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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다시 삶의 근거지로

때로 숏폼과 인스타로 대표되는 소셜미디어는 작은 삶의 공간을 무한에 가깝게 확장한다. 그건 일견 진실이고, 때론 거짓이며, 대체로 기만이다. 소셜미디어의 반짝거리는 일상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가슴 따뜻한 휴머니즘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갖 종류의 ‘행복 경연대회’와 ‘이건 못 참지’ 식의 클릭 상업주의는 도파민을 무한 가속하는 방식으로 의미 유통을 구조화한다. 그 무한 유통하는 ‘월드 와이드 소셜미디어’의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커뮤니티에 모여 눈먼 증오와 편견과 혐오의 배터리가 되어 충전된다.

인간은 점점 더 소셜미디어 스타일의 통조림이 되어간다. ‘어제’ 오프라인의 삶을 거짓이라고 말했던 나는 ‘오늘’ 오프라인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근심한다. 이제 오프라인의 권위적인 속물 구조가 완전히 온라인으로 이식됐고, 때로 모험과 가능성의 섬들이 있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온라인은 이제 개방과 가능성과 공유와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그저 진영과 잘난 척과 지긋지긋한 속물근성을 다양한 가면으로 숨기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인받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러다가 ‘삐끗’하면 언제든 증오와 혐오로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

이제 온라인에서 잠시 벗어나 소셜미디어에서 잠시 물러나, 다시 ‘삶의 근거지’로, 하지만 가장 확실한 우리 자신의 마을로 돌아갈 때인 것 같다. 마치 공화국을 구원하겠다는 브루투스의 심정처럼, 캡콜드(김낙호 드렉셀대학 교수)마저도! 공론장의 폐허에 대한 해법이 자기 삶의 터전, ‘지역’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공론장의 폐허, 지역이 해법이다

💡 알림 안내

이 글은 2025년 9월 19일(금) 밤과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에 함축했고, 본문은 문답 형식이 아닌 답변자(인터뷰이) 1인칭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내용을 확인하고 협의하여 퇴고했습니다.
🔖 여는 말(질문자): 민노
🔖 본문(답변자): 김낙호(캡콜드)

내 삶에 밀착한 이슈

지역 이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건, 세상 돌아가는 일과 나라 돌아가는 것은 걱정하지 말고 우리 단지 아파트 재개발만 걱정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내 삶의 물리적 터전에 밀착한 이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타인의 존재를 전제하는 물리적 삶에 관심을 품는 건 ‘관용’을 전제로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에 대해서도 구체적 사안에서는 서로 불만족스럽게 절충해서 합의를 이뤄가야 한다. 그래야 함께 추구하는 공동의 프로젝트, 가령 고작 재개발이라고 해도 그 재개발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으니까. 그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서로 공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공통의 이슈는 무슨 ‘큰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동네 이야기, 놀이터에 CCTV 설치하는 문제 같은 예를 들어보자. 당장 거기에 투여되는 세금, 동네 예산 문제다. 그리고 그 CCTV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가? 철이네? 순이네? 순이네 골목에는 여성들이 많이 퇴근하는 지역이니까 거기에 먼저, 그리고 놀이터에 아이들 안전을 위해서 설치하자. 그 목적은 ‘나’의 안전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공공의 안전’이 되고, 그게 합의의 기준을 마련해 준다. 이런 조율과 합의의 과정은, 실제 생활 공간의 차원에서는 그나마 좀 가능해진다.

