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솔루션 × 슬로우뉴스 공동 기획] 1년 대부분 남아도는 전력, 유연성 자원 확보가 핵심… 피크 타임 전력 소비 줄이고 가상 발전소로 분산 자원 보상하는 시장 열어야.

정부가 발표한 3대 메가 프로젝트가 돌아가려면 39.7GW의 전력 수요를 맞춰야 한다.
- 첫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5GW,
- 둘째, 광주 등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 6.3GW,
- 셋째, AI 데이터센터에 18.4GW 등이다.
정부는 재생 에너지를 100GW로 늘리고 원자력 발전소와 SMR(소형 모듈 원자로)도 더 짓고 송전망도 늘리고 계통 안정화 설비를 보강하는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는 계획이다. 재생 에너지와 ESS(에너지저장장치), VPP(가상발전소)를 결합한 실증 사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나라 전체의 전력 체계를 다시 짜야 할 판이다.
- 지난해 2월 확정한 11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서는 2038년 목표 수요가 129.3GW였다. 당연히 메가 프로젝트를 고려하지 않은 전망이다. 대략 30% 이상 수요를 추가 반영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 당장 발전 설비를 늘리고 송전망도 깔아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 정부는 2040년까지 전력 수급 계획을 담은 12차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올해 안에 확정한다는 계획이지만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유연성 전략이 같이 가야 한다.
- 재생에너지가 늘어난다고 해서 태양광이나 풍력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에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기는 모두 전력망 안에서 섞여 흐른다. 중요한 것은 재생에너지가 늘어날수록 전력망이 그 변동을 얼마나 잘 흡수할 수 있느냐다.
- 전력 공급은 부족해도 문제지만 넘쳐도 문제다. 공급도 들쭉날쭉하지만 수요도 들쭉날쭉하기 마련이다. 반도체는 24시간 내내 상시 부하가 걸리지만 AI 데이터센터는 전력 수요가 초 단위로 출렁거릴 수 있다.
- 전력 시스템이 수요와 공급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유연성이라고 한다. 유럽 전력산업연합(Eurelectric)은 유연성을 시간 단위로 나눠서,
- 배터리는 하루 안의 빠른 균형에,
- 수력 저수지와 산업 수요 반응은 며칠에서 몇 주 단위 변동에,
- 양수 발전과 수소 저장은 계절 단위 조정에,
- 가스 발전은 수요가 급증할 때 빠른 출력 대응에 각각 강점이 있다고 정리했다.
-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30년까지 세계적으로 1500GW의 에너지를 저장해야 하는데(넷제로 경로 기준) 이 가운데 1200GW를 배터리로 채워야 한다. “배터리는 1~8시간 단위의 단기 유연성에 적합한 자원”이라고 분석했다.
- 발전기 고장에 대비한 예비 전력도 필요하지만 주파수 조정과 전력 품질을 유지하는 데도 배터리 저장장치는 필수다.

피크 전력이 문제다.
- 전력 수요가 정점을 찍는 건 여름과 겨울 각각 몇 시간 정도지만 블랙아웃을 막으려면 1년 내내 피크 전력 이상을 확보해야 한다.
- 당연히 나머지 시간에는 설비가 남아돈다.
- 1년에 며칠 안 되는 피크 타임을 커버하려고 멀쩡한 발전소를 1년 내내 대기 상태로 남겨둬야 할까. 여기에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시장이 있다.

- 미국 듀크대 니컬러스연구소는 반도체 팹이나 AI 데이터센터처럼 전력 수요가 많은 대형 시설이 새로 들어설 때 피크 타임에 전기를 덜 쓰기로 약속하면 발전소를 크게 늘리지 않고도 전력 수요를 충당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미국의 경우 새로 들어서는 대형 시설이 피크 타임에 연간 전력 소비량의 0.5%를 줄이면 98GW의 추가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 1%를 줄이면 126GW다. 피크 타임의 뾰족 튀어나온 부분만 다듬어도 나라 전체의 전력 공급에 여유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피크 타임 전력 소비를 줄일 수도 있지만 백업 전원으로 버틸 수도 있고 가상 발전소(VPP) 등에서 전력을 공급 받을 수도 있다.
- 발전소부터 새로 짓기 전에 이미 있는 자원으로 피크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 먼저 계산해야 한다.

