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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오전 8시]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전하는 노동과 세계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중대재해법을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 시행(1.27)한다. 중대재해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22가지 체크 포인트.


중대재해법 22가지 길라잡이 (목차)


알림, 안내


이 글은 2024년 2월 2일 금요일 제네바 시각 오전 8시에서 9시까지 진행한 화상 인터뷰를 이상헌 박사와의 협의 아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각 항목은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작게 나눴습니다. 목차 링크를 통해 궁금한 항목을 골라 읽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이상헌의 제네바 오전 8시 [ep. 12]

1. 중대재해법 시행 2년 통계의 진실, 직접 처벌 아니라 경각심 환기다


아래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2년 동안 선고된 13건에 관한 통계다. 13건 중 실형은 1건이고, 그마저도 최저형이다(통계 정리 및 출처: 매일노동뉴스, 참고로 인터뷰가 마무리된 이후인 2024. 2. 7. 선고된 최초의 하청노동자 사망사고에 관한 1심 선고, 즉 중대재해 사건 14호 선고도 원청업체 대표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편집자.)

출처는 매일노동뉴스.

이 통계가 아주 중요하다. 우선 중대재해법이 시행하고 나서 재판까지 간 경우가 많지 않다. 그리고 선고된 13건(인터뷰 시점) 중에서 실형 선고는 한 건밖에 없다. 현재 시행 중인 중대재해법은 결과적으로는 직접적인 처벌보다는 경영자나 사업주의 경각심을 환기하는 게 주된 효과가 됐다. 중소기업 이상(50인 이상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형사적인 처벌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지난 2년 동안 통계가 잘 보여준다.

2. 법에 관한 오해, 중대 재해가 곧 처벌은 아니다 (예: 안전모 사례)


그러니까 법에 관한 오해가 많다. 모든 중대 재해가 발생한다고 무조건 책임지는 게 아니다. 기준은 당연히 법적으로 정의된 의무를 다했는지 여부고, 천재지변과 같은 불가피한 경우에 사업주나 경영자는 법적 처벌 대상이 아니다.

가령, 건설 현장에서 매일 같이 안전모를 써야 한다고 안전 교육을 했는데, 노동자가 자의로 현장에서 이를 무시하고 개인적 업무를 보다가 사고를 당한 경우에는 사업주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

3. (밑줄 쫙~!) 노동자 안전도 ‘경영의 대상’ 됐다 (예: 주가·매출 확인하듯)


다만, 노동자 안전과 관련된 법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사업주도 직접적인 처벌 대상이 있다는 걸 명시함으로써 사업주가 이 문제에 관한 우선순위를 따질 때 이전보다는 훨씬 더 경각심을 높이 가지고 항상 주의하고 살피는, 그러니까 경영의 어떤 대상, 그 핵심 중 하나로 이제 들어오게 됐다는 의미다.

그래서 예를 들면 사업주나 경영자가 매일 주식 동향을 체크하고, 매출을 체크하는 것처럼 노동자 안전 문제도 그렇게 매칠 체크해야 한다는 데에 중대재해법의 의미가 있는 거다.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이 하락했다고 경영자가 처벌받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항상 신경쓴다. 중대재해법으로 인해 ‘노동자 안전’도 그런 사업주나 경영자의 ‘일상적인 관리 대상’에 포함됐다는 점에 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현재 재판 결과를 보면, 그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안전 문제가 경영 행위의 주요 사항으로 편입되는 효과는 그 의미를 평가할 만하다. 그걸 무시할 게 아니라 그 정도도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그 의미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도 동일하다.

4. 산업안전보건청을 협상카드로? 정치적 분탕질이다


중대재해처벌법 50인 미만 확대 적용과 관련해 그동안 언론 보도를 참고하면 산업안전보건청(이하 ‘산안청’)을 정치적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 A. 산안청 신설: 국민의힘 협상 카드, 민주당 일부 호응.
  • B. 50인 미만(5인~49인) 확대 유예: 국민의힘 주요 목표.

