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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케이스] 왜 악당의 차별과 혐오가 승리했는가. 승자의 오만 혹은 패자의 체념으로 결과에 끼워 맞춰진 신화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인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분석합니다.(⏰15분)

죽거나 죽이거나.

선거에 관해 중요한 사실은 둘뿐이다. 승리 혹은 패배.

물론 선거가 끝난 뒤에도 ‘그것 봐, 내 그럴 줄 알았지’ 오만한 승리의 말 잔치, 쓰라린 패배의 푸념이 난무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 경우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평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이번 기회에’ 쏟아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트럼프가 이기고, 해리스가 졌다. 선거에서 중요한 건 그것뿐이다. 그렇게 선거는 끝났다. 그럼에도 선거에 관해 이야기한다. 선거 이후에도 세상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캡콜드(김낙호 드렉셀대학교 교수)에게 미국 대선, 선거가 끝난 뒤에도 해야 할 이야기에 관해 물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16]

미국 대선 그 후:
그래도 계속 해야 할 이야기들

질문 정리: 민노

정체성 정치: 공화당의 적반하장


‘정체성 정치’란?

정체성 정치는 전통적인 다양한 요소에 기반한 정당 정치나 드넓은 보편 정치에 속하지 않고 성별, 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 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을 의미한다. (위키백과, ‘정체성 정치’ 중에서)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당이 정체성 정치를 하다가 졌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공화당이 정체성 정치로 이겼다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선거라는 게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때다!’하고 떠벌리는 사람들로 넘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바람과 불만이 뒤섞여서 자기 반영적 해석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우익에서는 민주당이 정체성 정치를 해서 이렇게 졌다고 놀려 먹는다. 정치적 올바름(PC)이나 워크(Woke; 깨어 있는; 인종적 편견과 차별에 대한 경계를 의미)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반발 심리 때문에 우리(공화당)가 이겼다! 그렇게 놀려 먹는 거다. 그런 조롱에 민주당 지지자 일부도 말려드는 형국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히려 정체성 정치로 이익은 본 건 트럼프다. 트럼프는 ‘밀려난 백인 정체성’ 달리 표현하면 반(反)이민자 정서를 통해, 전통적 남성성 동맹을 통해 정체성 정치를 펼쳤다. 그래 놓고 오히려 민주당의 해리스가 여성, 흑인, PC, 워크(Woke) 등을 강조한 정체성 정치를 펼쳤다고 비난한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다.

해리스 제공. 2024.10.26.
민주당의 정체성 정치? 오히려 피해왔다

오바마 후기에는 아무래도 일부 PC “과잉”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가령 성 정체성을 존중해주자는 차원에서 he나 she 대신 they로 쓰자는 둥의 움직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미시적인 문화의 문제에 대한 불편을 사람들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평소 쓰던 그(he)나 그녀(she)를 썼을 뿐인데, 성중립 인칭대명사로 그 사람들이 새로 정한 ‘그이(they)’를 쓰지 않았다고 (= 그러니까 개념 없다고) ‘까이는 걸’ 불편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거다. 방향의 옳음 여부와 별개로, 언어를 통제하는 느낌을 준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바마 집권 후기에 일부에서 표현된 문화적 경향일 뿐이고, 2024년 선거에서 그런 과도한 PC적 억압 때문에 민주당 해리스가 패배했다고 해석하는 건 정말 넌센스다. 그리고 거짓말이다. 오히려 해리스는 ‘전략적으로’ 여성이나 LGBT 같은 특정한 정체성 정치의 상징을 피했다고 보는 게 맞고, 민주당 차원에서도 2016 힐러리의 패배 이후에는 정체성 정치로 해석되는 행보를 피해 왔다고 봐야 한다.

