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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 역사의 목격자들

  1. 천국 문 앞에서도 AP 기자를 만날까 봐 무섭군
  2. AP 특파원의 일곱 가지 조건
  3. AP,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한다
  4. AP 특파원의 ‘소름 끼치는 임무’
  5. ‘아랍의 봄’ 그 자리 남은 절망: 27살 아델 케드리가 분신한 이유
  6. 취재원의 여섯 가지 유형
  7. 언론의 권위는 현장에서 생긴다
  8. 현대전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 사라예보 포위전 (’92-’96)
  9. 멕시코 마약 전쟁: 마크 스티븐슨의 기록
  10.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분쟁과 미디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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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 세르비아 고란 옐리시치

무슬림 인구가 많은 보스니아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이 지역에 거주하는 기독교세르비아인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여 사라예보 주변 산악지역을 점령하고 소총, 기관총, 박격포, 대포, 로켓발사기 등을 배치한 뒤 도심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보이는 대로 사살하였다.

1992년 5월 2일 시작되어 1996년 2월 29일 끝난 이 포위전은 현대전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으로 기록되었다. 보스니아군은 끝내 세르비아 민병대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였으며, 결국 나토(NATO)의 무력 개입으로 세르비아가 철수하면서 끝이 났다. 이 기간 동안 민간인 5,434명을 포함하여 13,952명이 사망하였으며, 사라예보 인구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이 전쟁은 오늘날 사라예보 포위전(Siege of Sarajevo) 또는 보스니아 전쟁(Bosnian War)이라고 불린다.

1992년~1993년 겨울, 장작을 모으고 있는 사라예보 주민. (출처: Christian Maréchal, CC BY 3.0)
1992년~1993년 겨울, 장작을 모으고 있는 사라예보 주민. (출처: Christian Maréchal, CC BY 3.0)

목숨을 걸고 현장으로

세르비아가 사라예보를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하자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빠져나왔지만, AP 특파원 토니 스미스(Tony Smith)는 동료 기자들과 함께 거꾸로 이곳으로 들어갔다.

“사라예보는 포화 속에서 폐허가 되고 있었고, 거기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었죠. 물론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고려할 요인이 되지 못했어요. 해외 특파원이 되고자 결정한 건 나였고, 내가 해야 할 일이었거든요. 나 자신에게, 동료에게, 나의 상사에게, 무엇보다도 사라예보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든 게 너무도 안 좋았어요. 터무니 없을 정도로 공정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당연히 취재해야 한다고 느꼈죠.

스미스는 뒤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을 막기 위해서 자동차 뒷자리에 타이어를 잔뜩 실었다. 그리고 땅콩버터를 비롯해 온갖 생필품과 식수 정화제도 한가득 실었다. 사라예보에서는 깨끗한 물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저격수의 사정 거리에서 벗어나려고 최대한 속도를 냈어요. 눈 앞에 대전차 장애물이 보이길래 기어를 저속으로 바꾸려고 했는데, 아차 “이 차는 자동변속기였지!” 주춤거리는 사이에 방향을 꺾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박고 말았죠. 자동차 앞부분이 움푹 패였는데, 그래도 차가 달리더라구요. 토요타 코롤라에게 축복을!”

보스니아 전쟁

스미스는 부동산 중개인에게서 아파트를 빌려 임시 AP 사라예보지국을 꾸렸다. 그곳은 세르비아 포격의 표적이 된 병원이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건물 맨 위층에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긴 했지만, ‘사상자들을 관찰하고, 그 숫자를 세는 데에는’ 상당히 좋았다.

또 다른 AP 특파원 폴 알렉산더(Paul Alexander)는 사라예보에 입성한 첫 날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지대공 무기를 지대지 무기처럼 쓰는 세르비아 군인들 사이를 뚫고 간신히 사무실까지 갔죠. 거리의 간판들은 총알구멍으로 구멍이 숭숭 뚫여 있었고, 곳곳에 매복한 저격수들은 조준점을 확인하고 있었어요.”

