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 인터뷰] ‘위험한 국가의 위대한 민주주의'(2025) 저자 윤비(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만나 2025년 한국 민주주의에 관해 물었다. (⏰19분)

“국가 형태는 주권자 또는 대표자 구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대표자가 한 사람일 경우에 그 국가는 군주정이고, 대표자가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인 경우에는 민주정, 일부의 집단만이 대표자가 되는 경우에는 귀족정이라고 불린다. 이 세 가지 형태 외에 다른 종류의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1651) 중에서
다만 군주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전제정이라고 부르고, 귀족정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과두정이라고 부르며, 민주정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질서라고 부를 뿐이다.”
서: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한국 민주주의
이 책은 존 레넌의 ‘이매진(Imagine)’으로부터 시작해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 그리고 여러 나라들, 가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홉스와 미국 건국의 아버지,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이탈리아를 경유해 한국으로 끝난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 나라들을 살피면서 이 책은 ‘민주주의’라는 추상명사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고찰한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추상명사’는 우리 삶에서 대체로 무기력하다. 그것은 총이나 비행기, 스마트폰이나 자동차와 같은 구상명사처럼 잘 만져지지 않는다. 헤밍웨이는 자동차 번호판보다 못한 공보물 속 추상명사들에 대해 야유한다.
민주주의라는 추상명사의 감촉, 빛깔과 냄새 그리고 그 형태에 관해,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진화’ 과정에 관해 이 책은 몇 가지 힌트를 제시한다. 가령 국가와 개인의 ‘거래 대가’로서 시민은 자신의 육체와 목숨을 걸고 국가는 시민권과 참정권을 판돈으로 걸었던 역사적 사실들을 언급한다.


국가는 전쟁과 같은 막대한 자원을 동원해야 할 때, 특히 인적 동원이 긴요할 때 시민권이나 참정권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체를 ‘거래 수단’으로 활용한다.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경우에도 시민권이 확대하는 과정에는 이런 국가와 개인의 ‘거래’가 있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목숨을 담보로 흑인이 시민권을 얻고, 말(馬)에 깔려 죽으면서 ‘이등시민’ 여성은 투표권을 확보했다. 윤비는 그 과정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에게 엘리트가 양보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이 모든 논의들이 향하는 건 우리의 빌어먹을 조국 한국,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추상명사인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다.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로 시작된 2024년 12월의 겨울은 결국 123일 만의 ‘파면’으로 일단은 해피엔딩 흐름으로 이어질 것 같았지만, 대법원의 개입으로, 다시 한국판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민주주의’는 다시 요동치고 있다.
5월 1일 이재명 선거법 재판 파기환송심이 있던 그다음 날 성균관대학교 윤비 교수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우선 문제의 ‘대법원’에 관해 먼저 물었다.

민노인터뷰
위험한 국가의 위대한 민주주의:
윤비가 본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한국 민주주의
질문 정리: 민노
인터뷰이: 윤비(성균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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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5월 2일(금)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윤비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그러니까 인터뷰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윤비 교수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대법원의 이재명 선거법 결정에 대하여
트럼프의 범죄 혐의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도 고심했다. 끝까지 추적해서 그 범죄를 밝혀야 한다는 입장과 트럼프에 관한 재판을 일절 중단해야 한다는 입장이 맞섰고, 연방대법원은 결국 시민의 정치적 선택권과 대통령직의 안정적 수행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후자를 선택했다.
하지만 어제 대법원 판단(인터뷰 시점이 5월 2일)은 어떤가. 이 결정은 공동체를 위해 신중하게 내려졌나? 대통령직의 무게에 관한 충분한 성찰이 있었나? 특정 입장에 대한 지지를 떠나 내가 이 결정에 우려하는 이유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한다. 하지만 ‘절제된 분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법원의 결정은 협소한 당파적 입장으로 분석하기보다는 한국 민주주의 제도적 문제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당파적 입장에 따라 섣불리 유불리를 따질 게 아니다. 오늘의 피해자가 내일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오늘 어부지리를 얻은 당이 내일은 피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문제는 민주주의의 취지에 맞게 사법제도가 기능하는 틀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적인 해석을 억제하거나 억압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해석을 내리더라도 그 원인을 성급히 예단하기보다 신중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마치 위에서 군림하듯 국민 내려다보는 대법원
중세 말 이탈리아에서는 ‘뽀데스타’라는 제도가 있었다. 외부 명망가를 넉넉한 보수를 주고 데려와 행정과 사법에서 일하게 했다. 잘하면 큰돈도 벌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이었지만, 공동체가 판단하기에 그 사람이 잘못을 하면 혹독하게 벌주고, 심지어 감옥에 가두기까지 하는 제도였다.
