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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오전 8시]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박사와 나누는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


세상을 바라보는 자의 좌표가 있다. 그는 노동자이기도 하고, 교수이기도 하며, 이성애자이기도 하고,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는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며,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하다. 어떻게 세상을 볼 것인가. 그렇게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당신이 자리한 정치사회경제적 좌표는 어디인가. 그렇게 묻는 게 먼저다.

존재는 의식을 지배한다. 건물주는 건물주로 생각하고, 임차인은 임차인으로 생각한다. 지배하는 자는 지배하는 자로서 사유하고, 억압받는 자는 억압받는 자로서 사유한다. 그것이 엇갈리면, 그때 사유는 싸구려 감상이나 불가능한 판타지가 되기 쉽다. 현실에 닿아있는 연결고리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더 높은 곳, 더 멀리서 보면,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고, 진실한 문학과 예술은 그 현실에 얽매인 인간의 찌질한 껍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지만.)

엘리트로서 공부하고, 능력주의의 수혜를 받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국제기구에서 꽤 높은 직위로 노동 정책을 연구하고, 여러 나라에 제안한다. 그렇게 25년을 일해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을 겨우 얻었다. 하지만 마당 있는 집에 안주하기엔 노동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외침이 너무 절박하다. 안주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만, 노동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절규한다. 그 외침이 건조한 숫자와 통계를 통해 표현되더라도 그 고통의 목소리는 마당의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안주할 수 없는 불안과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고용정책국장에게 그 존재와 의식의 괴리와 갈등에 관해 물었다. 그리고 ‘나/이상헌’이라는 실체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 관해 물었다.

인터뷰는 제네바 현지 시각 2023년 7월 21일 오전 8시에서 오전 9시 10분까지 화상으로 진행했다.

제네바 오전 8시

3. 찌질함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

민노씨가 묻고 이상헌이 답하다


외부의 시선이 ‘나’라는 실체에 비해 비대해지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현실의 나와 그 시선 사이에 간격이 커진달까? 그럼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죠. 그 시선에 날 맞추거나 아니면 그 이미지를 깨거나.

개인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가족이죠. 가족을 위해 꽤 노력도 많이 했어요. 와이프는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요.

공적인 영역에서 아직 답이 없는 것 같기는 해요. 기본적으로 저는 제네바에서 국제공무원 역할을 합니다. 꽤 높은 자리에 있죠.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최고위직이니 그런 이야기도 하고요.

제 발언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도 경제적 조건이 하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고, 전 세계적으로 봐도 하위 30~40%에 속한 사람들의 노동 현실에 관한 거예요. 대부분이 그렇죠.

가끔 제가 목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할 때가 있어요. 제 직업적인 관성보다는 더 감정을 실어서 이야기하는 거죠. 그걸 인간적이라고 좋게 봐주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위선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한 발짝 차이죠. 저렇게 편하게 잘 먹고, 잘 살면서 그저 정의감 넘치는 이야기 한두 번 하고… 삶을 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 몇 마디 보탠다고 노동자의 삶이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제 말을 좋게 봐주는 사람도, 위선이라고 보는 사람도 사실 양쪽 다 100% 틀린 이야기는 또 아닌 것 같아요.

예전보다는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좀 많아졌으니까요. 책도 쓰고. 그래서 그게 늘 좀 고민이에요.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답은 없죠. 제가 지금 가진 직업을 그만두고 나서 그다음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오히려 저에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죠.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2023년 7월 21일 금요일 제네바 오전 8시쯤. 줌에서 캡처.

민노: 벌써 그런 생각을 하시나요.

이상헌: 하죠. 여기 오래 있으려면 있을 수 있지만, 언젠간 그만둘 테니까. 그 궤적이라는 게 뻔해요. 내 이미지를 좀 맞춰가야죠… 존재론적 부조화랄까, 그런 게 있어요. 그걸 해소할 방법을 좀 고민해야 봐야겠다고 생각해요.

찌질함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


민노: 존재론적 부조화라…

이상헌: 신문 칼럼을 쓸 때 되게 불편해요. 안 쓰려고 계속 기를 쓰고 버티다가도 마음이 약해서 계속 써야 한다고 그러니까 또 쓰고 있긴 한데요. 어떤 주장을 세게 하는 게 부담스럽죠. 물론 세상을 향해서 세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내부적인 부조화를 확장시키는 방식으로는 쓰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요새는 그게 좀 어려워요.

