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묵적지수] 러시아 제국 말기, 민족 갈등에 빠진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볼셰비키와의 ‘가교’를 자임한 나리마노프. 그 비극적 혁명가에 비춘 오늘의 분열과 불안, 이를 극복할 통합의 원리. ‘K를 생각한다’ 임명묵이 말하는 ‘낯선’ 세계와 사람. (⏰15분)

임명묵의 ‘명:묵적지수’
분열의 시대, 통합의 원리:
‘나리만 나리마노프’라는 낯선 실마리
질문 정리: 민노
답변 퇴고: 임명묵
📢 2026년 2월 4일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했다.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의 행간으로 맥락화했고, 임명묵의 독백 문투로 정리했다. 퇴고 과정에는 임명묵도 참여했다.
여는 말: ‘두 도시 이야기’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1859) 중에서
‘단일 민족’은 기만이다. 개념적 조작이며, 유사 과학이다. 하지만 동시에 민족은 역사적인 실체다. 우리는 같은 역사적 운명 공동체로서 기쁨과 환희를 공감과 증오를 무엇보다 공포와 고통을 공유한다. 한국인 선수가 올림픽에서 승리하면 우리는 마치 우리 스스로 승리한 것처럼 ‘함께’ 감격한다. 민족은 마치 영혼의 재료 같다.
지능을 다시 정의해야 할 AI의 시대지만, 인지적 퇴행이 광범위하게 진행하는 첫 세대이며, 민주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시대이면서 동시에 혐오와 배제의 극단주의가 지독한 장난처럼 득세하는 시대다. 윤석열 내란이 실패한 시대이고, K-민주주의의 국뽕이 마치 예능 프로그램 에피소드처럼 상쾌하게 교차하는 시대다.
그건 마치 찰스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에서 그려낸 프랑스 혁명의 혼돈 같다. 런던과 파리를 교차하는 ‘두 도시’ 속 인물들의 운명처럼, 한국이라는 아름답지만 잔인한 축제를 불안과 공포에 빠진 불감증의 군상이 투명한 공기처럼 채운다.

이주노동자가 지게차에 묶여 장난감처럼 취급받는 시대이면서 이제 이주노동자가 없는 농촌과 공장,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이 없는 홍대와 강남 거래를 상상할 수 없는 시대다. 단일 민족 국가라는 한국적 판타지 속에서 한국인은 위선적인 ‘갑’이 되기도 하고, 낯선 문화들 속에서 충돌하는 매력적인 ‘K-’접두사’의 아이콘이 되기도 한다. 한국 역시 민주주의의 위기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로 드라마틱하게 변신하기도 한다.
서설이 길었다. 그래서, 아무튼, 어쩌다 보니 오랜만에 다시 임명묵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석사 논문 속 화두, 아제르바이잔 혁명 지도자를 실마리 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혁명 지도자의 이름은 ‘나리만 나리마노프’다.

나리만 나리마노프
나리마노프(1870-1925)라는 사람은 러시아 제국 말기에 나로드니키(인민주의) 지식인으로 활동하다가, 러시아 혁명기에 볼셰비키 혁명가가 된 그런 인물이다. 사실 구 러시아 제국에 이런 인물들은 정말 많았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레닌이나 트로츠키처럼 중앙에서 혁명 이론과 전술을 다룬 사람들보다는 당연하게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많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나리마노프라는 사람이 러시아인이 아니라 아제르바이잔 무슬림이라는 사실이다. 전공이 아시아 지역학임에도 러시아 혁명을 소재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이유다.
나리마노프를 논문 주인공으로 결정한 건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였다. 나는 학부 때 러시아어, 튀르키예어, 페르시아어를 배웠는데, 연구 지역은 러시아 제국∙소련 내부의 무슬림 사회로 잡고 싶었다. 그런데 저 3개 언어도 잘 못하는데 또 다른 외국어를 더 배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튀르키예어와 몹시 흡사한 아제르바이잔을 일단 연구 지역으로 골라놓고, 그 다음에 내가 이 주제로 할 수 있는 연구가 무엇이 있을지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도 몰랐지만, 여러 연구서를 참고하면서 점차 관심이 생기고 지식이 쌓였다. 그리고 영어권 연구서는 아제르바이잔 하면 두 가지에 보통 주목했다.
- 하나는 아제르바이잔인과 아르메니아인의 민족 갈등
- 다른 하나는 바쿠, 전 세계 최초의 유전 지대 중 하나.

