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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케이스] 20년 전 우리는 웹2.0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유행어와 함께 개방과 참여, 공유의 이상적인 월드 와이드 웹을 꿈꿨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건 고립과 단절 그리고 증오로 들끓는 소셜미디어의 지옥이다. (⏰17분)
🎈 ‘폐허’ 3부작


🧨 소셜미디어의 폐허 그리고 그 다음 세계
🎃 매노스피어, 개방∙참여∙공유에서 고립∙단절∙증오로
🎠 결국 공론장 폐허의 해법도 ‘지역’이다 (가제)

같은 시간, 같은 공간, 다른 세계.

스마트폰. 이제 손바닥 안에 서로 다른 각자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춘기 자녀가 ‘집 안’에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안전’하다고 착각하면 오산이다. 같은 소파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엄마가 드라마에 빠진 그 순간에 아들은 ‘빨간약’(영화 ‘매트릭스’의 비유)을 먹고 여성을 위해 설계된 이 기만적인 세계의 위선과 조작을 깨뜨리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참고 기사). 그리고 기꺼이 혐오의 홍위병으로 다시 태어난다. 엄마는 아들이 뛰어든 세계를 알지 못한 채, 그저 곁에 있는 아들 모습을 무심하게 혹은 흐뭇하게 바라본다.

갈라진 채 서로에게 닫힌 세계. 그중에서도 남자들이 모여 여성 혐오와 증오, 열등감과 그 보상적 폭력성을 서로에게 확대재생산하는 무서운 세계가 있다. 매노스피어 불리는 세계다. 매노스피어(Manosphere)남성성을 강조하고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및 웹사이트 집합체를 의미한다. 개방∙참여∙공유의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에 태어난 건 고립∙단절∙증오의 ‘매노스피어’다.

이젠 빛바랜 추억, 블로고스피어…

매노스피어의 탄생과 진화에 관해 캡콜드(김낙호 드렉셀대 교수)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세계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 그 세계를 깨뜨리는 방법… 혹시라도 그런 게 있다면, 그게 뭔지도 더불어 물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24]

매노스피어,
개방∙참여∙공유에서 고립∙단절∙증오로

질문∙정리: 민노

💡 알림 안내

이 글은 2025년 8월 9일(금) 밤과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에 함축했고, 본문은 문답 형식이 아닌 인터뷰이 1인칭 독백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내용을 확인하고 협의하여 퇴고했습니다.
🔖 프롤로그(인터뷰어): 민노
🔖 본문(인터뷰이): 김낙호(캡콜드)

매노스피어, 그 ‘물적’ 토대와 기원 

‘매노스피어’ 현상은 서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기원 자체야 훨씬 오래되었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의 극우화 흐름과 맞물리면서 ‘주류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주류화의 시대적 배경, 물적 토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리먼 브라더스(2008년 9월15일 파산)로 상징되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부터 시작할 수 있다.

리먼 사태 이후 사람들은 새로운 질서를 원했다. 당시 한국은 이명박 정부 시절(재임: 2008~2013년)이라 흐름에서 비켜나 있긴 했지만, 그리스와 스페인, 미국 등에선 좌파적 접근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리스, 스페인 등의 좌파 대중주의는 금융 위기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을뿐더러, 미국 오바마 정권은 아예 당선의 기반이었던 대중주의 이미지를 벗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문제를 대체로 묻어두고 적극적인 성장 정책과 금융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 극심한 양극화로 돌아왔다. 딱히 신기한 전개는 아닌 것이, 한국도 IMF 사태라는 유사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경제는 회복했지만, 그 대가로 양극화는 더 심화했다.

이런 일련의 경제적 흐름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해결책으로는 자신들의 처지가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정치적 허무주의’가 조금씩 퍼졌다. 경제적 실패라는 토대가 초래한 필연적인 상부구조인 셈이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쫓기며 편리한 해법, 뭔가 비난하고 밀어내면 무언가 나아질 눈앞의 누군가를 찾아내고 싶기 마련이고, 이미 탐탁치 않아 하는 집단이면 더욱 좋다. 그건 여성일 수도 있고, 이민자일 수도 있었다.

