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호모데우스]의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작인 [사피엔스]에서 그가 흔한 베스트셀러 저자가 아님은 눈치챘지만, 이렇게 내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십 년 이상 내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있던 불편을, 하라리는 너무나 쉬운 방법으로 해결한다. 내가 감히 시도하지도 못했던 답이지만, 받아들이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고 이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져 오히려 그간의 내 소심함만을 탓하게 될 뿐이다.
[호모데우스]를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인류는 아래 도식과 같은 시대의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 → 인본주의(자유주의) → 과학
이 도식 자체는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사실 [호모데우스] 역시 전작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을 잘 엮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도 그가 이야기하는 사례들은 이미 대부분 알았던 것들이고, 책의 후반부 어느 시점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안고 있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듯 하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세계관의 변화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내 세계관의 변화도 위 도식과 매우 비슷한 흐름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로 진화심리학에 입문하다
1996년 겨울에서 97년 여름까지의 기간은 내 삶에서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나는 이 시기 내게 매우 큰 지적 영향을 끼치게 된 두 권의 책을 만난다.
나는 독실한 부모님과 친척 다수가 목회자인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자연스레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으며, 가능한한 종교가 가진 긍정적 의미를 찾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 창조과학 같은 과학에 대한 명백한 부정에 대해서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맹목적인 이들의 자기만족 정도로 치부하며, 한 번씩 다가오는 근본적 의문 역시, 내가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한 그것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는, 그런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학원 입시가 끝나 다소간 여유가 있었고, 겨울 방학 동안 도서관 4층의 교양과학 서가에 꽂힌 책들을 모두 읽으려는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때에는 책꽂이로 서너 열이나 될까, 그렇게 책이 많지는 않았다. 보이는 대로 몇 권을 읽어나가던 중 내 손에 잡힌 것이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지금은 인터넷에서도 찾기 힘든, 노란색 표지의 문고판으로 기억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뚜렷한 목적이나 사전지식을 가지고 책을 읽기 보다는 그저 눈에 뜨이는 대로 읽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이 책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그저 특이한 제목의 책이라 생각하며 나는 책을 읽어 나갔다.
인생은 한 번씩 아무런 예고없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이기적 유전자]도 그랬다.
어느 글에서인가,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큰 어린시절의 사건으로 유년기에 시작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훈련에 관해 쓴 일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명령은 일종의 행동 강령처럼 내 소년기를 지배했다. 이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읽거나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결국,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만약 저 상황에 처한다면?’이라는 질문의 답을 찾는 일이며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나에 대한 이해, 곧 나는 왜 이렇게 느끼고,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나는 심리학 책들을 계속 찾아다니며 읽었다. 애런슨의 [사회심리학], 치얼디니의 [설득의 심리학],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 등은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기적 유전자]가 이런 질문, 곧 나의 느낌과 나의 욕망에 대해 왜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왜 그런 욕망을 품는 지에 관해 하나의 설명을 제공하는 훌륭한 틀(프레임)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얼마 뒤 출판된 조지 윌리암스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에서 이 표현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육체적 특징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규칙을 따라 진화해왔다면 정신적 특징도 그러지 않았어야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의 모든 오호와 무관심, 열정과 혐오, 심지어 지식에 대한 이끌림까지도 그 뿌리에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미생물에서 출발한 극히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원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진화심리학의 첫 만남이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화심리학을 21세기의 ToE(Theory of Everything: 물리학에서 유래한, 모든 것의 이론)이라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당신이 왜 지금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진화심리학은 설명해줄 수 있습니다!’
물론 설명력은 이론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조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적어도, 진화심리학은 너는 특별하지 않다, 너는 생물학적 존재다, 너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의 사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인물과 사상]을 통해 만난 ‘자유주의’
하지만 진화론의 단점은 설명은 매우 그럴듯하게 해줄 망정,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다음 20여 년을 좀 더 실질적으로 지배한 사상은 다른 하나의 책, 아니 사람을 만나면서 접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 고등학교 친구들과 같이 놀러간 바닷가에서 나는 한 친구가 가져온 책 한 권을 만난다. 그 책이 바로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이었다. 나는 민박집에서 그 책을 다 읽은 뒤 학교로 돌아와 전월호들과 그의 다른 책들을 읽기 시작했고, 자연과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여러 조류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접한 것이 인본주의, 특히 자유주의였다.
