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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 역사의 목격자들
- 천국 문 앞에서도 AP 기자를 만날까 봐 무섭군
- AP 특파원의 일곱 가지 조건
- AP, 미국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한다
- AP 특파원의 ‘소름 끼치는 임무’
- ‘아랍의 봄’ 그 자리 남은 절망: 27살 아델 케드리가 분신한 이유
- 취재원의 여섯 가지 유형
- 언론의 권위는 현장에서 생긴다
- 현대전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 사라예보 포위전 (’92-’96)
- 멕시코 마약 전쟁: 마크 스티븐슨의 기록
- 팔레스타인 vs. 이스라엘 분쟁과 미디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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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특파원은 전투 결과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현장에 직접 들어가 시체를 하나씩 센다. 아마도 AP 특파원이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위험한 임무일 것이다. 정부가 발표하는 정보에는 왜곡이 많기 때문에 기자는 직접 현장에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기사의 신빙성을 높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상당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1980년 광주, 테리 앤더슨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은 이런 일을 두 번이나 수행했다. 1980년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는 한국의 도시 광주에서 정부군이 무자비하게 반정부시위를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광주 시민은 계엄군에 맞서 도시를 장악했고, 계엄군은 도시 외곽을 봉쇄한 다음, 도심으로 진격하여 시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앤더슨은 사진 기자와 함께 광주로 갔다. 택시기사는 광주로 들어가는 길목을 10여 킬로미터 남겨두고 그들을 내려주었고, 걸어서 바리케이트를 넘었다.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전화기를 사용하러 매일 계엄군부대에 들어간 것을 빼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현장에 머물렀고, 그렇게 9일 동안 광주를 취재했다.
“광주에 들어간 첫째 날,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너무나 큰 충격과 비통함 속에서 하루를 보냈어. AP가 뭐하는 곳인가?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곳이지. 사람이 얼마나 죽었을까? 계엄군은 폭도 세 명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정말 죽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첫날, 그날 아침, 내가 광주에 들어가자마자 한 장소에서만 센 게 179구였어.
차에 깔려 죽고, 두들겨 맞아 죽고, 사지가 잘려 죽고,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살육당한 시신들… 그걸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며 숫자를 셌어. 손가락을 들어 하나, 둘, 셋, 넷… 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눈에 띄는 시체는 모조리 셌어… 그날 저녁 기사를 전송하기 위해 도시외곽으로 나오면서 내린 결론은, 한국 정부의 발표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었지. 죽은 건 세 명이 아니야. 내 눈으로 그 끔찍한 시신들을 하나하나 셌다고.” (테리 앤더슨)
앤더슨은 광주 전라남도청 옆에 있는 호텔에 묵었다. 도청은 계엄군이 최종 진격을 했을 때 시민군이 끝까지 저항하던 최후의 보루였다. 계엄군은 호텔을 향해서도 총격을 가했는데, 당시 앤더슨이 묵던 방의 벽에 붙어있던 숙박비 알림판에도 총탄이 날아와 구멍을 뚫었다.
“그날 새벽에 우리는 잔뜩 겁에 질려 밖으로 나왔어. 한국군 대령이 지프를 타고 지나가길래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 “대령, 대령, 대령!” 그가 멈춰서더군. “김 대령님, 오늘 작전으로 사람이 얼마나 죽었습니까?”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두 명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군인 한 명과 반란군 한 명이 죽었소.” 우리는 건물을 돌아 도청 안으로 들어갔어. 앞마당에 쌓여있는 시신만 17구가 되더군.
그 자리에 나 말고 특파원이 두 명 더 있었는데, 최대한 흩어져서 시신을 찾아보자고 했지. 우리는 각자 구역을 나눠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고, 그렇게 해서 확인한 시신은 수백 구에 달했어. 우리가 도청에서 알아낸 게 그 정도였으니, 광주 전체에서 죽은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알 수 없지.” (테리 앤더슨)
그는 이렇게 취재한 것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계엄군은 공식적으로 셋이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총알 세례를 받아 벌집이 된 한 건물 안에서만 기자는 시신 16구를 발견했다. 시민군 지도자들에 따르면 그날 죽은 사람만 261명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 기자 생활을 했지만, 이토록 많은 시체를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학생들에 따르면, 매장하기 위해 가족들이 수습해 간 시신도 많고, 배수로, 공터, 공사장에 버려진 시체도 많았다. (테리 앤더슨, “정부군 광주 탈환”, 1980년 5월 26일, Terry A. Anderson, “Government troops retake Kwangju,” May 26, 1980)
AP 특파원의 ‘소름 끼치는 임무’
몇 년 후 베이루트에서도 사망자가 적게는 400명, 많게는 1만 5,000명이라는, 너무나 차이가 큰 주장이 맞서는 미스테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곳에서도 앤더슨은 몇몇 특파원들과 함께 병원과 묘지를 찾아다니며 직접 시체를 셌다. AP 특파원은 ‘인간의 고통을 일관성 있고, 정확하게 취재하는 것이야말로 저널리즘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한 AP 기자는 피맛이 느껴지는 공기 속에서, 비닐봉지 밖으로 튀어나온 시체조각들 사이에서 시체를 세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공포를 느낀 경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 둘, 셋” 집중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면서 셌죠. “하나, 둘, 셋.” 밖으로 소리를 내면서 셌어요. 얼마까지 셌는지는 모르겠어요. 20, 30… “더이상 못 하겠어.” 소리쳤어요. 나 자신이 싫었어요. 그곳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시체를 세고 있는 나 자신을 참을 수 없었어요. (AP Oral History, Faramarzi, 2009, 53-54)
AP 기자들은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이 끝나면 곧바로 바그다드 내 병원을 돌아다니며 사상자를 파악했다. 안전상 문제로 인해 밖을 나갈 수 없는 경우에는 비상근 현지인 통신원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당시 AP 기자들의 업무는 ‘시체 안치소 관리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AP는 기사만 쓴 것이 아니라 매일 사망자 수를 집계하여 발표했다. 이런 확인 작업을 하지 않으면 미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피해 상황을 거짓으로 공표하기 때문이다.