이런 심리적인 흐름은 이미 인터넷에서 일정하게 지분을 가진 4chan과 같은 곳,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일베’류 공간에 갇혀 있던 남성주의 세력과 결합해 나갔다. 그런데 하필 그즈음 인터넷의 주류 사용 방식이 점차 소셜미디어라는 형식에 지배되어갔는데, 덕분에 일부러 인터넷의 음침한 구석으로 찾아가야 했던 그 정서가, 나에게 편리하게 배달되어 오는 타임라인이라는 양지로 튀어나왔다. 비유하자면, 몰래 일베를 찾아갈 필요 없이 그냥 훤히 드러나 있는 자기 소셜미디어가 일베인 셈이다. 혐오와 증오 그리고 배타적 폭력성이, 별도의 자의식과 노력 없이도 그냥 주류 공간에서 접하는 것으로 주류화한 것이다.

게이머게이트(2015): 지하 혐오 세력의 주류화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던 문화가 주류화하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공격적 배제를 근간으로 하는 퇴행적인 방식으로서의 남성주의가 주류화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다. 사회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생겨난 정치적 허무주의의 ‘대답’으로 채택된 남성성 회복 전략은 재앙을 가져왔다. 그런 재앙을 영미권에서 징후적으로 드러냈던 초기의 큰 사건이 2015년의 ‘게이머게이트'(Gamergate)다.

2015년 당시는 하드코어 게이밍을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하던 시기였는데, 연예인 기질이 다분했던 한 여성 개발자(조이 퀸)가 우울증을 다루는 어드벤처 게임을 출시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런데 게임 자체는 무척 별로였는데, 게임 매거진에서의 평가는 좋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남성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접’한 게임을 여자가 개발했다는 이유만으로 좋게 평가한 거야?’
‘조이 퀸이 게임기자와 잔 거 아니야?’

그러니 조이 퀸을, 그의 게임에 높은 점수를 준 기자를, 그 게임의 지지자들을 조져놓자. 그런 보이콧 운동을 게이머 커뮤니티 게시판을 활용하여 조직적으로 수행했다. 악의적 합성 사진도 뿌렸다. 오늘날 전형적인 온라인 집단 진상짓의 문법이 이 때 많이 설립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나름으로 승리의 맛을 봤다. 우리(남성)가 우리의 게임 문화를 지켜냈다는 쾌감 말이다. 그 즈음에 트럼프도 부상했고, 이런 흐름은 마치 시대 정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일상이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어려움이 지속하는 와중에 그간 문제라던 신자유주의 접근의 대안처럼 부각된 좌파적 대중주의의 해결 방식도 근본적 한계든 그냥 충분히 나아가지 못해서든 사실상 실패하면서 정치적 허무주의가 팽배했고, 미디어 환경 또한 모든 것이 평평하게 주류화되어 버릴 수 있는 소셜미디어로 빠르게 전환했다. 이 모든 것이 커뮤니티 속 극우적 남성 목소리가 주류화하는 환경으로 작동했다. 이런 각각의 요소는 물론 한국이나 세계 각지에서 유사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인터넷 문화는 아무래도 국경을 쉽게 넘어간다. 영미권이 일종의 (롤)모델이 되면, 그런 모델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영미권에서 왜 남성권이 중요한지, 마치 학술적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등장하고 몇몇 유명한 혹은 유명해 보이는 교수와 자칭 전문가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에서도 외국 석학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서 그런 혐오와 증오를 쉽게 수입한다. 그렇게 인터넷과 모바일로 연결된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혐오와 증오가 퍼진다.