국민의힘은 산안청을 2년 뒤 여는 대신에 50인 미만 확대를 유예하자고 민주당에 제안했다. 민주당은 여당의 절충안을 거부했다. 이에 관한 언론 보도는 이 사안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과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한마디로 정치적 분탕질이다. 논의 프레임이 잘못됐다. 이 둘(50인 미만 적용 확대와 산안청)은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다. 이거 할래, 저거 할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 둘은 함께 가는 게 당연하다.

5. 중대재해법 만큼 산안청의 지원이 필요하다 (상호보완적)


보통 대다수 나라들이 산업안전을 위해 처벌과 지원을 동시에 한다. 처벌을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게 하는 체계를 갖추고, 동시에 중소기업 이하 사업장은 교육 문제, 안전 전문가 활용 방법, 안전 컨설팅 등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고용노동부는 그런 큰 일을 체계적으로 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런 전문 기능을 분리하자는 거다. 가령 국세청을 생각하면 된다.

산안청 만들자는 건 논의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중대재해법 논의와 별개로 늘 고려 대상이 돼왔다. 현재 산업안전 문제는 실무적으로 근로감독관이 ‘핸들링’한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근로감독관만으로는 산재 사망률 줄이는데 역부족이다. 기존 근로감독관 체계로는 빠른 변화에 발맞추기 어렵다.

이런 노동자 생명이 걸린 문제를 정치적인 거래 대상으로 삼는다? 계속 말하지만, 정치적 분탕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분탕질로 인해 일반 국민들이 사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혼돈에 빠뜨린다.

6. 산안청을 정치적 협상 카드로 삼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령, 중대재해법이 없다고 ‘가정’하면 산안청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처벌과 지원은 동시에 통합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지금 핵심적인 아이디어(중대재해처벌법)은 있으니까 산안청은 당연히 함께 같이 가야 했다.

산안청을 중대재해법 50인 미만 적용 확대 유예를 위한 ‘카드’로 제안하고, 여야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 둘을 무슨 선택 사항처럼 정치적 ‘딜'(거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한국 정치권이 산업안전에 관해 가지는 시각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보여준다. 산안청을 협상 대상으로 삼는 것 그 자체가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다. 나는 이 일련의 상황을 여야의 정치적 직무유기로 판단한다.

7. 산안청에 조사권, 처벌권 없다? 그럼 무용지물이다


게다가 여당이 제안했던 산안청에는 단속권과 조사권도 없다. 영국은 기소권까지 있다. 조사권 없으면 산안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런 허수아비 산안청을 협상 카드로 내세운다? 그게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건 앞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백보양보해서 그걸 협상 카드로 치더라도 거들떠볼 가치도 없는 제안인 셈이다.

8. 장관이 퍼뜨리는 공포에 관하여: “식당 사장님도 이번에 적용”(이정식)


오늘 사고는 1월 27일 50인 미만 사업장에 중대재해처벌법이 확대 적용된 이후 50인 미만 사업장에 처음 발생한 사고입니다. 현장을 보니 매우 위험해 보이는 기계장비인데 안전조치는 없어 보였습니다. 출동한 감독관에게 법과 원칙에 따라 신속하게 처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중략) 특히 50인 미만 사업장은 준비가 안 된 곳이 많은데 오늘 사고로 마음이 더 급해졌습니다. 오늘 현장에서 만난 근로자 한 분은 “사업주가 수사받고, 구속되거나 폐업되면 남은 우리도 생계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10여 명 남짓 동네 지인과 형님, 아우처럼 지내왔던 분들이 재해자에게 애도의 마음을 가지면서도, 사고로 인한 사법처리, 폐업과 일자리 걱정, 동료들의 트라우마 등 예상되는 아픔과 피해는 너무도 복잡하고, 큰 것이었습니다. 다른 중소업체도 대동소이하지 않을까요?