대법원은 국민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도 국회도 사법부도 궁극적으로는 국민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사법부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면 그 ‘통제의 방식’은 다음 세 가지 방향이 있을 수 있다.
- 판사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방식이 있다. 잘못된 판결을 반복하는 판사에겐 일정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
- 판사가 사법의 권위를 남용하여 정치 위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법도 있다.
-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대법관이 되지 못하도록 제도를 손보는 방안도 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국민이 ‘사법부’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현실에 맞게 절충적 접근이 가능하다. 한편으로 이러한 통제가 자칫 법원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 사법부가 시민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삼권분립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도 된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앞에서 ‘절제된 분노’를 이야기한 것은 그 때문이다.

2016년 촛불 혁명이 광장에 머물렀던 이유
당시 나는 독일에서 연구 중이었다. 한국에 있는 동료 학자가 한 진보 일간지에서 촛불 광장의 모습을 보며 “너나 구별 없이 모두 하나가 되었다”고 감격에 어린 목소리로 장문의 글을 쓴 것을 보았다. 이런 감정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이 일종의 착시라고 생각한다.
그 시점의 대한민국은 이미 선진 자본주의 국가였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갖는 온갖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던 나라였다. 사회 자체가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하고 다양화했다. 그런 사회에서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어떤 공통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힘을 모으는 것뿐이다.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위해 함께 단합한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냉정하게 말해 각자가 민주주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들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공통의 적을 쓰러뜨린 후에는 다시 여러 개의 목소리로 분열할 수밖에 없으며,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실제로도 그런 분열이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 완전히 ‘다른 경로’를 살아온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관련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품질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독일제(Made in Germany)’라는 말은 원래는 지금의 ‘메이드 인 차이나’처럼 저가·저품질의 대명사였다. 영국에서 저가 독일산 제품의 공습으로부터 자국 상품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라벨을 만들었다.
하지만 불과 이십 년도 지나지 않아 독일의 기술이 세계를 휩쓸면서 ‘독일제'(Made in Germany)는 견고함과 신뢰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제가 ‘후졌던’ 시절을 산 세대와, 지금의 ‘명품’ 독일제를 경험한 세대는 전혀 다른 집단 기억을 가진다. 그런데 당시 기대수명이 짧았던 탓에 이 두 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충돌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국은 어떤가? 1950년대 최빈국에서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국가로 올라오기까지 채 70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독재와 정치적 혼란, 민주화, 고도성장, 경제위기 등 온갖 일들을 겪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느 시기에 태어나 소년기와 청년기, 장년기를 거쳤는가에 따라 매우 다른 경험을 했고 매우 다른 사고방식을 갖기 마련이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장수사회이다. 쉽게 말해 1950년대 가난한 한국, 힘없는 한국에 태어나 절약과 근면자조협동을 삶의 표어로 삼고 살아온 세대로부터 첨단 소비사회로 변모한 2000년대 한국에 태어나 미국, 일본을 우습게 아는 세대들까지 다양한 집단들이 한데 모여 산다. 따라서 관점과 생각의 다양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촛불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동일하지 않았다.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도는 대부분 조건부였고, 사실상 해쳐 모여식 연대였다. 그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잠시 연합한 것이며, 그 자체로 의미와 성과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 정치적 에너지와 방향성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까지 유지되지는 못했다.
이런 사회를 제대로 이끌고 가려면 신중하고 주도면밀해야 한다. 모두가 100퍼센트는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받아들일 만한 삶의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끝이 보이지 않던 지지자의 행렬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문재인 정부는 초반에 뭔가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게 했다. 하지만 비전 부재이든 무능이든 변화를 향한 제도화(구조화)에 실패했다. 개혁이 더뎌지고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서 초조해진 문재인 정부는 결국 대기업 오너들과 만나 일자리를 협상하는 것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의 어부지리와 문재인 정부의 개혁 실패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 OWS, 2011.09-11)을 연구했었다. 이 운동의 상징성과 내부의 조직화 논쟁에 주목했다. 당시에도 시민의 자발성을 강조하며 조직화를 반대한 흐름이 강했다. 한국 사회도 비슷하다. 조직화나 정치 세력화를 불순하거나 위험하게 보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정당정치는 시민의 자발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2015년 겨울부터 2016년까지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 –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누적된 불만이 분출된 것이지만 – 그 다양한 요구를 하나의 정치적 그릇으로 모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광장의 힘이 정당 정치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선택지는 민주당밖에 없었다. 이는 민주당에 일종의 반사이익이자 어부지리였다.