강준만 교수 외에도, 당시는 그런 사회적 필요와 그 필요를 채워주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자유주의 논객들에 의한 계몽의 시대로 누군가는 기억할 수도 있다. 홍세화, 고종석, 진중권, 김규항 등 지금도 여전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들의 책을 나는 나오는대로 읽었다. 결의 차이는 있을 망정 이들이 기본적으로 진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에 부족했던 인본주의와 특히 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을 전파했다는데 큰 이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시 그렇게 책을 탐닉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내 존재에서 목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조기교육의 문제점을 주장하는 글에 전형적인 예로 등장했을 만한 이였을 수도 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고, 대학원생의 본분은 연구였지만, 나는 친구들을 따라 시험을 치고, 친구들을 따라 상급학교로 계속 진학했을 뿐, 본분이나 그 목적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형식 만을 겨우 흉내내고 있었다. 늘 해야할 일과 나를 분리하려 했으며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 자신을 찾는, 그런 크게 뒤늦은 무책임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방황 혹은 거리두기에서 오는 공허함을 나는 책에서 찾았고 책은 나름의 보상을 주며 나를 더 책 속으로 이끌었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을 게임에 썼다.) 그렇게 97년 즈음부터 2004년 박사를 받고 3년 반의 에트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2007년 까지 10년 동안 매년 100여권의 책을 읽었다.
그렇게 20년 전, 이 두 사건으로 인해 나는 서서히 종교의 영향을 벗어나게 된다. 나는 언제나 내 정체성을 과학자에서 찾아 왔기에, 나는 내가 종교로부터 독립하게 된 계기를 그 정체성, 곧 과학의 힘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쓰나미처럼 내 정신의 세계로 밀려와 방사능처럼 침투했다.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 다른 이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한!’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하며, 그리고 솔깃하다 못해 자극적인가!
특히 과학과 달리 자유주의는 행동원칙을 정해 주었다. 당위를 주었고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지침을 내려주었다. 그 전까지 나를 옥죄던 모든 구습과 구태, 그리고 이를 요구하는 상대에 대해 그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기위해 그 이유를 힘들게 찾아야했던 어려움을 나는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쉽게 벗어던지고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주의는 당대의 난제들을 손쉽게 해결하는 듯 보였다. 동성애, 안락사, 성매매, 간통 등의 개인과 사회가 충돌하는 수많은 문제에 대해 자유주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린 알렉산더의 칼처럼 명쾌한 답을 주었다.
자유주의의 한계
물론 자유주의가 어쩌지 못하는 경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자살? 본인의 선택이 아닌가? 한 가지 어정쩡한 답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것. 하지만 이는 어정쩡하다. 주변 사람들이 받는 피해의 종류는 물질적 피해에서 정신적 슬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당사자가 내린 결단의 힘에 어찌 비할까? 그래서 누군가[footnote]알베르 까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으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 [시지프 신화]의 첫 구절[/footnote]는 자살만이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 하지 않았을까?
자유주의가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과학은 자살에 대해 훨씬 더 효율적인, 그러나 경박한 답을 준다. 자살은 우울증이라는 병 때문이다. 약을 먹고 고쳐라! 사람들은 이런 처방이 가진 독성을 눈치채지만, 다른 방도 없이 이를 받아들일 뿐이다. 물론 과학의 장난은 끝이 없다. 인간은 때로 고귀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한다. 진화심리학은 교묘하게 이 희생의 가치를 유전자로 환산한다. 당신이 목숨을 버려 자식을 살려야 한다면, 한 명은 손해, 두 명은 ‘쌤쌤’, 세 명은 이득이다!