떠도는 이슈, 가령 찰리 커크

그런데 한국에서, 미국도 물론이지만, 이슈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자. 자기 삶의 조건에 바탕한 것들이라기보다는 그저 거시적 관념 덩어리에 자기 목소리를 과시적으로 보태는 것에 가까운 경우가 잦다. 최근 암살당한 미국 청년 극우의 상징 찰리 커크에 관한 한국 몇몇 연예인의 추도 멘트는, ‘커크’와 같은 미국 극우의 상징이 한국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한국의 소셜미디어 공론장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소모적이고 피상적으로 소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삶의 구체성에서 가장 멀리 있는 거시적 이슈이다보니 그런 피상성이 쉽게 허용되는 것이다. 커크가 미국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죽음이 어떤 의미이고 파장은 어떤지에 관한 최소한의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커크가 단순히 기독교신자였다거나 커크의 부인이 가해자를 용서했다는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찰리 커크를 추도하는 이들의 행태를 보면, 그 얄팍함과 성급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커크는 대단히 극우적 사회관을 사이다롭게 터트리며 젊은 층을 포섭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원래 미국에서는 한동안 젊은이에게 극우는 인기가 없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오히려 틈새시장을 잘 공략하며 연설가로 극우의 슈퍼스타가 됐다.

커크의 ‘시그니처’는 맞장 토론이었고, 그 장면을 팟캐스트로 송출하고 소셜미디어에 올리면서 극우 이데올로기 전도사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극대화했다(한국의 하버드 나왔다는 모 정치인을 연상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트럼프와 친해졌고, 더 밀착하면서 더 자극적인 세계관으로 치닫았다. 가령 찰리 커크가 주로 하는 레파토리는 이런 것들이다.

  • 흑인 여자는 백인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다.
  • 바이든을 총살시키자.
  • 공감은 문명의 삑싸리.
  • 유색인종이 백인을 대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편협하고 폭력적인 주장 한편으로 종교적 모티브를 내세워 자신의 주장을 순화하고 위장하며 정당화하는 기제로 악용했다. 기독교 국가주의로 불리는 그런 전통을 장착하면서 신앙으로 서로 보듬자는 식이었다. 내용으로는 차별과 배제와 증오인데 그걸 그저 기독교라는 걸로 위장한 것으로, 특히 백인 남자 입장에서 자신의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찰리 커크 스스로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혀는 수천수만 정의 총의 화력이 되는 정치 폭력을 부추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찰리 커크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알아둬야 할 ‘최소한의 배경’이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정도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트럼프가 찰리 커크를 자식처럼 아꼈다는 그 정도 이미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찰리 커크의 세계관이나 정치관에 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단순히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정치적 인사가 암살되는 큰 사건에 내 말을 얹을까? 말까? 그런 것만 생각한다. 그래도 될만한 연결 수준이니까.

미국에서도 사정이 이런데 한국에서는 더욱 피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큰 미국 신문에 보도된 두세 줄 정도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피상적으로 그 이슈에 편승해서 말 보태기에 ‘참전’한다. 독실한 기독교였으니 안타깝다는 둥. 나름 멀쩡해보이던 유력 신문의 스타 필자도 물리적인 폭력보다는 그래도 토론을 추구하려던 사람이라서 안타깝다는 둥의 쉰 소리를 얹는다.

미국도 물론이지만, 한국은 더욱 찰리 커크를 피상적으로 소비한다.

커크의 내용(폭력)과 형식(말∙토론)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만 강조하거나, 기독교 코드에 매달리며 커크를 추모하는 것은 아주 문제다. 비유하면,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 기수이므로, 사회 근대화 지지하는 우리는 이토를 추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수준의 어이없음이다.

미국에 사는 유색인종 이주노동자가 아닌 한국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러니까 찰리 커크의 말로 인해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불안을 느끼거나 할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은 아주 추상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불안을 경험하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느껴온 사람들은 그런 그 죽음에 대해 관념적으로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는 ‘추모’는 불가능하다.

특히 미국의 오늘날은 한국으로 비교하자면 전두환이 집권했던 1980년대 같은 분위기가 생겨서, 당장 콜베어나 키멜 같은 스타 코미디언 토크쇼 진행자들이 트럼프에 대해 비판적인 유머를 구사했다는 것이 직접적 혹은 간접적 구실이 되어 잘리고 있는 판이다(그나마 키멜의 경우는 대중의 폭넓은 항의와 보이콧 움직임으로 인해 되돌려놨다). 정부가 압박하고 방송사가 알아서 선명하게 충성하며 기는 식으로 말이다. 그만큼 미국 사회 전반이 극우화하고 있고 커크를 보수의 신화적 아이콘으로 만들려는 판에, 속 편한 방식의 추모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맥락이 모두 거세되고 보수 유명인이 살해당했다는 점만 수입되었을 때, 그저 막연하게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나 남게 된다.

