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터뷰 44.] 쿠팡 소비자와 택배기사, 이 둘은 어느새 ‘편익’이라는 경제적 유인과 ‘권리’와 ‘바람’으로 표현되는 각자의 주관적 인식 속에서 서로 적대적인 제로섬 게임 플레이어가 되어버렸다. 그건 마치 ‘오징어 게임’ 같다.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말하는 인간과 노동. (⏰12분)
쿠팡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소비자다.
이상헌
하지만 쿠팡과 소비자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서로 ‘공생’ 관계다.
에필로그: 택배기사와 소비자의 오징어 게임
그는 제한된 시간에 엄청난 물량을 소화해내는 사람이었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그는 “고객님들이 상품을 좀 나눠서 주문해 줬으면 좋겠다”라는 소박한 바람을 남겼다.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들 (전혜원, 2021) 중에서. 강조는 편집자.
‘상품을 좀 나눠서 주문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 어느 택배기사의 그 바람 덕분에 하나의 서평과 두 개의 인터뷰가 나왔다. 두 개의 인터뷰 중 하나는 한선범(택배노조 정책국장)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이 글이다.
짧은 서평에선 오랜만에 비판적인 댓글도 받았다. ‘택배비 대신 내줄 거냐’는 지적은 그래도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낱개로 주문하면 배송비가 따로 붙는 상품도 있으니까. 혹은 쿠팡와우 회원이 아니라면 별도의 배송비가 붙은 상품들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댓글보다 내 마음을 더 깊게 건드리는 댓글은 생수를 주문하든 고양이 사료를 주문하든 그건 내 권리인데, 내 맘이고 내가 소비자로서 누리는 당연한 건데 네까짓 게 뭐라고 훈수하느냐는 서슬 퍼런 분노였다. 왜 우리는 사소한 것에 분노하는가. 그건 우리가 사소한 존재니까. 사소한 것만을 누릴 수 있고,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거라도 누리면 뭐라도 되는 것 같아서…그러니까 그런 거지…물론 그렇게 분노한다고 해서 삶이 왕관처럼 반짝거리는 건 아니다. 인생이라는 건 그렇게 쓸쓸할 만큼 비루하다.

그런 분노, 그런 사소하고 평범한 소비자의 ‘내 마음이지, 네까짓 게 뭔데’라는 목소리가 어둡고 무겁게 내 마음에 가라앉았다. 감히 소비자에게 훈계하지 말라는 그 댓글 쓴 이가 특별히 야박한 소비자일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같은 평범한 서민일 테지.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저 자신의 평소 희망사항을 말했을 뿐인 택배기사, 그 바람을 무슨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는 대단한 요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건 전혜원의 표현처럼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들어주면 좋지만, 안 들어주면 어쩔 수 없지…그런데 그런 말도 못 하나. 그런 말도 전하지 못 하나…
쿠팡 소비자와 택배기사, 이 둘은 어느새 ‘편리’와 ‘이익’이라는 경제적 유인과 ‘권리’와 ‘바람’으로 표현되는 각자의 주관적 인식 속에서 서로 적대적이고 경쟁적인 제로섬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버렸다. 그건 마치 택배기사와 소비자의 ‘오징어 게임’ 같다. 물론 VIP(쿠팡)가 이 모든 게임을 조정하고, 즐긴다.
‘왜 내가 소비자로서 맘껏 주문하는 게 당연하지, 네가 뭐라고 나서서 훈계질이냐’라고 분노하는 마음속에선, 그러니 나와 같은 평범한 소비자, 평범한 서민 누구나의 마음 한편에서는 그렇게 자기 소비자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 있는 택배기사의 노동 환경은 ‘그런 건 쿠팡에 따지지 왜 나 같은 소비자에게 따지냐’는 메마른 사막 같은 게 이미 자리하고 있다. 그 마음속 사막이 내 마음속 풍경에도 전염된 것처럼 나는 며칠 동안 그 날선 말들을 문득문득 떠올리며 우울해했다.
그건 “마치 세상을 증오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조시 파이에 대해 “이제는 더는 조시 파이를 좋아하기로 하는 건 포기하기로 했어요”라고 마릴라 아줌마에게 결심하듯이 말하는 빨강머리 앤을 떠올리며 위로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쓸쓸함이다.
택배기사와 소비자의 오징어 게임, 누구의 잘못도 아닌, 각자 나름으로는 정당한 분노와 소박한 바람으로 엉켜진 이 무시무시한 ‘쿠팡 방정식’... 그 방정식의 해법을 이상헌 박사(ILO 고용정책국장)에게 물었다.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44]
쿠팡 방정식:
소비자와 택배기사의 오징어 게임
질문 정리: 민노, 답변: 이상헌
💡 알림 안내
이 글은 2025년 7월 11일(금)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어의 질문은 소제목 등으로 함축했고, 본문은 문답이 아닌 인터뷰이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1인칭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이상헌 박사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 프롤로그(서) 에필로그(결): 민노(인터뷰어)
🔖 본문: 이상헌(인터뷰이)
쿠팡의 공간: 무한 확장한 포디즘
📢 쿠팡 ‘클렌징’
“가령 새벽배송은 7시까지 배송을 완료해야 하는데, 7시 1분에 배송하면 수행률 미달이다. 수행률은 정확히 말하면 ‘제시간 배송률’로, 기준은 95%다. 4주 연속 배송률이 95%에 미달하면 그 배송 지역을 빼앗긴다. 이것도 기준이 완화한 거다(기존엔 한 달에 2주 미달). 사실상 택배기사를 자르는 효과가 있다.
그걸 “클렌징”이라고 부른다. 쿠팡이 직접 썼던 말이고, 지금은 현장 택배노동자 모두가 쓰는 용어가 됐다. 하지만 우리를 포함해서 용어 자체가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하자, ‘위탁구역조정협의’라고 바꿔 부른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정말 냉혹하고 잔인하게 사람을 관리하고, 그 기준에서 미달하면 ‘청소해 버리는’ 제도다.”
– 한선범 택배노조 정책국장, 쿠팡 ‘클렌징’을 아십니까 중에서.
지금까지 쿠팡에서 해왔던 건 ‘클렌징’이 맞다. 생산성과 수월화에 방해가 되는 요소와 여지를 깔끔하게 싹 없애버리는 과정이다.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일괄 공정의 포디즘과 유사한 작업 과정의 합리화인데, 포디즘이 생산 과정의 틈을 없애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면, 쿠팡은 배송 과정에서 ‘틈’을 알고리즘화한 디지털 통제 기술로 없애버리는 셈이다.