정체성 정치를 악용한 공화당

반면 공화당은? 그야말로 정체성 정치를 악용했다. 반(反)이민자 정서를 강조하고, 중서부 아이티 난민이 동네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악질적인 프레이밍으로 이주자에 대한 악의적 이미지를 유포했다. 백인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 정치를 아주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가령 해리스를 지지하는 여성들을 보라면서 우리 남성들은 우리 자신의 남성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식의 차별적 배타적 전략을 구사한 건 민주당이 아니라 공화당, 트럼프였다.

왜 악당의 차별 혐오가 승리했는가


그런 악의적인 선동, 저질 프레이밍이 왜 효과를 거두었을까. 미디어나 대중적 인식의 하향 평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미국의 선거 관리 방식, 특히 금권선거를 가능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특히 일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금권선거는 미국 유권자의 인식 수준을 ‘적어도 한시적으로’ 하향 평준화한다. 그리고 기성의 언론의 ‘제정신 세탁’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금권에 바탕한 미국식 정치광고

미국의 선거 기간은 꽤 길고, 그 짧지 않은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이 뿌려진다. 그야말로 달러 홍보의 융단폭격이 펼쳐지는데, 악의적이고 차별적이며 혐오표현마저 아무렇지 않게 내보내는 선거 광고에 관한 내용 규제는 거의 전혀 없다. 악의적 정치광고와 상대방에 대한 흑색선전이 난무한다. 특히 공식 선본 외곽의 특정 후보 지지 단체라면(흔히, 정치운동위원회 Political Action Committee) 이렇게 막 돈에 기반을 둔 정치 광고를 아무렇게나 막 뿌린다.

정책 분석은 고사하고, 편견과 증오에 기반을 둔 이미지 광고가 유권자를 공략한다. 물론 선거가 끝나면 그런 광고들 역시 모두 사라진다. 미디어 회사 입장에서도 그야말로 선거 ‘특수’를 누린다. 정책 비교 대신 특정 후보, 사실상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 후보에 관한 자극적인 공격과 비난이 난무한다. 가령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 진영의 정치 광고를 보면, 갈색 피부 이민자들이 개나 고양이 잡아먹는다는 내용이 광고랍시고 버젓이 등장한다. 그뿐 아니라 해리스가 검사 시절에 이민자를 함부로 풀어줘서 그 이민자들이 강간하고 다녔다는 내용의 광고가 나온다. 이게 첫 번째 트랙이다.

기성언론의 ‘제정신 세탁’

두 번째 트랙은 자신의 저널리즘 관행에 빠진 언론이다. 트럼프의 ‘제정신 세탁'(세인워싱, Sanewashing)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벌어진다. 트럼프의 헛소리를 제정신인 이야기로 다뤄준 기성 언론의 방법론이 이 문제를 확산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전통의 레거시 언론은 이상한 모순에 빠져 있다. 극악무도한 트럼프의 헛소리를 마치 정상적인 담론인 양 소비하는 것이다.

가령, 뉴욕타임스가 트럼프의 막장 인종차별 발언에 관해 1면 헤드라인으로 ‘트럼프, 강력한 이민 관련 발언’이라는 식으로 포장하는 게 그 대표적인 예다. 이것은 한국 언론이 트럼프를 정상적으로 포장하는 것과도 관련 있다. 왜냐하면 한국 언론은 대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정론지, 권위지를 받아쓰기 때문이다. 두 번의 세탁을 거치는 셈이다. (‘언론의 문제’는 후반부에서 좀 더 상술한다. 편집자)

민주당은 정말 노동계급을 버렸나


“노동계급을 버린 민주당을 노동계급이 버렸다는 것이 그리 놀랍지 않다”

버니 샌더스(미 민주당 상원의원)

샌더스의 발언은 2016년 자신이 힐러리 클린턴과 경쟁하던 그때의 인식에 머물고 있어서, 안타깝게도 지금은 헛소리다.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라는 건 민주당으로선 ‘기본’이지만,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의 선택을 못 받은 것과 노동계급을 버렸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왜 민주당은 노동계급의 선택을 받지 못했는가.