민노: 이게 사회적인 껍질이랄까요. 그게 좀 많이 두껍고, 거대해진 느낌이 들 것도 같습니다.

이상헌: 그래서 칼럼을 쓸 때 가장 쉬운 건, 저 자신에 관해 쓰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엉뚱한 짓을 했다든지, 그런 나 자신에 관해 쓰고, 저 자신이 칼럼 일부로 들어가는 건 좀 오히려 쉽죠. 그래서 사회적인 큰 주장을 할 때는 가능하면 저 자신을 끌어들여 있으려고 해요. 큰 사회적인 주장을 하지만, 나도 잘 못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구절을 넣고 싶어하죠. 그런 부조화적인 게 항상 글에 좀 남아 있어서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그래요.

민노: 김수영 작가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그런 거 아닌가요?

이상헌: 맞아요. 김수영 시인은 평생 그걸 고민하셔서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서도 문학적으로 굉장히 날카롭게 발언하는 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찌질함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라고 해야 할까요? 용기라고 해야 할지 만행이라고 해야 할지. (웃음) 온몸으로 글을 썼죠. 그런 스타일의 작가를 좋아해요. 그래서 조지 오웰도 좋아하죠. 조지 오웰도 정말 지지리 궁상이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분들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저는 (국제) 공무원이라서 그 고민의 결이 좀 더 다층적인 것 같아요.

김수영 시인. 1921~1968.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 중에서

간극, 거리감…


민노: 감춰진 자기 모습을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도 하나요? 삶이든 글이든.

이상헌: 제 개인적인 사연이 뭐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중요하고 궁금하겠어요. 제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웃음) 이게 그냥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제가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해서 어떤 발언을 하면 그 주장이나 관찰은 그냥 과학적인 현상이 아니잖아요. 나를 쏙 빼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고, 나와 항상 관련된 상황이고, 또 제가 하는 일과도 관련된 상황이라서, 그런 주장을 할 때 저를 끌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게 훈계조가 되든지 아니면 정말 뜬금없는 소리가 되든지 하니까… 거리를 너무 멀리 둬서도 안 되지만 너무 거리를 가깝게 두면…. 글쎄요.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민노: 지금 교류하고, 함께 연구하는 분들이 대부분 엘리트일 텐데요. 연구하는 대상이 ‘밑바닥 노동자’인데요. ‘밑바닥’이라는 표현이 저 자신도 많이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리고 저 자신도 그중 하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그네들의 고민을 피부에 와닿게 ‘내가’ 체험할 수는 없잖아요. 그 거리감, 혹은 그 거리감에 관한 미안함 내지는 안타까움, 이런 것들을 평소에도 체감하시나요?

이상헌: 그걸 줄이려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관찰하고 지켜보는 차원 정도이고, 거기에서 생기는 간극이 분명히 있는데, 오히려 그런 간극보다 더 큰 간극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뭘 하자고 주장할 때예요. 그렇게 어떤 산업이나 노동 현실에 관해서 발언하지만, 그 속에서 직접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아니 불가능한 것 같고, 그냥 수치상으로나마나 사회적인 관심도나 공감도를 높이는 게 제 일이잖아요.

사람들에게 관심을 환기하게 하거나 생각을 좀 해달라는 이야기지 그 이상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제 글이 정책적 대안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는 그런 취지로 쓰는 거라서요. 정책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이야기고, 어떻게 보면 사회적인 관심과 압력, 공감을 만들어 내자는 건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 상황에서 있는 사람들에 관해 온전히 이해하느냐고 한다면 물론 아니죠.

민노: …

‘그래서 너는 무엇을 했는가’ 자신에 묻지 않을 수 없어요


이상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에게 묻는 거예요. ‘넌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거죠. 그래서 이번에 나온 책에서도 보면 ‘나에게 묻는다’는 글이 마지막이고요. 그게 항상 남는 거에요. 네 말이 맞는데, 그래서 도대체 넌 뭘 했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그 사회에 저도 들어 있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낸 책의 마지막 장도 ‘이제 너에게 묻는다’인 거죠.

또 생각해 보면, 가야 할 곳이 분명하고, 그 방향으로 온몸을 온전히 돌려세운 사람은 끊임없이 떨리는 자다. 그래서 신영복이 말하기를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나침반)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바늘 끝이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라 했다.