물론 민주당이라는 한 당이 다양한 시민들의 요구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특히 1997년 IMF 위기 이후 시민들의 삶에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했다. 법적, 정치적 민주화만으로는 시민들의 행복이나 삶의 질을 충분히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박근혜 탄핵과 더불어 영향력을 잃어버렸던 소위 보수 정치세력은 민주당이 채우지 못한 공백을 영리하게 파고들었다.
어느 행사에서 당시 보수정당에서 정치에 막 입문한 행정학 박사 출신의 한 보좌관이 했던 말이 인상 깊다. 그 박사는 자신이 일하게 된 당을 별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다만 평소 뜻하던 대로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받아들인 것이 그 보좌관 자리였다. 당연히 자기 정당화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차피 다른 당들도 다 꼰대당이잖아요?”
민주냐 반민주냐의 대립 구도에서 별재미를 보지 못한 보수 정치세력은 다른 지형에서 싸우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냐 아니냐가 아니야. 민주주의니 뭐니 떠드는 86세대들도 따지고 보면 청년들에게는 기득권 꼰대들이야!’ 소위 청년 문제로 일컬어지는 세대 간 기회와 분배의 공정성 문제가 떠올랐을 때 민주당은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룰 준비가 별로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조국 사태’는 민주당을 신기득권 이미지로 굳히는 결정적 계기였다. 보수 정치세력은 이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기회를 윤석열이 이용했다.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일하다가 곧 이어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는 후안무치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랍도록 관대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보수 정치세력은 청년 문제를 들고나온다. 윤석열이 탄핵당한 이후 줄곧 입에 달고 있는 것이 청년이다. 그러나 이들은 잊은 것이 있다. 이미 청년들은 보수 정치세력도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했다. 결국 청년 문제는 여전히 이 사회의 뇌관으로 남아있다. 최근 연금제도 개혁과 관련한 논쟁에서도 이는 잘 나타난다. 다만 대한민국의 어느 정치세력도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역과 이슈 대신 ‘중앙’과 ‘지역구’만 남은 정치
정당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독일 정치사에는 ‘명망가 정당’이 있었고, 최근 영국의 ‘브렉시트당’처럼 유럽의회를 주무대로 놓고 활동하는 정당도 있다. 정당의 모습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오늘날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의회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려면 특정 계층만을 대변하는 것으로는 어렵다.
예컨대 영국 노동당도 노동자 권익 향상이라는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것이 사회 전체의 보편적 가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 둘을 조화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독일 사회민주당(SPD)도 최초 계급정당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설립을 두고 심지어 당이 여러 분파로 갈라져 서로 무력을 써서 공격하기도 했지만) 국민정당으로의 진화를 이뤄냈다.

민노씨 지적대로 정당법 8조가 전국 정당을 강제하면서 사실상 지역정당의 설립과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문제다. 그러나 정당의 설립과 활동을 무제한 풀어놓을 수도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독일은 ‘봉쇄조항’이라 불리는 5% 득표율 혹은 3석 이상의 의석확보 룰이 있어 정당이 의회에서 난립하는 것을 방지한다.
특히 지역정당의 경우 자칫 협소한 지역 이기주의에 빠져 활동할 경우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이탈리아의 북부동맹 같은 경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나는 차라리 이원화된 접근법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지역 의회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고, 진입 문턱을 낮추면서 정당 설립 기준을 완화하되, 중앙 의회 차원에서는 일정 기준을 유지해야 하는 쪽으로 균형을 추구하는 게 어떨까 한다.
국가라는 강력한 ‘리바이어던’, 가령 팬데믹의 경우
애초에 책 제목은 ‘국가’였다. 토머스 홉스는 성서 속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에 빗대어 국가를 설명했다. 그는 국가를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시스템으로 봤고, 실제로 국가는 인위적으로 질서를 창출한다. 예를 들어, 책에서 이야기했듯 한 나라 안에서 우편 요금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나라보다 더 저렴한 것은 바로 이런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 효과다.