2016년의 힐러리 클린턴 vs. 버니 샌더스. 출처 힐러리 클린턴, Gage Skidmore, Hillary Clinton, CC BY SA ㅣ 버니 샌더스 Gage Skidmore, Bernie Sanders, CC BY SA
왜 민주당은 노동계급의 선택을 받지 못했나?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

사실 그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 중산층과 그 이하의 임금노동자, 소상공인을 노동계급이라고 할 때, 그런 것을 기준으로 한 데이터는 아직은 나온 게 전혀 없다. 업종이 아니라 수입을 수준으로 하면 연소득 10만 달러 이하로 기준을 잡을 수 있을 텐데, 그 기준과 투표와의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우선 바이든이 노동계급을 외면했는가? 질문해야 한다. 바이든은 가장 친노동 정책을 펼쳤다. 가령 자동차노조 파업에 직접 동참하기까지 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중에는 노동자를 지원하는 정책들이 매우 많다. 고용률 높이고, 실질 임금 높이는 임금노동자 친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미시간주 웨인 카운티에서 전미자동차노조(UAW) 피켓 행렬에 합류해 연대를 표명한 바이든(미국 대통령). 2023년 9월 26일. 백악관 유튜브 캡처.
유권자는 노동자 외에도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다

하지만 바이든 정책의 수혜자가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민주당 진영을 반드시 지지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다. 가령 소비자 정체성으로 물가가 올라서 그게 불만이라서 반(反)민주당 투표를 할 수도 있는 거다.

A라는 미국 유권자는 노동자로서는, 바이든의 친노동정책의 수혜를 받았다고 여기기보다는, 자기가 잘해서 임금이 올랐다고 생각하지만, 물가가 오르면 집권당을 탓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도 비슷한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노동계급에 속했지만, 인종 정체성, 남성 정체성 등 다른 변인이 작동해서 민주당을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민주당이 노동계급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퉁치면’ 황당한 거다.

이성 합리 대신 증오와 선동에 이끌린 유권자

그러면 트럼프의 정책은 친노동적일까? 쥐뿔이다. 국내 경제 정책을 큰 방향으로 보면 부유층 감세과 노조 권한 약화의 방향성을 분명히 했고, 심지어 사회보장제도를 줄이겠다고 말했다.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 노동자는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트럼프에 투표했다기보다는 인종적 정체성, ‘밀려난 자로서의 정체성’으로 혐오적 성향을 드러내는 투표를 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미국 노동자들의 주머니 사정은 오히려 조금 좋아졌다. 그런데 그런 이성적이고, 냉정한 계산이 아니라 감정적인 판단을 했다고 본다. 트럼프 캠프는 미국 소시민들의 불만과 울분이 쌓였을 때, 그 불만을 표출한 ‘(표)적’을 잘 만들었다. 민주당이 함께 이 위기와 어려움을 이겨내자 그러니까 정책적으로 돕겠다는 정석적 방법론을 사용했다면, 공화당은 ‘공공의 적’을 만들어서 혐오 대상에 그 불만을 돌리는 방법을 택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물가 올라서 살림이 팍팍하지?
그게 다 이민자들 때문이야!

밀려난 자의 분노: 혐오와 증오의 정치학


젊은 남성, 트럼프에 쏠렸다? 이대남 보수화의 미국 버전

젊은 남성의 트럼프 선택을 ‘쏠림’ 정도로 해석하는 건 과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래도 2016년보다는 늘었다. 고전적으로 젊은 층은 좌파적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미 한국에서 봤던 것처럼, 젊은 남성 유권자들은 보수 지지자 비중이 늘었다. 2024년 미국 대선은 그런 ‘이대남 보수화’의 미국화 버전으로 보면 된다.