가상 발전소(VPP)부터 만들자.
-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배터리와 조정 가능한 수요를 모으면 웬만한 발전소 몇 개 규모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다. 실제로 발전소를 하나 짓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가상 발전소(Virtual Power Plant)라고 부른다. 재생 에너지 설비가 늘어나면서 배터리 저장 장치가 늘었고 가상 발전소 시장이 가능하게 됐다.
- 미국 텍사스주는 지난해부터 75MW 이상 전력을 쓰는 시설에 백업 발전과 부하 감축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 미국 에너지부(DOE)는 2030년까지 가상 발전소를 80~160GW 규모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피크 타임 수요의 10~20%에 해당하는 규모다.
- 구글은 지난 6월 가상 발전소 사업자 볼투스(Voltus)와 3년 동안 연간 최대 100MW 규모의 분산 자원을 확보하는 계약을 맺었다.
- 발전소와 변전소를 짓고 송전망을 깔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흩어져 있는 배터리와 분산 자원을 끌어모으는 건 서너 달이면 가능하다.

4년 안에 본전 뽑는 배터리 사업.
-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데이터센터는 정전에 대비해 설치한 UPS(비상 전원) 배터리를 전력망에 빌려주고 돈을 받는다. UPS의 비상용 전력 기능을 유지하면서 남는 배터리를 상시적인 유연성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이야기다.
- 아일랜드의 전력망 사업자 에어그리드(EirGrid)는 긴급 전력 수요에 150ms 안에 응답하면 세 배의 프리미엄을 제공한다.
- 테슬라가 호주에 지은 세계 최초의 대형 배터리 서비스 혼스데일은 상업 운전 첫 해에 2400만 호주달러를 벌어들였다. 투자비 회수에 4년이 채 걸리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 투자도 늘고 있다. 호주에서는 67.3GW 규모의 대형 배터리가 계통 접속 절차를 밟고 있다.
- 배터리 팩 가격은 1kWh 기준으로 2010년 1400달러에서 2023년 14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기술은 있지만 시장이 없었다.
- ESS가 유연성을 만드는 자원이고 VPP가 그것을 묶어 계통에 내보내는 운영체계라면, 이 둘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건 시장이다.
- 한국은 주파수 조정과 예비 전력을 사고파는 경쟁 시장이 없다. 남는 배터리를 전력망에 빌려줘봐야 고정 단가로 보상하기 때문에 금액이 크지 않다.
- 한국의 ESS 신규 설치 사업장은 2018년 975개에서 2019년 479개로 오히려 줄었다.
- 재생 에너지 발전을 강제로 끄는 출력 제어는 2025년 상반기에만 164.4GWh로 2024년 연간의 12.5배로 뛰었다. 남는 전기를 저장해도 판매할 통로가 없으니 버리고 마는 상황이다.

