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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객관주의, 이제 더는 자명하지 않은…

저널리즘의 객관주의는 ‘금과옥조’ 같은 느낌을 준다. 언론은 진실을 전해야 하고, 진실은 객관적인 어떤 것이라는 것. 그것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언론이 추구해야 하는 ‘선의 이데아’ 같은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예술에 관한 한 이제 자명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T. 아도르노, ‘미학이론'(1970)

사실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어떤 특정한 권력의 강화와 유지를 위해 그 ‘정당성’을 획득한 경우가 많다. 가령 성실함이라는 것도 그렇다. 왜 인간은 성실해야 하는 걸까. 왜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걸까. 그 성실함은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학이 성실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생산성이 피지컬 AI에 의해 압도당하고, 더는 성실이 미덕이 아닐 때, 그때의 정치경제학은 성실함을 촌스러운 어떤 것으로 치부하고 금기시할 지도 모른다.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권력이고, 좀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하면, ‘시대정신’이다.

각설하고, 왜 미국 저널리즘의 ‘객관주의’는 자명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그 객관주의는 ‘비겁한 변명’이 되었나. 왜 캡콜드(김낙호 드렉셀대 교수)는 미국 언론을 그토록 진심 어린 짜증으로 비판하는가. 캡콜드의 뉘앙스가 얼마나 잘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캡콜드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미국 언론의 객관주의는 왜 비겁한가

📢 안내 및 알림: 인터뷰는 2026년 5월 7일 밤 11시에서 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했습니다. 질문은 맥락화하고, 캡콜드의 ‘독백 문투’로 정리합니다. 퇴고 과정에는 캡콜드가 참여했습니다.

시대적 변화인가, 트럼프 변수인가

미국 저널리즘의 질적 위기는 트럼프라는 돌출 변수가 아니라, 미국 사회의 좀 더 오래된 구조적 한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가령, 위싱턴포스트가 자본에 투항한 시기는 트럼프가 아니라 바이든 시대였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에게 2013년에 인수된 후 한 십 년 동안 줏대 있는 심층 보도를 만들어냈으나, 소유주의 마음이 바뀌면 그냥 그렇게 엎어질 수 있는 정도의 기업 구조였던 셈이다.

2016년 트럼프 1기 시기에선 ‘정의의 투사’로서 언론이 시민들의 지지 속에 구독자 증가로 이어지는 바람에 유예기간을 받았다면, 코로나와 바이든을 거치고, 트럼프가 2기에서 언론을 공격하면서 자본가 속성이 강한 언론사주들이 보기에 트럼프 쪽으로 경제적인 유인이 강화되었고, 결국 이런 흐름이 도드라졌다.

미 워싱턴포스트의 명실상부한 얼굴 중 하나인 시사만화가 앤 텔내이스(Ann Telnaes)가 사표를 냈다. 이유는 미디어 재벌들이 앞장서서 트럼프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현실을 풍자하는 만평(위 이미지)을 그렸는데, 신문에서 게재 거부했기 때문. 당연히 워싱턴포스트 소유주인 베이조스(위에서 두 번째 남자)도 그 만화에 포함돼 있었다. 이게 대충 오늘 미국 저널리즘의 현주소다. 텔내이스는 이 만평을 워싱턴포스트가 아닌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주류 언론 시장은 거의 전체가 영리 기업으로서 시장에만 맡겨져 있는 방식인데, 200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미디어 환경 변화, 그러니까 뉴스 소비의 인터넷 이동으로 인해 기존 수익 모델이 붕괴하자 그 안에서 언론 보도의 품질을 유지할 방법이 사실상 사라졌다. 그 균열의 틈새에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억만장자의 소장품이거나 투기 금융의 투자처, 문어발 언론 대기업의 점포 처럼 되어버린 경우라면 조금이라도 자본 친화적 행보를 추구하지 않을 길이 없었다.

결국 시장성 극대화를 추구하겠다면 트럼프 시대의 생존법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본격적 우익화고, 나머지 하나는 탈정치화를 외치며 중간층 독자들을 노리겠다고 내세우는 것이다. 이번 인터뷰에서 특히 이야기할 내용은 후자다.