밀려나는 것에 대한 울분,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빼앗기는 것에서 오는 혐오와 분노. 젊은 남성층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대적으로 자신이 누렸던 혜택이 축소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가령 여성 진학률을 보더라도 그런 경향은 뚜렷하다. 이들이 울분의 정서를 공유하면서 정체성 정치를 키워나가는 현상은 어떻게 보면 좀 ‘당연한’ 현상이다. 물론 당연하다는 게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정당하지 않지만 당연한 느낌

정치적 보수화가 된 젊은 남성층의 정서적 ‘억울함’은 규범적으로는 당연히 정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현상인 건 미디어든 교육이든 정치든 시민사회든 이들에게 자기가 가져야 하는 ‘몫’을 각자의 욕망에 맞춤형으로 제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함께 나누고, 서로 협력하는 세계에 관한 꿈과 소망을 품게 하는 대신에 ‘개개인의 성취와 욕망’을 기준으로 미래를 디자인했다. 학교도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의 욕망은 말할 것도 없다. 시장은 공동체의 협력과 조화보다는 개인의 욕망을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한 땔감으로 사용했다. 개인 맞춤형 욕망을 제어하고, 함께 사는 조화와 나눔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정치 세력도 그런 욕망을 부추겨 표를 얻었다. 인스타그램이나 숏폼 미디어의 소셜미디어에서도 개개인의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고, 이런 모든 욕망 기제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건 정당하지는 않지만, 당연한 결과다.

개인 맞춤 욕망에 대한 브레이크?

‘오징어 게임’이나 ‘기생충’은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했고,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개개인의 욕망에 특화된 집단과 공동체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개인의 욕망만 부추기는 시스템이 결국은 승자와 패자 모두를 파괴하고, 비극을 초래하는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런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되돌아보고, 좋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깨닫….는 건 개뿔이고, 그 작품의 성공에만 주목한다. 넷플릭스 조회수 1등, 오스카상 수상 같은 표피적인 욕망의 표상들… 실질적인 메시지와는 반대로 행동하는 미디어, 그런 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들.

결국, 좋은 말, 좋은 작품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전략적으로 이야기하면, 여전히 희망은 협업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적 협업에 있다고 믿는다.

드라마 ‘SKY 캐슬'(2018) 속 이른바 ‘예서 책상’. 맹목적 입시가 어떻게 아이들과 그 부모의 영혼을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이 드라마의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바깥 ‘진짜 현실’에서는 작은 감옥 같은 ‘예서 책상’이 최저가 245만 원짜리 ***책상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SKY캐슬의 주제 의식은 개뿔…
공동체적 협업

문화산업에서도 다양성을 수용함으로써 성공한 케이스는 많다. 한국 대중문화가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한국 문화를 다양성이라는 넓은 품으로 포용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미 대선에서 해리스의 러닝메이트였던 팀 월즈 주지사는 미네소타주에서 포용적이고 사회적인 정책을 취했다. 월즈의 노력으로 미네소타는 더 살기 좋은 동네가 됐다. 더 작은 지역 단위, 산업 단위에서는 그런 긍정적인 사례들이 넘친다. 다만, 그런 작은 성공을 국가 단위나 세계 단위에서 적용하기는 어려워서 지레 포기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작은 성공이 모여서 의미 있는 규모의 크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가 선 그 자리에서 함께 시도할 수밖에는 없다.

언론의 문제, 가령 ‘제정신 세탁’


한국 언론의 문제

미국 정론지와 권위지를 다시 정제하는 과정에서 트럼프의 ‘제정신 세탁’이 더 심화했다. 워싱턴이나 뉴욕이 미국의 전부인 우리의 척박한 언론 환경도 그런 현상을 부추겼다고 본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관한 기본 매뉴얼도 없다는 거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서 대중 여론을 형성하는 경우는 온라인이 우익화된 상태에서 정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뿌려지고, 그걸 확대 재생산하는 현상이 가속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의 ‘워크(woke) 만능론‘이 대표적이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적반하장’이라는 건 앞서 이야기했는데, 어쨌든 국내에서도 우익 지지자들을 설레게 하는 인식인 것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한국 일부 보수 언론의 이런 행태는 해당 언론 자체의 능력적 한계와 함께 다소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측면도 있다고 보인다.