(중략) 인근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했습니다. 식당 사장님께 직원 수를 여쭤보니 13명이라고 하시길래 이번에 법이 추가로 적용된다고 말씀드렸더니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부인, 아들, 며느리, 두 딸까지 가족만 6명이 일하고, 일반 직원이 7명. “손님도 예전 같지 않고, 우리들은 하루하루 장사가 살얼음판인데, 중대재해가 발생한다고 사장을 구속하면 너무 한 것 아니냐, 딸린 식구뿐 아니라 직원들도 나가야 하는데 이게 맞느냐?”라고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정부의 대책을 말씀드리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사고는 예고도, 예외도 없다. 예방에 완전은 없으니, 식당도 방심은 금물이라고… 그러나 기차 시간에 쫓겨 식당을 나서는 발길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이정식(노동부 장관) 페이스북 게시물 중에서, 2024년 2월 1일.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 이후 처음 중대재해사건이 발생한 현장에 찾아간 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건데, 사건 현장도 아닌 인근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페이스북에 올린 이유는 뭘까. 식당 사장님 호구조사까지 하고 “이번에 법이 추가로 적용된다고 말”하고,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하소연”하는 식당 사장을 페이스북에 중계한 노동부 장관. 거기에 혹시 무슨 ‘계산법’이 있었던 건 아닌가(이정식 장관이 페북에 올린 ‘식당 발언’을 많은 언론이 기사화했다. 편집자).

9. 내가 장관이었다면? 식당 사장님 안심시켰을 것


우선 팩트를 몇 가지 짚고 가자.

  • 중대재해 사망자는 건설업과 제조업에 집중됐다(약 80%).
  • 음식점업 숙박업 비중 1% 미만이다.
  • 50인 미만 사업장이 산재 사망자 중 60% 비중을 차지한다.

노동부 장관께서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하지만 일견 사실을 전한 것 같지만, 중요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50인 미만 중소기업과 10명 남짓 식당 사업장은 중대재해법에서 지켜야 할 준수 사항이 대기업보다는 훨씬 더 적다. 중대재해가 몰려 있는 사업장은 건설과 제조업 현장이지 식당이나 빵집이 아니다(중대 산업재해가 잇달아 일어난 ‘파리바케뜨’ SPC 공장은 ‘빵집’이 아니다. ‘공장’이다. 혼동하지 말자. 편집자).

내가 장관이라면, “실제로 식당에서 중재해재가 일어날 확률은 매우 적으니까 걱정 마시고, 사업주로서 안전 준칙을 잘 준수하셨다면 혹시라도 재해가 일어나도 책임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안심시킬 거다. 1/100도 되지 않는 가능성을 마치 눈앞에 닥친 위험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정책 책임자로서 너무 무책임하다. 괜히 걱정하게 만드는 거다.

파리바게뜨, 입에 착! 가격도 착! “착!” 한빵 프로모션 진행. 2023. 02. 22. SPC 제공.

10. 처벌보다 지원에 초점? 참 한가한 소리 + 현실 왜곡이다


일부 언론은 중대재해법이 너무 처벌 위주라고 불평하면서 처벌보다는 지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한다. 중대재해법은 처벌에 초점을 맞춘 법이다. 처벌에 초점을 맞춘 법이 처벌 위주인 게 이상한가? 그럴 수밖에 없다.

지원에 초점을 맞추라고 하는데,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참 한가한 이야기다. 한국 형법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처벌 규정이 극악한 범죄부터 가벼운 범죄까지 모두 꼼꼼하게 규정한다. 그리고 형법이 있다고 해서 처벌만 하는 건 아니다. 형법을 ‘범죄인의 마그나 카르타'(범죄인을 처벌하는 게 형법이지만, 동시에 범죄인 인권을 가장 보호하는 게 형법이라는 취지의 법률 격언)라고 부르는 건 다 그런 이유다.