일반적 상황일까, 일부 상황일까

빅네임 주류 언론이 모두 겪는 상황이고, 그 방향도 같다. 그런 흐름에서 비켜나가는 몇몇 언론의 예외적 방향성도 있다. 하지만 주로 시장 영리 기업의 한계 자체를 비켜나려는 비영리 스타일 언론이나, 수익 규모의 굴레에 덜 의존하는 소규모 지역지 들 정도다.

가령, 필라델피아의 일간지인 인콰이어러는 수익성 위기 속에서 2016년에 비영리 재단을 만들어 소유권을 이전하는 전략을 감행했다. 이것을 발판 삼아 취재의 품질이나 사회 윤리적 방향성을 장착할 수 있었다. 같은 펜실베이니아주의 다른 대도시인 피츠버그 또한 전통의 일간지인 포스트-가제트가 올해 폐간당할 예정이었으나 비영리 전환으로 활로를 되찾았다. 이런 성공적 사례들은 고무적이지만, 강력한 지역 연고라든지 특수한 요인들이 갖춰져야 하기에 아직 주류적인 흐름으로 보긴 어렵다.

미국에서 언론 공공성 개념은 지난 250년 동안 늘 희박했다. 공영 언론이라고 흔히 알려진 NPR과 PBS의 운영비는 대부분 민간 기부에서 나오고 있고, 국회 생중계를 전문으로 하는 C-SPAN은 케이블TV 업계에서 공동 출자하는 것이다. 그렇듯 미국 언론은 시장 영리 기업으로서의 전통이 강하다. 시장의 규모와 다양성, 특히 땅 넓은 연방제 특유의 지역 시장 분할에 힘입어 사회적 상황 변화마다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가면서 공공적 역할을 수행해 내며 지금에 이르렀다.

  • 냉전 초기 매카시즘에 정면 도전하고,
  • 흑인 민권 운동의 손을 들어주고,
  • 워터게이트 정치 스캔들을 터뜨리고,
  • 베트남전의 부도덕함을 터트리는 등 무용담이 넘친다. 20세기 후반에만 한정해도 이 정도다.

하지만 거의 영리 기업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은 경향성과 한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미국 주류 언론은 상대적으로 ‘국제 뉴스’의 깊이나 비중이 약한 편이다. 왜? 미국 대중들에게 상업적으로 인기가 없으니까. 그나마 주어지는 뉴스라고 하면 대체로 어느 나라에서 사람들이 죽었다더라 같은 선정적 소재나, 미국이 어디에 또 전쟁 걸었다 식의 사실은 미국 뉴스다.

사실 미국 저널리즘의 직업적 전문성을 상징하다시피 하는 객관주의도 상업적 고려에서 파생한 면이 크다. 여타 출판물과 차별화되는 시장 영역을 굳히고, 소구 독자층을 넓혀야 했던 20세기 초의 유산이다. 물론 현재는 정치적 현실의 변화,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저널리즘이 수행해야 할 역할도 함께 변했는데도, 계속 겉으로 객관주의만 내세우며 사회적 사안에 대한 개입을 꺼리는 듯한 자세를 고수해서 욕을 먹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슬로우뉴스가 표방하는 ‘솔루션 저널리즘’ 개념도 바로 이런 객관성을 가장한 무책임 저널리즘의 폐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측면이 있다).

또한 영리 기업의 상업성은 중앙값에 가까운 독자들을 중심에 놓기 쉽기 때문에, 주변화되고 과소 대표되는 이들의 의제가 그냥 밀려나기 쉽다. 그게 특정 지역이든, 특정 인종이든, 특정 성적 지향이나 기타 정체성이든, 특정 문화든 말이다. 포용과 통합이라는 요인을 놓고 보는 사회적 필요성이 아니라 시장의 수요라는 경제적 유인만이 지배하면 당연한 흐름이다.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각 동네에서 알아서 대안매체를 만들어서 그 문제에 대처해 왔다.

산업이 무너지면 규범도 무너진다

이런 상황은 적어도 지난 100년 동안은 쌓여 왔다. 좀 더 탄탄하게 다듬은 저널리즘 윤리와 방법론으로 극복하려고도 했고, 기자 개인의 윤리와 작업으로 돌파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영리 기업 외길 인생이라는 미국 언론 환경의 전체적인 구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2000년 중반 이후, 인터넷의 주류화가 촉발한 미디어 환경 변화 속에 신문사들의 수익 모델이 붕괴하고 TV뉴스의 의제 장악력이 떨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언론인 감원 사태가 본격화하면서 언론 윤리와 같은 개인적인 결심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난망한 상황에 빠졌다. 산업이 무너지면 규범도 당연히 무너진다. 무너진 빈자리에는 새 환경 속 역할의 성찰이 아닌, 오래된 껍데기 습관과 공허한 버즈워드(Buzzword; 특정 집단이나 분야에서 일시적으로 유행하며 자주 쓰이는 단어)가 먼저 들어선다. 이것이 지난 20~30년 동안 미국 언론의 위기고, 그 배경이다.