그 두 가지 핵심 화두가 중첩하는 혁명기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는 매력적이었다. 나는 원래 스탈린 시대나 그 이후를 하고 싶었는데, 선행 연구가 혁명기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혁명기를 선택했다. 그런데 공부해보니 재밌었다. 당대 혁명기에 사람들이 펼쳤던 여러 가지 상상력, 또 여러 층위의 경쟁, 배경의 세계사적 맥락이 서로 경합하면서 복잡하게 흘러가는 역사에 흥미를 느꼈다. 결국 역사적 갈림길은 크게 둘이다. 아제르바이잔만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와 함께 역사적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1917년에 러시아 제국은 무너졌다. 그 이후에 아제르바이잔이 스스로 독립하더라도 어떻게 주권을 지켜야 하는지에 관한 방법론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다. 언어와 종교, 문화를 공유하는 서쪽의 터키 민족주의와 연계하는 방식이 제기됐다. 또 제국에서 원래 동거했던 러시아와의 연대를 복원하는 길도 있었다. 아예 아제르바이잔 민족을 새로 만들고 탐구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여러 흐름 중에서, 사회주의와 반제국주의 혁명을 위해 아제르바이잔 독립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여러 민족과 ‘국제 연대’에 참여해야 한다는, 그러면서도 무슬림 민족주의를 놓지 않았던 나리마노프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역사학자 프레데릭 쿠퍼의 제국론이 논문 주제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줬다. 제국은 어떻게 해체되고, 어떤 조건에서 재조합하며, 또 무엇보다 어떻게 제국은 관리되는가. 과거의 화석으로 박제된 것이 아닌, 강압적이고 착취적인 것을 넘어서는 ‘제국’은 그 자체로 인간사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형태였다.
사실 나리마노프는 ‘국제 연대’를 주장했지만, 이건 또 어떤 의미에서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제국’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우리 같이 식민지 출신으로 민족주의가 당연한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민족주의 운동가가 제국에 다시 돌아가자고 주장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나리마노프를 탐구하는 것은 제국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 특유의 세계관을 엿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나는 특히 근래 들어 일국적 국민국가, 자유주의적 근대성, 1인1표의 물신화와 절대화, 굳이 말하자면 1989년식 승리주의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품었던 터에 쿠퍼의 제국론이 더 매력적이었다. 쿠퍼가 제국론을 본격적으로 펼칠 무렵에 낸 책이 ‘식민주의에 대한 질문(Colonialism in Question, 2005)’이다.

이 책에서 쿠퍼는 그 당대 사람들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지, 오늘날을 기준으로 정답을 찍어놓고 역사를 후행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라고 아주 집요하게 서술해놓았다. 신자유주의, 혹은 냉전 종식이라는 1989년 패러다임이 회의 대상이 되는 오늘날에 중요한 것은 과거에 존재했던 다원적 정체(polity)와 그 속에 살아가는 주체들의 다양한 질감을 복원해 내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그런 여러 영감의 원천 중에 나는 다민족 제국을 선택하여 연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다.
시대적 교훈: ‘가교’로서의 지도자
신자유주의는 구조적 관성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때, 그 시대라는 말 속에 내포한 공통의 문법, 함께 경험한 어떤 역사적 사건들, 문화적인 공통 분모를 고려하면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때 신자유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았고, 사실 신자유주의가 일정한 역사적 역할이 있었다고는 지금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많이 바뀌었는데, 현재 신자유주의 오작동은 점점 더 커지지만, 그 대안은 부재하여 고통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측정 가능한 자본
- 계량화하는 개인주의
- 민주당 대 국민의힘
- 아시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나
나는 20세기 역사에 관심이 아주 많다. 19세기는 유럽에서 출현한 근대성이 아시아로 침습해 들어오기 시작한 시대였다. 그리고 아시아의 전통과 서구 근대성 사이를 오가며, 어떤 방식으로든 대안을 모색한 시대가 바로 20세기였다. 1900년대 러일전쟁 전후, 중국의 신해혁명, 터키 독립전쟁, 3.1운동 전부 그런 역사적 흔적들이다.
아시아의 이러한 흐름은 1950년대에서 70년대에도 두드러진다. 당시 반둥회의, 베트남전, 쿠바혁명,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등 반제국주의적 급진주의가 부흥했다. 나는 요즘도 어쩌면 그런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 독점에서 벗어나 비서구의 자율성, 반발이 활발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게 꼭 좋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당연했던 서구의 독점이 무너지고 아시아의 반발이 효과를 거두는 현상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나는 그런데 그런 움직임이 진공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누적된 역사가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한국 사회 담론에 대한 불만은 우리가 아시아적 흐름이나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다는 거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주로 미국, 일본, 유럽을 참고한다. 보수는 (나도 어느 정도 그랬지만) 트럼프에 열광했었는데, 진보도 최근에는 맘다니에 열광하는 게, 대미 종속성의 관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미국에 크게 영향받는 나라로 당연하긴 하지만, 우리가 아시아의 맥락에 너무 무관심하고 무지한 것은 아닐까.

