내가 정확한 답을 얻었을까.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오히려 안갯속이다. 그 시간 동안 제대로 취재를 했던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돌아보면 막막하고, 가슴 속에 갑갑한 것이 시커먼 기름때처럼 엉켜 있다. 제대로 풀지 않고 지나쳐서, 생각하지 않고 들은 대로 쓴 채 놔버려서 망가진 생각의 덩어리들이, 저 한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다.
48 : 52,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취임 뒤 문재인은 (적어도 아직까진) 그를 찍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수준을 넘어, 또는 그를 찍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놀라움을 줄 정도로 괜찮은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87%라는, 그의 통치를 향한 ‘기대감’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숫자다. 그러니 또 질문이 생긴다. 그가 이렇게 잘할 줄 알았다면, 내가 써왔던, 그 숱한 비판 기사들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이명박 정권 때 기자가 된 뒤 7년여, 기자로서 보아온 최고권력들의 모습과 너무 다르기에 시민으로 감동하면서도 기자로서 당혹스럽다. 그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대통령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대통령 후보보단 대통령에 잘 맞는 사람 같아요.” 며칠 전 민주당의 어느 의원을 만났을 때 했던 얘기다. (정치보다 통치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 ) 여기서 출발하고 싶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매우 특수한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그를 시대가 호출해냈고, 등판 즉시 ‘대선 후보’로서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 ‘구(舊)야권’의 표를 있는 대로 끌어모아 그가 받은 성적표가 48:52라는 결과다. 그 강박을 지닌 채로 문재인은 다시 4년을 ‘대선 후보’로 살았다. ‘유력한 대선 후보’로 호출돼 5년을 대선 후보 재수생으로서만 산 경험을 견준다면 ‘이회창’ 정도가 비슷한 사례지만, 문재인과 이회창은 좀 다르다. 문재인이 직면한 질문은 4년 내내 한결같았을 것이다.
우리가 박박 끌어모은 게 ’48’이라면 그 이상 어떻게 전진할 건가. 그 마지노선을 어떻게 넘을 건가.
‘문재인’으로 살지 못했을 4년
2012년 대선의 패인 일부를 ‘우리 안의 근본주의’로 꼽은 문재인의 말이, 나는 그의 지난 4년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대선의 패인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저와 민주당의 평소 실력 부족일 것입니다. 민주, 인권, 평화, 복지, 연대, 환경, 생명, 사람 등 좋은 가치가 모두 우리 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거에서 지는 것일까요? 왜 국민들이 더 많이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요? 심지어는 왜 거리감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일까요?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저는 저 자신도 포함해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근본주의에서 해답을 찾고 싶습니다.” – 문재인, ‘1219 끝이 시작이다'(2013) 중에서, 한겨레에서 재인용
언론과 정치권이, 또 그 자신도, 자타가 머리말로 삼아온 전략은 지난 4년 오로지 ‘중도 외연 확장’이었다. 쓰고 또 써서, 닳아빠진 교조적인 말. ‘48%’의 마지노선을 넘어야 한다는 강박이, 지난 시간 그를 ‘문재인’으로서 살지 못하게 옭아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1년 문재인을 취재하면서도 “도무지 문재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느낀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책을 통해 만져지는 문재인은 원칙주의자에 가깝다. [문재인의 운명], [대한민국이 묻는다] 등 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책들을 민주당 출입기자라면 여러 권 읽어보았을 것이다. 내 경우는 ebook으로 저장해놓고 필요할 때마다 검색해 열어보았다. 그러니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떤지, 그가 생각하는 사회가 어떤지는 대충 얼개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 1년 동안 만났던 문재인은 책 속의 문재인과 조금 달랐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인지부조화가 분명 있었다.
‘대선후보’ 문재인
사드 배치, 재벌개혁 등 중요한 이슈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대선후보’ 문재인은 주저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에서 국가보안법 일부 개정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서 제정 반대로, 2012년보다 2~3걸음 물러난 재수생 문재인은, 분명 ’48%’의 선 앞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이고, 외연 확장이 최대 과제니까.
재벌개혁을 말하면서도, 그가 ‘기업친화적 행보’의 첫걸음으로 삼성경제연구소 등 4대 재벌기업 연구소장을 만나 간담회를 진행할 때는 답답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문재인을 잘 알거나 그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을 만날 때 종종 묻곤 했다.
“문재인이 꿈꾸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가요? 노무현이 꿈꿨던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처럼, 문재인의 그림은 분명하지가 않아요.”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서 읽힌 것은 ‘권력의지’보단 일종의 ‘소명’이긴 하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야권’이 그를 전폭적으로 인정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는 지난 대선에서 48%의 ‘몰빵’을 받았고, 그 지지에 답하기 위해 이번에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는 소명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대선이 가까워져 오면서 들려왔던 ‘문재인이 달라졌다’는 평가들(주로 ‘기자들에게 인사를 잘한다’는 따위의 하나 마나 한 소리)도, 그 소명의식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 후보로서 문재인의 말과 행동은 모두 그 48%의 그물에 포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좌고우면’하는 문재인,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문재인은, ‘민주당 경선’까지였다. 민주당 본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그는 비로소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 페이스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표정엔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고, 말에는 확신이 실렸다. 특히 경선 직후 치고 올라왔던 안철수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부턴 그가 마음껏 내달려도 괜찮을 정도로 구도가 좋았다. 안철수와 홍준표가 보수표를 나눠 가졌고, 문재인은 48%의 벽에서 해방됐다.
마침내 ‘누구인지’ 알게 된 문재인
선택받기 위해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함부로 운신하지 못하며 ‘고구마’라고 불렸던 그가, 캠페인 방향을 ‘통합’보단 ‘적폐청산’으로 정리했다는 말을 들을 때, ‘기자’로서 나는 비로소 문재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누구보다 후보의 의지가 강력했다”는 말을 들을 때, ‘촛불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심 좀 안심이 됐다.
기자들이 문재인을 만날 때마다 앵무새처럼 “통합이 중요한 거 아니냐”, “어떻게 통합할 거냐”고 물을 때 문재인은 비로소 “개혁에 기반한 통합이어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1년 전 같으면 ‘통합도 중요하고, 개혁도 중요’하다고 말끝을 흐리며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게 자신의 소신과 원칙이든, 아니면 비로소 ‘정치인’으로 성장한 문재인이 체화한 시대정신(또는 국민감정)이든 간에, 그 자신감이 취임한 문재인의 열흘에 반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야 문재인을 좀 알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을 때, 그와는 헤어지게(?) 됐다. 이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로 시작하는 기사와는 이별이다. 시원섭섭하다. 6개월 동안 탄핵과 대선의 ‘막장 드라마’만 취재하다, 일일연속극같이 잔잔한 이야기들을 취재하려니, 좀 심심하긴 하지만, 해피엔딩이어서 다행이다(우리 ‘공장'[footnote]필자는 한겨레신문 기자다. 여기서 ‘공장’은 한겨레신문사을 가리킨다. (편집자)[/footnote]에는 큰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왔지만…).
마침내 ‘누구인지’ 알게 된 문재인이 알려졌던 대로 좋은 사람이어서 다행이다. 그와 멀어지고 나니,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서 기자로선 열패감을 느낀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고맙다. 그리고 축하한다.
우리를 위해, 달님[footnote]문재인 대통령을 ‘달님’으로 부르는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정확히는 그 중 ‘성’)을 영어로 표기하면 ‘Moon'(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래한 애칭. (편집자)[/footnote] 흥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