우리나라도 팬데믹 초기, 국가라는 시스템이 비교적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팬데믹은 자연재해의 경우보다도 더 분명하게 국가의 효용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생각한다. 민노씨는 이를 두고 박정희식 통제 행정 시스템의 유산이 아닌가, 그런 시스템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느냐고 비판하지만, 이 문제는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국과 중국 모두 팬데믹 당시 중앙통제적 시스템을 통해 위기를 관리했지만, 두 나라의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중국은 효율성만을 생각한 상명하복식 행정의 전형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투명한 정보공개에 기초하여 시민의 사생활 침해를 최소로 하고 자발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정책적 방법론을 발전시켰다고 본다.
덧붙이고 싶은 건, 상층에서 하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자원과 수단을 여기에 집중하면서 이견 수용에 인색한 상명하복식 의사결정 구조는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론 더 큰 문제를 안겨준다는 사실이다. 이해의 다양성을 무시하면 갈등은 필연적이고, 그 갈등을 힘으로 누르려하면 갈등은 더 커진다. 그런 갈등 구조는 사회의 성장 잠재력을 잠식한다. 오늘날 선진국도 때로는 자원 분배의 불균형을 감수하면서까지 특정 정책에 집중하지만,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를 조정하려는 노력을 결코 소홀히하지 않는다.
박정희 체제는 상명하복식 권위주의 의사결정구조의 전형을 보여줬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중화학 공업 중심의 경제 드라이브를 강하게 추진했고, 단기적 성과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정치 탄압, 고문, 감시가 일상처럼 벌어졌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 말기에 이르면 이런 폐쇄성과 경직성으로 인한 피로감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권위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문재인 정부의 청년 정책은 왜 실패했는가
윤석열 정부의 계엄령 사태 이후, 그동안 잠복해 있던 파시즘 성향의 세력이 눈에 띄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파시즘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지금처럼 자신을 드러내지는 못했었다. 그 가운데 일부 청년이 극우적 목소리를 내어 우려를 자아낸다. 현상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배경은 복잡하다. 세대 갈등은 분명 실재하고 예민하게 다뤄야 할 문제지만, 그렇다고 기성세대가 절대악이거나 청년의 목소리가 무조건 옳다는 이분법적 접근은 곤란하다.
개인적으로는 『복학왕의 사회학』(최종렬, 2018)이 청년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청년이 어떤 고민을 안고 있고, 어떤 문제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은 여전히 청년 정책을 ‘시혜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복지정책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밈이 있다. 세 사람이 담장 너머 야구경기를 보려고 하는데 한 사람은 키가 작아 경기를 볼 수 없다. 다음 그림에서는 담장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받침대를 제공하여 경기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형평(equity)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시혜적 복지 개념이다. 그러나 왜 담장을 낮추거나 혹은 사람들이 딛고 있는 ‘땅’을 더 높이고 단단하게 다지지 않는가? 왜 구조는 그대로 두고 시혜를 통해서만 문제에 접근하려 하는가?

2020년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사태(‘인국공’ 사건)는 문재인 정부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공정’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소비하는지도 보여줬다. 문재인 정부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권을 잡았고, 청년 실업 문제도 구조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연금 문제 등 중장기 과제를 함께 고민하며 청년 문제를 바라봤어야 했지만, 개별 이슈 중심의 이벤트성 대응에 그쳤다. 그렇게 형성된 잘못된 신호는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목소리를 크게 내면 대접받는다’는 인식이 생겼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청년 이슈도 ‘수도권’ ‘4년제’ 과잉 대표
다른 문제도 그렇지만, 청년 문제도 지나치게 ‘중앙’으로만 향한다. 민노씨가 지적했듯이, 4년제 대학, 특히 수도권 대학 출신 청년의 목소리만 과잉 대표된다. 실제로는 제도적으로 기득권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계층임에도, 여전히 청년 대표로 포장되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지방대학 출신 청년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배제된다. 그들의 자리는 정부 정책 안에 별로 없다.
한국연구재단 사회과학단장으로 일할 때 지역 청년들과, 지역 대학교수들을 만나면서 이런 문제를 절감했다. 청년 정책이나 지역 정책이 ‘보여주기식’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짧게 회의하고 사진 찍는 걸로 끝나는 것이다. 비트코인에 몰려가는 청년들을 보며 ‘꿈을 주자’고 말하는 것은 공허할 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된 문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청년의 목소리가 모두 옳다는 전제도 문제다. 청년들은 시대적 모순을 내면화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모순을 누가 대신 깨뜨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각해서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사태는 역설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본다. 청년들은 교과서로만 접했던 ‘1980년 광주’의 현실과 역사, 그리고 민주주의의 갈망을 다시 체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소중한 역사적 기회였다.


