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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케이스] 주머니 속 휴대폰으로 전 세계 누구와도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기적의 시대, 하지만 그 기적으로 만든 건 폐허, 증오와 혐오의 사막…(⏰13분)

프롤로그: 폐허, 그 다음 세계

[제3의 물결] (1980)로 유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 책에서 ‘프로슈머’라는 조어를 처음 썼다. 토플러는 [부의 미래] (2006)에서 ‘인터넷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를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별을 없애고,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고, 소비자이면서 생산자인 ‘프로슈머’의 대표적 사례로 소개하고, 버너스-리가 대중화한 월드 와이드 웹이 그런 프로슈머의 토양으로 기능하리라 전망했다.

토플러의 평가와 전망은 정확했다. ‘개방 공유 참여’라는 웹 2.0이라는 구호와 함께 인터넷은 대중화했고, 그 인터넷을 상징하는 ‘1인 미디어’ 블로그의 시대가 잠시 꽃피웠지만, 빅 테크와 소셜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열린 연대와 공유의 문은 조금씩 닫혔다.

페이스북이 ‘좋아요’만 있는 ‘멋진 신세계’를 창조하고, 애플이 앱스토어로 상징되는 폐쇄적인 DRM(디지털 저작권 보호∙관리 기술) 시스템을 공고히 하면서 인터넷을 그 이전의 인터넷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가자, 팀 버너스-리는 “인터넷이 조금씩 닫혀가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우리는 어쩌면 연결할 수 있는 자유를 잃을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프로슈머’라는 표현은 [제3의 물결](1980)에 처음 등장한다. [부의 미래](2006)에서 앨빈 토플러는 ‘월드 와이드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와 같은 자발적인 창조자/참여자들이 프로슈머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면서 이들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허물어 뜨릴 것으로 봤다.
팀 버너스-리 경.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WWW 개념의 기초가 된 인콰이어(Enquire)를 개발했고, 1989년 글로벌 하이퍼텍스트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대중적 ‘인터넷’ 월드 와이드 웹으로 ‘인터넷 혁명’의 초석을 마련했다.

팀 버너스-리의 한탄과 경고로부터도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제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의 조각으로, 알고리즘 시스템의 데이터 더미로 거대한 빅 테크의 안락한 소셜미디어 세상 속에서 기거한다. 사회를 향한 우리의 분노는 이제는 누군가를 향한 조롱이 됐고, 서로 다른 목소리와 연결할 수 있는 자유는 함께 눈먼 증오와 혐오의 타겟을 쫓는 하이에나의 본능으로 변질했다.

그 풍경을 캡콜드는 ‘인터넷의 폐허’라고 불렀다. 그 폐허에 관해, 그리고 그 폐허 다음에 올 세계에 관해 캡콜드(김낙호 교수)에게 물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23]

소셜미디어의 폐허
그리고 그 다음 세계

질문∙정리: 민노

💡 알림 안내

이 글은 2025년 7월 11일(금) 밤과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에 함축했고, 본문은 문답 형식이 아닌 인터뷰이 1인칭 독백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함께 내용을 확인하고 협의하여 퇴고했습니다.
🔖 프롤로그(인터뷰어): 민노
🔖 본문(인터뷰이): 김낙호(캡콜드)

옛날 옛적 인터넷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는 많은 이들이 인터넷 공론장의 가능성을 꿈꿨다. 하버마스식 이상적 공론장 개념을 살짝 적용하되 학술 용어를 피하고 단순화하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가 삶의 경험을 열린 공간에서 공유하고, 이야기하며, 사회적인 의제들에 관해 문제제기하고 각자의 유사하거나 상반된 체험을 던진다. 사회적인 대처 차원에서도 일정한 여론을 형성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강호’의 전문가가 참여해 ‘덕후’스러운 고급 지식까지 더한 후에 언론 등을 통해서 이슈화하고, 정치를 통해 제도화하는 것. 이런 이상적인 모습을 인터넷 공간의 개방적, 연결적 특성을 통해 어느 정도는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옛날 옛적 인터넷에선 ‘디지털’ 낙관주의가 있었다.
요즘 인터넷과 커뮤니티에는 매번 새로운 ‘혐오’ 스테이지가 올라온다. 이 모든 일이 아무런 교훈도 성찰도 없이 반복된다.