중대재해법도 마찬가지다. 어느 법도 처벌 조항만 들어 있는 법은 없다. 지원도 많은 논의가 있었고, 지원에 관한 규정과 제도도 당연히 있다. 이건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마치 가정해서 그런 지원은 아예 없는 것처럼 말한다. 중대재해법이 만들어지지 전부터 지원 이야기가 나왔다.

11. 재해법 만들기 전부터 지원 대책 논의는 있었다


중대재해법을 만들기 전부터 정치권과 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시민단체 쪽에서도 지원 논의는 처음부터 있었다. 왜 법이 만들어지고 나서 2년 동안 유예를 했겠나. 중소기업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유예하지 않았나. 여기에 관련된 지원을 어떻게 할지, 재정적 지원도 필요하고, 교육적 지원도 필요하고…

교육기간동안 임금 보상은 어떻게 할지, 시설 지원은 어떻게 하고, 특별한 분야나 이슈에 관해서는 산안청이 기술적 자문도 제공하고. 그런 게 다른 나라들에도 다 있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지원 없이 처벌만 하나. 독재국가도 아니고.

12. 그런데 2년 동안 도대체 뭘 준비했나?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야 할 2년 유예 기간동안 뭘 했나.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안 해놓고 또 한 번 미루자고 하는 거다. 그래서 한 번 더 유예하는 게 실은 좀 더 지배적인 시나리오였던 걸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정치권 움직임과 반응은 좀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면, 뭐가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인다. 처벌이 문제라고 떠드는데, 앞서 통계에서 보는 것처럼 실제로 무슨 제대로 처벌을 한 것도 없다. 도대체 무슨 조항이 어떻게 문제라는 구체적인 논의는 하나도 없고, 뜬구름 잡는 식으로 문제라고만 한다.

13. 처벌 강화만이 답은 아니다? 처벌받은 사례가 없는데 뭔 소린가?


2022년 기준으로 산재사고 사망자 수는 2,223명이다(KOSIS, 고용노동부, 산업재해현황). 2023년도 비슷할 거다. 해마다 산재로 2천 명 넘게 노동자가 죽는 나라에서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실형’ 처벌받은 사업주나 경영인은 지난 2년 동안 딱 한 명이다. 그것도 최저형(1년)으로 실형을 받은 경우다. 기소된 경우도 겨우 14건에 불과하다(2024. 2. 7. 현재).

이게 무슨 의민가. 현재 현행법상으로 사업주가 그 법적 책임을 다했다고 판단한 케이스가 압도적인 다수라는 거다. 이미 처벌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무슨 처벌 강화가 답이 아니라고 하나? 처벌받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14. 유예론의 맹점, 유예해 주면 준비 잘할까? 아닐 것 같다


지금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작은 사업주들이 준비가 안 됐다는 거다. 조사를 해보면 준비하고 있기는 했다. 중대재해법 유예 종료를 대비해서 정부가 중소기업에 어떤 지원책을 세워서 어떤 사업을 했다는 게 또렷하게 나오는 게 없다. 당연히 지원은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결과론을 가지고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중소기업이나 작은 사업장 준비가 필요하다고 해서 2년 유예했다. 정부도 그동안에 지원책 준비하라고 했고.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직 제대로 준비된 것 같지 않으니까 또 2년 유예하자? 그러면 준비가 잘 될까? 보장이 없다. 지난 2년을 보더라도 전혀 보장이 없다.

가령 이런 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지금 75% 정도는 준비된 것 같은데 25% 정도는 미흡하니까 1년 정도만 더 유예하자. 정부로선 우리가 지원책으로 10개를 준비했는데 그중에서 7~8개는 됐는데, 2~3개 준비가 덜 됐으니까 1년만 유예하자. 그런 로드맵이 있다면 협상이 가능할 거다. 지금 그런 게 있나? 지금 논의 수준이 처벌 강화보다 지원 대책, 이런 수준인데? 유예 기간을 더 줘봤자 준비 잘한다고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금 유예 논의는 실무적이고 실천적인 논의가 아니다. 그저 정치 셈법일 뿐이다. 그렇게만 보인다.