가처분 시간과 관심의 양극화

민노씨 말처럼, 사람들은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 ‘가처분 시간’이라는 표현은 아주 적절한데, 좀 더 나아가 ‘가처분 인지력’이라고 해도 좋다(원래 오래전에 클레이 셔키가 던진 ‘인지 잉여’라는 용어도 있었다). 실제로 가처분 인지력이 부족할수록 내 관심의 가성비를 따질 수밖에 없다.

가성비로 보면 삶에 밀착한 작은 이야기, 동네 이슈보다는 거대한 이슈에 말을 보태고, 관심을 가지는 건 자연스럽다. 왜? 그래야 뭔가 내가 대단한 일에 내 아까운 시간을 쓰는 기분이 드니까. 아주 작은 내 삶의 조각들이 아니라 뭔가 거대한 공동체와 세계의 일에 참여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렇게 관심의 양극화가 벌어진다. 내 삶과는 분리된 상징적인 거대 담론에만 참여한다. 그런데 거대 담론일수록 조율이 아니라 선명성의 과시가 우선시되어, 결국 감정의 양극화, 진영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거기 없는 건 구체성이다. 거대한 양극화, 거기에 구체성이 없으면 그게 뭐겠나. 그게 바로 폐허다.

뭔가 거대한 것에 나도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지만, 아무런 구체성도 없는… 텅빈 폐허.

숙의 민주주의

그런 공론장의 폐허를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숙의 민주제의 방법론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의, 그러니까 모두가 충분히 사안을 공부했으며 조율해야 하는 입장들을 펼쳐놓은 상태에 도달한 그런 민주제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 문재인 정부 때 원전에 관한 숙의 토론(2017)은 대표적 사례다.

📌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 471명이 15일 2박3일 간의 합숙해 토론했다. 시민참여단은 마지막 설문조사에 응한 뒤 해산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는 2016년 착공했고, 2017년 잠시 건설을 중단했지만, 공론화 과정을 거쳐 다시 건설을 재개했다.

미국에선 ‘미국이 한 방에‘라는 2019년의 토론 프로젝트가 있었다. 인구 비례에 맞게 대규모 시민토론단을 구성했고, 2박3일 동안 한 리조트 호텔에 보내서 여러 현안에 관해 정보를 주고받으며 토론했다. 그 결과, 프로그램을 모두 마친 뒤에 실제로 참여자들은 개별 사안에 대한 극단성이 줄어들었다. 가령 공화당원인 참여자가 처음에는 9 정도 찬성하던 정책에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엔 7 정도로 찬성하는 것으로 정도가 완화하고, 더 신중해졌다. 즉 선명한 극단보다는 더 정밀한 태도로 변하는 경향성이 관찰됐다. 또한 민주제에 대한 공통의 합의를 긍정하는 상호 신뢰 역시 커졌다.

물론 한계도 있다. 숙의 토론만으로는 보수였던 사람은 보수, 리버럴이던 사람은 여전히 리버럴이라는 정치적 정체성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는 게 또 다른 포인트다. 여하튼 이런 결과는 후속 실험에서도 반복되어, 2025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비슷한 형식을 다시 시도했을 때도 참여자들의 정체성은 바뀌지 않아도 극단성이 완화했다. 특히 이 경우는 피부에 와닿는 지역 이슈를 이야기했는데, 결과 변화의 폭이 이전에 했던 전국구 사안보다 더 켜졌다. 사안에 대한 극단화는 더 뚜렷하게 감소하고, 합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더 많이 올랐다. 그러니까, 밀착하는 동네 이슈에 대해서라면 더 변화의 가능성은 더 컸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숙의 토론 가능함? 지역지의 함의

물론 어렵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다. 그렇기에 지역 이슈를 먼저 알아야 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고,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도 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미디어가 던지는 이슈는 너무 커다란 전국 단위 이상의 이슈들 위주며, 우리가 당장 직접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그것도 아니면, 우리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의 흥미 위주 가십들뿐이다.