2023년 8월 24일(현지 시각) 공개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머그샷. 미국 조지아주 풀턴카운티 보안관실 제공.
‘돌아이’를 정상으로 만든 미국의 정론지

‘돌아이’ 트럼프를 정상인으로 만든 정론지 문제는 다시 한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정론’이라는 것은, 정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걸 의제로써 다룬다는 거다. 그러니까 ‘트럼프’를 의제로 다루는 순간 트럼프는 의제로 다룰 만한 어떤 것이 된다. 즉,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으로 다루게 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오랜 표어는 ‘출판에 적합한 뉴스는 모두 다룬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발행하면 이야기해야 할 정상적이고 중요한 의제가 된다는 거다. 그야말로 앞뒤가 바뀐 셈이다.

심지어 뉴욕타임스 ‘굿즈’ 티셔츠에 새겨진 슬로건.

상업적인 것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같은 비영리 지역지 등이 오히려 상업 정론 권위지인 뉴욕타임스나 더 포스트보다 훨씬 더 정론의 가치와 기준에 어울리는 태도(트럼프의 헛소리를 헛소리로 비판하고, 아예 배제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영국에 기반을 두고 미국 지사를 지닌 가디언 등이 훨씬 더 명확하고 명료하게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취급’했다고 본다.

트럼프 2기의 언론 전망

‘2016 힐러리 패배 직후 오히려 뉴욕타임스 등 정론지 구독률이 치솟았다. ‘2024에는 정론지들이 대선을 망쳤다는 걸 많은 지식인이 알고 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일까? 그게 아니면 새로운 매체 혹은 방법론을 찾아갈 수도 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읽는 지식인 사회에서는 정론지가 트럼프라는 비정상을 정상화했다는 불만이 아주 크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미국 사회에서 이런 식자층의 대중적 영향력이 별로 크지 않다는 거다. 지식인 사회의 영향력이 미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제로’로 수렴한다.

그저 지식인끼리만 서로 영향력을 미칠 뿐이다. 놈 촘스키의 한마디? 대학생들 몇명 정도가 좋아하는 정도다. 영향력이 확실히 줄었다는 게 지난 10년의 흐름이다. 일시적인 이상 현상이었다고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희망을 가졌는데… 왜냐하면 2020년에 바이든이 트럼프를 이겼으니까.

2024년의 결론은 그런 희망을 가지면 안 되겠구나 하는 절망감을 주는 게 사실이다. 사려 깊은 연구, 정책 조율, 대화, 토론은 사라지고… 증오와 차별, 혐오와 선동이 이겼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런 증오와 혐오가 ‘기본’인 상황이고, 그걸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새로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이다.

신화: 혹은 결과 끼워 맞추기


미국 대선은 미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의 보복 투표다!

대표적인 신화다. 아랍계가 많이 정착한 주가 미시간주다. 그런 논리라면 미시간주는 월등하게 폭망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다른 경합주와 비슷하게 망했다.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면 그런 ‘망상’류의 신화는 다 깨진다.

데이터 너머의 진단을 남발하는 즉각적인 평론가들의 반응을 받아쓰는 언론의 행태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월즈가 상대를 ‘위어드’라고 해서 사람들 마음이 떠났다고? 순진한 발상이다. 그러면 ‘해리스는 저능아’ 같은 공화당의 조롱과 선동에는 왜 사람들이 그토록 너그러웠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공화당이 말의 잔치에서도 이겼다? 그것도 거짓말이다.

‘시간’ 없었다는 것도 신화

시간이 없어서 졌다? 그것도 신화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수 있는 변곡점을 주기 어려웠을 뿐이다. 전체 선거판을 흔들 거대 이벤트는 딱 두 개였다. 트럼프 쪽에서는 1차 피격, 민주당 쪽에서는 해리스와 바이든의 후보 교체, 이게 이번 미국 대선에서 한 번씩의 변곡점이었다고 본다. 그 이후는 그 기세를 얼마나 관리하느냐의 싸움이었다.

