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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여자의 ‘싫어요’는 ‘좋다’는 의미”란 말이 통용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인권 의식이 성숙하고, 여성도 주체적인 인간이며 성윤리에는 서로의 합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이 자리잡으며, “여자의 ‘싫어요’는 말 그대로 ‘싫다’는 의미”라는, “No means No”(아니라고 말하면 아니야!)가 대두되었습니다.

변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싫다’는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여성도 분명히 ‘좋다’는 의사를 표현했을 때에만 승낙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Yes means Yes”(예라고 할 때만 예라고!)가 새로이 대두됩니다. 성윤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합의와 배려입니다. 상대의 동의 없이 이뤄지는 성관계는 마땅히 성폭행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노 민즈 노 예스 민즈 예스 미투 페미니즘

비동의간음죄 

문제는 이 원칙이 형벌의 영역에 발을 들일 때 벌어집니다. 성폭행은 죄질이 매우 나쁜 범죄입니다. 우리는 성폭행을 강간죄, 유사강간죄, 위력에 의한 간음죄 등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이뤄지는 성관계 또한 성폭행이라면, 우리는 이것도 처벌해야 하지 않을까요? ‘비동의간음죄’ 신설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요구입니다. 이름 그대로, ‘명시적인 동의가 없었던 성관계’를 모두 처벌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강간에 대한 기존의 판례는 부적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강간이나 유사강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폭행, 협박 등이 중대하여 피해자가 저항하기 현저히 곤란한 상황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가 얼마나 강하게 저항했는가 따위가 판결의 기준이 되기도 했죠.

폭력 페미니즘

그러나 ‘명시적인 동의가 없었던 성관계를 모두 처벌한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요? 형벌에는 명확하고 엄격한 구성요건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이 나오겠지요.

비동의간음죄에서 ‘비동의’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서부터 입장이 갈립니다.

첫째, 말 그대로, ‘동의를 표하지 않은 것’을 뜻한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 경우 문제는 더 커집니다. 법정에서 어떻게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성관계는 매우 내밀한 개인 대 개인의 관계이며, 증인이나 증거가 있기 어렵습니다. 또한, 성관계 자체가 곧 범죄인 것은 결코 아니지요. 폭행이나 강도 같은 다른 범죄와 크게 다른 점입니다.

원고 측에 입증 책임을 지운다면 2차 가해의 우려가 있습니다. 반대로 피고 측에 입증 책임을 지우는 것도 형벌을 주먹구구식으로 적용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둘째, 여기에서 한 발 후퇴하여,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더라도 거부 의사를 표명한 것’을 뜻한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는 것을 법정에서 증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말이죠. 따라서 법정에서는 양자의 증언 내용, 실제 현장 상황과 전후 맥락 등을 따져 거부 의사가 있었는지를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정의 재판 법원 판사 판결

그런데 이렇게 되면 결국 협박이나 폭행, 저항 유무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의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는 무죄를 추정함이 원칙이고, 형벌을 가하려면 거부 의사가 있었다는 분명한 정황을 포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부 의사를 문서로 남겨놓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법학계는 오래 전부터 현행 형법상 강간을 재정의하여, 폭행이나 협박이 저항을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강간으로 보자고 주장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합리적인 개선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동의간음죄’는 실효성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면 형벌의 엄격성을 무너뜨릴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강간의 구성요건을 세분화하여 폭행, 협박, 위력의 정도에 따라 형벌을 달리 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연애의 형태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성별 고정관념에 속박당해 살아왔습니다. 연애의 형태도 마찬가지죠. 여성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미덕이고, 남성은 이런 여성에게 끈질기게 구애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애프터’는 남성의 몫으로 여겨집니다. 주도적으로 추파를 던지지 않으면 여성에게 관심이 없거나 ‘바보’ 취급을 받기 마련이죠. 어쩌면 ‘명시적 동의’만이 답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이런 전형적인 형태에 익숙한 여성과 남성들에게는 연애나 성적 만남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굳이 이런 고정관념만이 연애를 방해하는 건 아닙니다. ‘밀당’이니 ‘썸’이니 하는 유행어는 기성세대가 만든 게 아니죠. 연애 초기, 혹 ‘썸’이라고 불리는 단계에는 때로는 가까이 하고 또 때로는 멀리 하는 기술(!)을 통해 연애감정을 키워나가기 마련입니다.