2020년대의 현실은, 시작 부분만 비슷하다. 자기 삶의 문제와 체험을 공론장에 던져 넣는 것까지. 그런데 그다음 단계에서, 함께 조롱하고 혐오하는 손쉬운 길을 택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조지는’ 방식으로 그 해당 문제를 감정적으로 소비하고, 동시에 위로받는다. 그런 커뮤니티 ‘진창’을 접하게 되는 강호의 전문가들은 그런 더러운 쓰레기통에 끼고 싶을 리 없고, 분야 지식은 빈약해도 관심을 모으는 것으로 장사하는 것에 특화된 이들만 붙게 된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 모든 혐오의 소동이 일주일만 지나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혐오 스테이지가 올라온다는 것이다. 도돌이표인 셈이다.

PC통신에서 블로그로, 블로그에서 소셜미디어로

그렇다고 요즘 사람들은 화가 참 많다는 성악설이나, 인터넷 기술은 사람을 타락시킨다는 식의 기술결정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쓸만한 공론장이 이뤄지기에는 당대에 부족했던 미디어 환경, 그러니까 기술과 서비스와 그를 통해 생겨나는 활용 문화가, 하필 우연히도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지는 순간이 있었는가의 문제다. 예를 들어 한국 온라인 공론장의 발달 내지 퇴화 과정을 이렇게 나눠볼 수도 있다.

PC 통신: 초기 게시판 시대에는 여전히 기성 언론이 먼저 의제를 먼저 제시하고, 사람들은 하이텔이든 한토마든 그렇게 올라온 의제에 관해 주로 이야기했다. 의제는 주류 언론이 결정했지만, 실질적인 토론 내용은 주류 언론의 필터링 기제들(뉴스 가치, 저널리즘 기준, 상업적 기준 등등) 없이 좀 더 생생한 이야기가 가능해서 이런 게시판들이 ‘대안 언로’로 기능했고, 주류 언로에서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피시통신과 초기 게시판을 통해서 표출한다. 주류 매체와 구별되는 대안적인 매체의 가능성이 맹아 형태로 존재했던 시기다.

블로그: 게시판의 대안적인 공간을 체험한 이들은 그 체험을 기반으로 ‘나의 매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기 개인 홈페이지가 자기 이력서를 벽보로 붙이는 식이었다면, 블로그는 ‘발간’에 가까웠다. 그 안에서 자기의 전문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또 블로거들끼리 서로 연결(트랙백, 메타블로그)해서 ‘연결된 전문성’의 형태로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스스로 자신의 진실을 호소하는 문화가 생겼다.

소셜미디어: 그런데 늦어도 2010년대 중반쯤에는 확연히 온라인을 평정한 소셜미디어의 시대정신은 확실하다. 내용은 개뿔, 관심을 끌면 장땡인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더는 내가 축적된 품질을 관리하는 ‘나의 공간’은 없고, 그저 실시간의 ‘타임라인’만 있을 뿐이다. 정보는 파편화하고 흘러가는 화제성으로만 남게 됐다. 더는 전문성을 축적할 필요가 사라졌고, 화제와 주목성이 중심 가치가 되었으며, 사회적 이슈에 문제의식을 품고 순차적으로 고민할 필요 역시 줄어들었다.