그 두 사건 이후 그만큼 큰 파장을 미친 이벤트는 없었다. 후보의 발언 등 문제는 눈싸움 수준이다. 해리스가 언론 인터뷰를 더 안 해서? 혹은 민주당이 선거 캠페인을 망쳤다? 실제 데이터를 보면, 해리스가 주력으로 관리한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이 다른 주보다는 트럼프와의 격차가 적다. 즉, 캠페인 효과가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선거 후반부에 해리스는 언론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오히려 트럼프가 그 반대였다.

해리스 ‘개인의 한계’라는 것도 편견과 신화

해리스 후보 개인의 문제라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해리스는 매력이 없다. 해리스는 교조적이다. 더 다양한 후보들과 경선을 거쳐야 했다 등. 그런 지적들 역시 해리스에 대한 편견에 내재한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드러내는 이야기일 뿐이다. 해리스는 기본적으로 흑인+여성이라는 핸디캡이 있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그걸 내세우지 않는 방향으로(정체성 정치를 경계하는 방향으로) 선거 전략을 수립했던 거다. 해리스는 여성+흑인이라는 이중의 편견 속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더 엄격한 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었다. 근본적으로 해리스는 유능한 검사 출신이며 정책적으로 성공한 정부의 부통령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에 차별과 혐오를 뿜어내는 트럼프와 해리스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해리스와 트럼프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트럼프 캠페인이 천재적? 결과와 원인을 뒤집은 오류

트럼프의 캠페인이 천재적이라는 것은 결과와 원인을 뒤집어서 해석하는 오류다. 선거에 승리했기 때문에 캠페인이 훌륭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트럼프 캠페인은 그 수준이나 내용이 역대급 개판이었다. 트럼프의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수지 와이스(트럼프 대선 캠페인 매니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내정)가 컨트롤했다는 지적은, 수지 와이스가 일정하게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유세 현장을 보면 하기 어려운 평가다.

머스크와 베이조스


머스크의 ‘올인’

머스크는 원래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한번 꽂히면 이길 때까지 올인한다. 테슬라도 다른 자동차 회사도 전기차 개발 부분이 있었지만, 머스크가 전기차에 올인한 거다. 무슨 천재적인 발상이나 독창적인 기술이 아니라 ‘무한 투자’였던 것. 그래서 성공한 프로젝트보다 실패한 프로젝트가 많지만, 큰 성공으로 다른 실패를 가린 케이스다. 트위터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사게 된 과정이랄지… 머스크는 천재라는 신화를 거둬내면, 꽂히면 올인하는 막무가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노골적으로 불법을 자행하며 트럼프에 올인한 머스크.
베이조스의 ‘오너질’

베이조스는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고 나서 ‘방치'(하고 싶은대로 만들어라)랄까 편집권에 자율권을 부여했다. 그러는 동안 보도 퀄리티가 높아졌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적자 폭이 커지고, 자신의 본진 기업인 아마존을 생각해야 하니까 작년부터 조바심을 냈다.

먼저 영국 보수지 출신을 편집장으로 꽂아넣음으로써, 소유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정타가 이번 미국 대선에서 해리스 지지 사설을 막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표출된 거다. 이번 사건의 교훈은 아무리 착하게 굴던 소유주도 얼마든지 망나니 짓을 할 수 있다는 것. 즉, 소유주에 대한 편집권의 자율성을 확보할 방어망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다. 그야말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민주주의는 대낮에 죽었다, 제프 베이조스 덕분에”(보스턴글로브) 다수 언론은 베이조스가 ‘더 포스트’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비겁하게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남은 이야기들


팬데믹 이후 집권 여당이 승리한 선거가 없다

아주 타당하고 합리적인 해석이다. 지금 정권 잡고 있는 정부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대부분 유권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은 팬데믹으로 인한 전 세계적 현상이고, 거기에서 우리 정부는 더 잘 대처했어! 이런 식으로 냉정하게 전 세계 정세를 살펴서 투표하는 유권자는 없으니까.