조던 피터슨, 채널4 인터뷰(2018.01)

조던 피터슨의 채널4 여성 앵커(캐시 뉴먼, Cathy Newman)와의 인터뷰. 한국에선 ‘BBC 앵커’로도 잘못 알려졌지만, 영국 지상파 공영방송 채널4가 진행한 인터뷰다. 원본 영상 조회 수는 현재(2025.08.) 5055만 회에 이른다.
채널4 인터뷰에 한글 자막을 붙인 동영상(캡쳐). 조회 수가 현재(2025.08) 200만 회에 육박한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클리앙)에 소개된 조던 피터슨과 캐시 뉴먼의 인터뷰. 동영상 대표 이미지(공격적이고 화난 듯한 얼굴)와 문구(“하지만 성공한 여성들은…”)는 은연중에 여성에 대한 편견을 유도한다.

일례로, 조던 피터슨의 채널4 인터뷰가 무척 상징적이다. 약 30분(정확히는 29분55초) 정도 분량의 이 동영상은 제대로 된 앞뒤 문맥과 함께 유통∙소비∙재생산된 게 아니다. 대부분 몇 개의 ‘짤방’과 극단적인 요약 정리본으로 퍼졌다. 특히 여성 앵커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이 인기였다.

이것이 지금 유통되는 핫한 밈, 핫한 클립을 뿌리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내용과 맥락이 아니라 핫한 포인트로 빠르게 확산하는 방식으로 특화했다. 그래서 대화의 앞뒤 내용 전개가 아니라 그 말투, 전체가 아니라 ‘앵앵’거리는 단 몇 초의 순간으로 전체를 대신한다. 전체가 30분이라면, 겨우 몇십 초, 겨우 몇 초, 그것도 길다면 ‘짤방’ 하나.

물론 인간은 ‘내용’보다 먼저 ‘태도’에 영향받는 게 심리학적으로 누차 증명된 당연한 현상이긴 하다. 조던 피터슨은 자기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굉장히 ‘차분하고 지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동의하기 어려운 헛소리다. 자신을 유머러스하고 잘나가는 남성으로 포장해서 이야기하는데 내용은 엉망이다. 앵커인 캐시 뉴먼이 “합리적으로” 토론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조던 피터슨의 이야기가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태도의 싸움’에서 피터슨이 이겼고, 뉴먼이 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성에게만 속한 이중의 함정이 있다. 세상의 온갖 헛소리에 대해 평온하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구는 굉장히 어려운 요구다. 차분하게 대응하면 마치 그 말을 말로서는 인정하는 것처럼 되며, 오히려 흥분하고 분노하는 게 어떻게 보면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적인 분노하는 반응을 보이면, 여성이라서 감정적이고 열폭한다고 비판받는 딜레마가 있다. 그런 함정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화적 헤게모니가 어디에 가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전체적으로 피터슨과 뉴먼의 인터뷰는 남성의 피해의식 상황을 상징적으로 함축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억압받는 남성’이라는 현대적 신화를 미디어적으로 완성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잘 나가는 여성’이라는 포인트다. 정중한 남성이 공격받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잘난척하는 자들의 위선을 까발긴다는 고전적인 인터넷 공식에 ‘성공한 여성’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박살 내는 피터슨의 모습은 2030 남성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비주류의 주류화: 소셜미디어의 묵인과 공모

2000년대 초의 인터넷에서는 매노스피어를 굳이 찾아가야 했는데, 이제는 그런 컨텐츠가 내 타임라인에, 그것을 다시금 반영하고 증폭시켜주는 주류 미디어에 이미 스며들어 있는 상태다. 남성들이 더 흔하게 이야기 나누는 소재의 모임들, 소위 ‘남초’ 공간들은 세계 곳곳에서 그런 정서가 이미 상당히 스며들어왔다.

예전이라면 ‘분리수거’되어야 할 상황이 아무렇지 않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비주류의 주류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예전 온라인 환경과 현재의 소셜미디어 환경의 차이이기도 하고, 주목 경제가 유인하고, 빅테크가 조장하는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제적 담론에 대한 개입을 1. 적극 조장 2. 묵인 3. 중립 4. 방지 5. 적극 방지라는 오지선다 문제지로 보자면, 속칭 ‘빅테크’ 급의 소셜미디어 업체들은 2번 정도의 포지셔닝을 해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옛 트위터, 틱톡… 할 것 없이 모두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다.