포위전이 장기화되면서 사라예보는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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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장작을 얻기 위해 도시의 공원과 묘지를 샅샅이 뒤졌다. 나무, 관목, 울타리…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잘라냈다. 그렇게 모은 지저분한 나무뭉치를 사람들은 집으로 끌고 갔다. 초록 식물을 채취하기 위해 불모지를 찾아다녔다. 잔디도 상관없었다. 겨울철, 먹을 것이 떨어진 그들은 떨어진 밤을 먼저 줍기 위해 다람쥐와 경쟁했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얼어죽는 것과 굶어죽는 것밖에 없었다. 카밀라 페트코비치-자사레비치(64)는 자신은 살만큼 살았다고 하면서 낯선 외신기자에게 아이들만이라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John Daniszewski, “In besieged Sarajevo, many wonder if they’ll survive winter,” The Associated Press, October 31,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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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이 되어

세르비아 민병대는 외신기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ABC 특파원이 밴을 타고 가다가 사라예보 거리에서 저격으로 사망하였는데, 총알은 밴 뒷면에 테이프로 크게 붙어 놓은 ‘T’자와 ‘V’자 사이를 정확히 관통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우리를 향해서도 주저없이 총을 쏘았어요. 기자들을 맞추면 보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우리가 타는 랜드로버는 여기저기 총알 자국으로 가득했어요. 한번 나갔다 올 때마다 검은 매직펜으로 새로 난 총알자국에 동그라미를 쳤죠.” (폴 알렉산더)

토니 스미스는 사라예보에 들어가 취재를 시작한 지 겨우 며칠도 지나지 않아 끔찍한 비극을 경험한다. 스미스는 동료들과 함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효과적으로 취재하기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이 도시를 세 구역으로 나눠, 두 명씩 짝을 지어 90분 마다 순찰하기로 했다.

어느 날 아침, 순찰을 나갔던 AP 사진기자 데이빗 브로클리(David Brauchli)와 스페인 카탈루냐 일간지 《아부이Avui》의 젊은 기자 조르디 푸욜(Jordi Pujol)이 복귀하지 않았다. 다른 두 팀이 그들을 찾아나섰고, 폭격이 시작되기 직전 폭격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현지인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폭격 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했기에, 먼저 가까운 병원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수소문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폭격이 잠잠해진 뒤 그 지역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그들을 발견했다. 브로클리는 유산탄에 맞아 쓰러져있었는데,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로 몸 한 쪽에 박힌 파편을 혼자서 뽑아낸 상태였다. 반면, 방탄조끼를 입고 있지 않던 26살 푸욜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스미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취재를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어떤 면에서 비극을 진정으로 느낄 여유도 없었어요. 사람들은 자주 나한테 물어요. “그곳에 있을 때 위험하다고 느꼈나요?” 아뇨.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너무나 집중해있었거든요. “오, 맙소사, 총에 맞는 거 아냐?” 그런 걱정을 할 시간도 없었어요. 물론 저격수들이 하루종일 총구를 겨누고 있는 길을 통과해야 할 때는 정말 심장이 튀어나올 듯 무서웠죠.

하지만 매일 매순간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게 느낀다면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절대 그런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분별하지 말고, 그냥 마음 한켠에 밀어놓을 수 없다면, 정말 이런 것들이 신경 쓰인다면 현장에 나갈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취재도 할 수 없겠죠. 기본적으로 위험을 향해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은 기자를 해서는 안되죠.”

이 비극적 사건은 그가 작성해서 송고한 기사의 다섯 번째 문단에 짤막하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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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밤새 전개된 전투는 동틀녘에 끝났다. 하지만 이 전투 와중에 카탈루냐 일간지 《아부이》의 사진기자 조르디 푸욜이 사망하고 AP의 사진기자 데이빗 브로클리가 중상을 입었다. 브로클리는 머리, 사타구니, 팔에 박힌 박격포탄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푸욜은 전쟁 발발 10주 만에 1,300 명이 목숨을 잃고 70 만 명이 난민이 된 보스니아전쟁에서 사망한 첫 번째 언론인이 되었다. (토니 스미스; Tony Smith, “Bosnian troops call off assault on army barracks,” The Associated Press, May 17,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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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

이 ‘초현실적인’ 상황에서 스미스는 계속 취재를 하면서, 관을 만들어 줄 사람을 수소문하고, 동시에 기름이 가득 채워진 자동차를 찾아 구입했다. 전쟁통에 관까지 만드는 것은 유난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으나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전기도 끊긴 상황이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브로클리의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의사들의 소견을 얻어내야만 했고, 이들을 이송하기 위한 국제적인 정부 관료들의 협조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UN에서 파견된 관료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제 밑도 닦지 못하는 허수아비 같았다.