우리나라도 어쨌든 부동산 폭등 문제로 윤석열에게 투표했고. 미국은 코로나 이후 경제적인 지표가 좋음에도 인플레이션이 미치는 정서적 영향이 컸다고 보인다. 생활 물가는 아무래도 가장 피부에 와닿는다. 물가에 시달린 중위소득층 이하의 유권자가 집권여당에 반대 투표해서 그게 승부를 갈랐다고 본다. 그런 큰 틀 속에서 인종과 이민자 혐오 전략이 더해져 악의적인 정체성 정치를 선거 캠페인으로 성공시켰다고 본다. 가성비가 입증된 전략이었던 셈이다.

해리스 기대에 미치지 못한 히스패닉

유색인종도 해리스를 외면했다는 비평에 관해선 실제로 선거를 보면 인종 너머 다른 정체성이 더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주로 젊은 층과 히스패닉에서 해리스 캠프 기대만큼 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히스패닉만 보더라도 히스패닉이라는 인종 정체성은 그렇게 강하다고 볼 수 없다. 히스패닉은 워낙 부피적으로 커졌다. 인종적 정체성보다는 보수 가톨릭의 정체성, 젊은 남성의 정체성 등으로 좀 더 나뉘어져 비(非)히스패닉적 속성이 강하게 작용한 거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대표적인 히스패닉 스타 제니퍼 로페즈가 해리스 캠페인에 힘을 더했지만, 히스패닉의 지지는 예상보다 낮았다. 제니퍼 로페즈 인스타그램.
‘중서부의 예언자’ 불명예 퇴진

그 결과를 놓고 추정해 보면 꽤 팽팽한 선거로 추정된다. 다만 경합주에서 체계적으로 한쪽으로 쏠렸던 그 희박한 가능성, 그 가능성이 실현됐던 것뿐이다. 숫자가 아니라 방향성에서 트럼프 쏠림이 일어난 거다.

트럼프 과소 표집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여론조사 기관이 강력한 가중치를 부여해서 균형을 잡았지만, ‘여론조사 공진화’ 등의 문제로 인해 일관된 쏠림 현상을 여전히 포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주가 아이오와주다. ‘중서부의 예언자’로까지 불렸던 앤 셀저가 크게 틀렸다. 해리스가 이길 걸로 예측했는데(2~3% 앞서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15% 이상 격차로 해리스가 패배했다. 지역특화적인 샘플링으로 적중률이 높았던 업체인데, 크게 틀렸고, 앤 셀저는 불명예 퇴진했다. 그만큼 점점 더 선거 예측은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의 네이트 실버는 선무당 역할을 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실버의 숫자가 크게 틀리진 않았지만, 숫자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여론조사 전문가가 아닌 ‘선무당’이 된다. 사회 현상, 사람들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 숫자에 강하니까 정치와 경제가 복잡하게 얽힌 사회도 잘 분석한다? 양자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트럼프 2기, 독재에 민주주의가 묻었을 때

상상 이상의 이상한 인간들로 내각이 채워질 것이고, 지금은 잘 알려진 사람들이 모일 거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균형이랄까, 그런 기대는 없다. 하지만 너무 냉소에 빠지지 않고, 그래도 가치를 지향하는 마음, 말이라도 한마디가 필요한 때다.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에 기부라도 좀 하고…

독재와 민주주의 잔재의 하이브리드라는 표현을 쓰는 분도 있는데, 그게 독재다. 독재에 민주주의가 살짝 묻었다고 독재가 독재 아닌 게 되는 건 아니다. 독재 정부가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고 민주 정부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박정희 독재 시절에도 국민 지지가 꽤 높았다.

5.16 쿠데타(당시 5.16 혁명)를 다룬 대한뉴스 제314호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박정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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