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덩샤오핑의 세 가지 유산(1978-2002)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2003년, 칠상팔하(七上八下)[footnote]칠상팔하(七上八下): 당 대회를 기준으로 67세까지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수 있지만, 68세 이상은 은퇴해야 한다는 중국 공산당 고위 인사원칙 불문율[/footnote]와 격대지정(隔代指定)[footnote]격대지정(隔代指定): 현 지도자가 한 세대를 건너 뛰어 그 다음 세대 지도자를 미리 지정(지명)하는 것. 덩샤오핑이 장쩌민을 제3세대 지도자로 정한 뒤 얼마되지 않아 장쩌민의 후계로 후진타오를 내정한 게 그 시초다.[/footnote]의 원칙에 따라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의 3세대 지도부는 물러나고 후진타오를 위시한 4세대 지도부가 새로이 들어섰다. 후진타오는 2012년까지 1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고, 그 이듬해인 2013년에 시진핑에게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겨준다. 이 후진타오 시대를 굳이 한 마디로 표현해야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경제성장’
처음 후진타오가 집권했을 때, 중국의 GDP는 1조 6천억 달러였다. 집권 1기가 끝난 2007년에 그 규모는 3조 5천억 달러로 늘었다. 그리고 후진타오 집권 마지막 해인 2012년에는 8조 5천억 달러가 되었다. 10년 사이에 중국의 부는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2008년 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때도 중국은 잠시 흔들리고 성장가도를 이어갔다. 중국은 2010년에는 마침내 20년 가까이 제2의 경제대국 자리를 지켜온 일본마저 꺾고 새로이 제2의 경제대국 자리에 올라왔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후 당국이 직면한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이 엄청난 성공에서 나왔다.
모든 인민은 자유롭다, 그러나 어떤 인민은 ‘더’ 자유롭다
처음엔 물론 모두가 좋았었다. 절대빈곤 근처에 살던 중국 농민들은 자유로워진 농업 덕분에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몇몇은 농민공이라는 신분으로 도시로 건너오는 도전을 감행했다. 가혹한 공장의 노동 환경과 비좁고 더러운 주거 환경은 백번 양보해도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망 없는 농촌보다는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기에 그들은 도시의 불빛에 이끌려 들어왔다.
농민공들은 고향인 농촌에 돈을 송금하면서 중국 전역에 돈을 돌게 했고, 중국의 도시를 밑바닥부터 건설했다. 원래부터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더욱 좋았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팽창하는 부동산 시장에서 이익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 동부 해안지대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더욱 더 좋았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언론과 문화를 비롯한 각종 영역에서 인력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경제성장을 가장 행복하게 지켜본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고위 당원들과 그들과 ‘꽌시’(關係; 직역하면 ‘관계’, 우리말 ‘인맥’, ‘연줄’ 정도의 의미)로 엮여 있던 사람들이었다.
정부가 힘을 시장과 나눈다는 것은 정부가 독점하던 부가 민간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공공부문을 민간자본에 불하할 때, 정보에 밝은 이들이 더 많은 이득을 얻는 것은 중국만의 일은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든 민영화 정보에 밝은 사람들은 대체로 정부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수익성 있는 부문을 싼 값에 빠르게 불하 받아 자본을 손쉽게 축적할 수 있었다.
세계 최대 부호 중 하나인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도 국영 통신사인 텔멕스가 민영화될 때 기회를 잡아 사업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이런 대규모 세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소련에서 벌어졌다. 소련이 러시아로 전환될 때, 막대한 천연자원과 국영 제조업 시설들은 해당 사업체의 정보를 잘 아는 관련 당원들이 모두 접수했다. 일반 러시아인들은 이들을 부정하게 돈을 축적한 ‘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footnote]올리가르히(Олигархи): ‘과두제’에서 유래한 말. 특히 소련 붕괴 후 에너지 자원, 지하자원의 국영 기업이 민영화하면서 이를 싼 값에 사들여 거대 재벌로 성장한 관료 출신 혹은 관료의 지원을 받은 기득권[/footnote]라고 부르면서 이를 갈았다.
당연히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중국은 여전히 국가가 국영기업을 통해 경제 전반에 대한 막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들이 똑같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패턴만큼은 같았다. 중국의 붉은 자본가이든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든, 이들은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부정한 특혜와 특권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일반 시민들은 상상도 못하는 부를 쌓아 올렸다.