주류 미디어 방식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온라인에서 무언가를 던지고 수용하는 사용자 문화의 기대 자체가 변하면, 심지어 같은 기술이라고 해도 그 성격이 달라진다. 대표적인 예가 게시판 커뮤니티인데, 가령 예전 황우석 사태를 생각해 보라. 거대한 권력의 담합 구조와 대중 대다수의 광풍에 논리적으로 균열을 낸 게 포항공대 브릭과 디시 과학갤 등의 게시판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의 게시판 문화에만 익숙한 사람들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웅’ 황우석. 그 광기와 광풍에 균열을 낸 건, 지금으로 보면 믿어지지 않지만, 브릭과 디시 과학갤 등 온라인 커뮤니티의 이성적 활동이었다.

초기 피시통신과 게시판, 블로그 시대의 사용자 문화는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그것으로 토론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연대하는 것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역설적으로 그것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고 남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들에게만 유인가가 있는, 진입장벽 있는 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드디어 ‘상업 공식’이 완성되고, 그 공식으로 만들어진 시대의 키워드 ‘인플루언서’가 태어났다. 사용자 문화가 그 틀을 중심으로 최적화되면, 세상에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이들보다는 상품을 광고해 주는 이들에게 더 상업적 활용 가능성이 생긴다. 그런 쪽이 주류가 된 모습을 보다 보면, 인터넷에서 사람들 일반이 기대 자체가 거기에 적응해 버리고.

시대의 주류적 미디어 형식이 바뀐다고 해도 기존 지배적 형식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유튜브 시대, 틱톡과 인스타그램, 릴스와 숏폼의 시대라고 해도 TV와 라디오, 신문과 잡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주류적인 소통 방식을 새로운 미디어 형식과 그것에 적응하는 사용자 문화가 대체하는 식이다.

김어준과 딴지일보, 인플루언서의 탄생과 진화

딴지일보도 흥미로운 사례인데, 위의 여러 시대를 고스란히 통과하며 속성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1998년 7월6일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분명히 ‘대안 잡지’였다. 엄숙함을 뒤집는다는 모토를 건 패러디 언론으로, 본질적으로 비상업적인 시도였다(이 시기, 나 또한 딴지일보에 연재 및 기고 글을 썼던 적이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황우석 응원에 몰입하고 ‘나꼼수'(2011년 4월27일~2012년 12월18일)를 시작하는 등의 시기를 분기점으로 상업적 이슈 인플루언서에 가까운 매체로 탈바꿈했다고 본다. 풍자 유머를 가미해서 다양한 전문적 정보를 전하는 접근은 쪼그라들고, 자기편 설레게 하는 선정적 음모론의 매력만이 폭발했다.

인플루언서는 과거 블로그 주류 시대의 전문성을 대체했다. 블로그 시대에는 각자가 자신의 주제에 대해서 블로깅을 하고 그것이 해당 공간에 축적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검색 엔진’이나 인용 링크(특히 트랙백의 효용성은 토론 기능에 필수적이었다), 추천 포스트를 통해서 블로그에 찾아오는 것이 관계 맺기의 방식이었다. 반면에 인플루언서는 지속적인 지식의 축적이나 관계 형성이 아니라 순간적인 영향력바로 그 특정한 시점에 발휘하는 게 포인트다.

블로그 시대에는 자기의 특화된 분야와 그에 따른 전문성을 이야기하고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소통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는? 그런 방식의 소통을 원하지 않아도 그냥 다들 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간절한 내용들, 고민한 내용들이 다른 휘발성 강한 컨텐츠에 뒤섞일 수밖에 없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와서 규모 자체가 돈이 되고, 그런 상업적 가능성 때문에 그것 자체로 원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블로그 시대와는 본질에서 다른 방식의 소통 구조를 형성한다. 소셜미디어가 사회악이라는 게 아니라, 온라인이 이상적 공론장을 도울 거라는 기존의 희망은 블로그 시대 정도까지가 한계였다는 말이다.

공론장의 폐허, 누구의 책임인가

뭐 사실 지금 모습만으로 보면 소셜미디어를 사회악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긴 하다.