여러 대형 주류 언론사에서 이런 풍파 속에 버티고 있는 언론인은 ‘회사원’ 같은 직장인으로 버티고 있는 게 맞다. 그리고 패배의식이 축적되고 있는 것도 맞다(레딧의 r/journalism 게시판을 구경하다 보면 먹구름이 가득하다). 그런데 새로운 돌파구를 기존 조직에서 찾기도 어렵다. 그래서 어느 정도 네임 브랜드를 구축한 이들이 개인이나 소그룹 단위로 대안적인 미디어를 새로 만드는 것이 지난 수년간 유행했던 것이다. 서브스택이라는 콘텐츠 관리 및 메일링리스트 구독 플랫폼이 특히 흥했는데, 한국으로 치면 ‘팟빵’ 같은 느낌으로 보면 된다.

2024년 뉴욕타임스가 구독자 1143만 명을 돌파했다는 내용의 보도. 온라인 기사 화면 캡처.
💡 AI와 저널리즘?

스포츠 기사, 경제 기사를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10여 년 전부터도 있었던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게 대체할 수 있는 종류의 기사들, 그러니까 경기 스코어나 주가 현황을 가지고 정상적 문장들을 뽑아내기만 하면 되는 글쓰기를 실시간으로 대량 뽑아낸다는 접근이었다.

하지만 요즘 이야기되는 것은 마치 중요한 의제를 발굴하고 사실관계를 찾고 제대로 알리는 좀 더 종합적인 저널리즘 역할을 AI가 이제 그냥 다 해줄 것이라는 듯한 호들갑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LA 타임즈의 소유주 패트릭 슌시옹은 자기 매체에서 AI로 개별 기사의 편향성을 측정해서 보여주겠다는 괴상한 상상의 나래를 선보인 바 있다. 물론 정말로 AI가 그런 저널리즘 전체 과정을 대체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기자는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정도의 수준은 턱도 없고, 오히려 걱정거리는 독자들이 AI가 만드는 쓰레기와 진짜 취재와 검증이 들어간 저널리즘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뿐이다. 뭐 AI가 잘 나가지 않던 옛날에, 사람들이 만든 쓰레기와 구분을 못 했던 것과 다를 바도 별로 없지만

새로운 저널리즘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대 후반에는 NYT마저 위험했던 시기가 있었다. 본사 건물도 팔고, 야구팀 지분도 넘기고 아주 휘청거렸다. 여튼 나름으로 열심히 절치부심해서 인터넷에 특화한 새로운 기사 문법도 개발하고(2012년의 ‘산사태’ 멀티미디어 기사), 2014년에는 그 유명한 ‘혁신 보고서’도 냈다. 어쨌든 그때의 방향성이라는 게 크게 두 가지였다.

  1. 인터넷 매체 환경에서 어떻게 더 완성도 높은 저널리즘 상품을 만들어 낼 것인가.
  2. 그리고 그 환경에서 어떻게 수익모델을 만들어 낼 것인가.
뉴욕타임스 혁신 보고서. 왼쪽은 2014년 5월 15일, 버즈피드에 의해 유출된 표지 모습. 오른쪽이 정식 표지 모습이다.

백서를 주도했던 AG 설츠버거는 지금은 발행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듯 그 방향성으로 계속 NYT의 저널리즘이 굴러가고 있긴 하다. 그런데 그때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던 더 큰 질문이 있다.