쿠팡이라는 배송 시스템을 포디즘의 공장에 비유한다면, 그 공간이 굉장히 크게 확대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포디즘과는 차별화한다. 포디즘의 컨베이어 벨트 통제 시스템도 비인간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정적인 공간을 통제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면, 쿠팡의 배송 시스템은 그 공간이 하나의 공장이 아니라 하나의 지역으로 확대함으로써 그 공간을 통제한다는 게, 아무리 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국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 과거에 포디즘의 공간은 그래도 그 공간이 물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면, 쿠팡 배송이라는 광활한 외부 지역을 모두 ‘통제하고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안전사고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책임을 개인(택배기사)에게 회피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쿠팡의 책임 소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배송 인력관리회사(쿠팡CLS) 등을 따로 자회사로 만들어서 정작 쿠팡은 뒤로 빠진다. 위험과 책임의 외주화다. 그것도 ‘클렌징’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위험과 책임을 쿠팡에서 깨끗하게 제거해서 외주화하고, 외부화하고, 없애 버리는 것.

쿠팡의 시간: 전 세계에 유례없는 “연속적인 고정 야간노동”
쿠팡의 배송 시스템을 생활 지역으로 공간 확장한 포디즘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쿠팡의 공간성이라면 시간성은 어떨까. 쿠팡에서 시간 개념은 점점 더 무의미해지고 있다. 포디즘은 생산 벨트라인을 24시간 운영하기 위해 교대 체계라는 걸 고안했다.
하지만 쿠팡은 그럴 필요도 없다. 쿠팡에서 대다수 배송업무는 개별적인 자영업자와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자영업자와 계약하면 그뿐이다. 굳이 ‘교대’ 개념을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더욱이 쿠팡은 그런 사실상의 배송 직원과 계약할 필요도 없다. 그 윗선에 있는 택배사(원청, CJ 등)와 계약하면 그뿐일까.
쿠팡이 직고용한 직원은 일부에 불과하고, 대다수는 택배사의 하청인 지역 대리점까지 내려가는 ‘간접 고용’이다. 그러니 전 세계에서도 사례를 찾기 어려운 교대 없는 “연속적인 고정 야간노동”(한선범 택배노조 정책국장)으로 노동자 건강이 상하고, 병들며, 심지어 사고를 당해도 그건 쿠팡 책임이 아니다. 쿠팡과 정부가 자영업자 취급하는 택배기사 개개인이 온전히 그 책임을 떠안는다.

