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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 역사의 목격자들

  1. 천국 문 앞에서도 AP 기자를 만날까 봐 무섭군
  2. AP 특파원의 일곱 가지 조건
  3. AP,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한다
  4. AP 특파원의 ‘소름 끼치는 임무’
  5. ‘아랍의 봄’ 그 자리 남은 절망: 27살 아델 케드리가 분신한 이유
  6. 취재원의 여섯 가지 유형
  7. 언론의 권위는 현장에서 생긴다
  8. 현대전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 사라예보 포위전 (’92-’96)
  9. 멕시코 마약 전쟁: 마크 스티븐슨의 기록
  10.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분쟁과 미디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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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중인 미군 병사들. (출처: 작자 미상, 노르웨이 해군 역사센터, 퍼블릭 도메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중인 미군 병사들. (출처: 작자 미상, 노르웨이 해군 역사센터, 퍼블릭 도메인)

“어딘가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평범한 사람이 모두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있는데, 정신 나간 몇몇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기자일 것이다.” (모트 로젠블럼, Mort Rosenblum)

AP 특파원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직업 윤리의 핵심이고, 그렇게 기사를 써야만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으며, 그렇게 쓴 기사가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언론이 권위를 갖게 된 것은, 기자가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취재하여 보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 목격은 단순히 속보를 취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통찰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장을 일일이 찾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최근 많은 뉴스 매체가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예전처럼 직접 현장을 쫓아다니는 기자들은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 가지 않고는 어떤 사건도 제대로 취재할 수 없다는 AP 특파원의 믿음은 굳건하다.

사무실에 앉아서 다른 매체에서 내보내는 뉴스를 체크하거나, 기자실 같은 곳에 가서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는 기사를 받아쓰는 것으로는 왜 충분치 않을까? 이런 취재 방식은 권력기관이나 군사정권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권력기관들은 기자실 제도를 활용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언론에는 정보를 주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은 배제하는 등 접근권을 통제함으로써 언론을 길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언론 보도가 권위를 갖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직접 취재하여 퓰리쳐상을 수상한 맥스 데스포(Max Desfor)는 ‘현장의 힘’을 증언한다. 그는 연합군과 함께 북한부대를 추격하던 중 ‘오줌이 마려워서’ 잠시 멈췄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헛됨"(Futility), 맥스 데스포가 한국전쟁 중 찍은 처형당한 민간인의 손. 시신 위로 눈이 쌓이고, 손에 남은 체온으로 눈이 녹은 모습.
맥스 데스포가 한국전쟁 중 찍은 처형당한 민간인 시신의 손. 데스포는 이 사진에 (전쟁의) “헛됨”(Futility)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두 손이 눈 밭에 솟아올라있었고, 바로 몇 센티미터 위에 검은 구멍이 있더군. 곧바로 나는 카메라를 꺼내들었지. 검은 구멍은 그 아래 누워있는 시체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면서 눈이 녹아 생긴 것이었어.

황급히 지휘관을 불렀고, 거기서 남녀 시체가 100여 구가 나왔어. 당시 우리가 추적하고 있던 부대는 굉장히 다급했던 모양이야. 북쪽으로 끌고 가던 사람들이 뒤쳐지기 시작하자 모두 총으로 쏴죽이고 떠난거야.

그렇게 쓰러진 사람들 위로 눈이 내려 시체를 모두 덮어 버린 것이지. 손등과 손등을 마주하여 손목이 묶여있었는데, 이런 비참한 일은 당시 수도 없이 벌어졌어.” (맥스 데스포)

 

맥스 데스포, "난파된 다리를 건너는 한국 피난민의 탈출"(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1950. 12. 3. 촬영, AP에 의해 최초 배포, 퍼블릭 도메인) 데스포는 이 사진으로 이듬해인 1951년 사진 부문 퓰리쳐 상을 받았다.
맥스 데스포, “난파된 다리를 건너는 한국 피난민의 탈출”(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1950. 12. 3. 촬영, AP에 의해 최초 배포, 퍼블릭 도메인) 데스포는 이 사진으로 1951년 사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데스포는 직접 약 15m 높이(50피트)의 피폭된 다리 위에 올랐다.

