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이현재 전 국무총리, “현실 참여는 학문적 근거에 바탕을 둬야... 경제학의 근본 과제는 개인적 풍요와 공동체적 가치의 균형.”
95세 노(老)교수가 최근 경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노태우 정부 초대 국무총리(1988년 3~12월)를 지낸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이현재의 논문이다.
‘한국의 경제학과 경제학자: 반성과 제언’이라는 논문은 지난달 한국경제학회 학술지 한국경제포럼에 실렸다.
이현재는 논문에서 “한국 경제학 역사가 사람으로 치면 고희(70세)를 넘긴 이 시점에서 한국 경제학과 경제학자의 현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앞으로 나아가 방향을 제시하는 일은 조금도 무의미하지 않다”고 밝혔다.

“노벨상 수상자? 죽을 때까지 경제학 놓지 않는다.”
- 이현재는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앨프리드 마셜, 존 메이너드 케인스, 밀턴 프리드먼, 폴 사무엘슨, 카를 마르크스 등을 ‘경제학 선현’으로 소개하고 평가했다.
- 1969년 프리슈(Ragnar Frisch)와 틴베르헌(Jan Tinbergen)을 제1회 수상자로 선정한 후 지난해 아제몰루, 존슨, 로빈슨에 이르기까지 56회에 걸쳐 96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노벨경제학상에 대한 논평이 인상 깊다.
- 이현재는 “노벨상 수상자는 새 분야를 개척했거나 새 방법론을 제시했거나 새 관점을 제시했다는 특징을 지닌다”며 “남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발견한 주제에 대해 평생을 천착한 끝에 다수가 동의하는 학자로 대성한 이가 다수”라고 설명했다.
- “수상자 거의 전부가 평생을 아카데믹 월드에서 활동했으며 죽을 때까지 경제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것저것 적당하게 아는 데 만족하거나, 이 주제 저 주제 가리지 않고 덤벼들거나, 그 당시 유행을 좇아 연구 주제를 선정한 수상자는 하나도 없었다.”
“기업 연구가 부실하다.”
- 이현재는 한국 경제학계에 다섯 가지 고언을 남겼다.
- 첫째, 경제 생산 주체인 기업 연구가 부족하다. 이현재는 “대다수 경제학도에게 기업은 인풋(Input)을 넣으면 아웃풋(Output)이 나오는 가림막 속에 있는 상자와 같다”고 꼬집었다. 기업 본질이 무엇인지, 기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기업은 어떻게 가치를 창출하는지 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경제학자가 적다는 것이다.
- “많은 수의 경제학자가 기업과 기업가를 구분하지 않고 몇몇 기업가의 일탈 행위를 근거로 기업을 비난한다. 기업과 기업가가 생존과 발전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지를 외면한 채 기업과 기업가에게 정의하기조차 어려운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다그친다. 더 나아가 기업과 기업가가 번 돈은 누구나 가져다 써도 되는 양 무슨 일만 생기면 ‘사회’를 위해 내놓으라고도 한다. 기업에 대해 잘 모르는 경제학자일수록 그런 경향을 보인다.”
- 기업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기업과 기업가를 비판하려면 먼저 기업과 기업가에 관한 객관적이며 깊이 있는 연구를 선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 기업에 관한 이론 연구는 많으나 실증 연구는 부족하다. 기업 내부 데이터를 확보하기 어려운 탓이다.
학문적 근거에 바탕한 현실 참여인가.
- 둘째, 경제학자의 현실 참여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 이현재는 “생동하는 현실을 다루며 개개인 그리고 공동체 다수의 복리를 증진할 방안을 모색하는 학문 1세계에 몸담은 자로서 우리 사회 문제에 대해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함은 경제학자의 당연한 책무”라면서도 “그런 행위는 본인의 주관적 판단에 좌우됨 없이 엄밀한 학문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 “그러나 경제학자가 언제나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따른다.”

논문 개수로 업적 평가, 문제 없나.
- 셋째, 국내외 등재지에 실린 논문 수로 학자 업적을 평가하는 시스템은 부작용을 낳는다.
- 이현재는 “세계적 명성을 지닌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므로, 객관적 평가를 거쳐 높은 평판을 획득한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의 양과 질을 기준으로 경제학자를 평가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라면서도 “이 경우에도 소수의 ‘동호인’끼리 추천을 주고받아 논문을 게재하는 일이 잦다는 의심을 받는 몇몇 외국 학술지에 대해서는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등재 제도도 우려했다. 엄격한 잣대로 등재지를 선정하고 거기에 실린 논문 숫자로 업적을 평가하면 우수한 학자를 선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 제도를 시행했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다. 등재 제도 시행 전에는 소수이던 경제학 학술지가 제도 도입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 수십 개로 폭증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경제학자 시장의 경쟁도 높여야.”
- 넷째, 경제학자의 ‘내수 시장’이 역동적이지 않다. 한국인 경제학자의 국내외 이동이 비교적 활발하지만 미국 경제학자 시장만큼은 역동적이지 않다.
- 이현재는 “유능한 타 학교 교수를 스카우트하는 행위에 관해 비판적이며 처음 취업한 데서 정년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도중에 자리를 옮기는 소수를 제외하면 절대 다수의 경제학자가 일단 한 곳에 자리 잡으면 도태되지 않고 정년까지 자리를 지킨다”고 꼬집었다.
- “경제학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경쟁이듯이 경제학자 시장의 경쟁도도 높이면 좋을 것이다.”