폐허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상업화한 거대 소셜미디어 회사들, 특히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있다. 자신의 상업적 성공은 극대화하면서, 온라인 대화의 질적 하락을 방치하고 방조했다. 페이스북은 일찌감치 관심 극대화와 상업성에 초점을 둔 노출 알고리즘으로 공론장의 형해화에 악영향을 끼쳤고, 트위터는 영향력의 극단적인 정량화로 ‘관종’ 기질 있던 이들의 괴물화를 부추켰다(가장 대표적으로 현 미국 대통령 트럼프, 그리고 트위터를 아예 매입하고 자기 선호에 따라서 극우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일론 머스크가 있다).

세계 최고의 권력, 세계 최고의 관종… 트럼프와 머스크.

물론 개별 소셜미디어 회사만 탓할수만은 없다. 사람들이 그런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구와 방식에 편승해서 만들어낸 풍경이니까. 게다가 소셜미디어가 기존의 블로그 기술이나 게시판 커뮤니티를 금지한 것도 아니다. 블로그라는 소통 방식과 표현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소셜미디어라는 새로운 소통 기제와 그 방식, 특히 편의성과 즉각성 그리고 반응성이라는 매력을 이용자들이 쉽게 거부할 수는 없었고 주류 활동 공간이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이다. 소셜미디어 블루스카이에 매일 붙어있지만, 개인 블로그는 수년째 개점휴업 상태다.

다음 시대는 AI일까?

시대 구분을 하다 보면 당연히 나오는 궁금증은, 그래서 소셜 미디어 시대 다음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지금의 흐름으로 손쉽게 결론을 내리자면 그게 ‘AI 시대’일 거라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우선 좀 생각해 볼 게 있다.

정보의 유통이라는 소통 행위에 대해, 나는 음식의 비유를 즐겨 쓰곤 한다. 인터넷에 누군가가 올린 떠도는 정보를 누가 그대로 믿으려고 할 때, ‘아무 음식이나 막 주워 먹으면 안 된다’라고 한다든지. 영양가 있는 음식인지, 대충 만든 건지, 상한 것인지, 뭘 살펴보고 먹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AI가 만들어낸 메시지에 대해서 해야 할 비유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과연 음식이긴 한지 좀 보고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처럼 생겼다고 음식인 건 아니다.

인간이 만드는 정보는 어쨌든 인간의 동기가 들어있다. 그 정보를 만든 이유가 있고, 들어간 인간으로서의 경험과 식견과 일관성이 있다. 틀린 정보라 할지라도, 유해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상상 가능한 인간의 논리와 감정으로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다(흔히 ‘비판적 독해’라고 하는 덕목의 정체다). 하지만 현행 AI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반응한다는 것 외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목적성이 없는 것이다.

최근 머스크의 그록4 챗봇 사태를 보자. 머스크가 AI 인재를 끌어모아서 우수한 엔진이라고 만들긴 했는데, 그만 챗봇이 머스크와 X(구 트위터)를 기준으로 삼아 데이터를 학습하더니 반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남발한 것이다. 머스크 멋대로 자기 말과 자기 서비스를 우선시하도록 알고리즘을 바꿔버리니 빠르게 극우로 변질된 것이다. 일관성 없이 그냥 소유주의 입김 한번에 ‘성격’ 자체를 바꿔버리는 비일관성을 보여준 것이다. 다시 음식 비유로 가자면, 인간이 아니기에 원재료가 식자재가 아니라도 음식이랍시고 내놓았고, 주문 받은 김밥을 가져오다가 아무 의식 없이 순대로 바꿔치기하는 식이다. 세상에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보통은 그 정도로 엉망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팬덤 정치’의 아이콘이었던 히틀러와 그 조력자들.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그 악명 높은 괴벨스.

AI 시대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으로서는 AI와의 대화가 소셜미디어의 시대까지 발달한 어떤 흐름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물론 그냥 정보를 얻는 창구로서라면, 혹은 간단한 선택을 돕는 계기로서라면 잘 만든 AI가 못난 인간보다 나쁠 것도 없다. 하지만 인간이 굳이 온라인에서 떠드는 핵심 이유에는 다른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게 좀 더 권력 중심적으로 가면 지배욕이 될 것이고, 액면 그대로 가면 그냥 사회성 자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은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소속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가다듬는 마음과 욕망은 사라지지 않으로 본다. 사회성이라는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해주지 않는 AI로 공론장이 재편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AI 애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만, AI 마을은 게임으로서의 대리만족 정도가 아니면 의미 없다.

