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대통령 노태우 씨가 10월 26일 병세 악화로 사망했습니다. 노태우 씨는 12·12군사쿠데타를 주도하고,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전두환 씨와 함께 군부독재시대를 이끈 인물입니다. 6·10민주항쟁이 이뤄낸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제13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노 씨는 재임 기간 서울올림픽 개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등 성과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내란죄, 수천억 원 대 비자금 조성 등으로 징역 17년 형을 확정 받아 대통령 예우가 박탈됐습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노태우 씨 사망과 관련한 언론보도를 살펴봤습니다.
보수언론은 ‘공’, 진보언론은 ‘과’ 초점
노태우 씨 사망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는 사망 다음날인 10월 27일 신문 1면부터 확연히 차이 났습니다. 동아일보 [“저의 과오, 깊은 용서 바란다”] (김윤이·유성열 기자), 조선일보 [“국민에 봉사해 영광…과오는 용서 바란다”] (김형원 기자), 중앙일보 [노태우의 마지막 말 “용서해달라”] (김형구 기자)와 같이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는 ‘용서를 바란다’는 노 씨 말을 1면 제목에 실었습니다. 반면, 한겨레는 [12·12 쿠데타, 5·18 유혈진압…노태우 사망] (이승준 기자), 경향신문은 [5·18 사죄 없이 떠나다] (유정인·조문희 기자)를 실어 ‘과’에 초점을 뒀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무력진압 이후 행보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이라 할 만큼 달랐습니다. 중앙일보 [노태우 사죄 유언, 화해 통합의 빈소 열었다] (10월 28일 권호·윤성민 기자)는 “빈소 풍경은 사과와 용서, 화해에 가까웠다”며 이런 “분위기가 움트게 된 것은 먼저 고인과 유족의 통렬한 자기반성이 있어서다”라고 했습니다. 한국경제 [아들 재헌씨, 광주 수차례 찾아 대신 사죄…외손녀는 해군 자원입대] (10월 27일 고은이 기자)는 아들 재현 씨가 사죄했던 내용과 외손녀인 최민정 씨가 해군 소위로 임관했던 내용도 전하며 노 씨 유족의 지난 행보를 부각했습니다.
반면 한겨레 [5월 단체 “광주학살 진상 끝내 안 밝혀…죄인 기록될 것”] (10월 27일 김용희 기자)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끝내 말하지 않고 떠났다”는 5·18단체 등의 목소리를 전하며, 노 씨가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들이 저항했다”며 광주학살 책임을 시민에게 돌렸던 점을 짚었습니다. KBS [끝내 아들이 전한 대독 사과…“5·18 희생자에 용서 구해”] (10월 27일 강나루 기자)는 노 씨가 아닌 아들의 ‘대독 사과’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41년이 되도록 5·18의 실체를 밝히거나 직접 사과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채널A·MBN, 시민군 조문 ‘화해’로 확대해석
일부 언론은 유족대표가 아닌 사람을 ‘유족대표’로 잘못 적으며, 5·18 유족이 노 씨 사죄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채널A [“5.18 희생 용서해주시길” 유언 공개] (10월 27일 김성규 기자)는 “조문객 중에는 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 5.18 유족대표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며 “오늘을 기점으로 화해하고 화합하고 용서했으면 하는 것이 제 마음”이라는 박 씨 발언을 전했습니다. MBN [노태우 “5·18 무한 책임…너그러운 용서를”…노재헌, 사죄] (10월 27일 노태현 기자)도 “5·18민주화운동 시민군 상황실장을 맡았던 박남선 5·18 유족대표도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이런 가족들의 노고를 인정”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은 조문한 박 씨와 노 씨 유가족이 손을 맞잡은 사진을 1면에 실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튿날인 10월 28일 5·18단체는 박 씨 조문을 두고 “유족 뜻과 무관”하다고 발표했습니다. 동아일보 [‘5·18시민군’ 盧 조문에 5·18단체 “유족 뜻과 무관”] (10월 29일 이형주 기자)은 “박남선씨는 5·18유족회 회원이 아니다. 유족회 활동을 한 사실도 없고, 유족회 대표, 회장도 아니다”는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입장을 보도했고, 한겨레 [“5·18상황실장 노태우 조문은 개인행동”] (10월 29일 김용희 기자)도 “박씨의 개인 행보가 유족들의 공식 입장으로 비쳐 우려된다”라는 김영훈 5·18유족회 회장 발언을 보도하며 ‘유족대표’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바로잡았습니다. 또 한겨레는 “내가 유족대표라는 표현은 일부 언론이 오보한 것이다. 나는 유족이라고 말한 적 없다”는 박남선 씨 해명도 전했습니다.
5·18기념재단 등 5·18단체는 노태우 씨가 사망하자 “본인의 사죄는 물론 진상규명 관련 고백과 기록물 공개, 왜곡·조작된 회고록을 교정하지 않음으로써 끝까지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유족단체는 회고록 등을 이유로 노 씨 가족의 사죄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도 학살 책임자에 대한 진상규명 조사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박 씨 방문을 두고 ‘유족대표가 조문해 노 씨와 화해했다’는 식의 보도는 사실 확인에도 소홀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째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아픔을 안일하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닌지 의심케 합니다.
용서 구했으니 화합하라?