방향과 떨림이 섞여서야 비로소 세상의 나침반이 된다. 내가 그 방향을 향해 제대로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이 나침반이라면, 방향과 떨림 어느 하나만 봐서 될 일은 아니다. 나침반 끝이 흔들린다고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 반동이고, 방향의 존재를 이유로 제가 선 곳이 옳다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이 퇴보다. 둘 다 앞길을 막기는 매한가지다.

이상헌, [같이 가면 길이 된다], 제6부 이제 너에게 묻는다: ‘떨리는 것들을 보며 묻는다’, 생각의힘: 2023.

민노: 재능만으로 자기 삶과 유리된 글을 쓰는 분들이 있겠지만, 저는 그건 글쓰는 기술자라고 해야지 작가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이상헌: 저도 그건 경계해요. 유체이탈은 하지 말자. 그건 정말 안 된다는 생각을 해요. (웃음) 근데 좀 애매한 건 있어요. 사실은 그런 자기를 개입시키는 글, 자기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글이 파급력은 별로 없어요. (웃음) 주장을 세게 해야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으쌰으쌰 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는 건데, 저는 그러지도 못하고, 그리고 제가 다루는 주제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도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좀 마이너리티 이슈인 측면도 있고요.

민노: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건 맞잖아요.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이상헌: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게 ‘유체이탈’과 관련된 건데, 제 상황에서 그런 류의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내가 하는 이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꼭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글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신문사와 항상 싸워요. (웃음) 독자 반응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사실 독자 반응은 잘 모르죠. (웃음) 그래서 제가 칼럼 기고를 그만두겠다고 하는데, 좋아하는 기자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몇 달만 더 쓰자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민노: 평생, 어쨌든 글을 써오셨잖아요. 신문에 칼럼 기고를 끊을 수는 있겠지만, 글을 안 쓰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이상헌: 혼자서 일기를 쓸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글을 쓸 수 있지만, 신문에 쓰는 건 좀 다른 종류의 글쓰기 같아요.

민노: 맞아요. (웃음)

이상헌: 잘 모르겠네요. (웃음)

돌아오지 못한 친구, 항상 날 다시 돌아오게 하는 원형적 기억


민노: 말씀하신 것들을 들으면서요. 본래의 자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그래서 (글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 껍질, 직급이나 명예 따위의 사회적 표상이 커지면서 본래의 나와 그런 표상 사이에 어떤 거리가 생긴 것 같다. 그래서 9년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그 친구분’ 이야기가 떠올랐는데요.

친구가 배를 탔고, 돌아오지 못했다. 마치 세월호 사건과 비슷하다. 선원들이 전원 구조됐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오보였다. 검찰에서도 조사를 진행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너무 화가 나서 해운항만청에 고등학교 친구들 대여섯 명이 함께 쳐들어갔다. 그 일로 나는 수배 상태가 됐다.

슬로우뉴스, 편지 쓰는 경제학자가 바라본 세상 – 이상헌 인터뷰, 2014. 8. 13. 중에서

민노: 그때 인터뷰를 한번 찬찬히 다시 읽으면서, 누구에게나 어떤 원형적인 기억이 있잖아요. 잊을 수 없는 기억. 평생 계속 곱씹으면서 회상할 수밖에 없는 그 기억. 그런 기억 중 하나 원양어선을 타고 먼저 세상을 떠난 그 친구에 관한 기억인 것 같아요. 그 기억은 어떤가요? 지금도 가끔은 생각이 나시나요. 아니면 그저 삶에 체화된 상태인가요.

이상헌: 요즘도 생각나죠. 한국에서 오늘도 보니까 산재사고로 두 분이 돌아가셨던데요. 산재사고만 나면 친구 생각이 나요. 신문에서 뉴스만 봐도 생각이 나죠. 어떻게 보면 그런 사고가 날 때마다 생각나고, 기억의 합성작용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항상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기억의 밀도랄지 기억의 방식이 조금씩 바뀌기는 하죠.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항상 그런 일들이 자주 있으니까, 한 30년 정도 별로 크게 바뀐 건 없는 것 같아요.

내 친구는,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 처럼, 배를 탔다. 하지만 첫 월급을 받지도 못한 채 돌아오지 못했다.

