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원 칼럼] 저항이란 무엇인가. 저항(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본 탄핵 집회의 상징 응원봉의 의미,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제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펼친 다양한 저항의 모습들. (⏳4분)

‘저항’이란 무엇인가.

저항은 사회운동과 다르다

사회학에서 저항(resistance)은 사회운동(social movement)과 다르다. 긴 이야기를 축약하자면, 사회운동은 ‘전략적’으로 접근하고 해석될 수 있다. 사람을 어떻게 모으고 조직화하고, 집단행동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에 관한 체계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

반면, 저항은 전략적 관점을 거부한다. 저항 이론은 유럽 사회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구체적으로 부르디외, 푸코, 스티븐 룩스 등의 논의에 많이 기댄다.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폭력에) 순응하게 만드는 권력에 대한 반대 행위”가 저항이다. 권력이라는 작용에 대한 모든 반작용이 다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회가 하나의 신체라면 사회운동은 ‘외과학’에 가깝고, 저항은 ‘내과학’에 가깝다. 원인이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고, 떼어내거나 수술할 수도 없지만 우리를 아프게 하는 권력은 분명 이 사회에 깊숙이 침습해 있다고 보는 셈이다.

그러한 점에서 저항을 연구하는 이들은 한두 명의 국회의원이 바뀌거나 대통령이 바뀌는 것으로 사회에 숨은 권력 지형이 모두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는 입장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권력 행위자를 쓰러뜨리는 문제 그 자체보다 통치 문화를 전복하는 일에 관해 더 골몰한다. 이게 속 답답한 소리처럼 여겨진다면 어쩔 수 없다.

저항학의 렌즈로 본 탄핵집회 응원봉

그러나 한편으로 저항학은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가령 이번 탄핵 집회부터 새롭게 등장한 응원봉의 역할과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체감할 수 있다.

주류 정치학자라면 응원봉을 들던, 사시미 칼을 들던, 빗자루를 들던 100만 또는 200만의 머릿수가 모일 만큼 모였기에 탄핵이 결국 가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보인다. 합리주의적∙경제학적 접근에 기반하여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입장에서 응원봉 같은 건 탄핵 유무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냥 치장품의 일종일 뿐.

그러나 저항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응원봉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케이팝 응원봉은 집회 참가자들의 ‘빨갱이∙종북∙좌파’ 딱지를 원천 차단하는 성물과도 같았다. 케이팝 응원봉을 든 빨갱이는 없다. 케이팝은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나타난 문화적 현상이고, 응원봉은 케이팝 산업계 안에서도 가장 상품화된 물건 중 하나다. 그러한 점에서 응원봉을 든 시위는 200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집회 문화를 상징하던 촛불을 든 시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촛불은 2002년 미국 장갑차에 압사당한 미선/효순양 추모식때부터 등장했기에 ‘반미주의의 상징’이자, SOFA와 FTA의 반대 의미를 안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촛불을 든 시위는 ‘종북 시위’로 프레이밍이 가능한 셈이다. 그러나 응원봉은 그렇지 않다.

나아가 응원봉은 형형색색 서로 다른 색깔을 비춘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모습을 상상케 하는 힘을 갖는다. 모두가 주황색의 불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빨주노초파남보의 응원봉을 들고 있고, 그 응원봉 집회 문화 너머에는 LGBT 활동가들의 역사가 함께 담겨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오타쿠의 문화도 담겨있고, 10대 아이돌부터 60대 트로트 가수들까지의 사연도 담겨 있다. 응원봉의 등장은 ‘힘 대 힘’ 격돌로 인식되어 왔던 집회의 성격을 다원적인 양상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저항의 순간, 사물 시간 장소 행위

저항을 연구하는 이들은 저항의 순간에 수반되는 사물, 시간, 장소, 행위를 유심히 관찰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권력을 전복시키고 저항 문화를 형성하는지 연구한다. 나아가, 같은 응원봉을 흔드는 행위가 한 번 이루어질 때와 네 번 다섯 번 반복될 때의 의미도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

이 글에서는 응원봉 하나를 가지고 저항학의 예제를 짤막하게 풀어보았지만, 사실 저항이라는 개념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은 무척 많다. 우리는 항명하지 않은 군인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직접적인 항명만 과연 인정받을 수 있는 저항일까.

  • 선관위를 털어오라고 시킨 대통령과 상사의 말을 듣고 따르는 척하며 편의점 가서 40분 동안 죽치며 컵라면 먹다 오는 것은 저항이 아닐까.
  • 특임대가 총을 거꾸로 매고 국회를 배회하는 것은 저항이 아닐까.

연대의 가치를 되살리는 (미시적) 저항의 의미

우리가 이런 미시적 저항, 의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주어지는 사물, 시간, 장소, 행위를 조금씩 뒤틀어가며 나와 상대를 지키려고 하는 저항 행위에 관해 충분히 연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이쪽 편’과 ‘저쪽 편’으로 나누어질 뿐이고, 갈등을 평면적인 것으로 이해하며 상대의 위치성과 고뇌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영원한 증오의 정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세계는 빠르게 개인주의화하고 전통적인 사회운동의 조직력은 급속도로 무너져간다. 연대를 되살리는 운동도 더없이 소중하지만, 그에 앞서 연대의 가치를 잊은 사람들이 연대와 저항의 의미를 다시 꿈꿀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응원봉을 들고나오는 것도, 다시 만난 세계와 아파트 노래를 부르는 것도, 선결제하는 것도, 상부 지시에 아랑곳하지 않고 컵라면 불어 터질 때까지 편의점에 앉아 죽치며 시간 죽이고 있는 것도 다 어찌할 수 없는 제 삶을 지켜나가는 와중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행위임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저마다의 저항이 모두 연결되어 이 사회를 지금 지탱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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