이렇듯 지금 우리를 둘러싼 미디어 구조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이런 미디어 구조는 인터넷 보편화 이후 오늘날의 뉴스 산업 구조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2010년대를 거치며 인터넷으로 옮겨간 독자 관심과 광고수익 손실을 못 견디고 중소 규모의 지역지들이 대거 소멸했다. 인수합병을 통해서 전국 네트워크에 매달린다든지 아니면 인쇄를 멈추고 인터넷 전문으로 옮겼다. 한국의 경우는 지역지가 더 오래전부터 계속 고생했지만.

그런데 연구해 본 결과, 지역 언론이 튼튼한 지역일수록 지역 이슈와 구체적인 지역 의제에 관심이 높았다. 생각도 훨씬 섬세하고, 의견도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관찰됐다. 앞서 ‘놀이터 CCTV 설치’에 관한 가정적 사례처럼 시민들이 전략적으로 또 우선순위를 맞춰서 생각하고 조율하는 역량을 가지려면, 그런 이슈를 다루는 미디어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 구체적인 삶의 이슈를 다루는 지역 매체가 사라지면 그런 의제에 관해 관심 자체를 가질 기회도 덩달아 사라진다.

노란색은 지역 언론이 없는 지역, 회색은 한 곳, 청색은 두 곳 이상. 컨버세이션. CC BY ND.

그러니까, 당신이 살고 있는 생활 이슈, 삶의 이슈가 일상으로 들어오도록 던져줘야 한다. 지역 관련 이슈가 연예인 가십보다 더 돋보이게 소셜미디어의 노출 알고리즘에 가중치를 부여한다든지, 지역 뉴스 전문 매체를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지원한다든지 하는 정책적 방향성이 필요하다. 조건은, 지역 현안의 고려 요소에 관한 정보를 부각해야 한다는 거다.

물론 더 큰 떡밥들이 넘치는데 그런 지역 이슈에 누가 관심을 품겠느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렇듯 수요 자체가 의문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처럼 중앙집권화된 나라조차도, 정작 구 단위에서 결정하는 이슈가 굉장히 많다. 가령 도서관 예산, CCTV, 순찰 문제, 환경미화원 동선이나 인력 배치 문제들도 생활 환경에 밀접하게 와 닿는 문제다.

그런데 그런 이슈들에 대해 공적 이슈로 접근하기보다는 집값 영향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들의 흔한 자화상이다. 이상하지 않나. 집값이라는 것은 여기 살고 있는 집을 팔고 떠난다는 것을 전제할 때 비로소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지역 공동체를 버리려는 마음의 준비로 지역 공동체의 사안을 논하다니.

그래서 지역 미디어가 중요하다. 서울 강남구 이슈가 안산시 이슈와 같을 수는 없다. 나아가, 안산은 다양한 외국인 노동자와의 공존이 중요할 테고, 어떤 농촌으로 가면 다문화 자녀의 2세가 학교에 적응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할 수 있다. 같은 다문화 사안이라도 두 가지는 결이 다르다. 그런 디테일 속에서 결정을 돕는 것이 정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이슈다. 이런 의제들을 끌어내는 활동을 미디어, 특히 지역 미디어들이 해야 하고, 지원받아야 한다.

부산일보 ‘산복 빨래방’ 사례

지역 이슈에 인력과 자원을 집중하는 정책을 추진한다고 해서 일사천리 해결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역 안에서 통용되는 권력구조 눈치를 본다든지 하는 지역 고유의 문제를 경시할 수 없고, 규모의 경제로 자립성을 얻어내기 어려운 현실에서 보조금만으로는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어렵다. 다만 이런 문제는 어제오늘 새로운 것이 아니고, 어쨌든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옥천신문, 경남도민일보 등과 같은 모범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모델을 다양한 지역 맥락에서 더 확산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을 따름이다.