중국은 마오쩌둥 시절에 비해 경제 활동에 상당한 자유를 부여했지만, 경제 성장의 주도권은 여전히 공산당과 국가가 쥐고 있었다. 공공투자와 도시계획, 자금조달 등 모든 면에서 공산당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많은 경우 실질적인 내용까지도 결정했다.
위안화, 삶의 새로운 목적
문제는 이렇게 권리와 법치에 관한 제도와 의식이 모두 미숙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엄청난 돈이 솟아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천안문의 피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배금주의를 부추겼다. 천안문 시위 당시 학생들은 부정한 특혜로 부를 독식하는 고위 당관료 가족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개혁개방의 총설계자라는 덩샤오핑은 이 요구를 탱크로 깔아뭉겠다. 일단 지금은 자유를 줄테니 불평 하지 말고 돈은 알아서 벌라는 소리나 다름 없었다.
마오쩌둥이 계시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믿음도 사라지고, 정치적 자유화와 시민으로서의 권리 획득에 대한 꿈도 사라지니 사람들은 우선 당장 주어진 경제적 기회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선부론은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부를 축적하라는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무엇보다도 부를 추구하라는 새로운 계시였다. 그리고 인민은 이 계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당 관료가 부정부패로 자신들의 성을 쌓아올린다고 해서, 그 이전 시대가 그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살아갈 직장과 주거지가 결정되고, 누구나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옷을 입던 회색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국 사회가 무엇을 열망하는지는 자명했다. 덩샤오핑이 노린 것도 바로 이 야심과 열망이었다.
그는 표면적으로 자신이 건설했던 경제특구를 순회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이유로 남순강화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진정한 목적은 보수파에게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데 있었다. 개혁개방의 맛을 한 번 본 인민과 지역 당관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88세의 노인을 열렬히 환영했다. 당내 보수파들은 이를 보고 시대의 흐름이 개혁개방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드 인 차이나
그렇게 천문학적 규모로 창출되는 경제적 기회, 그 경제적 기회를 통제하는 당의 특권, 그리고 중국 인민의 부를 향한 야망이 결합하자, 대륙 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치 초석과 숯과 유황을 결합해서 화약을 터트린 것과 같았다. 규칙, 상식, 윤리가 실종된 수억의 사람들이 돈을 좇아 달려가는 모습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다.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이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겁박도 부정부패를 부추겼다. 사업가들은 당에 연줄을 어떻게든 만들어 부정부패에 적극 가담하지 않으면 제대로 사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상납금을 내지 않으면 앙심을 품은 당 관료가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악명 높은 중국 감옥으로 집어넣는 것도 가능했다.
많은 사업가들이 그런 이유로 자신이 키워낸 사업체를 빼앗겼다. 그런면에서 뇌물은 어느 정도 반강제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반강제적이라는 말은 반은 자발적이라는 의미이며, 이 경우 자발성은 강제성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다. 대부호로 거듭나고자 한 야심가들은 식품에 화학약품을 탔다. 세계인에게 선명히 각인될 ‘메이드 인 차이나’, 전설의 시작이었다.
과거 마오쩌둥이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초현실적인 경제사업이었다. 사람들은 마오쩌둥의 지혜로운 교시를 지키기 위해서 참새를 잡아야 했다. 참새가 곡식을 훔쳐먹으니 해로운 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참새가 사라지자 병충해가 들끓어 농업생산고에 엄청난 타격이 왔다.