나리마노프는 20세기 아시아라는 혁명의 시공간을 구성했던 또 하나의 인물로, 나름 상징적 의미도 있는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 혁명 초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자리까지 오른 유일한 무슬림 당원이었다. 나리마노프가 볼셰비키에서 우대받은 첫 번째 이유는 나리마노프의 고향인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정권 생존에 필수적인 석유 산지였기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이 엄청났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소련 프로젝트는 노동계급 혁명뿐 아니라 전근대의 무지와 제국주의 착취에 이중으로 고통받는 아시아의 피억압 대중의 해방도 추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 러시아 제국의 방대한 무슬림 인구를 대표할 정치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리마노프는 무슬림 인민대중에게 ‘반제국주의 혁명’이라는 ‘언어’를 주고, 무슬림의 언어에서 혁명적 잠재력을 탐색해 다시 러시아 볼셰비키에 전해주고 싶었다. 나는 거기에 마음이 끌렸다.
볼셰비키는 무슬림에 대해 혁명적 잠재력이 부족하거나 봉건적이다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계몽 대상’으로만 바라봤다는 시각이 많다. 아직도 이런 주장이 상식처럼 통용되어서 안타깝다. 물론 일부 볼셰비키는 그러한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아제르바이잔의 나리마노프나 우즈베키스탄의 압두라우프 피트라트와 같은 급진적 무슬림 혁명가의 비판을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혁명 프로젝트 전반을 총체적으로 재점검할 정도로 유연하고 열려 있던 조직이었다.
나는 나리마노프라는 인물이 볼셰비카와 무슬림의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어떻게 했는가, 또 볼셰비키가 그에 어떻게 반응하여 나리마노프라는 이 무슬림의 주장을 수용했는가, 그 구체적 역사를 알고 싶었다.
혁명 ‘플랫폼’ 러시아
좀 더 부연하자면, 나리마노프는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기존 볼셰비키의 언어가 그 잠재력을 포착하기 어려운 무슬림 민중의 말, 표정, 언어, 신앙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후대 사상가들에 비해서는 이슬람을 더 ‘도구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주류 볼셰비키에 가까웠지만, 무슬림 대중의 정치적 주체성, 종교를 통해 표출되는 사회 정의의 요구, 영국을 향한 세계적 반란의 선봉에 설 수 있다는 국제주의적 믿음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최상층에까지 전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볼셰비키의 세계주의, 국제주의는 단순히 소련 국경 바깥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카자흐인, 부랴트인, 에벤키인이 뒤섞이는 광대한 다민족 변경에서 시작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비유럽인 비러시아인의 참여가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비서구인은 아시아 네트워크를 통해 러시아의 해방적 실험을 확산시키려고 했고, 러시아는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혁명 역사를 단순히 볼셰비키 제국주의가 고도의 식민주의를 강요했다라는 일면적이고 비난적인 평가를 넘어서, 소련이라는 나라가 가진 ‘제국성’이 좀 더 다면적이고 실제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역사적 의미는 이후 그람시와 마오쩌둥을 통해서, 즉 상부구조의 자율성과 아시아 농민의 잠재력을 강조하는 정치적, 지적 흐름이 등장하며 계속 이어졌다. 사실 이런 문제의식을 품은 연구는 최근 부쩍 많아지고 있다.