문제는 끝이 없다. 마약은? 혼자 골방에서 하는 마약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마리화나에 대해서는 적어도 승리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큰 쾌락을 줄 수 있는 약들은 어떤 원리로 막아야 하는가?
수간은 또 어떠한가? 양들이 침묵하는 일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가? 마약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막아보자. 그렇다면 사회의 유지가 개인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일까? 물론 현실적으로 당연히 그렇다. 국가는 이를 등에 없고 개인을 감시하고 불순분자를 제거한다. 그리고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수간은 동물권이라는 일종의 인본주의의 확장을 통한 답이 있다. 적어도 수간으로 채우려는 욕망이 저급한 욕망이라는 도덕적인 답이 마음에 든다면, 사회를 다시 신정의 시대로 회귀!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동물권에 대해, 특히 육식에 대해, 기독교는 일찌감치 창세기에서 이미 인간을 만물의 주인으로 삼는다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문제의 싹을 잘라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살생을 금한 불교는 유발 하라리가 거듭 호감을 표하듯 특이하다.
물론 여기서 과학은 또다시 장난을 계속한다. 사실상 인간이 타인의 수간에 혐오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동물을 향한 애정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 동물을 향한 사랑을 철저하게 분해한다. (물론 수간 역시 동물에 대한 사랑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인간이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이유 중에는 역사적으로 더 귀여운 반려 동물이 더 높은 값을 받고, 더 많이 팔림으로써 인간의 개입에 의한 품종의 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있다. 얼마나 시장주의적인가.
물론 이 이야기의 의미는 당신이 당신의 반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의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의 장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동물에 대한 사랑을 인간이 인간의 아기에 대해 가지도록 만들어진 애착(큰 눈, 몸집에 비해 큰 머리 등)에 의한 일종의 부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로렌츠). 심지어 동물을 귀엽게 느끼도록 만드는 기생충(톡소플라즈마)을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이것은 너의 자유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화심리학의 설명, 공리주의의 개입
어쨌든 자유주의의 문제는 자유주의 원칙(원하는 대로! 단, 피해는 금물!) 양쪽에서 다가왔다. 먼저 등장한 것은 ‘피해’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육체적, 물질적, 객관적 피해만이 주요한 피해로 여겨졌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정신적, 관념적, 주관적 피해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이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역시 처음에는 합리적인듯 보였다. 내 기분이 나쁜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를 남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누군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상황에서, 누구의 기분도 나쁘지 않아야 한다는 구호는 얼마나 형식적이고 공허한가! (패러독스의 아버지 러셀은 여기서도 등장한다.) 그렇게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원하는’ 이라는 단어에서 나타났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독립성과 욕망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개인의 욕망이 거시적으로는 진화의 산물임을, 미시적으로는 화학물질의 영향임을 밝혀내고 있었다. (한편, 잡스와 같은 선지자가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른다’는 테제를 내세운 것은 흥미롭다.)
진화심리학은 지금 당신이 그것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과거 당신 조상의 생존과 번식에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당신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바로 그러한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당신에게 이득이다. 나는 ‘가장 소중한’ 나의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누가 인간의 본능을 더 자극하고, 누가 대중을 더 잘 속이느냐에 따라 보상을 준다. 속임수는 진화의 주요 메커니즘이고, 종교와 자유주의에도 깊숙히 침투해 있다.