농촌 노동력은 모두 흙으로 용광로를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 철상생산에서 영국을 뛰어넘는 목표가 설정되었다. 그리고 당은 이미 가지고 있는 농기구를 용광로에 녹여 새로 철을 만들어내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쓸모 있는 농기구가 아무 쓸모 없는 철 덩어리로 바뀌었다. 이런 정책 실패가 누적되었음에도 당국은 곡물수출을 계속 지시해 결국 3천만 명이 기근으로 아사했다.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개방의 대업도 이에 지지 않는 초현실성을 자랑했다. 중국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짜로 만들어냈다. 어떤 사람은 공업용 파라핀을 원료로 가짜 돼지고기를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종이로 쌀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다. 누군가는 한국에 수출하는 김치에 벽돌가루를 써서 빨간색을 내기도 했다.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을 개발했던 중국인의 진정한 창의성은 짝퉁으로 다시 만개한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살하려고 농약을 마셨는데 그 농약이 가짜여서 살아나기도 했다. 믿을 것은 점점 사라져 갔고, 오직 돈만이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당연히 돈이라고 진짜라는 보장은 없었다. 막대한 위조지폐가 제조,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지진이 남긴 것
물론 메이드 인 차이나의 전설이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화로만 끝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뢰와 규범의 상실은 훨씬 더 진지한 문제였고, 결국에는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했다. 대표적으로 후진타오 정권 2기가 시작되던 2008년에 두 사건이 중국을 뒤흔들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중국의 땅이 뒤흔들린 사건이었다. 2008년 5월 쓰촨성에서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실종자를 포함하여 9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고, 37만 명이 넘는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사실 대재앙이긴 했어도 지진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자연재해를 인간의 힘으로 어찌 막는단 말인가?
그러나 정부가 보여준 대처는 결국 시스템의 문제이자 인간의 문제였다. 대지진 당시 당국은 언론과 인터넷을 통제하고 사망자 수에 대한 통계를 공개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몇몇 기자는 이에 분개하여 당국 지시를 어기고 몰래 지진 피해지역에 잠입해 취재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재해가 지나간 뒤에는 더 어처구니 없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지진으로 인해 피해 지역에는 수많은 학교가 붕괴되었는데, 지진이 일어날 당시 수업시간이었던 수많은 학교가 대피할 시간도 갖추지 못한 채 그대로 매몰되었다. 학부모가 일하고 있을 그 시간에, 순식간에 수천명의 학생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붕괴된 학교를 찾아가 보니 너무나 이상했다. 설계상 있어야 할 철근이 보이지 않았고 콘크리트는 마치 두부처럼 물렀다.
이들 학교의 공통점은 모두 개혁개방 이후, 특히 2000년 이후에 지어진 신축 건물이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1970년대에 지어진 낡은 건물들은 지진을 이겨냈다. 부실시공의 흔적이 너무나 명백해보였다. 그러나 당국은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학부모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힘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두부학교’, ‘두부교실’이라고 부르면서 자조했다(참조: 서울신문, 한겨레).
성공한 올림픽과 죽어가는 아기들
그래도 중국은 지진의 피해를 딛고 일어나야만 했다. 곧이어 중국의 부상을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선포할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의 베이징은 올림픽으로 인해 매우 분주했다.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화장실을 정비했고, 택시기사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다.
그와 동시에 베이징의 수백년 이야기를 품은 유서깊은 뒷골목들이 불도저에 밀려 고층 건물로 재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지방정부의 토지 수용은 당연하게도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미 십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의 모든 지방정부는 거주민과 경작민의 의사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주택을 철거해 재개발하고 농경지에 도로를 냈다.
이로써 중국의 도시는 놀라울 정도로 팽창했고 새로이 정비된 인프라로 사람들은 중국 각지를 더 쉽게 오갈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가 상승으로 나온 이권은 모두 당관료와 건설사의 몫이었다. 여하간 그런 일들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뒷골목들과 그곳의 사람들은 베이징 올림픽으로 중국을 깔보았던 서구 선진국 사람들에게 중화민족이 이룩한 대업을 알릴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 없는 문제들이었다.
그렇지만 갖은 노력으로 세계인들에게 중국의 부상을 똑똑히 각인시켜 놓았어도, 그 명성은 한 달을 채 가지 못했다. 2008년 9월에 중국 각지에서 신장결석 보고 사례들이 급증했다. 특히 유아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중국 전역에서 7명의 아이가 죽고, 29만 명의 아이가 신장결석 및 배뇨관련 질환을 앓아야만 했다.