15. 차라리 시행착오를 통해 개선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지원 강화는 원칙적으로 맞는 이야기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지금까지 일이 흘러온 모습으로 봐서는 좀 한가하고 뻔뻔한 소리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지금 경험으로 봐서는 유예를 끝내야 지원에 관한 논의가 실효적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한국 상황이라서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각심을 높이고, 큰 기업 사업주든 작은 사업장 운영자든 노동자의 안전을 신경 써야 할 ‘경영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한다는 점에서 중대재해법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건 의미가 크다.

지원 논의 과정에서 산안청 논의가 당연히 나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지원을 걱정하는 분이라면 안정청을 가장 먼저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걱정하는 건 총선이다. 총선에서는 이 논의가 싹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가을 국회에서나 다시 논의가 가능할 것 같은데… 지원 논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6개월이 지날 가능성이 크다. 정치적인 스케줄 상으로는 지금부터 열심히 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는 않아 보인다.

16. 벤치마킹할 만한 나라? 영국이나 북유럽이나 다 잘한다


영국은 메뉴얼이 잘 돼 있다. 북유럽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거기에 더해서 노동조합이 자기 역할을 잘 한다. 산업안전에 아주 민감하다. 프랑스나 독일, 스위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빼고 선진국이라고 부를만한 나라들은 다들 잘한다.

17. 벤치마킹도 좋긴 한데… 벤치마킹에도 한계는 있다


우리는 외국 모범 사례를 참 좋아한다. 그래서 자꾸 물어본다. 외국에 무슨 요술 방망이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웃음). 그런데 벤치마킹이 현실에 도움이 되려면, 그래도 좀 엇비슷해야 한다. 앞선 인터뷰에서도 한두 번 지적한 적 있지만, 산업안전 문제에서 한국은 ‘완전히 예외적'(아웃라이너)이다.

벤치마킹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노력이 부족하다. 좋은 시스템 벤치마킹도 중요하지만, 산업안전에 관해선 지금은 ABC부터 그 기초를 다져 나가야 한다.

국민소득과 산재사망률은 반비례 경향이 있지만, 한국만은 예외다. 이상헌 제공.

18. 기초 ABC, 누가 무엇부터 해야 할까?


첫 번째 기업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결과적인 효과일 수도 있지만, 노동자 안전에 관한 인식을 주주의 이익 수준으로 격상해야 한다. 즉, 경영의 대상에 포섭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가치를 계속 격상시켜야 한다.

두 번째는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다. 작은 사업장에는 인적인 지원도 필요하고, 재정 지원도 필요하다. 기술적인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해야 할 게 많다.

19. 한계기업도 산업안전에 관해선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실제로 산업안전을 위한 추가 비용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많다. 물론 그런 한계기업(재무가 부실해 이자 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기업)은 어차피 시장에서 퇴출당하지만, 그 사이에 노동자가 죽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경영이 부실해서 퇴출당해야 할 기업을 지원해선 안 된다. 기업을 그런 식으로 지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산업안전과 관련해서는 퇴출기업, 한계기업 이런 거 상관 없이 일단은 우선해서 대대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20. 개별 기업 지원하기 힘들면 묶어서… 산업안전에는 비용이 든다


개별 기업들을 지원하기 어렵다면, 그 지역에 비슷한 업체들을 묶어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다든지, 특히 산재가 빈번한 산업단지에는 ‘센터’ 같은 걸 만들어서 인적 자원이나 재정적인 자원을 공유해서 비용을 줄여나가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아이디어는 많다.