제국: 다민족의 문제,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이야기한 건 포괄적으로 20세기부터 지금까지 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탈식민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화두는 다민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19세기 말에 카스피해에 세계 최대의 유전 중 하나가 개발되면서 그 인근 소도시 바쿠는 그야말로 거대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인종과 계급이 적나라하게 교차했다.
- 최상층: 서유럽 자본과 러시아 관료와 군인
- 중간층: 아르메니아 상인, 석유 숙련 노동자
- 최하층: 아제르바이잔 석유 비숙련 노동자
여기서 아르메니아 숙련 노동자와 아제르바이잔 비숙련 노동자는 산업 현장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면서, 때로는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때로는 서로 간 악감정을 쌓고 그랬다. 문제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이 민족 간에 유지되던 아슬아슬한 공존이 깨졌다는 데 있었다. 한 번 무정부적 폭력이 휩쓸자, 어제는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서로 추방하고 죽이고 갈등한 것이다.
자 그런데 아제르바이잔과 바쿠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아르메니아인들은 바쿠가 자신들의 도시라고 생각했고, 1918년 3월에 아제르바이잔 무슬림을 학살했다(‘3월의 날들’). 무슬림은 반동적이고 아르메니아를 몰살시키려 한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반대로 아제르바이잔인들도 복수를 해주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미 바쿠에 산 역사가 수십 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보복으로 죽거나 추방당했다.

다민족 질서라는 건 사실 낭만적이다. 하지만 더 상위의 시스템(제국이든 무엇이든)으로 안정적인 통제가 작동할 때 그 낭만이 가능하다. 그런 상위 논리가 없을 때에는 영토와 역사, 기억 등 온갖 이슈를 둘러싸고 서로에게 폭력을 정말이지 가감없이, 야만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이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기나긴 갈등 역사가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1988년에도 2020년에도 소련 해체와 그 여파 속에서 전쟁했다. 그뿐인가. 우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시리아 내전, 그리고 식민자 이스라엘과 피식민자 팔레스타인의 끝없는 투쟁과 분열을 보고 있다. 평화와 공존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고, 또 어떤 때에 갈등이 폭발하는 것일까?
내가 슬로우뉴스에서 ‘지방의 눈으로 본 세계화’를 쓴 지가 7년이 됐는데, 그때 내가 쓰고 생각했던 것에서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한국은 우선 계속해서 늘어나는 다문화 인구를, 한국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동화로 관리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나는 민족 국가의 이주민 동화 정책을 긍정하지만, 때로는 작동하지 않을 때도 있다. 니라마노프는 공산주의라는 더 큰 운영 원리가 생긴다면, 민족적인 차이를 뛰어넘는 더 큰 대의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주민을 한국인으로 동화함과 동시에 더 큰 상위의 지배 원리, 시스템 통합의 원리가 무엇이 있을까 이런 것이 요새 고민 중 하나다.