이번 사건에서 원인은 분유에 있었다. 분유 제조업체들이 단백질 함량 기준을 속이기 위해서 멜라민을 첨가해서 팔았던 것이다. 멜라민 분유 파동은 천재지변과는 아무 상관 없는 오로지 순전한 인재였기 때문에 당국은 변명할 수 없었다. 관련자들을 체포해 사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멜라민 말고 또 어떤 것이 우유에 들어가 있을지, 우유 말고 다른 식품은 과연 안전한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돈만 있어서는 안심하며 살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뇌우 속을 달리는 열차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되어감을 점차 느끼고 있었지만, 본디 사회의 관성은 오래 가는 법이다. 한 개인의 습관을 바꾸는 것도 힘든데 수억 명이 사는 국가의 관성은 오죽 하겠는가? 덩샤오핑식 사회계약은 2011년에도 파열음을 내며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린다. 그 시기 중국은 고속철도 대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규모를 무기로 당국은 세계 유수의 고속철도 기업과 기술협력을 체결해 전국을 고속철도로 도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약진 류’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철도부장 류즈쥔(刘志军)이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속도전을 기치로 걸었다. 부지 매입비, 인건비, 자재비는 가파르게 올라가니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짓는 것이 비용 절감을 위한 관건이라는 것이다. 류즈쥔은 철도부장이 되기 위해서 다량의 금품을 고위층에 뿌렸고, 이권사업에서 한 몫 단단히 챙겨서 여러 첩까지 거느렸다. 물론 공산당은 중국이 고속철도 대국으로 커나가 세계 인프라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정교한 시스템이 그렇게 졸속으로 처리되고도 아무런 사고가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런 시스템일 수록 작은 실수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법이다. 원저우의 뇌우 속에서 고속열차가 벼락을 맞고 정지했을 때가 그랬다. 조만간 동력이 복구되어 열차는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열차 신호기도 뇌우 속에서 같이 정지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뒤쫓아오던 다른 고속열차는 정지 신호를 받지 못했고, 두 열차가 부딪혀 추락하고 말았다.
당국은 이 사고로 사망자가 40명이었다고 집계했지만, 진상규명을 피하기 위해 구조작업도 진행하지 않고 열차를 파묻어버렸기 때문에 그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은 개혁개방 후의 중국에 대한 완벽한 은유와 같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중국은 승객의 안전에는 도저히 아랑곳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과연 이 열차(중국)가 전복된다면 승객(중국 인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철도사고가 끝나고 조사가 시작되자 이제는 익숙한 이야기들이 다시 되풀이 됐다. 시멘트는 잡석으로 대체되었고, 직원들은 존재하지도 않은 부서를 만들어내서 대규모 사업비를 따내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직책도 거래되었다. 여객 승무원은 4500 달러였고, 관리직은 1만 5천 달러인 식이었다.
중국 인민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사실 그들도 일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러한 ‘관행’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따라야만 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피부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다. 부를 위해 중국은 자연환경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파괴하고 있었다. 하천은 오수로 뒤덮였고 도시는 스모그 때문에 한 낮에도 전등을 켜야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 개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돈은 자신이 가져가는 것이었고, 손실은 다 같이 분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의 대책: 조화사회 건설
당은 이전부터 경제성장이 가져온 각종 사회문제와 돈이 당을 부식시키는 상황을 타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모두 장쩌민 시대에는 당에서 별로 고려되지 않았던 문제들이다. 장쩌민은 ‘삼개대표론’(三個代表: 당은 선진 생산력, 선진 문화,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주요 요지는 중국 경제는 앞으로 더 많은 생산력을 갖출 필요가 있기에 공산당에 자본가 계층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명백히 선부론의 연장에 있는 발상이었다.[footnote]”장쩌민은 2002년 5월 31일 공산당 중앙당교 졸업식에서 삼개대표론은 마르크스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을 계승하고 세계와 중국의 변화 발전에 맞춰 공산당과 국가의 새로운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라며 “삼개대표론을 관철하기 위해 날로 발전하는 선진성을 유지하고, 본질적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 정동근, 후진타오와 화해사회, 중에서.[/footnote]
하지만 후진타오가 천명한 ‘조화사회 건설’과 ‘과학적 발전관’에는 이와 다른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과학적 발전관은 이제 개발도상국 경제발전 모델에서 탈피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았다. 또한, 조화사회론에서는 성장에 매몰된 기존의 가치관을 재검토하고, 법치로 움직이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 환경을 보호하고 삶의 질을 신경 쓰는 사회를 주창했다.
여기에는 후진타오가 안정적으로 권력을 확보하게 된 경위와도 통하는 면이 있었다. 덩샤오핑의 격대지정으로 후진타오는 2003년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실질적 권한은 여전히 전임자 장쩌민에게 있었다. 중국의 권력구조에서는 형식적으로는 공산당 총서기가 최고지도자를 맡지만, 공산당의 진정한 권력은 군권을 갖고 있는 중앙군사위 주석직에 있다. 그런데 장쩌민은 총서기 직책을 먼저 넘겨주긴 했지만, 중앙군사위 주석을 2004년까지 맡아 후진타오를 반쪽짜리 권력으로 만들었다.