물론 여기에는 고용노동부는 물론이고, 산안청 같은 정부 기구의 기능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늘 내가 이야기하는 거지만, 비용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 비용이 든다. 비용이 드는데 그 비용에 관한 걸 사회가 감당해야 하고, 사회 전체로 보면 그게 손해가 아니다.

21. 한국은 산업안전 비용을 개인이 감당하는 사회


산업안전을 위한 비용을 사회 전체로서 감당하면, 우리 사회 전체로는 손해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산업안전에 관한 비용을 노동자 개인이 감당하는 구조다. 그러지 말고 그런 비용을 차라리 투자로 돌려서 각 기업에 분배하고, 산업안전에 관한 사회적 비용을 사회적으로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

사회 전체가 산업안전의 비용을 조금씩 감당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정부를 좀 더 강하게 ‘푸시’할 수 있다. 우리 세금으로 좀 더 안전에 투자해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기업 입장에서도 산업 안전 문제를 경영의 핵심 대상으로 격상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을 거다. 여기에는 노조의 역할도 당연히 중요하다.

22. 기업 인식 변화, 정부 대대적인 투자, 사회적 비용에 관한 공동체 합의


산업안전에 관한 기업의 인식이 변화해야 하고, 정부는 안전을 위해 특히 중소기업과 작은 사업장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지원해야 하며, 그 비용에 관해서는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연결돼 있다.

부록. 폴 콜리어의 ‘사회적 모성주의’ (자본주의의 미래)


폴 콜리어는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세계화로 상징됐던 자본주의 발전론이 사실상 파산했다고 말한다. 그게 콜리어의 핵심 주장이다. 그 파산의 이유가 뭔가. 세계화는 자본주의와 시장이라는 게 어떤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사는 공간과 분리돼서 경제를 운영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런 세계화의 글로벌 엘리트는 항상 자기들이 움직인다고 말한다. 마치 다보스 포럼에 모인 사람들처럼. 그들은 돈이 어디에 있는지, 일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일자리 만들고 투자하고 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그들만의 세계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사람이라는 건 자기가 사는 공간에 뿌리를 박고,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공간이 중요하다. 인간은 그걸 통해서 일도 하고, 사회도 경험한다. 이 둘(경제와 공간)을 분리하면서 오늘날 포퓰리즘이 생겼다는 게 폴 콜리어의 생각이다.

그런 환경에서 트럼프는 당연히 출현할 수밖에 없다. 세계화의 엘리트들은 좌파(리버럴)도 많다. 그런 사람들, 가령 왜 농부들이 시위를 이렇게 많이 하고,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역) 노동자가 왜 좌파, 미국식으로 말하면 민주당을 싫어하느냐, 왜 트럼프를 더 좋아하느냐…. 그 이유는 뭐냐하면, 민주당은 자기들(농민, 백인 노동자)의 이해관계와는 정반대 이야기만 하니까.

그래서 [자본주의의 미래]가 말하는 것은 이 공간의 중요성, 시간의 중요성 이런 요소를 복원하는 어떤 공동체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사회적 모성주의’를 복원해야 자본주의의 미래가 있다는 게 폴 콜리어의 주장이다. 그런 맥락에서 폴 콜리어는 영국 노동당(특히 토니 블레어의 제3의길, ‘신노동당’)에 비판적이다.

폴 콜리어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언급하는 건, 스미스의 생각은 뭐냐면, 사람이라는 게 기본적으로는 상호 반응을 통해서 신뢰를 만든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신뢰가 시장 경제를 만드는 핵심이라고 본다. 신고전파 경제학자의 관점과 매우 다르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고, 상호 작용하며 그런 관계를 통해서 신뢰를 형성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다는 거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도덕감정론 초판(1759)

폴 콜리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과 신뢰의 요소를 제거하고, 눈에 보이는 성분 경험만 보면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작동 방식을 보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주장을 위해 선거 이야기도 하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 거다. 폴 콜리어의 이 책은 한국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꽤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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