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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베테랑 기자 김훤주가 따뜻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세상 소식을 전합니다.

제주 표선 해안 방파제에서

지난해 제주도에 놀러 갔다가 표선 어느 방파제에서 쓰레기를 주운 적이 있다. 친구는 낚시질을 했고 나는 그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바라보는 방파제는 나름대로 청소가 되어 있어서 깔끔했다.

쓰레기를 치울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눈에 거슬리는 물건이 방파제에 널브러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우연히 들여다본 방파제 아래쪽 바위 틈새에 여기저기 곳곳에 쓰레기가 박혀 있었다.

페트병, 유리병, 알루미늄캔, 밧줄, 낚싯바늘과 낚싯줄, 스티로폼 부이, 플라스틱 부이, 철재 닻 등이 손에 잡혔다. 슬리퍼와 운동화 같은 신발도 있고 팬티, 티셔츠, 반바지 같은 옷가지도 있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 일이 커져 있었다.

희고 검은 비닐봉지도 틈새에서 나왔다. 봉지에 담긴 쓰레기는 누군가 작정하고 버린 것이지 싶었다. 어떤 틈새에는 커다란 마대자루까지 꽂혀 있었다. 덕분에 나는 거기서 건져 올린 쓰레기를 어디에 담아야 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때 바다도 보이는 대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다는 해류와 바람, 물고기와 해조류, 햇살과 달빛 같은 것만 숨겨 놓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쓰레기를 처분하고 돌아오니 친구는 바다가 숨겼던 물고기를 몇 마리 찾아내어 손질하고 있었다.

창원 바닷가 덩치 큰 쓰레기

나는 올해 들어 한 번씩 쓰레기를 주우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지난해 12월 31일 다니던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덕분에 누리는 보람 가운데 하나다. 매주 하루는 줍고 싶은데 아직은 한 달에 하루 정도밖에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다.

어떤 때는 산이나 강으로도 가지만 바다로 갈 때가 제일 많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오가는 이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한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눈길에 신경 뺏기지 않고 마음껏 쓰레기를 주울 수 있는 데가 바닷가라는 얘기다.

해변에 가면 덩치 큰 쓰레기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스티로폼 부이, 통발, 폐그물 뭉치, 선박용 밧줄, 목재 바지선 조각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해상 표시용 깃발이나 나무 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파레트(pallet)도 종종 눈에 띈다.

처음에는 이런 큰 쓰레기를 주로 주웠다. 치우고 나면 주변이 한꺼번에 깨끗해지는 것 같아 기분도 좋고 보기도 좋았다. 게다가 덩치 큰 쓰레기는 한 시간만 주어도 산더미를 이룬다.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눈에 보이는 성과와 보람은 컸다.

두 시간 정도 하면 누구나 이 정도 바다 쓰레기를 주울 수 있다.

스티로폼 삼키고 가라앉지 못하는 물고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자잘한 쓰레기도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여기에 더해 덩치 큰 쓰레기 또한 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잘한 쓰레기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물, 밧줄, 깃발, 통발도 그렇지만 스티로폼 부이가 더욱 그랬다. 스티로폼은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다니다 바위를 만나면 부딪혀 쪼개진다. 그 조각들은 다시 파도에 쓸리고 햇살에 바래면서 조약돌처럼 닳고 모래알처럼 부서진다.

문득 얼마 전에 보았던 기사가 떠올랐다. 바다 위로 떠올라 죽은 물고기의 배를 갈라보았더니 미세한 스티로폼이 내장을 가득 채우고 있더라는 내용이었다. 물고기가 먹은 것은 덩치 큰 스티로폼 부이가 아니었다. 자잘한 스티로폼 때문에 가라앉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닷가 곳곳이 자잘한 쓰레기였다. 갯바위는 물론 모래사장이나 자갈밭, 갯가 우묵한 수풀 속도 마찬가지였다. 좁쌀처럼 작아진 스티로폼은 쪼그리고 앉아 한참 품을 들여도 겨우 한 줌을 건질 수 있을까 말까 했다.

스티로폼은 닳으면 조가비·돌멩이와 구분하기 쉽지 않다

물새들 옥죄는 투명 낚싯줄

이처럼 자세히 살펴보게 되니까 다른 것도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낚싯줄과 그 끝에 달린 낚싯바늘이었다. 나는 언젠가 바다가 가까운 어떤 병원의 중환자 면회 대기실의 창문에서 한쪽 발목이 잘린 갈매기와 목에 낚싯줄이 감긴 비둘기를 본 적이 있다.

그때부터 나는 눈에 잘 띄는 큰 쓰레기도 보이는 대로 치웠지만 자잘한 쓰레기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비닐이나 페트병 같은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잘 보였다. 스티로폼 미세 조각이나 낚싯줄은 고개를 숙이고 자세히 보아야 보였다.

치우기는 덩치 큰 쓰레기보다 훨씬 힘들었다. 모래나 바위 틈새로 들어가 휘감겨 있는 낚싯줄은 장갑 낀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도 빠질까 말까 했다. 또 끝머리에는 미늘이 꽂혀 있어서 손가락을 찔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뽑아내면 기분은 흐뭇했다.

기대하면 실망도 하게 마련

처음 바다에 나가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게 얼마 되지 않아도 내가 줍는 만큼은 쓰레기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주워보니까 쓰레기는 끝이 없었다. 겉은 깨끗해도 한 꺼풀 들추면 쓰레기투성이인 데가 바닷가였다.

게다가 오늘 나름 치웠다 해도 내일이면 쓰레기가 다시 수북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조류를 타고 또 다른 쓰레기가 밀려드는 것이었다. 전체의 0.000001%도 못 치우는구나, 내가 치우는 이상으로 새로운 쓰레기가 발생하는구나…….

나는 낙담했고 무력감에 빠졌다. 아무 보람 없는 짓을 무엇 하러 한단 말인가. 오히려 오가는 자동차 기름값이 아깝고 그로 말미암은 대기 오염이 더 크지 않느냐. 이런 식이면 쓰레기 치우기를 때려치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스피노자가 했다는 그 명언이 떠올랐다. 유명한 철학자의 그럴듯한 소리로만 여기고 평소 아무 뜻 없이 때로는 장난삼아 읊조리던 것이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

그런데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그 본뜻이 단박에 훅 다가왔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면 지금 사과나무를 심은들 그 열매를 따 먹을 사람이 없다. 그렇다 해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면 상관없이 할 일은 하겠노라. 삶을 대하는 담담한 자세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구나, 맞네. 보람이나 기대 따위는 개한테나 줘 버리자. 내가 그만둬야 하는 것은 쓰레기 줍기가 아니었구나. 어떤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세상이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접으면 되는 것이었구나.

덕분에 좀 더 자유로워졌다. 세상은 깨끗해지지 않아도 좋다. 쓰레기가 더욱 넘쳐나도 괜찮다. 어디든 가서 쓰레기가 보이거든 그것을 주우면 그만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줌의 쓰레기를 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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