  • 달라진 담론 환경 속에서 저널리즘은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말을 걸어야 하는가.
  • 특히 대형 미디어라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지금도 이런 질문은 부족한 상태다. ‘백서’를 썼을 때도, 지금도 트럼프라는 정치권력의 문제, 그리고 기업이 언론을 ‘구입’해버리는 기업 권력의 문제, 이 두 가지 큰 변수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사회적인 의제가 ‘좋은 보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다소 구태의연하고 순진한 향수(鄕愁)를 기본적인 전제로 깔았다. 가령 워터게이트 보도와 같은 기념비가 세상을 바꾸고, 저널리즘을 혁신하면서 시대를 전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워터게이트’와 같은 기념비적 특종도…뭉개지고 사라진다

이미 그러고 있다. 2019년에 뉴욕타임스가 트럼프 조세 기록을 입수하여 그가 행했던 탈세 수법을 특종을 내보냈지만, 얼추 일주일 만에 관심에서 사라졌다. 좀 더 최근에는 연방대법원이 긴급 개입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법적 기준도 제시하지 않고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대법원 내부의 비밀 메모를 입수하여 폭로하는 특종을 내보냈지만, 사람들에게 미친파장은 미미하다. 자신들도 후속 보도가 대단히 미미하고…

예전이라면 대통령이 하야하고, 대법원판사들이 옷을 벗어 마땅한 상황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냥 유야무야해 버린다. 광포한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에 종속된 언론이 초래한 ‘무기력한 정치력’이 드디어 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라는 개인의 마음에 들면 어떤 부패가 터져도 누구나 자리를 보전하는 상황에서 그냥 사실관계 몇 가지를 드러낸다고 어떤 충격이 오겠는가.

‘워터게이트 사건'(정확히는 워터게이트 보도 이후 재판에서의 녹음 파일 공개 파문)으로 사임을 발표한 후, 사임이 발효되기 전에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

워터게이트에 버금가는 특종을 터뜨려도 사회가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니 센세이셔널한 부패 사건을 부패로 보도하고, 장기적으로 취재하는 동기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 대신 그냥 선거를 가져올 수 있는 중앙값 시민들에게 집중해 다음 선거에서 승리나 하자는 식으로 쪼그라들고 말이다. 각 가정의 주머니 경제에 호소할 수 있는 의제에만 집중하다 보면, 공공성이 강한 다양한 사회적인 의제는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란에 전쟁을 건 과정과 진행의 모든 것이 스캔들 감이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소비자 휘발윳값밖에 없다.

‘김치’와 미국 저널리즘의 객관주의

역사를 돌아보면, 미국 언론에서 ‘객관성’이라는 언론 윤리는 고작 1920년대에 처음 등장했다. 즉, 미국 언론에서 객관적이라는 금과옥조는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에 불과하다. 미국 저널리즘이 객관성을 추종하는 오랜 전통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거짓인 셈이다.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지금 우리가 먹는 ‘붉은색’ 김치가 조선 후기에서야 등장한 음식이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신문이 진실을 보여주는 업종이라는 것이 당시 업계의 캐치프레이즈였고, 변화한 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사표를 지킬 수 있을지를 당대의 회의주의에 대한 대항 논리로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회의주의에 대한 상업적 대응 논리로 ‘객관성’을 가져왔다. 즉, 미국 언론의 ‘객관주의’는 1890년대까지 기승을 부리던 엘로우 저널리즘에 대한 비판으로서 먼저 등장했다.

미국-스페인 전쟁(1998년 4월-12월)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는 ‘퓰리처상’의 그 조지프 퓰리처(왼쪽)와 우리에게는 미국의 신문왕으로 알려진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오른쪽). 역사적으로도 기념비적인 삽화. 이들이 입고 있는 노란색 원피스는 당시 유행했던 만화 ‘엘로우 키드’ 캐릭터의 복장이다. 여기에서 옐로우 저널리즘이 유래했다. 즉, 당시 선정주의적 가짜뉴스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신문업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객관주의’는 옐로우 저널리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다. 삽화는 레온 배릿(Leon Barritt).

이를 시간순으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전문적이고 사회운동 주장 중심의 언론. 독립전쟁 등의 전통이 있었고,
  2. 대규모 저널리즘 생산물이 유통하면서 진영주의보다는 대중적인 관심사로 변화했으며
  3. 이런 과정에서 옐로우 저널리즘, 즉, 선정주의가 득세했고,
  4. 선정주의에 반대하는 건조한 스타일이 상대편에 등장했으며,
  5. 드디어 의견과 사실을 분리하는 ‘객관주의’가
  6. 그리고 그 객관주의는 현재는 ‘비겁한 거리두기’가 되어버렸다는 게 나의 진단이다.