결국, 스미스는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부상으로 인해 최대한 안정이 필요한’ 브로클리를 태우고 사라예보를 탈출할 독자적인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사라예보를 빠져나가 2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는 스플리트로 갈 계획을 짰다.

“사라예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악명 높은 ‘스나이퍼앨리(Sniper Alley)’를 통과해야 했어요. 그 길을 전속력으로 달릴 때가,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을 거예요.

“아, 이제 끝이구나. 어쨌든 최선을 다했으니 죽어도 후회는 없어.”

하지만 운 좋게도 사라예보를 빠져나올 수 있었죠. 그렇다고 고비가 끝난 건 아니었어요. 또 다른 바리케이드가 나왔고, 더 광신적인 무장단원들이 지키고 있고,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였어요.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죠.

“그쪽으로 가면 그자들이 당신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곳을 피해 가는 방법은 산길로 돌아가는 거였어요. 돌멩이가 울퉁불퉁 솟아있는 험난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거였죠. 브로클리는 계속해서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면서 이를 악물고 극심한 고통을 견뎠어요. 어쨌든 산길을 무사히 통과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런데 또 크로아티아 경찰이 나타나 우리를 세우더군요.

“서류를 보여주십시오.”

“저기, 없습니다. 있었는데 모두 잃어버렸어요. 이 친구는 사라예보에서 취재하다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차에는 관이 실려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스플리트공항으로 가는 중입니다. 제발 좀 가게 해 주세요.”

하지만 그건 우리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줄 생각이 전혀 없더군요. 잠시 무전을 한다고 경찰들이 자기들 차로 갔는데,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시동을 걸고 달렸죠. 결국, 우리는 스플리트에 진입했고, 공항에 다다랐어요. AP 에디터들이 마련해놓겠다고 한 부상자 수송용 헬리콥터가 있더군요. 브로클리를 먼저 헬리콥터에 실어 떠나보내고, 이제 시체를 처리하기 위한 일을 했죠. 모든 일이 끝난 뒤 에디터들이 이걸 기사로 쓰라고 요청했어요. 결국, 이게 내가 쓴 기사 중에 1인칭 시점으로 쓴 유일한 기사가 되었죠.” (토니 스미스)

사라예보 지역에서도 특히 악명이 높은 "스나이퍼 앨리"를 통과 중인 노르웨이 UN군 (촬영: 1995년 11월, 출처: Paalso, CC BY 3.0)
사라예보 지역에서도 특히 악명이 높은 “스나이퍼 앨리”를 통과 중인 노르웨이 UN군 (촬영: 1995년 11월, 출처: Paalso, CC BY 3.0)

다시 죽음의 도시 사라예보로

스미스는 부상당한 동료와 죽은 동료의 시체를 싣고 사라예보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뒤, 휴가를 받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 폭격으로 도시 절반이 사라진 사라예보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BBC뉴스에 출현한 것이 아버지에게 전한 마지막 안부였기 때문이다. 당시 위성전화는 기사를 전송할 때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가족에게 알려줄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일주일만에 비엔나로 돌아와 사라예보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자원한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할 거 같아요. 지금 돌아가고 싶어요. 취재하다가 중단하고 온 게 있는데, 빨리 돌아가서 그 취재를 마무리하고 싶어요. 지금 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그런 용기가 날지… 잘 모르겠어요.” (토니 스미스)