부산일보의 산복빨래방 사례도 눈겨여볼 만하다. 사내 프로젝트팀에 지역으로 파고들라는 과업을 주었더니, 동네에 가서 ‘빨래방’을 열었다. 그 동네에는 빨래방이 마침 필요했고, 빨래방 종업원이 된 기자들은 주민들이 방문하자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들어주었다. 왜 이 동네에 살게 됐는지, 어떤 게 필요한지, 어떤 게 힘든지… 자연스럽게 그 빨래방이 그 지역의 구심점, 사랑방 역할을 한 거다. “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받는” 컨셉이다. 빨래방이라는 언론 기능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사업이, 지역민의 목소리라는 목적이 들어가자 완벽하게 적합한 수단이 되어주었다.

부산일보 사례처럼, 어떤 동네에는 ‘키즈카페’가 필요할 수 있고, 어떤 동네는 노인들 쉼터, 어떤 동네에는 이주노동자의 사랑방이 필요할 수 있다. 이상적으로는 그 수단과 목적이 지역의 필요와 부합해야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미디어 이슈로 담론화하는 선순환 구조와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들이 여전히 일회적이고, 이벤트처럼 느껴지는 것은 대대적인 정책 드라이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원 주체의 문제

지역 이슈 미디어 활성화 이니셔티브를 하기 위해, 중앙정부가 지원한다면 운영 주체는 언론재단이든지 NGO라든지 어디든 상관없을 것으로 본다. 지자체가 지원 주체가 되면, 하려는 지자체와 하지 않으려는 지자체로 나뉠 수도 있으니 전국적인 단위로 프로젝트를 세팅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여러 이해관계 조율 등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방향성은 매우 명료하다. 우리가 거대 공론장에서 허비하는 관심과 시간을,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거대 담론에 관심을 거두자는 게 아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는 안건은, 스스로 변화를 만들 수 있고 구체적으로 지역 주민들과 합의할 수 있는 그런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거다.

내가 지금 사는 지역의 이슈가 나를 키운다

사실 나도 미국에서 박사 과정 당시, 위스콘신대 언론학과에서 지역 이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시민언론 매디슨 커먼스라는 온라인 매체를 출범시켰을 때 편집진이자 개발 담당이었다. 지역 이슈는 그 지역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상관없어 보인다는 단점이 있는데, 조금만 스토리텔링을 가다듬으면 얼마든지 호기심과 공감대를 불러낼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매디슨 커먼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다. 이 지역의 요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철도와 버스의 예산 ‘빵구’ 문제다. 주의회 예산이 필요한데, 우익 공화당 의원들이 강짜를 놔서 빵구가 나고 공공노선을 30~40% 없애야 한다는 위기 상황까지 갔다가 겨우 땜빵한 상태다. 공화당 의원들은 필라델피아 대중교통이 필요 없는 외곽 농촌 지역 주민의 지지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많아서, 그런 건 사라져도 괜찮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자기 지역구 시민들에게도 당신이 그 동네 사는 게 아니니 그들에게 세금 낭비하지 않은 나를 지지하라고 한다.

그런데 약간만 디테일로 들어가면, 대도시인 필라델피아에서 노동자들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며 경제활동을 해서 주 전체의 예산을 상당 부분 먹여 살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즉 농촌 지역민들에게도 필라델피아라는 타지역 사안을 주 전체와의 관계성, 그래서 다시 자기 지역 사안으로 이해하게 해야 온전한 지역 이슈로 담론을 펼칠 수 있다. 지역 이슈를 전체적인 맥락과 연결하고, 전체적인 조망 속으로 그 의미를 헤아려야 한다.