“미군은 우리가 전쟁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키려고 한다고 불평하면서, 우리가 집계한 숫자에 대해 늘 이의를 제기합니다.” (스티븐 허스트. Steven Hurst)
이 소름끼치는 임무를 AP 특파원이 중시하는 이유는, 다른 언론사들이 AP 집계를 ‘표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1966년 브라질에서 대홍수가 발생했을 때 사망자 수를 집계하는 통신사는 AP밖에 없었는데, 이때부터 시체를 세는 것은 AP의 주된 임무가 되었다.
시체를 직접 세는 작업은 사망자 수를 확인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처참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기 위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게릴라 조직) 무장단체 사이에 발발한 무자비한 전쟁 중, 캐시 개넌은 5살 소녀가 로켓포에 정통으로 맞아 처참하게 죽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아이는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가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더 끔찍했던 경험도 있다.
“하자라족 사람이 미친듯이 울음을 터뜨리며 내 발 앞에 뭔가를 던지더군요.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사람의 머릿가죽이었죠. 그리고 나를 끌고가 머릿가죽이 벗겨진 시체들을 보여줬어요. 여자들을 강간한 뒤 머릿가죽을 벗겨 죽인 거예요.” (캐시 개넌 Kathy Gannon)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경험 많은 특파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경험은 직접적인 위험으로 입는 몸의 상처보다 훨씬 큰 마음의 상처를 남길 수 있다. 특별한 치료 방법도 없이 오랜 시간 트라우마와 싸울 수밖에 없다.
가장 큰 고통, ‘감정의 장벽’
AP 특파원은 취재 현장에서 아드레날린을 계속 분비하면서 거침없이 달린다. 특히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에는 비참한 현실이 자신의 감정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취재원을 찾고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기자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장벽을 치는 일’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날 무렵, 도나 브라이슨은(Donna Bryson) 폭력현장을 취재하러 나갔다가 동료가 죽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지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장에서 취재를 계속 이어나갔다.
때로는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현장에서는 아예 감지하지 못하는 공포도 있다. 취재를 하는 동안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공포가 나중에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한다.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은 베이루트에서 그런 경험을 했다.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불에 타 온몸이 까맣게 되어 수술대 위에 죽어있는 걸 봤습니다. 의사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죠. 수술대 옆에는 젖먹이 쌍둥이 남매를 물에 담가 놓은 양동이가 놓여있었는데, 죽은 아이의 동생이었어요. 물 속에서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죠. 그 참혹한 장면을 보고 나는 기사로 썼죠.“
병원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점령한 서베이루트에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분계선에서 몇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던 BBC 특파원 로버트 피스크(Robert Fisk)는 앤더슨이 현장에서 돌아와 ‘눈물을 쏟으며’ 기사를 타이핑하는 모습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앤더슨이 쓴 592단어로 된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얼굴과 가슴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3살짜리 꼬마 아메드 바이탐을 병원침대에 올려놓고 부드러운 붕대로 묶었다. 의사 아말 사마는 백린탄으로 인해 여전히 연기가 피어나는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지만, 그 순간 어린 아이의 심장은 멈췄다… 마른 체구의 소아과의사는 온힘을 쏟아 아이의 가슴을 강하게 압박하며 규칙적으로 입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간호사는 정맥주사와 전기충격기를 가져오기 위해 달려나갔다. 목요일 오후, 20분 간 노력을 쏟았음에도 아이는 되살아나지 못했다. (Terry A. Anderson, “One phosphorous shell kills three children, burns 11 relatives,” The Associated Press, July 30, 1982)
앤더슨은 나중에 인질로 잡혀있는 동안, 이 사건을 취재할 때 느낀 경험을 시로 썼다. 시는 이러한 비극을 아무리 열심히 취재한다고 해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처절한 절망을 표현한다.
우리가 종이 위에 흘린 눈물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다음 세상에도 또다른 아이와
또 다른 기자가 있을 것이고,
폭력으로 가득찬 세상이라는 욕조에서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일어날 수는 없는 법
단어를 수천 개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 감정은 깨끗이 정화되지 않는다.
– 테리 앤더슨
테리 앤더슨은 해병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4년부터 AP특파원이 되어 일본, 한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거쳐 중동에서 활약하였다. 박정희 암살 소식을 최초로 타전하여 단독 특종보도하였고,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1985년 레바논 전쟁 당시 베이루트에서 이슬람 무장단체에게 납치되어 6년 9개월 동안 감금되어 있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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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AP, 역사의 목격자들] (지오바니 델오토, 신우열 옮김, 크레센도, 2020)에서 발췌한 내용을 출판사가 직접 각색하고, 슬로우뉴스 원칙에 맞게 편집해 발행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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