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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입시학원 강사직’을 접은 날이다.

교육이라는 어마어마한 토양 위에서 일개미 한 마리 수준이었던 내가 어찌어찌 고 3만 수업하는, 인정받는 대치동 생활을 거쳐 5년 근속한 –오늘 그만둔– 학원에 정착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잘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전부터 그냥 좋은 직업을 선택하길 바라는 부모님의 꿈이 내 꿈인 줄 알고 쫓아다녔고, 서른이 넘어서까지도 교육공무원이 되어 안정된 삶을 살다가 은퇴 후 연금 받으며 사는 삶을 꿈꿨으며, 그러지 못하는 나를 불행하게 여겼었다. 언제나 더 나은 삶이라는 허상에 눌려 청춘을 열심히 연소했다.

춘천, 청평, 홍천, 서울을 넘나들며 학원 강사, 방송 작가, 해외 MBA 컨설턴트, 인강 강사, 기간제 교사, 속독 지도사, 과외 교사, 독서논술 강사 다시 입시학원 강사를 거치면서, 요동치는 내적 갈등과는 상관없이 끔찍이도 성실하고 악착같은 성격 덕분에 내 경력은 끈질기게 쌓여갔고, 점점 유능해졌다. 남의 꿈이 내 삶이 되고, 내 삶을 내 꿈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비로소 가르치는 일이 내 일임을 인정하게 되고, 이 직업의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결국에 내가 내린 결정은 이 바닥을 뜨는 거였다. 십 년이 넘는 경력을 내밀어 얻을 물리적 가치가 더 이상 나에게는 매력이 아니다.

내가 쌓은 모든 지식은 나에게 다 버리는 것이 답이라고 말했다.

그냥 버티며 견디며 외면하기엔 너무 처참한 국어 교육의 현실. 아무리 가리고 막고 땜질을 해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문제들을 외면하기엔 내 경력의 안목이 너무나 예리했다. 언제부터인가 수업만 하면 머리가 아팠다. 매 수업마다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나는 앵무새같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무의미한 설득을 이어가야 하는 걸까. 문득 내가 너무 불행하게 느껴졌다. 너무 명백히, 나는 내가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여기선 행복할 수가 없었다.

안정된 삶이라는 것이 사막보다 건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잘못된 바닥, 잘못된 톱니바퀴 아래서 아무리 다른 부품을 갈아 끼워 봤자 이 거대한 잘못된 움직임이 방향을 바꿀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의미가 있는 움직임이라면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이 한몫을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난 다른 움직임을 시도하고 싶고, 다른 꿈을 꾸고 싶고, 다른 세상을 살고 싶다.

그리고 이제 난 적어도 다른 그림을 구상해 볼 수는 있는 것 같다. 어차피 힘든 거, 보람은 느끼며 힘들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직장을 옮기는 이직이 아닌 직업을 바꾸는 전직을 결정했다. 한 달 동안 조금씩 조금씩 짐을 옮기며 내 마음도 조금씩 정리했다. 생각보다 모든 과정이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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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주말만 일해도 한 달에 벌 수 있는 수입이 얼마인지도 알고, 그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도 알고, 이 수업을 위한 노력과 시간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내가 하려는 북클럽에서 만날 사람들이 소수인 것도 알고, 불안 조장의 마케팅이 통하지 않을 것도 알고, 지속적인 수업이 보장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합당한 수입을 보장받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내가 나이가 많다는 것도 돌아올 기회가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난 점수 높이고 학벌 만들어주는 것이 목적인 교육은 더는 못 하겠다. 안 하는 게 아니다. 못 하겠다. 난 더 나은 방법을 안다. 하늘을 나는 법을 아는데 땅을 기는 법을 가르칠 순 없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생명체다. 생각할 줄 모르게 변해가는 학생들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롭다. 다른 판을 짜 보고 싶다. 뻔한 판을 뒤집고 싶다. 입시 교육을 아예 안 하진 않겠지만, 평생을 써먹을 공부가 아닌 것은 안 가르치고 싶다.

중간 기말고사용으로 개념 없이 만든 교육과정 뒤치다꺼리도 이젠 하기 싫다. 학부모가 숨 막히게 할 때도 학생들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도, 학교가 너무 많아 시험 준비가 힘들었을 때도, 행정 실장님이 힘들게 할 때도, 빈혈로 HB 수치가 5까지 떨어져 일상이 힘들 때도, 자궁근종 판정을 받고 암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서도, 난 꿋꿋이 수능 시험일까지 일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었다.

그랬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학원 탓이 아니다.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다. 내가 변했기 때문이고, 나를 둘러싼 사회가 잘못됐기 때문이다. 교육계는 이미 침몰하는 범선이고, 언제까지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난 사람들이 옮겨 탈 뗏목을 만들고 싶다. 여기 이 학원에서 지낸 5년은 나에게 안락하고 복된 시간이었다. 지난 일기를 읽어봤다. 내가 정말 절절한 사랑에 빠졌던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었던 내가 대견하고 그런 기회를 준 이곳이 고맙다. 좋은 마지막이었다.

학생에게 선물 받았던 감자칩
학생에게 선물 받았던 감자칩

평생 친구가 될 제자들도 만났고, 눈물 나게 감동적인 순간도 많았고, 비로소 서울의 동네 지인이라 부를 인맥도 쌓았고, 수없이 많은 편지와 메시지도 받았고, 교육적인 성과도 화려했고, 만족스러운 열매도 많았다. 나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기간이기도 했고, 평생 만나기 힘든 인격적인 원장님과 함께 일했고, 내 수업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유쾌하고 적극적인 학생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다.

여한이 없다.

오늘 학생들에게 내가 쓴 엽서를 나눠주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내가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선 마지막 어휘 시험을 잘 보겠다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귀엽고 고마웠다. 사진도 같이 찍어주고 잘해주려 애쓰는 태도, 머뭇머뭇거리며 마지못해 교실을 나서는 표정에 아쉬움이 하나하나 읽힌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보여주는 마음들이 떠나는 내 맘을 편하게 해줬다.

이제 이 바깥에 내가 있으니 서로의 의지가 맞으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나로서는 이것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도 든다. 불행하게 버티는 것 말고, 행복하게 떠나는 것. 집에 오며 아이들이 써준 편지를 읽었다. 새벽까지 연이어 메시지가 왔다. 돌아서면 잊는 것이 학생들이지만, 그래도 오늘까진 내 제자였던 애들… 고맙다.

끝까지 수업하고 왔다. 내 뜻을 존중해 준 아이들.
끝까지 수업하고 왔다. 내 뜻을 존중해 준 아이들.
학원에서 선물로 받은 케이크. 우린 퇴직금 이런 건 없다.
학원에서 선물로 받은 케이크. 우린 퇴직금 이런 건 없다.

난 이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겠다. 공든 탑을 뒤로하고 이제 내 손엔 조약돌 하나뿐이다. 어디로 던져 파문을 일으킬까… 이제 난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이제 내 마음이니까. 

 

아이들이 써준 손 편지
아이들이 써준 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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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약 1년 전 필자가 입시학원 강사일을 그만둔 날 새벽에 쓴 글입니다. 과거의 기록이지만, 자신의 일이 천직인지를 고민하는 많은 이에게는 지금도 앞으로도 조금 더 깊게 생각하고, 조금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줄 판단의 재료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필자와 협의해 슬로우뉴스 원칙에 맞게 편집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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