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오늘 트위터를 무대로 일어난 ‘해프닝’을 극단적으로 요약한다.

  1. 한 일간지 기자(트위터에서 나름 ‘유명인’)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영화가 너무 재미없어서 ‘카톡질’을 했다는 트윗을 올렸다.
  2. 트위터 여론 분노. (왜 우리는 이토록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나도 그런다.)
  3. 해당 기자 왈, “욕하고 싶은 사람 안 나타나 어찌 살았을까 싶은 양반들.”
  4.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리는 식 대응에 트위터 이용자의 분노는 폭주했다.
  5.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발빠르게 [극장에서 스마트폰을 켠 당신을 사람들이 비난하는 5가지 이유](이하 ‘5가지 이유’)라는 글을 발행했다.
  6. 곧이어 허핑턴포스트 공동편집장, 트위터에 “오늘의 프론트페이지 1면은 모 기자님께 바칩니다.”라는 트윗을 남긴다.
  7. 사람들 환호. 허핑턴포스트코리아가 나의 복수를 대신해줬다! 브라보!

우리는 항상 마녀와 악당이 필요하다

나는 성선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에게는 항상 ‘마녀’가 필요하다. 내 억눌린 분노를 폭발할 수 있는 먹잇감이 필요하고, 사회적인 정의감을 충족할 수 있는 악마가 필요하다. 쉽게 말해 사회적인 정의감으로 충만한 공격심리, 일종의 ‘대중심리’는 늘 우리 주변에 있다. 나에게도 그런 ‘대중심리’가 있다. 나만 혼자 깨끗하고, 고상하다는 거 아니다. 나는 너다. 우리는 이미 자기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체는, 언론사는 적어도 미디어질을 하는 사람은 이러면 안 된다. 대중심리에 편승해서 그 대중의 공격성을 휘발적으로 해소하는 건 언론의 역할이 아니라 개인의 원한을 대신 풀어주는 흥신소나 동네 깡패의 역할이다. 언론은 비유하자면, 국가가 형법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사적인 복수를 대리하듯, 언론은 대중의 공격성을 사회적인 공적 언어로 환원해서 합리적인 토론 공간, 이른바 ‘공론장’을 제시해야 한다. 그저 대중심리에 편승해 대신 복수하면 안 된다.

마녀 화형식
마녀 화형식 (그림: 위키백과 공용)

비판과 비난

비판과 비난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쉬운 기준은 뭘까?

행위와 행위자를 구별하는 건 ‘비판’의 기본이고, 행위를 핑계 삼아 행위자에게 모욕을 가하는 건 ‘비난’의 기본이다. 물론 행위자를 공격하고, 비판할 필요가 존재할 때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행위자를 공격해야 하는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 이 경우에도 그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행위자에게 귀속하는 것이지 그 행위자를 비난하기 위해 비난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후보자(의 과거 행위)에 관한 판단이 대표적이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5가지 이유’는 대체로 합리적인 의견을 담은 글이다. “예기치 않은 공격이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어두운 밤 귀갓길에 당한 퍽치기나 다름없다.”라는 비유는 글쓴이가 표현한 것처럼 그 비판하려는 행위에 비해 과도하게 격한 비유라서 아쉽지만, 영화관 예절에 관한 견해로선 대체로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견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얼마나 급하게 편집했는지, 자신의 매체 이름에 오타(누기)를 냈다. 허핑턴포스트코리!
얼마나 급하게 편집했는지, 자신의 매체 이름에 오타(누기)를 냈다. 허핑턴포스트코리! 물론 있을 수 있는 실수다.

‘허핑턴포스트코리'(!)의 트위터식 마녀 화형식

허핑턴포스트코리아가 ‘트위터’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해프닝(트위터에선 이런 일이 일상적이다.), 그 대형 ‘버즈'(떡밥)를 발빠르게 ‘영화관 예절론’에 관한 리스티클 기사로 프론트에 올린 것도 대체로 이해하려면 이해할 만한 발행 정책이라고 나는 본다. 나는 허포코를, 물론 허포코뿐만 아니라 대개의 매체가 그렇지만, 이런 대형 ‘버즈’가 일어나면 일단 발행하고 보자, 이런 정책을 강하게 구사하는 매체로 본다. 이런 정책은 순발력 있게 독자의 의식과 호흡하려는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5가지 이유’ 자체보다는 이런 컨텐츠를 유통하는 방식에 있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편집장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오늘의 프론트페이지 1면은 모 기자님께 바칩니다.”라고 이 해당 글을 소개했다. 세칭, 트위터식 ‘조리돌림’이다.

허포코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그 비판 내용이 합리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방식은 비난이고, 마녀사냥이다. 대중정서에 편승해서 트위터 마을 광장에서 벌어지는 마녀 화형식을 마치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광고’한다. 내가 보기엔 아주 개판스러운 상황이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물론 헛소리다. 사람의 의식은 그렇게 고결하지 않다. 마동팔 검사식으로 말하면, “솔직히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 죄를 저지르는 좆 같은 새끼들이 나쁜 거지.”(넘버 3. 송능한, 1997) 하지만 “우리, 사람이 되긴 힘들어도 괴물이 되진 말자.”(생활의 발견, 홍상수, 2002)

하물며 언론이다. 언론인이다. 매체 하는 사람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외면한 ‘위선자’나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판을 함에 있어 그 행위와 행위자를 구별하고, 반드시 그 행위자를 비판할 필요가 있을지 한 번 더 생각하면 좋겠다. 더불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서로 편을 나눠 투쟁할 필요가 있는 이슈인지 아니면 ‘공론의 장’을 만들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해야 하는 이슈인지도 좀 구별해주면 좋겠다.

고야
The Procession (goya,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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