후진타오의 돌파구는 다소 뜬금없게도 전염병에서 나왔다. 중증급성호흡기 증후군, 약칭 사스(SARS)로 더 유명한 이 질환은 처음에 2003년 홍콩과 광둥성에서 그 사례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몇몇 기자들은 홍콩 사람들이 이상하게 마스크를 많이 쓰고 다니는 것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경제발전을 위해 다소간 허락해준 언론의 (부분적) 자유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염병에 관한 소문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던 당국에 맞서 사스가 실재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주었다. 퇴역군의관이 사스의 존재를 공인하면서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도 중국에게 정보공개를 요청했다.
그러나 실질적 권력을 갖고 있던 장쩌민은 요지부동이었다. 요컨대 중국의 안정을 위해서 진실은 때로 숨겨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 때 후진타오가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는 사스에 관해서 지연되거나 거짓된 보고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며 경고했고, 국제보건기구와 협조하여 사스를 퇴치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사건으로 장쩌민은 큰 타격을 입었고, 마침내 후진타오는 그 다음 해에 중앙군사위 주석직도 찾아올 수 있었다.
사스와 관련된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후진타오는 어느 정도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부터 중국 개혁파의 거두였던 후야오방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후진타오의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는 후야오방보다도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자오쯔양의 최측근이었다. 원자바오는 자오쯔양이 천안문에 가서 학생들에게 광장을 빨리 떠나라고 호소하는 유명한 사진 속에서 그의 옆에 서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개혁 성향에 대해 과장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후진타오는 티베트 자치구 서기로 근무할 때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혈진압을 감수하면서 당 고위층의 신뢰를 얻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이 추구했던 정치개혁은 분명 공산당의 권력독점이라는 한계를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천안문 사태로 인해 그런 논의는 당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논해지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실종된 권력
그러나 짚고 갈 것이 하나 더 있다. 많은 중국인에게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비전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 정치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힘의 논리였다. 그 목적을 어디에 두든 먼저 중국을 바꾸어 낼 추진력과 당의 반대파를 누를 권력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권력승계 때부터 잘 드러났듯이, 시작부터 후진타오에게 가장 부족한 것도 바로 그 권력이었다.
장쩌민은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그냥 넘겨주지 않았다. 7명이던 정치국 상무위원회 정원은 9명으로 늘어났다. 최고지도자가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동의를 얻어내야 할 사람이 6명에서 8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자연스레 최고지도자의 지도력은 상무위원의 숫자에 비례해서 더 약해졌다. 그리고 후진타오 정권이 시작되는 16기 상무위원들은 거의 다 장쩌민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들이었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를 제외하고는 우방궈, 자칭린, 쩡칭훙, 황쥐, 우관정, 리창춘, 뤄간 모두 장쩌민이 이끄는 상해방에 속해 있거나 연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장쩌민은 권력을 떠나면서 끝까지 후진타오의 손발을 묶어놓은 것이다.