2000년대 초, 탈레반이 아편 재배를 모두 근절했다고 발표했을 때 서방 세계는 모두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개넌은 탈레반의 발표가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농촌 지역으로 직접 들어갔다.

“누구라도 양귀비를 재배하면, 재배한 사람은 물론 당신들도 모두 체포할 것이오.”

탈레반들이 마을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물라(율법학자)와 원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사람들이 탈레반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은 한번 말한 것은 무조건 행동으로 옮긴다’는 거였죠. 결국, 마을의 원로와 물라들이 엄격하게 단속을 했어요. 실제로 캠페인이 진행되는 동안 발각된 양귀비 재배면적은 2,000m²에 불과했으며,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은 네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요. 취재한 내용을 기사로 썼는데, 반응이 한결같았죠.

“에이, 그럴리가? 이걸 믿으라고?”

나는 UN이 낸 통계도 확인했고, 온갖 자료를 다 확인했어요. 실제 양귀비를 재배하던 농가에도 가봤고요. 농부들은 정말 수입이 사라져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무수히 눈물을 흘렸어요. 헬만드, 칸다하르, 낭가르하르…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죠.” (캐시 개넌, Kathy Ganon)

특히 전장을 누비는 종군기자는, 매체를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행위까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라크 전쟁(2003.3.-2011.12.)을 취재한 그레이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시장에 갔다오던 농부가 탄 트럭을 세워서 검문하던 미군이 갑자기 칼을 꺼내 타이어를 쑤시는 거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 이런 수모를 당한 사람들이 미군, 더 나아가 미국에 대한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우리 같은 특파원들이 전장에 가서 그걸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도대체 누가 알 수 있겠어.” (데니스 그레이, Denis Gray)

이라크 전쟁

특파원들은 한결같이 현장에 가서 직접 보는 것을 기자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라고 말한다. 현장에 접근하기 어려울 때는 현장에 가기 위해 기지를 발휘해서라도 현장에 가야 한다. 아무리 위험이 따른다고 해도 현장에 서있다는 사실에 기자들은 어떤 외경심,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세계사 속에 길이 남을 사건, 특히 민주화운동이 폭발하는 현장에 서있을 때 느끼는 감격과 기쁨을 직접 체험해본다면, 특파원들이 그토록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공산주의 체제가 한창 몰락하던 폴란드에서 활동한 AP 특파원은 이렇게 회상한다.

“자동차로 대여섯 시간을 운전해서 갔지. 다른 방법은 없었어. 물론 그곳에 자유노조연대(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 활동가를 비롯해 다양한 취재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통해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얻는 정보는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기 어렵거든. 현장으로 가서 직접 보고, 직접 사진을 찍고, 또 얼마나 많은 군중이 참여했는지, 수백 명인지, 수천 명인지, 수만 명인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지.” (존 대니젭스키, John Daniszewski)

1980년 8월 폴란드 대파업을 주도한 자유노조 '연대' 창립자 레흐 바웬사가 시민들에게 사인해주는 모습. 바웬사는 198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990년 폴란드 초대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1980년 8월 조선소 파업투쟁을 이끈 레흐 바웬사가 시민들에게 사인하는 모습. 바웬사가 세운 자유노조 ‘연대’은 9월에 정부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받았다. 바웬사는 198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990년 폴란드 초대 직선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출처: 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2011년 반(反)카다피 혁명을 취재하던 폴 쉠은 국경을 몰래 넘어 반군 점령지로 들어갔다. 포화를 뚫고 들어와 사막의 시체안치소에서 시체를 세는 쉠의 모습을 본 반군들은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

북아프리카 특파원 폴 쉠이(가운데) 2011년 2월 22일 오전, 이집트에서 리비아로 넘어온 직후 리비아 혁명세력의 환영을 받고 있다. 혁명이 발발하고 며칠 뒤였다. 왼쪽에 서있는 국경수비대원의 옷에는 ‘종족주의를 반대한다! 파괴행위를 반대한다! 리비아 청년운동이여 영원하라!’라고 쓰여있다. (사진 제공: 폴 쉠)
북아프리카 특파원 폴 쉠이(가운데) 2011년 2월 22일 오전, 이집트에서 리비아로 넘어온 직후 리비아 혁명세력의 환영을 받고 있다. 혁명이 발발하고 며칠 뒤였다. 왼쪽에 서있는 국경수비대원의 옷에는 ‘종족주의를 반대한다! 파괴행위를 반대한다! 리비아 청년운동이여 영원하라!’라고 쓰여있다. (사진 제공: 폴 쉠)