1993년 겨울 임시 AP지국으로 사용했던 벨베데레 호텔 앞에서 AP 사라예보취재팀이 포즈를 취했다. 랜드로버 위 왼쪽 끝에 서 있는 선글래스를 쓴 사람이 로버트 리드고, 그 옆에 선글래스를 쓴 사람이 토니 스미스다. (사진 제공: 토니 스미스)
1993년 겨울 임시 AP지국으로 사용했던 벨베데레 호텔 앞에서 AP 사라예보취재팀이 포즈를 취했다. 랜드로버 위 왼쪽 끝에 서 있는 선글래스를 쓴 사람이 로버트 리드고, 그 옆에 선글래스를 쓴 사람이 토니 스미스다. (사진 제공: 토니 스미스)

사라예보의 비극이 1년 이상 지속되면서 이 전쟁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갈수록 식어갔다. 외부 세계의 관심을 되살리고자 AP 특파원들은 좀더 색다른 소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발굴한 이야기 중 하나가 무덤 파는 일을 하는 23살 청년 이야기다. 그가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했다.

“장례식은 해뜰녘이나 어둑해질 무렵에 열려요. 아침에는 어느 정도 안개가 있어서 세르비아 저격수들의 총에 맞을 확률이 낮거든요. 묘지 입구에는 쇠로 만들어진 컨테이너가 있는데, 하객들은 충분히 어두워질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려야 해요.”

나는 무덤을 파는 청년을 인터뷰했고, 번역한 원고를 받아들었죠. 그제서야 전쟁이 시작된 이래 그 일을 하던 동료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처럼 삶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면 전혀 예상치못한 이야기들이 이처럼 도처에서 불쑥불쑥 나타났어요.” (폴 알렉산더)

그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기사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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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스 수바직의 직업은 사라예보에서 가장 위험한 일 중 하나다. 바로 무덤을 파는 일이다.

“거의 매일 저격수들이 총을 쏘지요. 그들은 나를 손바닥 안에 놓고 보듯이 볼 수 있어요. 낌새가 이상하면 곧바로 땅 속으로 뛰어들어 엎드려요. 사라예보사람들 모두 그런 일에 익숙하죠.”

사라예보에서는 죽는 이들이 늘어나자 축구장에 시신을 묻기도 했다. (폴 알렉산더; Paul Alexander, “Bosnian gravedigger dodges death to bury the war’s casualties,” The Associated Press, December 16,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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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사명: 진실의 목격자 

AP 파리특파원 데이빗 크래리(David Crary)는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동안, 총알들이 머리 위로 쌩쌩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는 공포에 질렸다. 파리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아이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곳에서 3주를 보낸 뒤, 그곳에서 활동하는 기자와 시민들의 용기에 깊이 감화되었고, 그곳의 취재 활동은 ‘계속하고 싶은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파리로 돌아갈 때가 되니 ‘뭔가 개운치 않고, 죄책감 비슷한 감정’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좀더 빠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기사를 더 많이 써야 한다고 느꼈어. 그러한 초조함이 기자들에게 그곳으로 필사적으로 돌아와 기사를 쓰고, TV 리포트를 하도록 독려했을 거야. 아마도 기자들이 모두 그곳에서 떠나 아무도 기사를 쓰지 않았다면 상황은 훨씬 악화되었겠지. 목격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당히 큰 차이거든.

우리는 문제 해결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너무나 더디게 변해갔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 우리의 집단적인 취재 활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 현장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곳에 있을 가치는 충분했지. 그 지역 사람들도 우리의 연대감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고.

사라예보에서는 어쨌든 진실의 목격자라는 기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생각해. 물론 그 사태의 해결 과정은 너무나 지지부진해서 어떤 실질적인 도움도 주지 못한 것 같지만.” (데이빗 크래리)

그럼에도 목숨을 건 특파원들의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끊임없는 보도는 미국이 보스니아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오늘날 평가받는다.

데이빗 크래리가 1992년 6월 크로아티아에서 UN수송대와 함께 사라예보로 들어가기 전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 데이빗 크래리) 
데이빗 크래리가 1992년 6월 크로아티아에서 UN수송대와 함께 사라예보로 들어가기 전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 데이빗 크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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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AP, 역사의 목격자들] (지오바니 델오토, 신우열 옮김, 크레센도, 2020)에서 발췌한 내용을 출판사가 직접 각색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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