이주노동자 폭염 사망 사건: 점점 더 ‘하방 압박’하는 죽음
이런 불안정 노동에 노출된 건 택배 노동자뿐만은 아니다. 폭염 속에서 한국인 노동자는 단체협약을 통해 오전 근무만 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정상근무하다 숨진 베트남 이주노동자 사망 사건은 한국의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다.
한국은 모른 척하지만, 이주노동자가 한국 노동의 하층부를 담당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위험은 계속 그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고 있으며, 그 밑바닥을 이주노동자로 채우고 있다. 앞으로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번 사건은 너무 적나라하고, 충격적이면서 상징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까지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위험의 외주화와 저임금 이주노동자의 접점에서 생긴 사건이다. 그래서 좀 더 주목해야 한다. 심지어 한국 노동자에게 전가된 위험이 이제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러니까 노골적인 차별의 방식으로 이주노동자에게 넘어갔다. 굳이 이번 사건에서만 차별적이었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차별적인 구조 위에 있었다.
죽음도 계층화하고 계급화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 이주노동자에게 내려가고 있다. 배달과 택배에서도 이제 곧 이주노동자에게 그 문호를 개방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한국 택배 노동자는 대부분 ‘자영업자'(특수고용 노동자) 취급을 하는데, 이주노동자는 자영업자라는 법적 지위로는 택배나 배달일을 할 수 없을 테니 그 문제를 어떻게 풀지 고민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업은 구체적인 ‘다음 단계’를 생각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

쿠팡과 소비자의 공생… 중독과 인질 그리고 죽음의 외주화
하지만 이런 ‘죽음의 외주화’는 계속 유지할 수 없는 방식이다. 지금까지는 인력 유입 구조가 유지됐지만, 이런 죽음의 외주화가 축적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더 유지하기 어렵다. 어느 임계점을 통과하면 붕괴한다.
지금은 비유하면, 소비자가 그 속도와 편의에 ‘중독’된 상태다. 로켓배송에 익숙해졌고, 배달 서비스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편하게… 스스로 원하는 정도를 높인다. 물건의 필요성을 뛰어넘는 상태로 그 속도와 편리를 원한다.
그런 상태에서 쿠팡의 독점적 지위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그렇게 ‘로켓배송’에 중독된 소비자가 있는 한 쿠팡의 독점적 권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쿠팡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소비자다. 그런데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쿠팡과 소비자는 서로 ‘공생’ 관계다. 풀어서 설명하면, 쿠팡은 소비자 유익을 내세워 택배기사의 노동을 촘촘하게 통제하고, 소비자는 기존에 누리던 서비스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귀찮고 불편하니까 그런 노동 통제를 묵인한다. 가령, 매번 늦은 밤에 주문해도 다음 날 새벽까지 배송받는 로켓배송이나 로켓프레시 배송 시각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안 되니까. 사용자 편익이 소비자의 사회적 행동을 가로막는 ‘인질’ 역할을 한달까.

아직까지는 그런 구조가 유지되고 있지만, 앞으로 한국의 인력 구조와 경제적 변화 속도를 보면, 이런 구조는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 베트남 이주노동자 폭염 사망사건에서 보이는 것은 이런 비극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징후다. 그 분야는 비단 건설 분야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퍼져갈 가능성이 크다. 아주 오래전 그리스와 로마에서 있던 ‘노예’ 제도에도 비유할 수 있다. 예전에는 (한국인) 하층 노동자도 시민적 발언권이 있었지만, 지금은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시민적 발언권마저 박탈당하고 있다.
민노씨가 말한 ‘부메랑 효과’의 측면에서 말하면, 이주노동자만 위험한 건 아니다. 이주노동자 계층의 ‘경계’에 존재하는 한국 노동자는 정말 어려워진다. 한국 상층 노동자 시장에는 진입하기 어렵고, 그 경계 부근에 존재하는 한국 노동자는 임금의 하방 압박에 시달리면서 노동 조건은 계속 악화한다. 그 부메랑에 맞을 계층은 노인일 수도 있고, 청년일 수도 있다. 이들의 불만이 커질 수 있다.
파국을 막으려면…더 큰 그물망이 필요하다
노동자로 인정해야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편입해야 한다. 혹은 특별 규정을 만들어서 보호해야 한다. 노동법 자체를 바꾸든지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노동법(근로기준법)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아 보여서 특별법을 만드는 방식이 더 나을 것 같다.
생명과 건강의 문제에 관해서는 굳이 노동법을 통하지 않고, 노동자의 건강을 관리할 수 있는 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생명안정기본법과 같은 논의가 결실을 맺어야 한다. 한국에서 사는 모든 시민이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규정하면 거기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를 통할 필요가 없어진다. 한국인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를 나눌 필요도 없어진다.
굳이 근기법에 편입한다 만다는 식으로, 산재법의 틀 안에서만 논의하면 효과가 없으니 다층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기업 입장에선 노동법, 산재법, 중대재해법…계속 빠져 나간다. 특수고용 노동자는 이런 그물(법제도)에는 걸리지도 않는다. 그물을 하나 더 치는 방식으로, 빠져나오는 고기를 잡기 위해 더 큰 그물망(생명안전기본법)이 필요하다. 모든 시민이 일하면서 안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면, 다른 노동법이나 산재법에서 보호할 수 있도록.