이런 류의 상업 서비스는, 대형화하면 할수록 가두리 양식장을 목표로 삼는다. 가두리 양식장 그 자체가 수익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 거대 소셜미디어의 지상 과제는 이용자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향이라고 파악하는 것을 끝없이 계속 공급하고, 그런 취향으로 더 강하게 나간 것을 추천하는 식으로 구조화한다(영미권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빗대서 ‘토끼굴 들어가기’이라는 비유를 쓴다).

그리고 강한 주장의 극단에는 당연히 문제적 내용이 도사린다. 그런 과정에서 혐오 이슈, 선정적인 외설 이슈 같은 게 생기면, 그걸 그때 그때 지우는 정도로만 미지근하게 반응한다. 이들 거대 소셜미디어의 전략적 태도는 딱 ‘광고주 심기 불편하지 않게 정도의 대응’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론 머스크의 X는 소유주의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적극적으로 인종주의와 남성주의, 극우를 밀어붙이고 있지만, 그건 개인 놀이터에 불과한 엉터리 기업이므로 범주가 좀 다르다.

[소년의 시간]과 월즈 그리고 슈퍼맨

매노스피어는, 남성은 억압받고 있으니 여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일종의 ‘유사과학’ 세계관이 진리로 통용되는 담론 공간이다. 그 유사과학을 지탱하기 위해 유전자에 관한 온갖 이론적 헛소리와 남성성이 억압받고 있다는 사회학적 음모론이 유행하고, 그런 유행은 하나의 문화로 굳어졌다. 그런 모습을 잘 형상화한 게 ‘소년의 시간'(2025, 넷플릭스)이다.

📌 ‘인셀’에 관하여


인셀은 ‘비자발적인 동정’이라는 뜻으로, 온라인 토론에서 만들어진 조어다. 오프라인에서보다 온라인에서 훨씬 더 공격적이고, 반사회적인 독설을 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규정하기 위한 개념적 울타리가 필요했는데, 그런 울타리 중 하나가 ‘인셀’이라는 용어다. 어떤 진영이 전략적으로 고안했다기보다는 말 자체가 재밌어서 히트했다.

그런데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헛점이 많은 용어다. 일종의 손쉬운 설명을 아무렇지 않게 현상을 손쉽게 설명하기 위해 붙여 버린 것에 가깝다. 조어 자체가 정상적인 범주(자발적인 연애)를 설정한 뒤에 그런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타자화하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울분을 폭발하고 있는 거라고 설명한다. 특정한 사람들을 정상 범주 바깥으로 추방해서(타자화해서) 비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정말 반사회적인 공격을 일삼고, 폭언과 혐오와 조롱을 남발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셀’이 많을까? 그렇지 않다. 체계적 조사로 드러나는 바들은 대체로, 그런 사람들 중 인셀 비중은 매우 낮고, 그 ‘정상’과 ‘보통’의 범주에서 멀쩡하게 사회생활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그냥, 사람이 문제다.

남성에게 연민을 보내는 세계관은, 남성들 위주의 사회적인 접촉에서 더 강화할 수밖에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해법에 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결국 오늘날의 사회현실에 바람직한 남성 ‘롤 모델’이 없어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옛 시대의 전능한 가부장 남성상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데, 남성 청소년들, 청년들에게 그런 상을 잃었다는 혼란만 던져지고 새로 배워나갈 대안적 남성상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일리 있는 이야기다.

롤 모델에 관해서는 상징적인 사건이 지난해(2024) 미국 대선에서 팀 월즈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케이스다. 월즈는 기본적으로 마초의 요소가 깔려있다. 사냥을 즐기고, 자동차를 정비하고, 아무거나 주워 먹는 등 전통적인 미국 남성성을 품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타인에게 친절하다. 때로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무엇보다 다양성과 발전의 가능성을 그냥 인정한다. 그렇기에 월즈가 한층 더 진화한 대안적 남성성으로 주목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리스와 대선 캠페인을 함께 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떠나기 전에 가족들과 함께 사진 촬영하는 월즈(위줄 왼쪽). 맨 앞에서 사진을 셀프 사진으로 찍는 여성이 월즈의 딸 ‘호프’. 우리나라에선 ‘희망’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이런 이미지가 훨씬 더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점은 아쉽다. 이것은 오롯이 민주당의 캠페인 능력의 부족 때문인데, 소위 ‘문화전쟁’을 피해가야한다는 방구석 책략에 얽매여서 강조의 타이밍을 놓쳤고, 결국 대선 패배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월즈의 롤모델, 그러니까 전통적인 남성성에다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적 친절함까지 겸비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렵다는 거다.