연애 데이트 사랑

성적인 만남은 언어적일 뿐 아니라 비언어적이기도 합니다. 간접적인 신호, 혹 직접적인 스킨십으로 ‘동의’의 단계를 쌓아감으로써 성적 긴장과 흥분에 도달하게 되지요. 모든 단계마다 언어를 통해 명시적인 동의를 구한다면 성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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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같은 ‘동의’의 시대에 성적 즐거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원문: 이온, 하이디 매튜스, 번역: 뉴스페퍼민트): 이 칼럼에서 하이디 매튜스는 ‘동의’라는 개념이, 이론에서 구성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 세계에서는 명확하고 명료하게 파악하기 쉬운 의사표시가 결코 아니며, 특히 ‘열광적 동의’라는 개념은 인간의 “에로틱한 잠재력”을 이분법적이며 기계적인 기준으로 도착증이나 범죄로 만들어버리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서구의 논의고, 이 의견에 대해서도 마땅히 비판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성문화에서 ‘동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의미를 또 다른 각도에서 음미할 수 있는 좋은 칼럼이고, 본문의 논의를 좀 더 풍성하게 할 것으로 생각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이것은 ‘Yes means Yes’를 부정하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구호가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하다는 이야기입니다.

‘Yes’란 무엇일까요? 운동가들은 쉽고 단순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정말 연애와 성이라는 가장 고차원적인 인간관계에서 ‘Yes’를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나요? 첫 키스의 순간 오고갔던 복잡한 감정과 신호들을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Yes’는 분명해보이면서도 분명하지 않고, 심지어 문화와 시대적 배경에 따라 변화하기도 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Yes means Yes’를 위하여 연애의 형태 자체를 고민하고 변화시켜가야 합니다. 추파는 일방의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주고받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한 층씩 번갈아가며 쌓아올리는 것이 되어야 하지요.

아지즈 안사리의 경우

여기에서 잠시 잠시 주목해 볼 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지즈 안사리라는 미국의 코미디 배우입니다.

페미니즘 성향의 웹진 ‘베이브’는 ‘그레이스’라는 익명 여성의 ‘미투’ 폭로를 보도합니다. 그 기사에서 그레이스는 아지즈 안사리가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주장했지요. 그레이스는 안사리의 아파트에서 만남을 가졌는데, 안사리가 성행위를 시도하자 이 과정에서 불편하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피력했습니다. 안사리는 그레이스의 의사를 일단 존중하였으나, 이후에도 성적인 행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레이스는 이를 성폭력이라고 주장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나쁜 데이트’, ‘불편했던 성관계’일 뿐, 성폭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사리는 그레이스가 불편하다는 의사를 표하자 멈추었으며, 강제로 성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지즈 안사리는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입니다. 안사리는 TV 토크쇼에 나와 여러 번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사진은 유명 토크쇼인 '코난'에 나온 2010년 당시 모습)
아지즈 안사리는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입니다. 안사리는 2015년 TV토크쇼 ‘레터맨 쇼’에 나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앞으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야 한다”는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죠. (사진은 TV 토크쇼인 ‘코난’에 나온 2010년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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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가 한 차례 불편하다는 ‘비동의’ 의사를 표하긴 했습니다. 겉으로 피력하진 않았지만, 내심 관계가 불쾌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비동의에 의한 강간이라 주장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걸 랜드]의 작가이기도 한 ‘디 애틀랜틱’의 케이틀린 블래너건(Caitlin Flanagan)은 베이브의 보도가 “3,000단어짜리 리벤지 포르노”(“3,000 words of revenge porn”)라고 말했습니다. 안사리는 졸지에 자신의 성생활이 대중 앞에 노출되고 말았으니까요.

베이브의 보도를 "3,000단어짜리 리벤지 포르노"라고 비판한 '디 애틀랜틱'의
아지즈 안사리에 관한 ‘베이브’의 보도를 “3,000단어짜리 리벤지 포르노”라고 비판한 ‘디 애틀랜틱’의 케이틀린 브래너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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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QgW0DAbmG4

하이라인뉴스(HLN)의 호스트 애슐리 밴필드가 베이브 보도를 비판하는 모습. ‘디 애틀랜틱’과 ‘HLN’뿐만 아니라 보수지는 물론이고, 뉴욕타임스와 가디언과 같은 진보지도 베이브의 보도를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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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시사점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동의’ 여부가 칼로 자르듯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레이스는 훗날 이 관계를 후회했으며, 아마 당시에도 그리 유쾌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고 관계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상대가 성적인 행위를 요구할 때 이를 거부하는 건 뭔가 배려심 없는, 나쁜 행위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미안해서, 상대에게 도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성관계에 응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납니다. 여성, 특히 어린 여성은 이런 경험을 많이 토로하곤 합니다. 물론, 남성에게도 일어나고요.

이건 강간은 아니지만, 분명 나쁜 경험입니다. 상대의 탓도, 내 탓도 아니지만, 어쨌든 일어나는 일이죠. 우리는 다시 ‘연애의 형태’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성이 주도하고 여성이 따르는 성별 고정관념을 벗어나, 호감을 한 층씩 번갈아 주고받으며 연애감정을 쌓아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적, 비언어적 방식으로 서로 동의하고 합의하여 관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물론 동의와 합의란 무엇이며, 비동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좀 더 진지하게 얘기해봐야 할 테고요. 그건 아마 긴 과업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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