미국 저널리즘은 50~60년 주기로 큰 흐름이 바뀌었는데, 객관주의를 저널리즘의 지고지순한 무엇인 양 생각하고, 그 자체로 맹목적 도그마가 되어버린 측면이 있다. 당대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저널리즘이 취한 한 가지 방법론이었을 뿐인데, 공공성 높은 사회적 의제에 대해 민주적 해결을 이뤄내자는 목표는 쉽게 잊혀진다.

새로운 저널리즘을 찾아서

개별 기자들의 세계관을 전면에 드러내고, 사건의 맥락을 충분히 이야기하는 해설 저널리즘’의 실험이 지난 10년 정도 이어졌다. 하지만 대규모 제도권 언론을 그런 방향성으로 이동시키는 건 사실상 어렵다. 가장 성공한 대안적인 실험 모델은, 대규모 제도권 기업으로 성장한 경우는 없더라도, 개별 저널리스트로서 성장한 케이스들이고, 이런 사례는 적지 않다.

너무 전통적인 언론 모델에 갇혀 있어서 그런데, 폭스뉴스만 해도 지금처럼 성공 가도를 달리는 건, 객관주의 저널리즘을 버렸기 때문이다. 보도 부문을 축소하고, 우익 인사들이 보도 ‘해설’하는 것으로 우익에게 대표 매체가 됐다. 객관주의를 버리고, 상업적 당파랄까 당파적 상업성을 추구해서 대중에게 어필하고 성공한 모델이라고는 할 수 있다.물론 폭스뉴스는 바람직한 모델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세상을 망치는 모델에 가깝지만.

이런 게 요즘 분위기?

그래서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방식은 ‘비영리’ 방식의 언론이다. 소유에서부터 공공성을 담보해야 취재나 결과물도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다.

💡 프로퍼블리카는?

물론 프로퍼블리카도 비영리 모델이긴 하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묵직한 특종을 터뜨린다. 그래서 항상 권력자에게는 예의 주시되는 언론이고, 일례로 일론 머스크는 항상 프로퍼블리카가 조지 소로스의 소유라는 둥의 음모론을 제기하곤 한다.

하지만 고정해서 꾸준하게 저널리즘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는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지금은, 앞서 말했지만, 엄청난 특종을 터뜨려도, 그 특종의 의제 설정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라서….

그렇다면 언론이 해야 하는 것은 어젠다 세팅과 키핑의 역량을 높이는 일이다. 적극적으로 담론에 개입해야 한다. 이런 역량은 기계적인 거리두기, 객관주의 저널리즘으로는 향상할 수 없다.

프로퍼블리카 홈페이지 갈무리.

디 어니언: 풍자 매체의 행동주의

디 어니언은 88년에 위스콘신 대학생들이 만든 풍자 언론인데, 여러 풍파를 겪고 살아남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오늘날 진지한 저널리즘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참고할 만한 사례로 진화해 버렸다. 일종의 (‘나꼼수’ 이전의) 딴지일보 같은 것인데, 디 어니언은 종이신문으로 인쇄했다. 처음에는 아주 잘 나갔다. 그러다 2010년대에 휘청했는데, 인터넷 시대에 와서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경쟁력을 잃었다. 거기에 지역 기업의 광고 모델도 붕괴하면서 그야말로 붕괴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지난 3~4년 동안 눈에 띄게 회복했는데, 그 방법은 인터넷을 통하긴 했지만 전통적인 방송 포맷으로 제작된 뉴스를 확대하고, 다시 ‘인쇄물’을 발행하면서, 그러니까 시대에 역행하는 방식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풍자 언론으로서 오히려 그 모태인 전통 언론을 구식으로 재현하고, 원조라는 아이덴티티를 강조해서 회복했달까. 새로운 색깔을 가진 저널리즘으로 요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저널리즘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제화를 진행 중이다.

디 어니언에 유명한 기사 시리즈가 하나 있는데, “도저히 예방할 수 없다… 라고 말하는 이런 일이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유일한 나라”라는 유명한 헤드라인이다. 집단 총격 살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진과 날짜만 바꿔서 이 기사를 재활용한다. 끝없는 반복 속에서 문제의식은 심화하고, 이번의 비극이 개별 사안이 아니라 하나의 오래된 패턴이라고 의제화된다. 웃프게.

강조 표시는 편집자.