‘사이다~!’ 열광하는 극단의 시대
윤석열의 계엄령과 탄핵 논란 국면에서 유튜브는 핵심 매체로 떠올랐다. 상당수의 정치 유튜브 방송에는 절제가 없다. 그저 ‘사이다!’만 있다. 현상과 사건을 냉정하게 바라보자는 목소리는 묻히고, 분노를 통쾌하게 표출하는 사람이 주목받는다.
오늘날 공론장은 진영의 승부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잘잘못을 정확히 가리고 합리적 대안을 이끌어내거나 타협점을 찾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우리 편’이 ‘상대편’을 박살 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 감정은 순수할지 몰라도, 이런 매체들의 배타성은 공론장을 폐허로 만들고 양극단화를 촉진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공론장은 그런 폐허의 길을 걷고 있다.
작년에 독일 ‘슈피겔’에 기고하면서, 독일도 한국 정치를 배워야 할 때가 됐다고 쓴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칼럼에서 독일의 극우 독일 대안당의 정치인과 기독교민주연합의 정치인이 벌인 TV 논쟁을 다뤘다. 논쟁 내용은 한국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날 텔레비전 앞에 앉은 독일인들은 꼴 보기 싫은 극우정치가가 시민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대변하는 정치가에게 박살 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다.
방송은 그런 심리를 이용했다. 심지어 프로그램의 제목도 ‘대결(Duell)’이었다. 그날 방송에서 시청자들이 실제로 본 것은 토론이 아니라 실제로 말을 무기로 한 결투였다. 한국 정치 유튜브에서 흔히 보는, 상대방을 깨부수기 위한 말의 전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얼마 전에 독일의 한 정치재단 관계자를 만났다. 그분 말씀이 한국 정치는 대립만 있고, 타협이 없다고 비판하더라. 그래서 그 프로그램을 예로 들며 “독일이나 걱정하세요”라고 말하니 아무 말도 못 하더라(웃음).
그럼에도 나는 장기적으로는 정치 유튜브를 통한 정치 공론장의 확대에 대해 긍정적이다. 문화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정작용을 한다. 영화, 라디오, TV 등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대중문화에 묻혀 양질의 문화가 사라질까 봐 걱정했지만, 결국 문화는 스스로 조정하고 균형을 잡아 왔다.
독일 인재 전쟁: 메르켈 난민 수용의 재해석
메르켈 정부 시절, 독일은 대규모 난민을 수용했다. 그 여파로 여론의 반발이 컸고, 이는 총선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독일인이 난민 정책에 대해 ‘무계획’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이런 반론은 자국중심주의에 사로잡힌 낡은 생각이다. 그렇다고 이런 의견을 무조건 밀어내서도 안 된다. 인류애와 같은 윤리적 이상론만으로는 이런 비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코스모폴리탄 담론이 실제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합리화하는 수단처럼 기능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국가 주권은 약화하고, 사회 취약 계층은 더욱 약해지는 모순이 발생하기도 했다.
말하고 싶은 것은 난민 수용이든, 이민이든 국가 차원에서 합리적 계획이 존재해야 한다는 거다. 독일 메르켈 사례로 돌아가면, 나는 메르켈 정부의 난민 수용 정책에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전략이 존재했다고 본다.

우리는 이주노동자를 일자리 관점으로만 본다. 그러나 독일은 인구 감소가 불러올 세수 축소까지 고려하면서 이주민 문제에 접근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래 독일 사회의 성장에 필요한 인재 확보라는 장기 전략적 이해도 한몫을 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독일은 인도 등지에서 IT 인재를 초청하고, 한국의 우수 인력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다. 메르켈 정부는 난민을 수용하면서 단기적인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한 인적 자원 확보라는 국가적 이익을 놓치지 않았다.
한국은 경제적 규모 면에서는 크게 성장했지만, 인재 수급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기술 인력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미래 산업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이미 많은 인재가 중국, 미국 등으로 유출되고 있다. 이들을 붙잡기 위해선 단순히 임금 인상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공동체와 삶의 질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메르켈의 난민 정책은 한국의 미래 전략을 고민할 때 참고할 만한 사례다.