니코 프라이스는 ‘아메리칸 드림’을 한 조각이나마 붙잡고자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중앙아메리카 사람들의 삶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 사진기자와 함께 그들의 행렬에 들어갔다. 과테말라에서 적당한 취재원으로 한 밀수업자를 골라,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밀수업자 곁에는 매춘부 한 명이 있었고, 엘살바도르 출신 ‘시골뜨기’ 13명이 있었고, 또 그들을 인도하는 가이드가 있었다. 물살이 세찬 강을 건너기도 하고, 신발이 빨려들어가는 진창을 달리기도 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밀수업자를 수소문했지만, 과테말라의 외딴 도시에서 미국인 기자 두 명이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죠. 우여곡절 끝에 며칠만에 밀수업자를 소개받았고, 끈질긴 설득 끝에 취재를 허락하겠다는 동의를 받아냈어요. 설득하는 데 하루 정도는 걸렸던 것 같은데 마지막에 돈을 얼마 줄거냐고 묻더군요. 우리는 돈은 지불할 수 없다고 말했죠. (웃음)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우리에게 따라와도 좋다고 말했어요. 우리는 모두 멕시코로 넘어왔고, 북쪽으로 우리를 실어다줄 차를 기다렸어요. 하루 종일 거기서 기다리다가 저녁이 될 때에 밴 하나가 오더군요. 그 차를 겨우 끼워 타고 밤새 들판과 숲을 가로질러 달렸는데, 정말 녹초가 되겠더라고요.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는 다시 국경으로 돌아갔는데, 가는 길에 우리는 진흙을 뒤집어쓰고, 신발은 다 망가지고, 꼴이 말이 아니었죠. 그런데 검문소에서 우리 보고 비자에 입국 도장을 받아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출입국관리소로 걸어들어갔는데, 국경 관리가 우리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와, 지난 밤에 한바탕 재미있게 놀았나봐.”” (니코 프라이스, Nico Price)

1970년대 중국이 문호를 개방한 뒤 베이징은 여전히 봉인된 북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기지로 변모했다. 1990년대 북한과의 국경 지역을 취재할 수 있는 허가를 받고 허츨러는 동료들과 함께 이 지역을 탐방했다. 중국은 이 지역을 개발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심각한 기근을 겪고 있던 북한은 이것을 마뜩지 않게 생각했다. 안내원들은 주민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막았으나, 허츨러는 예기치않게 주민을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가르는 압록강가를 지나가는데 밭을 경작하고 있는 주민이 눈에 띄더군요. 우리는 운전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어요. “스탑! 스탑! 스탑!” 얼떨결에 운전사는 차를 세웠고, 우리는 우르르 달려가 농부를 인터뷰했어요. 운좋게 누구의 방해도 없이 15분 동안 즉흥적으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죠. 북한 사람들이 겨울에 이곳으로 자주 넘어온다고 말했고, 또 그들이 상당히 굶주리고 있다고 했어요. 물론 심층보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 그 정도 정보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죠.” (찰스 허츨러, Charles Hutzler)

물론, 내전에 휩싸인 시리아나 무법천지가 된 상파울루처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해야 하는 곳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특파원들이 현장에 가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기자의 가장 본질적인 임무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는다. 거기에 진실이 있기 때문에. (출처: 왼쪽 사진 작자 미상, 노르웨이 해군 역사센터, 오른쪽 사진 맥스 데스포, "난파된 다리를 건너는 한국 피난민의 탈출", 모두 1950년 작, 모두 퍼블릭 도메인)
기자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는다. 거기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출처: 왼쪽 사진 작자 미상, 노르웨이 해군 역사센터, 오른쪽 사진 맥스 데스포, “난파된 다리를 건너는 한국 피난민의 탈출”, 모두 1950년 작, 모두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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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AP, 역사의 목격자들] (지오바니 델오토, 신우열 옮김, 크레센도, 2020)에서 발췌한 내용을 출판사가 직접 각색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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