정 많고 따뜻한 한국인?
한국이 정이 많다는 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가족은 경제적인 관계로 묶여 있다. 유럽은 그런 경제적 고리가 거의 없다. 한국은 경제적 연결 고리로 묶여 있어서 때로 ‘질척거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끈끈하지만, 정서적 공감대와 감성적 유대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은 정이 많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외국 관광객에게는 정이 많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한국처럼 거칠고 잔인하게 다루는 나라도 없다. 굉장히 공격적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중성이랄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아빠 찾아 삼만리'(EBS) 같은 ‘신파조’ 교양 프로그램은 나도 좀 봤는데, 한국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느낌이다. 그런 모습을 대다수라고 보기는 힘들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여줄 수 있는 그 한도만 보여준다.

그런 교양 다큐멘터리를 보고 공감했던 마음이 그렇게 많았다면, 그런 유튜브 동영상들 조회 수가 100만이 넘고, 댓글에는 따뜻한 격려가 넘쳤다면, 베트남 이주노동자 폭염 사망 사건에 그런 마음이 이어져야 하는데, 그런 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감정적인 자기 위로에 불과한 거지… 정말 현실에서 만나는 잘못된 비극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리는 거다. 그걸 바로 잡으려면 내가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니까. 아니 이제는 외면이라기보다는 아예 안 보려고 한다. 외면과 차이? 보이는 것을 굳이 고개 돌리는 게 외면이라면, 아예 그 방향으로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이랄까?
한국 소비자는 이런 상황에서는 매우 이중적이다. 그래서 쿠팡과의 ‘공생’ 관계를 구성할 가능성, 그래서 특정한 상황에서 택배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생각해 보자는 목소리도 소비자인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느껴서 공격적으로 반격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배송에서 특이한 건 배송하는 택배기사가 물건만 두고 간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점점 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이 없다. 그야말로 “클린”하다. 그건 쿠팡의 “클렌징”과 별로 다르지 않다.
로켓배송이 그런 것이다.

이상 본문은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고요. 이하 인터뷰어의 후기 겸 에필로그입니다. (편집자)
프롤로그: 반(反)민주주의적 미장센
나는 쿠팡의 포로이며 자발적 인질이다. 쿠팡의 몸값은 ‘클렌징’이며, 그 몸값은 택배기사가 떠안는다.
영화 ‘시민 케인'(1941, 오슨 웰스)에 관해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시공간을 무한하게 확장한다고 말한다. 시간은 ‘롱 테이크’를 통해 영원처럼 이어지고, 공간은 피사체 심도를 조정하는 ‘딥 포커스'(deep focus)로 한없이 깊어진다. 바쟁은 특히 딥 포커스로 구현된 ‘시민 케인’의 장면들을 ‘민주주의적 미장센’이라고 평가했다. 25살 청년 오슨 웰스가 만든 이 ‘저주받은 걸작’은 바쟁을 필두로 한 누벨바그 사단에 의해 재발견되고, 급기야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 미장센
프랑스어로 미장센(Mise-en-scène)은 ‘물건을 놓다’ ‘무대에 배치한다’는 뜻. 영화감독의 연출 의도를 담은 화면 구성, 즉 등장인물, 소품, 배경 등의 배치를 영화 전체의 주제 의식과 해당 장면의 의미에 맞게 조정하는 작업 혹은 그런 장면을 통칭한다.
쿠팡 역시 배송 관리의 극한 효율을 위해 시공간을 무한 확장한다. 그리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비생산성을 억압적 디지털 통제 기술을 통해 지워버리고(‘클렌징’) 이를 알고리즘화한다. 택배기사의 노동은 수직적 통제를 위한 알고리즘 데이터로 변환하고, 소비자의 편익은 그런 디지털 노예화를 유지하는 ‘인질’이 된다. 그야말로 반(反)민주주의적 미장센이라고 할 만한 풍경이 ‘빛의 혁명’으로 빛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에서 매일 새벽부터 한밤까지 24시간 펼쳐진다.
시공간을 무한 확장하고, 그 ‘틈’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쿠팡의 미션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 미션은 첨단 디지털 알고리즘의 거대한 성채를 쌓아 올린 쿠팡이라고 해도 아주 어려운 미션이다. 하지만 그 미션의 성공 조건은 비교적 명백해 보인다. 편익이라는 마약의 자발적 포로가 된 채 침묵하고 방관하는 소비자. 그런 소비자를 길들이는 기업. 그런 국민(소비자)에 편승하고 기업과 담합하는 정치권력… 기업과 정치와 소비자의 삼위일체는 완성되었고, 노동만 소외된다.
소비자와 노동자 그리고 기업과 정치권력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이 오래되고 일상적이며 잔인한 권력의 게임은 2025년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이 게임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소비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치권력? 소비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이 비극적 게임이 계속 플레이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