몇몇 지방정부 수장들도 후진타오의 권력을 무시했다. 상하이 시의 서기인 천량위(陳良宇)가 대표격이었다. 장쩌민이 상하이 시 서기로 근무할 때 그는 상하이에 속한 황푸구의 서기를 맡아 일찍부터 장쩌민의 눈에 들었다. 장쩌민이 후진타오 다음의 후계자로 그를 지정할 것을 고려했다고도 전해진다. 천량위는 중국 경제수도의 수장이라는 막강한 직책과 든든한 뒷배를 믿고 공개적으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 도전했다. 원자바오가 경기 과열을 억제하기 위한 긴축 정책을 발표하니 회의장에서 재떨이를 던졌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규율이 중요하다는 공산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후진타오 정권의 권위가 얼마나 약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물론 장쩌민의 세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한 후진타오가 이런 노골적인 하극상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중국 관료 사회에서 부패는 어차피 상수이기 때문에 정치 투쟁의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패자의 부패상을 드러내는 수법이 주로 쓰인다. 천량위도 비슷하게 걸려들었다. 천량위는 상하이에 자신만의 독립왕국을 만들었다고 비판 받았는데, 사실 지방정부 수장은 누구나 자신만의 독립왕국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하이는 특별했다. 그곳은 중국의 경제수도였기 때문에 자연히 부패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수십억 단위의 돈은 그야말로 푼돈이었고, 부동산과 인프라와 관련된 각종 이권사업으로 수백억의 돈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그리고 천량위 숙청의 공식적인 이유로 발표된 상하이 사회보장기금 스캔들은 0이 하나 더 붙는다. 상하이 노동사회보장국은 사회보장기금의 3분의 1 규모인 4천400억 원가량을 푸시라는 투자회사에 불법대출 해주었던 것이다. 이정도 되는 사건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2006년에 천량위는 끝내 파면되고 후에 재판을 거쳐 징역 18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천량위를 숙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진타오는 자신의 권력을 활용해 추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2007년 17기 정치국 상무위의 인선은 달라졌으나 여전히 후진타오의 의사에 반할 능력이 충분한 동격의 상무위원들이 너무 많았다. 새로이 들어온 중앙정치법률위원회(약칭 ‘정법위’, 중국 사법부와 공안기구의 수장) 수장인 저우융캉(周永康)이 대표적이었다. 저우도 장쩌민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고, 그의 후원을 받던 정치인이었다. 장쩌민은 후진타오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총구가 권력을 떠나가다
군부는 그보다 더 문제였다.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마침내 받아내면서 후진타오도 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었지만, 이는 반쯤은 명목상인 성격이 짙었다. 당시 중국 군부의 핵심인사들도 장쩌민과 연계된 인물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이들이 선양 군구의 쉬차이허우(徐才厚)와 란저우 군구의 궈보슝(郭伯雄)이었다. 이 둘은 모두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으로서 인민해방군의 최고 수뇌부를 이루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베이징 정가에 데뷔한 장쩌민은, 이런 핵심 인사들을 포섭해 권력기반을 다졌었다. 장쩌민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이들의 입지도 더욱 높아졌다. 이들은 한낱 풋내기로 보일 후진타오의 지시에 따르고 싶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들은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군의 인사권을 매매 대상으로 만들었고, 엄청난 부를 축재했다.
2011년에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군이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와 면담했을 때의 일화는 군의 불복종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 게이츠 장관은 마침 그 때 인민해방군 공군이 중국의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젠-20의 시험비행 소식을 들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게이츠 장관은 직설적으로 후진타오에게 물었다고 한다.
“제 방문을 겨냥해서 시험비행을 하신 겁니까?”
후진타오와 수행원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자신들도 그런 소식은 금시초문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군부는 미국의 국방장관을 도발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자신들의 통수권자도 도발하고 있었다.
정령불출 중남해
후진타오 시대 중국의 힘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GDP 통계는 이를 너무나 잘 입증한다. 중국 경제의 규모는 매년 1조 달러 꼴로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도 역시 해를 거듭할수록 명확해졌다. 오히려 중국 권력의 3대 원천인 공산당, 정부, 인민해방군은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견제 받지 못하는 이들 권력은 마오쩌둥을 따르지 않고 대신 마오쩌둥이 그려진 종이를 숭배했다.
각지의 조직에서 꽌시로 연결된 파벌이 자리잡아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고, 이권사업에 개입하여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고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다. 때로는 힘으로 사람들을 겁박했으며 성상납 스캔들은 너무나 흔한 일이라 놀랍지도 않은 사건이 되었다. 후진타오의 임기가 끝나는 2012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자주 “정령불출 중남해(政令不出中南海)”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최고지도자의 말이 중국의 권력이 소재한 중남해 문 바깥으로 넘어가질 못한다’는 뜻이다.
2012년 세계의 이목을 끈 보시라이(薄熙来) 스캔들은 장쩌민 시대와 후진타오 시대를 거쳐오면서 ‘중국에 축적된 모든 모순’(이는 마오쩌둥이 즐겨 쓰는 표현이기도 했다)을 하나로 모아놓은 것 같이 보였다. 보시라이의 아버지는 덩샤오핑 시대 최고 권력자 그룹이라고 사람들이 붙인 ‘중공 팔대로’의 일원인 보이보였다. 건국 원훈의 아들이라는 꽌시를 적극 활용하여 보시라이는 여러 지방 정부를 맡아 업적을 쌓으며 정가에서 상승가도를 타고 있었다.