국내 대학의 부실한 박사 학위 과정.
- 다섯째, 국내 대학의 박사 학위 과정이 부실하다. 석사 배출은 경제학 선진국 대학에 뒤지지 않지만 박사 배출 능력은 부족하다.
- 이현재는 “일류 대학에서조차 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도록 학생들을 인도하는 게 현실”이라며 “이는 양질의 박사 학위자를 배출할 능력이 부족함을 자인하는 일견 양심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학과당 수십 명에 달하는 교수가 재직 중인 대학이 한둘이 아닌 지금 박사 학위 배출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한국 경제학자가 잘할 연구 분야는?
- 이현재는 한국 경제학자가 다른 나라 학자보다 잘할 수 있는 연구 분야를 소개했다.
- 남북한 통일에 관한 연구가 대표적이다. 북한 경제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 남북 경제를 비교 평가하는 연구, 통일 필요성 여부에 관한 연구, 통일 방안에 관한 연구, 통일 장애 요인에 관한 연구, 통일 이후 한국경제 모습에 관한 연구 등이다.
- 이현재는 “남북 주민이 거부하지 않는 한 통일은 어느 때고 불시에 이뤄질 수 있다. 비록 인기가 없거나 당장은 시급성을 절감하지 못하더라도 한국 경제학자 누군가는 통일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일생을 바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이현재는 노태우 정부 초대 총리 시절 사회주의권과 교류 관계를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 ‘저개발 국가의 경제 발전에 관한 연구’도 한국 경제학자가 잘할 수 있는 분야로 꼽았다. 이현재는 “근세사에서 대한민국처럼 획기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한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 “‘지금도 절대 빈곤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십억 명의 빈곤국 주민들이 한국인이 해낸 것과 비슷한 방식의 발전을 통해 풍요롭고 자유로운 신인류로 변모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 한국인 경제학자 가운데 누군가는 세계인 누구나가 수긍할 수 있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 저출산 고령화가 화두인 한국 사회에서 ‘인구에 관한 연구’도 경제학자가 천착할 주제 가운데 하나다. 우리나라 적정 인구 규모가 얼마인지 알아내는 연구, 우리의 최적 수명은 얼마인지에 대한 연구 등이 필요하다는 주문이다.
실사구시 경제 교육이 필요하다.
- 이현재는 실사구시 경제 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경제 교육은 원리를 전달하는데 치중했다. 경제학과 학생조차 현실에서 일어나는 경제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 수강생 수백 명이 몰리는 일류 대학 경제학 과목은 대부분 “고시, 취업과 국내외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한 것”으로 이는 “기업 부문의 실상, 국제무역과 통상의 실제, 기술 개발의 경제적 측면, 자동차·전자·철강·조선 산업 등 실체적 경제 현실에 대한 이해 증진과 거리가 있다.”
- 아울러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종교인 등 경제와 거리가 멀 것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한 경제 교육이 중요하다. 이현재는 “그들이 정책 입안과 규제, 사설과 칼럼, 설교와 강론, 판결 등을 통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 경제 논리를 무시한 정치와 법률 행위가 얼마나 커다란 해악을 낳는지는 재론 여지가 없다”고 했다.
- 특히 천주교를 사례로 들며 “매주 진행되는 강론에서 반기업과 반시장 그리고 반서방(반미)을 주조로 하는 논지를 펼치는 천주교 사제가 많다”며 “사제 양성 과정에 경제 교육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경제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그러한 결과를 낳는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현실에 참여하는 일부 정파적 사제들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 경제학자들이 학생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고 재밌게 풀어쓴 경제 산문집이나 교양 서적을 집필해야 한다고도 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교양서를 집필하는 행위를 ‘낮춰 보는’ 풍조가 만연한 한국 경제학계 풍토에서 쉽지는 않으나 우리나라 최고 수준 경제학자들이 이 일의 선두에 선다면 학문 풍토를 쇄신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잘 사는 것 못지않게 남이 잘 사는 게 중요하다.”
- 경제학의 근본 과제는 풍요한 삶(Wealth)과 행복한 삶(Welfare) 사이 균형을 찾는 것이다. 두 개 목표를 원만하게 달성하는 방안을 찾는 게 경제학의 근본 과제라는 게 이현재 생각이다.
- “Wealth는 어떻게 하면 개개인이 잘 사는가 하는 문제이고 Welfare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가 조화롭게 사는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잘 사는 것 못지않게 남이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잘 살고 남도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안이 무엇인가를 모색해서 실천에 옮기는 게 경제학자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현재는 누구.
- 1929년 12월 20일 출생. 충남 홍성 출신.
- 1953년 서울대 상과대 졸업. 1969년 동 대학원서 경제 박사 학위 취득. 1961년 서울대 교수 부임.
- 1983년 제16대 서울대 총장 취임.
- 총장 시절인 1985년 5월 서울대·연세대·고려대생 73명의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 발생. 학생들을 제적시키라는 정부 압력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다가 퇴진했다. “법원에서 유죄가 나오면 학칙 위반으로 처벌하겠다. 그러나 학교에서 선행해서 처벌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올바른 일이 아니다”라며 정부와 이견을 보였다.
- 1988년 노태우 정부 초대 국무총리.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하는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
- 1995년 정년 퇴임 후 서울대 명예교수 활동 중. 생존 중인 전직 국무총리 가운데 최고령이자 최선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