매노스피어의 남성 롤모델은 철저히 알파의 법칙, 그러니까 힘의 우위를 가진 지배자다. 친절이 아니라 동물 무리와 같은 모델이다. 물론 이런 것을 추구하는 건 스스로도 폐허가 되어가는 혹독한 과정이지만, 그래도 남들 모두를 챙기는 친절보다는 상대적으로 좀 더 간단하다. 나만 강하면 되고, 문제가 생기면 강한 내가 상대를 눌러버리면 되니까. 한 마디로, 야망 없이 대충 쉬운 롤모델에 만족하는 것이다.

월즈가 부통령이 됐다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친절한 남성성이라는 롤모델이 미디어에 지속해서 노출됐을 것이고, 그런 모습이 좀 더 일상에서 긍정적인 파장을 일으켰을 거다. 그런데 결국 매노스피어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화신인 트럼프가 당선되었고, 그것은 강함으로 모두를 복종시키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 ‘알파’를 배알 없이 따르며 주변에는 강함을 과시하는, ‘졸개’의 남성성이 바로 밴스 부통령이고.

그럼에도 내가 월즈를 하나의 긍정적인 상징으로 보는 것은, 어쨌든 선례가 생긴 그 모습이 앞으로 대중문화 컨텐츠에 적극 반영될 것으로 전망하기 때문이다. 최근 좋은 사례가 바로 제임스 건의 ‘슈퍼맨'(2025)인데, 그런 ‘진화된 남성성’의 모습을 표현한다. 우주 악당을 때려 부수는 그런 남성성의 화신으로서의 슈퍼맨이 아니라서, 실망을 표하는 관객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묘사된 슈퍼맨은 약한 게 아니다. 주변을 살피면서 그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거다.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도 피해받을 수 있는 시민들을 살피고, 심지어 다람쥐까지 구하는 슈퍼맨이다. 그러니까 때려잡는 것보다 구하는 것에 집중하는 슈퍼맨이다. 그 슈퍼맨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을 돕는 게 지금 시대에는 최고의 반항(펑크락)이다.”

슈퍼맨(2025)

예전에는 펑크락이라는 게 주류 문화에 반항하면서 때려 부수는 것인데, 지금은 정반대 시대가 됐다. 그런 식으로 새로운 슈퍼맨을 만들었다. 현재 극우화한 미국의 이미지 때문에 세계 전역에서의 흥행은 별로지만, 미국 내에서의 반응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극우에 빠진 내 아들 구출하기’ 담론에 관하여

어쨌든 매노스피어는 오늘날 인터넷 접속할 줄 아는 남자들의 소통이 이뤄지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피어오를 수 있다.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집에 있다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다. 그건 어른들 생각이다. 물론 이런 지적이 새로운 건 아니다. 가족은 사회화가 시작하는 공간이지만,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또래 집단이 가장 중요해진다. 그런데 예전에는 대체로 학교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통해 사회화했다면, 지금은 모바일로 접속할 수 있는 환경 어디에서나 또래 준거 집단에 접근할 수 있다.

이들 사춘기 소년은 자기들 사이에서 권력을 가늠하는 실험을 언제나 어디서나 계속 진행한다. 그 안에서 강고한 정치성을 만들어서 ‘센 척’하면서 집단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견디지 못한 채 튕겨 나오기도 한다. 이들이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 쓰며, 짤방 올리는 그 모든 과정이 이들 나름의 치열한 권력 작용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떻게 주목받는지 학습하고, 반응하며 전략과 전술을 배운다.