어느새 보시라이는 후진타오 다음을 이을 5세대 지도부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당시 최고지도부의 마음을 결국 사지 못하고 사실상 좌천 형식으로 충칭시 서기로 영전하게 된다. 반면 개혁파 건국 원훈이었던 시중쉰의 아들로, 일찍부터 보시라이가 무시하던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에 진입해 최고지도부에 들어설 것이 확정되었다.
싼샤 댐의 틈바구니
보시라이는 절치부심하여 충칭시에서 판을 뒤집어보고자 했다. 충칭시는 어떤 면에서 그가 새로이 키워볼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충칭도 원저우 고속철 사고와 마찬가지로 많은 면에서 현대 중국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충칭시는 중국에서 가장 거대한 구조물인 싼샤 댐을 완성시킨 것을 가장 큰 업적으로 삼고 있었다. 확실히 싼샤 댐이 생산하는 전기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전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올라온 강의 수위 덕택에 대형 화물선이 들어와 충칭의 물류가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충칭은 우한과 함께 장강 내륙의 핵심 물류기지로 부상했고, 도시는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여전히 연해 지방의 놀라운 발전상과는 거리가 있는 가난한 내륙 중국이었다. 또한, 싼샤 댐을 짓는 와중에 수많은 마을이 수몰돼 영영 장강의 물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 마을과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싼샤 댐을 건설해낸 당의 거대한 위업과 댐이 생산해내는 전기가 중요했다.
충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보시라이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 들었다. 그는 소외된 내륙지방의 사람들에게도 성장의 단 맛을 보여주게 함과 동시에 가난한 자들이 느낄 쓴 맛도 최소한으로 관리해보고자 했다. 충칭시는 농민공들을 도시로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공공주택을 보급해주었다. 또한, 충칭의 국유기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민간부문의 투자를 주도했다. 거기에 도시화로 인한 사회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창홍타흑'(唱紅打黑)이라는 구호를 들고 왔다. 이는 마오쩌둥의 ‘홍’을 외치고, 범죄라는 ‘흑’을 때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 실상이 어떻든, 폭주하던 중국에 지친 사람들은 보시라이가 내세운 ‘충칭 모델’에 열광했다. 충칭은 연 10%가 넘는 초고속 성장을 이어갔고, 보시라이는 새롭게 빈자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당에 분열의 씨앗을 심고 있었다. 애초에 정해진 인선에 거역하여 ‘막판 뒤집기’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사실 그렇게 해석될 소지가 다분한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인 저우융캉의 후원을 받아 시진핑을 대신해 5세대 지도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중국이 당면한 문제를 파악하고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올바른 답인지는 제쳐두고), 여전히 중대한 결격사유가 있었다.
그 또한 중국이 당면한 문제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중차대한 문제였다. 그는 충칭에서 자신의 절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범죄조직 소탕을 빌미로 반대파를 제거했고, 막대한 뇌물을 수수했다. 또한, 충칭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오주의 구호를 선동했고, TV 광고를 금지하기까지 했지만, 보시라이의 아들인 보과과는 하버드 케네디 스쿨로 유학을 가 방탕한 생활로 빈축을 사고 있었다. 다시말해 보시라이는 무질서한 중국에 새로이 필요한 도덕적 기준이나 규율과는 부합할 수 없었다.
“우파를 경계하라. 그러나 주된 위협은 좌파에서 온다”
남순강화에서 덩샤오핑은 자신의 후대 지도자들을 위한 유훈을 여럿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다.
“여러분들은 우파를 경계해야한다. 그러나 주된 위협은 좌파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마라.”
여기서 덩샤오핑이 염두한 좌파는 당내의 보수파를 의미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떠오르는 “신좌파” 보시라이는 덩샤오핑의 유훈대로 당의 중대한 위협으로 부상했다. 만약 최고지도부의 일원까지 그의 비전에 공감하고 있다면, 정말 당이 분열하는 사태까지 갔을 때 어떤 혼란이 찾아왔을까?
전통적으로 중국의 지도부는 언제나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가장 최근의 예시는 문화대혁명이었지만, 그 전에도 천하가 무너지면 사람이 말 그대로 쓸려나가곤 했었다. 보시라이는 그런 종류의 위협을 선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지도부 입장에서 이런 위협은 조기에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오쩌둥을 방패로 세웠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기는 힘들었다. 보시라이를 내치기 위해서는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다.