신자유주의 파국: 가령 아이스 사태
미국도 유럽도 다민족 사회를 어떻게 통합하고 조율할지에 대한 시민적 합의가 깨졌다는 걸 보여주는 다양한 ‘분열적 증후와 사건’들이 있다. 미국을 살펴보자. 쿠퍼의 ‘세계제국사’를 보면, 미국이라는 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쟁점을 제시한다.
주류 서사는 미국은 제국이 아니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서사다. 그런데 쿠퍼가 보기에는 이런 시각은 기만적이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을 침탈하고, 흑인을 노예화한 미국은 제국, 그러니까 여러 다양한 종족 집단을 거느리고, 차이를 재생산하면서 제국이라는 틀 속에서 동시에 통합한 그러한 정치체였다.
우선 미국은 시작부터 아메리칸 원주민을 비가시화하고 배제한 뒤에 백인 중심으로 스스로 정체화했다. 미국은 구성하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을 암묵적인 차원에서 흑인과 다민족을 배제하면서 와스프(WASP;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가 권력을 독점한 ‘그들만의 민주공화국’이었다. ‘우리 모두 미국인’이라는 다양성을 ‘용광로’로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나라, 제국의 진면모를 숨긴 제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국은 문화적 융합, 공존과 해방의 플랫폼이 되기도 한다(러시아도 그랬듯이). 민권운동, 거기에 근거한 시민운동. 마이클 잭슨의 시대. 미국이라는 제국적 플랫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위대한 순간들이다. 문제는 2000년대까지는 그런 게 통합, 평등의 가치가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 내부의 ‘제국성’을 인정하기 싫은 이들이 부상한다. 사실 오바마 시대의 다문화주의와 진보주의는 미국이 복수의 집단을 관리하고 공존시키려는 위계적 권력, 즉 ‘제국’임을 인정하고, 그런 차원에서 새롭게 모색해 본 제국 문화의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여기에 백인 민족주의자들은 위협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도 미국은 백인 중심, 와스프 중심이어야 하지 않나? 왜 나를 가르치려 들지?’
(제국의 이념은 본래 강압적이고 제국 중심에 존재하는 위계를 강요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진보주의와 다문화주의가 진정한 제국 문화, 차이와 통합에 관한 실질적 비전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일단 받아’ ‘일단 공존해 보자’는 준비되지 않은 이상주의의 한계가 드러났다. 무엇보다 미국은 더는 여러 이주민을 통합할 수 있는 공동 프로젝트가 없었다. 그것은 뉴딜 시대, 나아가 냉전 시대에 사실상 끝이 났다. 신자유주의시대로 넘어 오면서 다양한 집단(특히 민족)이 통합할 수 있는 문화, 가치, 철학이 해체되고 정치적 부족주의가 부상했다. 결국 ‘하나의 국가’, ‘하나의 가족’이라는 생각의 공유가 있어야 공존할 수 있는데, 신자유주의의 다문화주의는 내부 다양성만 증식하고 통합의 원리를 창안해지 못했다.
과거 소련에서는 그게 공산주의, 미국은 자유, 미국의 특별한 운명, 뭐 이런 것이었는데… 물론 소련에서도 그 과정에서 ‘수용소’ ‘숙청’ 미국에서는 ‘흑인 차별’ 등의 기만적 요소가 있었지만, 어쨌든 냉전 시대까지는 더 거대한 상위 원리가 있었다. 물론 신자유주의도 ‘인간의 기능적 배치’라는 자본의 효율적 요소는 있었다. 자본주의 네트워크 권력이 전 세계를 신자유주의로 집어삼켰다. 어떻게 보면, 국경을 초월한 자본의 지구 경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반발이 정치적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갈등이 폭발한 게 현재의 모습이다. 공간이 해체되는 사람의 두려움, 그 두려움이 편협한 종족주의로 변질하기 쉽다(마누엘 카스텔). 자본주의 네트워크 권력이 국가, 민족을 뛰어넘는 상위의 개념으로 작동하면 어찌어찌 겨우겨우 작동하지만, 2008년 이후 그런 신뢰와 권력의 작동 원리도 깨져버렸다. 통합의 원리 ‘복원’이 절실하다.
공포가 모든 걸 삼킨다
통합의 원리가 깨지고 신뢰가 깨지면, 1918년 바쿠에서 일어난 ‘3월의 날들’ 같은 비극이 생긴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아제르바이잔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그 전에 1915년에 오스만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강제 이주를 명령하여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 1918년 3월 학살에는 공포가 아르메니안인을 집어삼킨 면이 컸다(오스만인들도 러시아가 몰려올 것이라는 공포가 있었다. 당시 오스만 인구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에서 넘어온 무슬림 난민이나 그 후손이었다)
그게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마가의 공포도 이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이대로 가면 크리스천 백인 공동체는 와해한다. 그런 혼란이 증폭하면 ‘완장 찬 폭력집단’이 출현한다. 볼셰비키 혁명 때도 농촌의 청년들이 완장을 차고, 내전 분위기 만연하면 공포가 공기를 채우고, 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가 생기고, 폭력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는, 트럼프가 아이스의 폭력을 용인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공포나 이데올로기라면, 어느 문턱을 넘어가면 그 관계나 전후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내전을 공부하면서 참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고도의 정치적 폭력에는 어떤 식으로든 ‘합리적 기제’가 작동한다. 스탈린 대숙청 때도 그랬다. 이란에서 일어난 유혈 강경 진압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시리아처럼 만들 것이라는 공포가 작용했다. 어쩌면 미국도 폭력이 폭력을 낳는 무서운 상황에 접어들 수 있지도 않을까. 이런 상황이 왔을 때 무서운 것은, 항상 이런 갈등과 폭력을 ‘교통정리’ 하겠다는 세력이 나오는데, 소련에서는 그게 볼셰비키, 터키에서는 아타튀르크, 중국에선 마오쩌둥. 미국에서 트럼프 측근의 자본가, 가령 피터 틸, 팔란티어 등이 통합을 앞세워 ‘크리스천 민족주의’ ‘데이터 통제와 감시체제’...
1차 대전을 전후로 온갖 제국이 해체되는데, 유럽에선 독일, 오스트리아, 아시아에선 이란,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다. 중국은 청나라.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이 해체한다. 이 지역에서 민족 갈등, 내전, 정치 폭력, 테러… 20여 년을 거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를 수습하는 방법은 지역적, 이념적 차이에 따라 제각각인데,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이 존재했다. 하나는 소련식 통합의 방향이 있고, 그래서 소련의 국호에는 ‘러시아’라는 민족국가는 의도적으로 생략됐다. 직역하면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다.
그 반대쪽에는 완벽한 동화와 배제가 있었다. 오스만 제국(터키인이 중심이었던 제국)에서 터키로의 이행이 이러했다. 민족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추방을 통한 인구 교환이었다. 터키인과 그리스인을. 서로의 나라로 추방했다. 200~300년을 살았어도 ‘너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 너희 나라로 가라’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사실 한국이나 서방에서 ‘독재자’라고 비판받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과거 오스만 시기에 존재했던 제국의 다양성을 존중하자고 해서 이런 분위기를 완화한 인물이다. 그는 고질적인 쿠르드 문제, 시리아에서 아랍인 난민의 유입,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 이주민 유입 등의 문제에 직면해서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이 다원성과 안정을 동시에 보장하는 전략을 취했다. 논쟁은 있지만 성공적인 축이었다고 본다.