가족 외부 집단의 사회화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포섭과 배제다. 누구를 우리 안에 포함하고, 누구를 우리 ‘바깥으로’ 추방할 것인가. 반면에 가족에는 포섭과 배제가 없다(의절, 이혼 같은 심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난도 높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가족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이니까.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포섭과 배제의 ‘게임’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그 게임은 대개 언어를 매개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게임의 공식, 성공의 치트키는 ‘사이다’다. 우리 남성 집단이 사실은 킹왕짱인데, 여성에게 핍박받는다는 스토리는 커다란 집단의 관심을 빠르게 집중시킬 수 있는 최고의 사이다 중 하나다. 사회화 학습의 단기적 쾌감으로 치자면 가족과 온라인은 비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집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극빠아'(극우에 빠진 내 아들) 담론에 관해 내가 비판적인 이유는 가족 안에서의 권력관계를 경시한다는 점이다. 또래집단, 나아가 온라인 공간에서의 사회화에서는 권력 서열이 어찌 되었든 나 하기에 따라서 유동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내가 더 맞는 말을 하면, 내가 더 재미있으면, 내가 주먹이 더 강하면, 내가 더 절실하면 내 말을 들어줄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은 그런 이치가 통하지 않는, 고정된 서열이다. 그렇기에 가족 관계 안에서는, 아무리 표면은 ‘대화’를 내세우더라도 실상은 자녀를 일방적인 훈육 대상으로 삼는 것이 된다. 오히려 비판이론이든 뭐든 간판으로 합리성을 포장할수록, 그런 이미지 자체가 자녀들에게는 위선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엄마들은 이 책을 읽고 ‘극우 유튜브’에 빠진 아들을 구출할 수 있을까. 단 한 명이라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니까 그런 방식은 별 효과가 없거나 역효과가 올 가능성이 다분하다.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문화의 본질적인 규칙이 있다. 모든 세대는 자신을 키운 부모 세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 소위 서구의 락큰롤 문화, 히피 문화, 68혁명이 그런 반항과 저항을 상징하고, 한국에서도 청바지 문화, X세대가 그런 걸 상징했다. 민주화 세대 부모의 라떼 세례를 받은 지금의 젊은 층이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다를 바가 있을까. 그 모색의 해답을 하필 극우에서 찾지 않도록 도울 수밖에.

그렇다면 도대체 부모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족 안에서 자녀가 배우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모방’이다. 아이들은 어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아이들은 관찰하고 모방하며 배운다. 그걸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야 당연하고, 어머니라도 성인 남성은 아니라도 어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보여줄 수 있다.

그러니까, 비판이론으로 무장한 대화법보다는 그저 그냥 보여주면 된다. 가령, 뉴스에 생각할 만한 이슈가 등장하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숙제하듯이 물어보는 게 아니라, “이런 사건에 관해서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런 생각이 드네”라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어른의 태도로서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비판이론이든 뭐든 어른의 무기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자녀와 ‘토론’으로 포장한 채 대화한다는 것은 사실 기만에 가깝다.

어른은 스스로 자신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보여주는 것의 본질에는 ‘책임’이 있다. 그것뿐이다. 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여러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다시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합리적이고 명확한 조치를 취하는 것.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직접적으로 아이들의 삶에 들어가려고 하지 말고, 그저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나는 그게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승자와 패자: 매노스피어의 정치경제학

매노스피어는 거기에 참여해서 거주하는 소년, 남자에게 평화를 주는 게 아니다. 매노스피어는 남성성이라는 힘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세계관이다. 그게 매노스피어의 본질적 가치다. 그런 가치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소년은 결국 자기 자신마저 황폐화한다.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을 폐허로 만든다.

비극은 스스로 황폐화하면서도 대다수는 점점 더 폐허로 변하는 자신을 스스로 어느 정도는 자각하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만족감과 결핍을 타인, 특히 여성과 사회적 약자, 가령 이주노동자에게 투사하면서 그런 악순환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그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때로 강렬한 동물적 쾌감을 준다. 그런 쾌감으로 폐허가 된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 견딜 수 있기도 하다.