결국, 충칭시 공안부장이자 보시라이의 측근인 왕리쥔(王立軍)이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 피살 사건을 계기로 미국 영사관에 망명하면서 보시라이의 도전은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참조: 월간조선). 왕리쥔을 되찾아오기 위해서 보시라이는 자신의 병력을 출동시켜 대사관을 포위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미국의 항의로 즉각 중앙군이 출동하여 보시라이 군대와 대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보시라이는 이로써 최종적으로 실각한다. 이 기간에 있었던 중국의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로 중국의 정기국회)까지 중국 정치판은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를 비호하던 저우융캉까지 같이 실각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최고지도부마저도 처벌해야만 했던 중대한 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시대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그 사건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당내 지도부의 합의는 이제 명확해졌다. 기존의 패러다임은 바뀔 필요가 있었다. 덩샤오핑 패러다임은 중국이 절대적 빈곤에 신음하고 있을 때 가장 유효했다. 그러나 이제 1인당 GDP가 중진국 규모에 점차 다가가면서 덩샤오핑의 유산만으로 대륙을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함이 드러났다. 선부론으로 당장 타는 갈증을 해결하는 시대는 끝났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부를 추구하는 관행은 중국 사회의 장기적 안정에 심각한 해를 끼치고 있었다. 인민들은 부정부패로 천문학적인 수준의 축재를 한 당관료들을 보며 분개했다. 이제 물이라고 아무 물이나 마시기보다는 더 깨끗한 물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당원의 능력뿐만이 아니라 도덕성과 규율도 관리해야 했고, 산업에는 적절한 환경 규제를 마련해야 했으며, 부동산 과열을 억제하고, 국영기업의 방만한 부채를 통제해야만 했다. 더불어 권력기관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을 잘라내야 했다. 여기서 바로 부정부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도전들에 안일하게 대처했다간 공산당의 권력이 위협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 신호는 이곳저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2006년 이미 중국에서는 9만 건의 시위가 벌어졌었다. 그리고 2011년에 이 수치는 두배로 폭증해 18만 건을 기록했다. 고위 공직자 부패에 항의하는 시위, 강제 토지수용에 항의하는 시위, 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 체불 임금을 받아내고자 하는 시위, 소수민족의 시위 등 중국 전역에서 시위와 파업이 들끓었다.
아무리 중국이 인터넷을 검열하고 대중소요를 무력으로 진압한다고 해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오히려 나중에는 통제할 수 없는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물결에 휩쓸릴 수도 있었다. 그런 혼란을 통해 집권한 공산당이니만큼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간 정치적 개혁을 봉쇄하고 국민을 철권으로 통치하던 아랍 국가들에서 연쇄적으로 시작된 정권 붕괴는 지도부의 두려움을 더욱 키웠다. 개혁의 필요성에 눈을 감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한 곳으로 집중된 막강한 권력이었다. 덩샤오핑이 보수파에게 한 것처럼, 반발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눌러버릴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덩샤오핑 스스로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였던 것과 달리 그가 남겨두고 간 집단지도체제는 이런 과제를 추진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저우융캉 같이 사법부를 장악한 상무위원이 명백히 부패했어도, 기존 체제로는 다른 상무위원은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다. 그리고 사법부의 수장이 썩어 있는 상황에서 무슨 다른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단 말인가?
집단지도체제는 마오쩌둥 같은 인물이 나타나 당의 규칙을 무시하고 전횡을 휘두르는 일을 막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제 집단지도체제는 권력의 형해와와 탈집중화를 통해 다른 종류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기존의 집단지도체제는 동등한 권위를 가진 관료들끼리 복잡한 이면합의와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자연스레 전임자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도 컸다. 장쩌민이 후진타오 시기 내내 행사한 영향력은 여기서 나왔다. 그리고 천량위, 보시라이, 저우융캉으로 이어지는 사건·사고를 거치면서 당 지도부는 관행과 합의를 제도로 대체해야 함을 느끼고 있었다. 중국의 성장이 야기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야흐로 새로운 권력 모델이 요구되고 있던 것이다.
⇒ 이 글은 다시 불붙은 노선투쟁의 화염(2008)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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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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