가장 최근에는 극우 음모론자 알렉스 존스가 운영하는 ‘인포워즈(Infowars)’라고 극우 음모론으로 돈 번 매우 유명한 미디어를 둘러싼 소동의 중심에 섰다. 당초 인포워즈는 초등학교 대량 총기 살해 사건을 조작된 것이라고 음모론 장사를 했다가, 오랜 시간에 걸쳐 결국 유가족들과의 소송을 당해서 파산했다.

그런데 디 어니언이 해당 소송을 진행한 학부모와 협력해서 인포워즈를 인수, ‘우익 풍자 사이트’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법원이 지정한 인수 중개업자를 끼고, 우선 월 8만 1,000달러(약 1억 1,000만 원)를 내고 브랜드와 도메인을 ‘라이선싱’ 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통제권을 쥐었다. 우회적인 방식으로 제대로 된 저널리즘 역할을 하는 행동주의적 언론이라고 할까.

디 어니언은 기본적으로 전국지고, 여러 지역에 유통하며, 정치적 당파성으로 보면, 진보다 보수다 그런 건 없고, 정말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말하는 언론이랄까. 요즘 세상에서는 그 정도로도 ‘좌빨’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이분법적 사고가 많기는 하지만, 그냥 번듯함과 이상함을 구분하는 매체, 그래서 당연히 우익에 비판적인 활동이 많다.

스트리밍 시대의 어젠다 세팅과 ‘키핑’

어젠다 세팅과 어젠다 키핑을 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다. 슬로우뉴스도 슬로우레터 같은 걸로 첫 단추를 잘 꿰었다고 생각한다. 슬로우레터는 맥락과 중심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품고 이슈를 선정하고 정리한다. 그 점을 평가할 수 있다. 즉, 기계적으로 망라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품고, 즉 의제를 먼저 설정한 뒤에 보도를 정리하는 방식이라서, AI로는 흉내 내기 어려운 방식이다.

슬로우레터의 문제의식은 이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특히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솔루션 저널리즘’의 사례를, 그 뉴스가 크든 작든, 꾸준히 소개한다. 그래서 어떤 솔루션 뉴스 사례는 다른 언론의 19면, 20면 구속에 나오는 보도들이기도 하다. 그런 ‘메타 언론’의 방법론이라는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다.

날마다 아침 7시 슬로우레터, 이렇게 만듭니다.

다만, 그 너머, 아젠다 세팅 너머의 ‘키핑’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새로운 사안들을 늘 큰 주제에 ‘이슈 깔때기’를 해야 한다. 모든 보도가 아카이빙되어야 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민노씨 지적처럼 모든 게 ‘스트리밍’되어 흘러가는 시대다. 그래서 결국은 뉴스도 어젠다도 상업적으로 잘 유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해진다. 정작 중요한 이슈를 오랫동안 긴 호흡과 풍부한 맥락으로 취재한 심층 기사는 외면받고, 사람들 관심(이른바 ‘어그로’)을 끄는 건 5분 전에 일어난 일을 그저 즉물적으로 과장하고 한 국면(흥미든 당파든)을 강조해서 자극적으로 터뜨리는 것이다. 그런 게 돈이 된다.

차분하게 맥락은 이렇고, 문제는 이렇고, 원인이 뭐고… 이런 것들이 어떻게 상업적 효용을 유지하면서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가. 어려운 문제다. 뉴욕타임스도 퍼즐, 스포츠, 제품 후기로 돈 벌어서 탐사보도하는 실정이긴 하다.

트럼프 이후의 저널리즘

다음 정권이 트럼프의 적폐를 극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바이든 당시에 한 정도의 강도로 하면 망한 것이고, 훨씬 더 처절하게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승하고, 상원을 확보하면서 하원까지 장악한다면 그 틈이 생길 수 있다. 지금 공화당이 수세에 몰리니까 대법원까지 나서서 게리맨더링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승하면, 이런 저널리즘적 문제 상황도 어느 정도 숨통이 틔일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자본이 언론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다. 의회 다수가 바뀌면 언론을 장악한 기업 ‘오너’들이 좀 눈치를 보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언론의 ‘수직 하락’ 추세가 다소 늦춰지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다. 새로운 돌파구를 추구하는 저널리즘 구성원은 항상 내부에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한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요즘 흥하는 한국적 유튜브 뉴스 모델은 사실관계와 합리적인 시각을 시민에게 유통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를 그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돈은 어떻게 벌든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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