풀 패키지: 전체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측면으로, 사안 전개의 ‘풀 패키지 경험’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욱 작은 단위의 체험 사례를 들어보자. 내가 사는 동네에는 비교적 최근에, 메인 도로를 일방에서 양방으로 바꾸고, 로터리를 설치하는 야심 찬 프로젝트가 성사된 적 있다. 그런데 양방향으로 하면 경로 편의성은 있지만, 체증이 심해질 수 있다. 로터리를 놓으면 신호등을 덜 받는 융통성은 있지만, 거꾸로 큰 차들이 지나기는 더 까다로워진다. 그러면 트럭 안 들어와서 좋네? 이럴 수 있지만, 겨울에는 트럭이 못 들와서 눈을 치우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런 것들이 사안의 디테일이다.

시민들은 입장 포스터를 붙이고, 지역 의원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공청회에 피켓을 들고, 지역 언론에 취재 협조를 하며 시끄럽게 참여했다. 실행에 옮기기가 그만큼 쉽고, 결론이 나기까지 전체 상황을 이해하기도 좋다. 사실 민주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사람들에게 전체 과정에 참여했다는 경험치가 쌓여야 한다. 어떤 부분은 성공, 어떤 부분은 실패라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스스로 평가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험에 따른 역량이 쌓인다. 시작과 종료까지의 민주적 프로세스, 그러니까 의제를 제안하고, 거기에 관해 공부하며, 토론을 조정하고 합의에 이르는 풀코스에 직접 참여해야 경험이 생긴다. 작은 사안일수록 그게 용이하다.

이것은 단순히 ‘성공의 경험’과는 다르다. 반례로 한국 사회에 아직도 횡행하는 ‘집게손’ 사태를 생각해보자(최근 아이폰 에어 출시 광고에, 한국 버전만 나머지 세계와 달리 손 그림을 삭제했을 정도다). 집게손이 보이니까 다들 모여서 조지자, 그런 것은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였다고 해서 민주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진상질이다.

아이폰 에어 광고. 위 미국. 아래는 일본. 하지만 한국에선 사라진 집게손.

그건 갑인 내가 을을 짓밟아도 되는 폭력적인 세계관의 승리일 뿐, 집게손이 남성에 대한 공격적 모욕으로 사용되는 상징 범위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어떤 모욕이 차별의 효과를 지니는지, 섬세한 조율을 하는 민주적 결정 과정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조율을 안 할 수 없고 전체 과정을 파악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사안은 지역적인 것에서 더 쉽게 찾아진다.

그런 건 일기장에 쓰세요?

서로 공존한다는 것은, 서로 싫은데도 굳이 함께 부대끼는 것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서 서로에게 최대한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해법을 도모하는 과정이다. 소위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늘, 자백할까 말까 머리를 굴리기 이전에 애당초의 딜레마 그러니까 서로 격리된 상황을 해소하는 것에 있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대해 고립된 상황을 깨야 서로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도모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지역적이기에 구체적인 이슈에서부터 시작하기 좋고, 지역 이슈 미디어가 그 역할에 최적이다. 아니,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어야 비로소 더 양질의 저널리즘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천하의 뉴욕타임스도 뉴욕이라는 미국 도시의 지역지 역할이 근간이지 않나. 그렇다면 이 지면, 슬로우뉴스는 어떻게 지역성을 복원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슬로우뉴스는 솔루션 저널리즘 특집으로 지역 소멸과 복원에 관해 이미 취재한 바 있고, 앞으로도 그 주제를 이어가며 기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어떤 작은 이야기, 개인 삶의 고민에 대해 ‘그런 건 일기장에 쓰세요’라고 말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 동네의 이야기가 논의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어떻게 보편적인 함의를 끌어내고 더해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게시판에서 한마디 보태는 지나가는 개인이든, 대형 언론사의 편집자든 말이다. 지역 ‘의제’는 우리 지역 자랑이나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에 그치는 게 아니다. 자기 삶의 조건과 과제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담론장을 폐허로부터 구해낼 귀중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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