이들은 대체로 ‘저들’ 때문에 ‘우리’가 손해 본다는 제로섬 게임의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배타성과 혐오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고 한다. 물론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이런 혐오와 증오로 더 황폐화하는 결핍의 세계에서도 이익을 보는 사람은 있다. 극우 정치는 이런 혐오와 증오를 숙주 삼아 성장해 왔다. 가령,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이런 세계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정치인이다. 빅테크는 그런 주목 경제의 효과들을 ‘묵인’하고, 소극적이고 파편적인 대응으로 이익을 추구한다. 일론 머스크 같은 자는 대놓고 ‘다 X까라’ 선언한다. 거대 소셜미디어를 개인의 악세사리인 양 운영한다.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후 재택근무 폐지, 주당 80시간 노동 등 고강도 업무 지시에 반발해 2022년 11월 18일~20일 사무실을 일시 폐지하는 일이 있었다. 이용자들은 트위터 #트위터 명복을 빕니다’(#RIPTwitter), #잘 가 트위터#GoodbyeTwitter)’ 등 해시태그를 밈으로 사용했다. 머스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패러디를 다시 조롱하는 의미로 트위터 로고를 묘비와 사람 얼굴에 붙인 이미지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2022년 11월 18일 모습.

페이스북은, 유튜브는 어떤가. 점점 더 혐오 표현을 묵인하고, 용인한다. 다 주목 경제 효과를 최대화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욕망으로 문제가 너무 커지면, 개별적으로는 소송까지 가는 일이 생기지만 A를 기소해서 처벌을 가해도 거기에 BCD 더 많은 비슷한 이들이 달라붙는 구조다. 마치 신화 속 뱀의 머리를 한 히드라처럼.

진짜 어른 롤모델과 차별금지법

사회 문화적인 바탕으로 ‘진화한 어른의 롤모델’을 전략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 대중 문화 속 제임스 건의 ‘슈퍼맨’, 정치에서 지난 미국 대선의 팀 월즈 같은 롤모델이 계속 생겨나야 한다. 집안에서든 학교에서든 그 사회의 권력관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다만, 어른의 논리를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대화를 빙자한 토론 같은 건 지양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른과 아이는 수평적으로 대등하게 토론할 수 없다. 굳이 토론하려고 한다면, 함께 문제를 해결할 공동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법론으로 토론하면 족하다. 그래서 토론이라기보다는 브레인스토밍 같은 거랄까. 논쟁보다는 함께 하는 탐색, 모험 같은 느낌으로 아이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해보면 좋겠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개별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을 쓰는지 규제할 수는 없고, 서비스 운영자에게 더 강한 책임을 물을 수밖에는 없다. 특히 오정보에 대한 더 빠르고 정확한 대응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혐오적 표현에 대해선 분쟁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뉴얼이 필요하다. 주목 경제에 따른 수익에 비례한 책임과 규제가 필요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수반해야 한다. 물론 아주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서가 필요하겠지만.

학교든 직장이든 롤모델이 필요하다. 상대방에게 군림하는 모델보다는 ‘어른 김장하’와 같은 진짜 어른이 필요하다. 그런 다큐가 흥행한 걸 보면 우리 사회에도 그런 욕구는 아주 강하게 존재한다. 단, 하나 아쉬움은 ‘어른 김장하’를 너무 신기하고 특이한 사람처럼 묘사한 건데, 그것보다는 좀 더 평범한 사람들도 좀 더 작게나마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표현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빠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건 역시 당국의 적절한 규제이긴 한데, 좀 야심 차게 나아갈 필요가 있다. 온갖 세부적 사안에 대응하는 모델을 찾기 위해서는 더 나은 포괄적 디딤돌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게… 바로 ‘차별금지법’을 입법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다양한 이들을 함께 포용하여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기본 가치이고,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 제도로서 박혀 있다는 강력한 사회적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주춧돌 제도가 박혀 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부 제도들, 더 나은 방법론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런 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매노스피어가 사랑하는 ‘강자 지배’ 패러다임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황인숙,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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