민노: 그렇게 30년째 이어오는 기억은 지금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상헌: 그런데 이제 그 기억이 점점 어려워지기는 해요. 그래도 30대, 40대에는 그런 거 있잖아요. ‘우리 세대가 좀 잘하면 나아지겠지’ 그런 게 있었는데… (= 9년 전 인터뷰에서도 그런 말씀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네, 그래서 그 기억이 어떻게 보면 고통이기도 하지만 힘이기도 하거든요. 한번 해보자! 이런 느낌.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30년이 지났는데, 저도 이제 중견의 나이가 된 거고, 나름으로 노동과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면 책임을 좀 져야 할 때가 된 거거든요.

민노: 책임을 져야 할 나이… 무거운 나이가 됐죠.

이상헌: 나이로 보면, 적어도 저희에게 한 10년, 길게는 20년의 기회가 주어졌었는데, 저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가 그걸 제대로 크게 고치지는 못했으니까. 좀 전에 친구의 기억이 고통이기도 하고 힘이기도 했다고 말했지만, 점점 더 고통스러운 면이 있죠. 책임감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에 관해선 책임감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급한 느낌도 좀 있어요. 예전엔 그런 게 없었는데, 요즘은 이런 문제에 관해 조금 더 조급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민노: 이제 조급함을 느끼시나요?

뜬금 없는 위안…


이상헌: 그래도 다행이 도움이랄까, 위안을 받는 분이 있어요. 정말 뜬금 없는 방식으로 위안을 받는데, 김훈 선생님이 지금 70대 중반(1948년 생)이신데요. 김훈 선생께서 아직 산업안전이나 시민안전에 관해 큰일을 하시거든요. (= 맞아요.) 그리고 그 일을 젊었을 때부터 하신 게 아니라 조금 어떻게 보면 노년에 들어서야 시작하신 거고요. 그래서 김훈 선생을 보면서 역시 늦은 건 아니구나. (웃음) 그래서 아직 기억에 대한 책임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괴로워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구나 그런 생각도 하죠. (웃음) 그래서 이번에 책을 쓸 때도 김훈 선생께서 추천사를 써주시고, 영상으로 짧은 리뷰를 남겨주신 게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였어요.

김훈, [같이 가면 길이 된다]에 관한 리뷰 겸 축하 메시지.

이 책에서 이상헌 박사는 경제학을 이끌고 인간 삶의 구체적인 현실 속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해서 경제학으로 건너가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흐름이 교차되면서 우리의 경제적 현실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 얼마나 정의로부터 멀어져 있는가. 이런 것들을 현실 속에서 보여주는 것이죠.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은 아주 울퉁불퉁하고, 뒤죽박죽이고, 어수선한 것이죠. 이것을 하나의 이론으로서 정리하거나 예언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학문이나 원리라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 현실에 적용이 되어 그 현실을 얼마나 개선할 수 있는가 하는 쪽에서 그 가치와 진실성이 규명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헌 선생님의 글에는 많은 문학 작품을 인용하거나 문학의 사례를 그 비유로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뭐냐면, 이상헌 선생님의 글과 시각이 인간의 구체적 현실, 현실의 개별성, 현실의 특수성 쪽으로 전환되어 가는 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작품이 나오는 대목에서 독자 여러분은 특별히 긴장하고 주의를 해서 이 책을 읽으신다면 더 재밌게 읽을 수가 있겠습니다.

문학 작품이라는 것은 그 삶의 현실, 삶의 구체성, 삶의 직접성, 이런 것들을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훈, [같이 가면 길이 된다] 리뷰 영상 중에서

이상헌: 그러니까 그 분께서 살아오신 궤적이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잖아요. 심지어는 보수적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지금 그 연세에 한국 현실에서 진보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자리에 남아 계신 분은 역설적으로 김훈 선생이거든요. 여전히 현장에 계신 작가이자 활동가인 거죠.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죠. 굉장히 큰 영감을 받았어요.

민노: 그나저나 책 인세는 전액 생명안전시민넷이라는 시민단체에 기부한다고요? 생명안전시민넷, 이름이 약간 생소한데요.

이상헌: 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웃음) 생명안전기본법을 제정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어요. 2023년 9월 28일 밤 12시까지 청원인 5만 명을 달성해야 국회에 청원할 수 있답니다. ( → 청원 참여하기)

옥혜숙&이상헌 부부는 [같이 가면 길이 된다]의 인세 전액을 ‘생명안전시민넷’에 기부했다. 시민넷에 따르면, 인세가 나오기 전에 “거금을 미리” 시민넷에 보냈고, “덕분에 지난 상반기 활동을 꾸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오른쪽은 그 고마운 마음을 담은 감사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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