자유주의라는 개인적 원칙을 사회적 원칙으로 확장하기위해서는 다수의 욕망과 피해를 조율할 수 있도록 근본적 수선이 필요했다. 그것이 공리주의다. 사회적 원칙을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효용을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효용(이익과 피해)과 타인의 효용을 비교해야 했다. 그것이 돈으로 치환가능한 물질의 한계를 벗어날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계산하고 비교해야할까? 한 가지 문제는, 위의 자살의 경우에서 보았던 것처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 피해를 입었는가 입지 않았는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결과적으로 다수결)에는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의 여러 문제가, 이들이 명백하게 과학의 발전에 따라 더욱 드러나고 부각되고 있는 것임에도, 이 공리주의의 문제는 과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분법을 연속적인 변수로 만드는 것은 과학의 영역이며, 사실상 전문 영역이다. 정신적 만족과 피해를 양화(quantize)하기 위해서는 최신 뇌과학 기술 곧, 호르몬의 양, 뇌 신경의 흥분 정도, 뇌 신경의 구조적 특성 등을 이용해 어떤 척도(measure)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규칙이 사회 구성원 앙상블의 행동, 생각, 환경의 변화를 만들고 이것이 사회 전체 구성원에게 미치는 쾌감과 비감을 종합한 효용의 크기를 양적으로 환산하면 문제는 풀릴 수 있다! 이를 통해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를 우회해 사회 전체의 효용을 최대화 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훨씬 빠르게 진군하는 과학의 승전보들에 비하면 미봉책일 뿐이다.
자유의지의 문제
[호모데우스]를 읽기 전 마지막 단계로, 나는 자유의지의 문제에 빠져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생각했다. 사실상 자유의지의 문제는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이미 결정이 난 문제이다. 단지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만이 아니라 쥐와 물고기를 거쳐 단세포 생물까지 올라간다.
생각하는 나, 선택하는 나는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쌓이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진화론이 아니어도 라플라스적 세계관(결정론), 곧 물리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미래라는 개념으로 자유의지의 부재를 미리 의심할 수 있다. 이를 미시적 관점으로 설명하자면, 당신의 모든 생각과 욕망은, 의학과 생물학이 말하듯, 뇌의 신경세포의 활성화에 따라 정해지며, 뇌 신경세포의 활성화는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에 따라, 곧 철저한 인과관계, 가장 아름다운 물리법칙으로 꼽히는 맥스웰 방정식을 따르는 전자들의 움직임에 의해 결정된다.
이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자유의지 문제에 ‘결정론 vs. 우연’이라는 또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결정론은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잠깐 흔들렸으나, 다시 물리학자들의 합의를 얻어가고 있다. 한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의 블로그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에서 결정론을 지지하는 이의 비율은 30% 정도였다. 결정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양자역학이 세상을 묘사하는 완벽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결정론이건 우연이건, 자유의지가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없다]는 위에서 제공한 논리들 외에 또다른 논리를 추가한다. 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원리, 바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논리를 이용한다. 곧, 당신이 무언가를 원하게 되었을 때, 그 무언가를 원한다는 마음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은 알지 못한다. 그 마음은 당신의 의식에도 (당신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나타났을 뿐이다.
위의 미시적 관점을 따르면, 뇌의 특정한 회로가 특정한 환경 조건(가령, 혈당이 떨어졌다)에 의해 특정한 신호(가령, 배가 고프다)를 당신의 의식에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로봇청소기가 배터리가 부족할 때 충전기로 찾아가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샘 해리스는 뒤이어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할 지는 정할 수 없다.”
자기가 무엇을 원할 지를 정할 수 있다면 인간사의 그 무수한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 텔레비전, 영화도 재미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고 내재화 하면서도 나는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자유주의를 계속 조금씩 비틀어 과학의 진보에 끼워 맞추려 했을 뿐이다.
드디어 [호모데우스]를 읽다
그리고 드디어 [호모데우스]를 읽는다. 결국 나의 문제는 하나였다. 자유주의(인본주의)와 과학이라는 두 가지 세계관은 동시에 만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명확하다.
하라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 선구자들을 비웃는다.
“실제로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핑커, 그밖에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 자유주의를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백 페이지에 걸친 박식한 논증으로 자아와 자유의지를 해체한 뒤, 숨이 막힐 듯 놀라운 지적 공중제비를 넘어, 마치 진화생물학과 뇌 과학의 모든 경이로운 발견들은 로크, 루소, 토마스 제퍼슨의 윤리적/정치 이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 18세기에 착지한다.” – [호모데우스], 김영사, P.419.
그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면!).
이것이 내가 서두에 말한 충격이다. 서두의 도식에서 본 것처럼, 인본주의를 버려야 한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감히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이다.