물론 지난 10년 넘는 기간 동안 소셜미디어에 대해서 사람들도 피로감이 축적됐다고 보기 때문에, 미디어 환경 전체에서는 소셜미디어의 입지가 기존의 대중매체처럼 되어버릴 가능성은 있다. 여기에는 이미 대중매체의 영역을 잠식할 대로 잠식한 유튜브도 당연히 포함한다. 물론 그것은 기존 TV나 신문 같은 대중매체보다는 훨씬 참여적이고 서로 맥락 연결이 되어 있는 모습이지만 , 대화보다는 습득에만 특화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고 사람들은 타인들과 사회적 소통을 하는 다른 방식을 찾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 좀 더 파편화된 방식(디스코드 모델)으로 가거나, 다른 한쪽으로는 파편화된 소셜미디어 방식(AT 프로토콜 등)으로 가거나 하는 몇 가지 흐름이 이미 존재한다.

소셜미디어 다음 시대에 바라는 바는, 좋은 자료와 식견을 통해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욕구가, 그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어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보다 더 많이 자극받는 방식의 플랫폼이 고안되어 성공을 거뒀으면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미디어 공간이 유도하는 소통법을 은근히 손쉽게 받아들이니까. 블로그 서비스의 원형 위에 금전적 보상과 이슈 연결 구조를 고민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얼룩소의 실패담을 지양분으로 더욱 과감한 실험들이 이어지면 좋겠다.

폐허 속의 희망

초기 PC통신과 블로그 시대는 전문성에 바탕을 둔 책임 있는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던 낙관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체로 (상대적이긴 하지만) 상업적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시간이 흘러 상업화된 소셜미디어 시대에서는, 하필이면 그 상업성을 단순한 주목 경제로 이뤄버렸다. 그래서 소통과 협업은 적당한 인간적, 감성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 말고는 필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관심받으면 장땡인 시대랄까. 좀 더 인정 욕구를 실현하기 쉬운 시대가 됐고, 그런 주목을 통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 상업주의는 온라인 소통 메커니즘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됐고.

그런 절망의 조건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그런 10년 넘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피로감이랄까. 화무십일홍이라고 그런 폐허에 지친 사람들이 앞으로 새롭게 등장한 기술과 방식, 새로운 또 다른 방식의 소통에 관심을 기울일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 변화가 반드시 상업적인 영역에서 올 필요도 없다.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던 마스토돈은 곤란했지만.

당장 AI 하나만 하더라도, 지금 굴러가듯이 꼭 하나의 정돈된(그러나 종종 ‘환각’으로 점철된) 모범답안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방식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정보가 있는 공식 혹은 전문 블로그 소스를 적극 추천해서 그곳으로 가서 직접 읽어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구글이 광고 기계가 아니라 우수한 검색엔진이었던 옛 시절을 모델로 해서 말이다. 혹은 위키피디아처럼 참여 협업으로 답을 업그레이드하고 그 과정을 통째로 볼 수 있게 한다든지 하는 더 강력한 상상도 해보고.

초기 PC통신, 블로그… 그리고 최근 실패한 얼룩소 같은 서비스만 해도 전문가를 모아 전문성을 추구하고 축적하려고 노력했다. 오바마 정부의 소통 모델을 벤치마크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국민청원이나 최근 빠띠 같이 경험 던지기와 사회적인 대처 이슈를 정리하는 것, 이런 대안적인 흐름들은 서로 언어나 목적이나 방식이 다를 수는 있지만, 공동체의 상식을 추구하며 공감하려는 노력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그리고 그 영향력에서 그 어떤 시도도 소셜미디어의 즉각적인 쾌감을 넘어서지 못했을 따름이다. 함께 조롱하고, 혐오하며, 증오하는 것의 쾌감과의 주목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민노씨가 말하는 전문성을 담보한 다양한 유튜브 채널들은 긍정적인 면도 있고, 블로그와의 유사성도 존재하지만, 그 소통 방식이 상호적이진 않고 일방적인 정보 수용을 위해 이용한다는 측면에서는 블로그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소셜미디어의 거시적 흐름 속에 있다고 봐야 한다.