노태우 씨가 유언으로 용서를 구했으니 이제는 화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언론에 등장했습니다. 한국일보 [사설/5·18 희생자에 용서 구한 노태우, 국민 통합 계기 되길] (10월 28일)은 “광주 희생자에게는 너무 늦고 부족한 사과일 테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제 국민의 몫”이라며 “10년 넘는 투병으로 직접 표현하지 못한 사정을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고인의 사과를 받아들여 광주의 상처를 달래고 국민이 통합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습니다.
매일경제 [사설/“용서 구한다”는 노태우 전 대통령 메시지, 국가화합 초석되길] (10월 28일)은 노 씨가 유언으로 남긴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메시지는 울림이 적지 않다”며 “5·18 영령들에 대한 사과와 함께 시대와의 화해와 치유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평했습니다. 이어 “모쪼록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가 국가적 화합의 초석으로 작용하기를 바란다”는 희망까지 덧붙였습니다.
일방적인 화해 강요는 폭력일 뿐
한겨레 [“선생님, 전두환도 국가장 해주나요?”…말문이 막혔다] (10월 29일 이유진 기자)는 “과거에 대한 역사적 청산, 진상규명, 사과, 그리고 용서·화해가 이뤄져야만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며 “이런 단계를 다 생략한 채 단지 고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장을 결정해버리면 교사들이 역사 수업시간에 매번 해왔던 이야기들은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박래운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의 발언을 전했습니다.
한겨레는 [사설/사죄 없이 오욕 남기고 떠난 노태우 전 대통령] (10월 27일)에서 “무엇보다 신군부 실세로서 자신 또한 책임이 무거운 1980년 5월의 학살과 관련해 그는 광주 시민과 국민에게 한번도 직접 사죄하지 않았”으며 “[노태우 회고록]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 시민들이 유언비어에 현혹된 것이 사태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며 자녀의 ‘대리 사죄’는 온전한 사과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동아일보 [정도언의 마음의 지도/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 건 폭력이다] (2018년 7월 20일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상처받은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데 “사람들은 상처받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한다며, 용서와 화해는 정말 멋있는 말”이지만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정 교수는 “일방적으로 사회나 종교가 나서서 개인에게 무조건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압력을 넣는다면 그것은 낫지 않은 상처에 소금 뿌리는, 집단적 폭력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노 씨가 유언으로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한 점은 다행입니다. 하지만 5·18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 없는 말뿐인 사과는 화해와 화합의 초석이 될 수 없으며, 여전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 진실 앞에서 ‘화해’,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강요이자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YTN ‘광주사태’ 자막, TV조선 ‘5.18 폭동진압’ 막말
공에만 초점을 두거나, 화해를 강요하는 것에서 나아가 5·18민주화운동에 관해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10월 27일 방송된 YTN [뉴스앤이슈]에서는 ‘광주사태’라는 자막이 방송됐습니다. YTN은 노태우 씨 장례가 국가장으로 정해지며 정식조문이 시작돼 빈소에 정치권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노태우 씨 평가에 대한 대담을 나눴습니다. YTN은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 발언 도중, 성 의원이 언급하지도 않은 ‘광주사태’라는 자막을 반복해 띄웠습니다. 정확한 표현이 필수인 언론 보도에서 반복적 자막 표기는 단순한 실수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TV조선 [보도본부 핫라인] (10월 20일)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두고 ‘5·18 폭동진압’이란 막말까지 등장했습니다. 10월 19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얘기하는 분들이 많다”는 황당 발언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홍연주 TV조선 기자는 윤석열 후보자의 발언을 전하며 “실언 논란이 계속됐던 윤석열 후보가 이번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옹호 논란을 일으켜 여파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신효섭 진행자는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하고 그다음에 5·18을 한 것만 빼면, 5·18 폭동진압을 한 거죠.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거죠. 그 부분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 이 발언이 여야 모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겁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실언을 인지하고 곧바로 정정했지만, 막말에 대한 사과는 방송이 끝날 때까지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광주사태·광주폭동’ 민중항쟁 왜곡 의도 아닌가
한겨레 [5·18을 모르는 당신에게] (2016년 5월 17일 김지은 기자)는 “간혹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이가 있는데,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하며 “‘항쟁’이 ‘맞서 싸운다’는 의미를 띠고, ‘운동’이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을 일컫는 데 반해, ‘사태’는 시위대의 폭력성에 무게를 둔 표현”으로 “신군부가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할 때 사용한” 잘못된 표현이라고 짚었습니다.
아시아엔 [김용길의 시네마 올레길/‘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2012년 5월 22일 김용길)는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한국사회는 그냥 ‘광주사태’라고 호칭했”는데 이는 “대단히 부정적인 호명”으로 “사회 안정을 해치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돌발적 사변”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설명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이 지금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많은 시민의 오랜 노력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무장폭동’, ‘난동’으로 불리다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광주청문회 등을 거친 뒤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많은 노력이 모여 1995년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지면서 현재 명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지 26년이 지난 지금 언론에서 ‘5·18폭동’, ‘광주사태’ 등 표현을 쓰는 것은 역사 인식이 없거나 역사를 되돌리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노태우 씨가 사망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왜곡하고, 역사를 되돌리려는 움직임에 단호하게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언론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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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대상:
- 2021년 10월 26~28일 KBS [뉴스9], MBC [뉴스데스크], SBS [8뉴스], JTBC [뉴스룸] (1,2부), TV조선 [종합뉴스9], 채널A [뉴스A], MBN [종합뉴스]
- 10월 27~29일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지면보도
- 2021년 10월 20일 TV조선 [보도본부 핫라인], 2021년 10월 25일 YTN [뉴스앤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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