후쿠시마 생선회와 한국의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한국 시민사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을 정점으로 위축되었다고 평가하지만, 선거 참여율 등 여러 지표를 보면 여전히 한국의 시민사회는 역동적이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도 한국은 시민사회가 활발하게 작동하는 나라다.
2013년, 동경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여파를 우려해 생선회를 먹지 않았다. 반면 일본 학자들은 거리낌 없이 먹더라. 그런데 이튿날, 그들이 생선회를 거부하길래 이유를 물어봤더니, 전날은 원양어선에서 잡은 생선이었고, 이날은 후쿠시마 인근에서 잡은 생선이라 안 먹는다는 거다.
이 경험은 일본 사회가 국가적 재난에 대해서도 매우 순응적이고 개인적으로 대응한다는 인상을 나에게 남겼다. 한국 사회였다면 아마 모두가 뛰쳐나와 정보를 공개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와글와글했을 거다. 물론 한국 사회는 아직도 청년, 노인, 여성, 이주노동자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여전히 변화와 저항의 동력을 품고 있다고 본다.

문제는 이런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수용하고 제도화할 정치 체제가 부족하다는 거다. 한국 사회는 발전한 만큼 쟁점도 많다. ‘민주 vs. 반민주’라는 구도로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정치권의 무능이 지속된다면, 시민사회의 동력은 정치 바깥으로 옮겨가고, 극단화나 불안정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일상성이 무너지고, 비일상적인 대응이 주류가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윤석열 이후의 보수
이번 대선 이후 국민의힘이 해체 수준의 위기를 겪더라도, 한국의 보수는 여전히 견고하다. 실제로 보수 성향의 시민이 상당히 많다. 물론 일부는 극단주의 성향을 보이지만, 존중할 만한 보수 인사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동시에, 한국의 진보 진영 역시 그리 선명하지 않다. 사실 한국 진보는 여전히 미발달 상태이다. 어쨌든 진보와 보수 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펼칠 기반은 시민사회에 이미 일정 부분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독주 체제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양한 정치 스펙트럼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고,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앞으로 더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등장할 수도 있고, 양당 체제를 벗어난 다원적 정치 생태계가 펼쳐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원성을 억누르지 않고 함께 호흡하기 위해 정치권 스스로 변신할 수 있는가이다. 물론 극단주의 정치세력과도 무조건 공존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주당은 현재의 지지가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는 순간이 동시에 지금 민주당 뒤에 서있는 사람들의 결속이 느슨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재명 우클릭과 민주당 일극 체제에 대하여
지금 한국 사회의 핵심 과제는 극우 정치 세력의 확산을 막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재명은 더 넓은 정치 연대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차기 정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칙 없이 모든 걸 포괄하려는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고, 민주당이 국회를 장악하는 일극 체제가 형성된다해도, 중장기적으로 그 체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회는 이미 청년, 노인, 여성, 이주민 등 다양한 집단의 이해가 얽혀 있는 복합 구조다. 한 정당이 이 모든 이해를 대표하긴 어렵다. 오히려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가 등장해 민주당과 공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정치 흐름일 수 있다. ‘우리 아래로 들어오라’는 태도보다는 포용과 연대의 방식이 필요하다.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일본 자민당처럼 장기 집권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러려면 다층적 이해를 매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과 균형 감각이 필수적이다. 한두 명의 정치 리더가 그런 유난한 자질을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헤게모니는 결국 필연적으로 한계에 봉착한다. 현재 한국은 높은 교육 수준과 다채로운 시민 욕구를 가진 사회다. 이념 지형도 이미 상당히 분화됐다. 중도를 비롯해 모두를 하나로 끌어안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앞으로 민주당은 더 큰 포용력을 발휘해 새로운 정치 세력과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새로운 당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봄이 오면 꽃이 피듯, 사회 변화는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런 변화는 오히려 건강한 민주주의의 증거다.
다시, 민주주의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쓴다. 그러나 익숙하지만 추상적인 ‘관념’은 헤밍웨이가 말한 대로, 때로는 자동차 번호판보다도 현실감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현실 속에서 우리 삶의 절실한 필요에서 출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추상적 관념도 도그마가 된 이념도 아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위해 피와 땀, 제도와 감시, 책임과 행동으로 지켜내야 하는 아주 구체적인 무엇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한 편의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다. 그 마지막을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것은 이제 국민의 몫이다.
“민주주의는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그런 절박함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싶었다.”
윤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