블로그의 트랙백과 같은 ‘상호작용성’은 소셜 미디어에서는 의도적으로 ‘거세’됐고, 유튜브 역시 그런 상호관련성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정보 축적과 확산에만 특화된 것이라서 공론장으로서의 좋은 기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던지기만 하고 길어올리지는 못하는 방식이랄까. 대형 플랫폼 회사의 방식은 상호작용을 통한 결론 도출 방식보다는 최대한 사용시간을 늘리고, 반응성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진화해왔다. 즉, 민노씨 말처럼 점점 더 능동적 ‘유저'(이용자)에서 수동적 소비자가 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그런 수동화는 소셜미디어의 상업적 가능성이 폭발하자 더 억압적이고 폐쇄적이며 강제적인 방식으로 상업적 효용을 기준으로 최적화했다.

관심 받으면 장땡, 돈 벌면 장땡.

사실 인터넷의 주요 공헌자들은 상업성을 전제하지 않은 이상주의를 일정하게 품고 있었다. 프로토콜의 빈트 서프든, 웹 인터페이스의 팀 버너스-리든, 자신들의 발명을 수익화하지 않고 그냥 풀어버렸다. 서버 운영체제의 절대강자 리눅스는 오픈 소스다. 위키피디아의 콘텐츠는 여전히 불특정다수의 협업이다. 그렇지만 결국, 버너스-리의 표현을 빌리면, “인터넷이 점점 더 연결할 수 있는 자유를 잃으면서 닫히는 과정”에서 즉, 사람들이 의지하는 인터넷의 주류 소통 방식이 상업화하면서 완전히 다른 패턴이 올라오게 됐다. 기술과 시장과 사용자 문화는 상호 견인적 관계일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시장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셈이다.

첫 걸음

인터넷 공론장의 이상향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디면 좋다. 그렇다고 당장 여러분 모두 공익 스타트업을 만들어 맨땅에 헤딩해 주세요,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당장 플랫폼과 상업적 수익 구조를 뜯어고치지는 못할 개개인 사용자의 차원에서, 그냥 사용자 문화의 차원에서 조금씩 실천해 볼 수 있는 소소한 가이드로 마무리하면 어떨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발 좀 덜 재밌어도 된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통쾌하지 않아도 된다. 당장 너무 관심을 과시하지 않아도 된다. 사안에 대해서 지금 바로 어느 편에 서서 누군가를 박살 내는 것보다, 문제의 구조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는 대단히 지루한 과정이 중요함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현재의 온라인 환경은 사이다를 요구하므로.

그런 자세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다. 모르는 부분을 계속 알아나가야 서로가 전문성을 합쳐나가며 더 나은 해결을 찾아나갈 것 아닌가. 남들이 관심을 끌기 위한 방식으로서 선명함을 던져도 나는 늘 모르는 부분을 유보해야 한다. 현재의 온라인 환경은 단호박을 요구하므로.

그리고 이런 자세들을 겉으로도 내보여야 한다. 내가 당장 함께 백퍼센트 분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안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차분하고 유보적인 분노도 있는 것이고, 배움을 청하여 더 많은 내용과 근거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의 온라인 환경은 딱 표현하는 만큼씩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손을 잡아주면 더 좋다.

생활 철학의 차원에서 이 세 가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1. 덜 재밌어도 되고,
  2.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건 당연하며,
  3. 이런 자세를 표현해야 한다.

이것도 대단히 어렵지만,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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