물론 인본주의를 버린다는 것이 당장 인명을 경시한다거나 타인의 자유를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그리고 공리주의)는 여전히 타인의 존중을 받는 사상이라는 점에서 유용하다. 하라리는 이를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가 아닌 제3의 실재, 곧 상호주관적 실재라고 표현한다(전작 [사피엔스]에서 돈, 종교, 국가 등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사용한 개념이다.) 단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장 주춧돌 역할을 했던 이 사상에 관해 그 주춧돌을 꺼낸 다음 그 아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수렵채집인들에게 수렵채집 생활을 버리고 농경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의미했을 것처럼, 지금 우리가 인본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주장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는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를 통해 거듭, 농경생활을 시작해 인간은 더 불행해졌다고 말하는 듯 하다. 수렵채집인 개인은 가능한 최대한 수렵채집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단지 수렵채집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농경생활이 자리잡은 것처럼, 인본주의도 그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이다.
자유의지는 없다. 이것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받아들인 것이고, 진화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가 쌓일수록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결정론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곧 미래는 결정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결정되어 있었다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자 하나하나 조차도 최초의 빅뱅 순간에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믿을 수 없지만, 나는 적어도 다른 그 어떤 대안들에 비해서는 더 믿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결정되어 있거나 아니거나 간에 그것은 물리학의 문제일 뿐이다.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당신의 의지나 선택이 들어갈 여지는 없으며, 그저 우연성(randomness)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거시 세계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실들이 사람들의 세상에 대한 태도와 자세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모든 깨달음이 그러하듯이 일희일비의 번뇌에서 우리를 한 발 더 떨어뜨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자유주의도 근거를 잃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라리는 다시 교묘한 출구를 만들어 놓는다. 그가 말한 상호주관성에 의해, 자유주의는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단지 수렵 채집인이 농경인에게 밀려나듯이, 자유주의도 그런 신세를 면치 못하게되리라는 것 뿐이다. 수렵 채집인은 수렵 채집이 가능한 환경이 존재하는 한 농경인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누렸을 것이다. 이번에도 같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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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더
‘뉴스페퍼민트’라는 외신을 번역하는 서비스를 5년째 하고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막연히 누군가는 내가 재미있어 할 내용을 재미있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동안 나름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왜 인간은 뉴스를 좋아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뉴스에 그렇게 수많은 시간과 감정을 쏟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또 다시 진화심리학은 인간이 뉴스를 좋아하는 것이 뉴스가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전형적인 ‘오래된 연장통’의 논리를 부른다. 비만이나 포르노 중독과 같은 현대병이 인간이 현대에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부작용인것처럼 뉴스 중독(페이스북도 물론)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뉴스를 만드는 것은 사회적 비효율에 일조하는 행위가 된다! (당연히 이는 극도의 단순화이다.)
또다른 뉴스페퍼민트의 문제는 비록 근본 철학으로 ‘언어의 장벽을 없앤다’라는 측면과, 뉴스페퍼민트의 기사를 가능한한 누구나 가져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정보의 공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저작권 문제로 인해 몇몇 언론과 힘들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본질적 가치인 정보의 공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의 마지막 장에서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종교로 데이터교를 이야기하며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 데이터교의 지고한 가치는 ‘정보의 흐름’이다. 정보를 흐르게 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이며 정보의 자유는 “미국이 소련보다 더 빨리 성장하게, 미국인이 이란인이나 나이지리아 인보다 더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하게(P.526)” 만들어주는 절대적 가치라 그는 말한다. 즉, 뉴스를 전달하는 것은 사회에 이롭다. 또한, “정보가 자유롭게 유포될 권리는 인간이 정보를 소유하고 그 흐름을 제안할 권리보다 우선(P.524)”한다고 말한다.
[호모데우스] 식으로 말하자면, ‘뉴스 본능’은 인본주의의 기준으로는 개인의 후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호모데우스]는 정보를 찾고, 소화하고, 전달하는 ‘뉴스본능’이 인본주의보다 더 강력하며 더 오래 살아남을 것임을 말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