제주가 증명한 것 : 가격 신호의 힘.
- 제주는 전기가 남아도는 곳이다. 2023년만 해도 181차례나 태양광·풍력을 강제로 멈춰 세웠다.
- 2024년 실시간 전력시장이 열렸다. 15분 단위로 하루 96번 가격이 매겨진다. 전기가 남으면 값이 내려가고, 마이너스가 되기도 한다.
- 가격 신호가 생기자, 13개 VPP 사업자가 흩어진 소규모 태양광을 묶어 4개월 만에 203.4MW를 시장에 실어 날랐다.
- 자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원을 부를 신호가 없었을 뿐이다. 신호가 생기자 흩어져 있던 자원이 스스로 움직였다.
강원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 강릉과 삼척, 동해에 석탄화력 발전소 8기가 몰려 있는데 가동률이 절반이 채 안 된다. 전체 발전 설비 용량이 17.9GW인데 송전망 용량은 11GW 정도다.
- AI 데이터센터를 강원도에 가져가 붙이면 해결될까. 당장 남는 발전소를 굴릴 수 있지만 탈석탄이라는 흐름을 거꾸로 돌리는 퇴행적인 선택이다. 발전소부터 짓고 보는 실패한 에너지 정책의 참담한 결말이다.
25년 전 게임의 법칙을 그대로.
- 정부도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4년 5월 [전력시장 제도개선 방향]에서 “한국 전력시장은 화력 발전에 기반한 과도기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 한국은 2001년 전력 시장 개설 이후 연료비가 싼 순서대로 발전기를 돌리는 규칙이 그대로 남아있다. 원자력 발전소를 거의 디폴트로 돌리고 석탄 발전소를 돌리고 그래도 부족하면 LNG 발전소를 돌리는데 가장 마지막에 돌린 발전기의 연료비가 단일 가격(SMP)이 된다.
- 재생 에너지는? 연료비가 0원이지만 가장 먼저 구입하는 게 아니라 전기가 남아돌면 가장 먼저 출력 제어를 당한다. 설비 비중은 0.2%에서 20%로 늘었는데 계통 접속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다.
- 문제는 변동성 대응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변동성 대응에 대한 인센티브 부족으로 발전설비 유연성 향상이 지연됐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발전기 출력을 최대 출력의 31~58%까지 낮추는데 해외는 3~40%까지 낮춘다. 다시 가동하는 데도 한국은 2시간이 걸리는데 해외는 30분이면 된다.
인센티브를 제대로 설계해야 한다.
- 한국의 전력시장은 여전히 하루 전 예측에 맞춰 돌아간다. 정부는 2025년까지 실시간 전력 거래 시장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운영 시스템 고도화 등의 이유로 계속 미루고 있다.
- 감사원은 실시간 정산 기준 없이 예비 전력을 과도하게 확보하거나 발전기를 비효율적으로 호출해 낭비되는 발전 비용이 연간 1조8250억 원에 이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독일은 15분 단위로 거래하는 인트라데이 시장을 운영하면서 2011~2017년 태양광과 풍력 발전량이 두 배로 늘어나는 동안 예비 전력 사용량이 55% 줄었다. 가격 변동에 따라 분산 자원이 수급을 맞추기 때문이다.
- 호주는 2021년 IRP(통합자원공급자)라는 법적 지위를 만들어 배터리 사업자와 VPP 사업자, 화석연료 발전소 등이 같은 자격으로 보조 서비스 시장에 입찰하게 했다. 2021년까지 예비 전력 공급에서 석탄과 가스가 대부분이었는데 2022년 1분기 배터리 점유율이 31%까지 올랐고 지난해 3분기에는 56%까지 늘었다.
- 한국은 예비 전력 가격을 시장가격(SMP)과 발전기 연료비의 차액으로 계산하는데 연료비가 없는 배터리와 VPP는 보상 기준조차 없다.
정부가 답변해야 할 네 가지 질문.
- 메가 프로젝트의 전력 계획은 단순히 발전설비 확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후솔루션은 정부가 다음 네 가지 질문에 순서대로 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 첫째, 사업별·시간대별 실제 전력수요는 얼마인가.
- 둘째, 기존 발전기와 수요자원이 지금 제공할 수 있는 유연성은 얼마인가.
- 셋째, 그러고도 부족한 ESS의 출력·저장시간·설치 위치는 어디인가.
- 넷째, 확보한 자원을 누가 운영하고 어떤 시장에서 보상할 것인가.
-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유연성을 새 설비로 확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존 발전기의 출력 조정 능력과 이미 설치된 ESS와 비상전원, 전기차 충전설비와 조정 가능한 수요가 저마다 역할을 한다. 이 능력을 먼저 평가하고 모자란 부분만 신규 ESS와 발전설비, 송전망으로 채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제안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ESS와 VPP의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 해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 실시간+예비전력 시장을 개설하고 가격 입찰제로 전환해야 한다. ESS에 인센티브를 주고 VPP 같은 중개형 사업자를 주력 발전원으로 키워야 한다.
- ESS는 빠른 충전과 방전이 필요한 영역의 핵심 자원이 되고, VPP는 흩어져 있던 ESS와 분산전원, 조정 가능한 수요를 묶어 실제 계통 운영에 투입한다. 각각에 적당한 보상이 제공돼야 투자가 늘어나고 시장이 작동한다.
- 김선규(기후솔루션 연구원)은 “발전소를 몇 기 늘리는 것만으로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담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미 깔려 있는 ESS와 분산자원을 VPP로 묶고, 유연성에 값을 치르는 시장을 여는 것, 메가프로젝트에 지금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유연성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