어쨌든, 혼란은 무한히 갈 수 없다. 사람들은 안정을 추구한다. 어떤 식으로든 ‘봉합’이 될 텐데, 미국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국가를 통합하든지, 아니면 트럼프, 혹은 다른 누군가가 추구하는 강제적 통합이 이뤄질지…
물론 ‘분리와 배제’를 전제로 한다고 해도 통합은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서, 가령 스탈린도 통합을 위해 지식인을 숙청하고, 배제한 것처럼. 러시아인도 엄청 숙청했다. 소수 민족들도 공산주의 경도된 청년세대들이 선배세대를 몰아내는 작업을 내부에서 진행했다. 1927년~37년까지 이런 내부 숙청이 활발했다. (나리마노프도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1925년에)
다민족인 질서를 통합해 낼 수 있는 원리. 그리고 그 원리에 내재된 억압. 그리고 시공간의 조건에서 벌어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미국: 불완전한 다양성
논문을 쓸 때도 생각한 것은 소련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필연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연과 조건의 조합을 통해서라는 것이었다. 미국도 그런 불안전한 다양성이 열려 있는 것 같다. 트럼피즘은 2008년의 실패와 대안의 부재가 만들어낸 역사적 필연이면서 동시에 우연적 요소의 결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만들라는 비주류 정치운동이 감시국가, 국가 폭력의 남용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불길하다(예전 인터뷰에서는 이런 것이 지닌 기술적 혁신의 가능성을 더 높이 샀는데, 엡스타인 파일을 보니 내 생각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우칠 수 있었다).
트럼프 남은 임기 3년의 분열적 파국을 막아내고 통합을 복원할 합의가 필요한데, 민주당은 주체가 아닌 것 같다. 정치적 대안이 부재한 것 같아 그게 더 불안한 상황 같다. 주류 민주당은 그 자신 신자유주의자의 적자들이고, 공화당은 마가에 붙은 자본가에 의해 하이젝킹됐고… 좌우를 뛰어넘는 정치통합이 가능할까? 어려울 것 같다.

‘어제까지’ 한국적 상황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상위의 원리. 갈등이 아니라 다양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그런 원리를 찾아야 한다.
갈등의 정체를 구별해 보면, 일본 제국 시대에는 의외로 다원성이 존재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중국, 일본으로 자유롭게 넘어가서 네트워킹했다. 일본이 한국 통치를 위해 용인한 지주 세력이 있었지만, 그때 한국도 좋든 싫든 ‘제국의 일원’이었으니까.
제국 해체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일본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남북이 분단됐고, 다원성이 사라졌다. 동아시아의 일원이었던 한반도의 공간적 특성이 일본 제국 해체, 중국 공산화가 겹치면서 폐쇄적이고 단일적인 내부 구성원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거기에 내전(한국전쟁)까지 겹치니까 남은 북을 소련의 앞잡이로 보고, 북은 남을 미국의 앞잡이로 타자화했다. 하나의 단일 논리에 의해 내 편(동화), 네 편(배제)이 갈렸다. 1945년~1953년 한국전쟁 휴전까지. 비극이긴 한데, 남북에 다양성이 없는 단일한 사회가 폭력을 거쳐 등장했고, 그런 단일하고 폭력적인 일원화가 역설적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에서는 큰 역할을 했다.


전후 유럽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있었다. 토니 주트(노동당 지지 성향 영국 역사가) 왈, 유럽의 복지국가는 히틀러와 스탈린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로 제국들이 해체하면서, 동부 유럽에서 펼쳐진 문제는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이 생겨나니까 그런 다양성 때문에 국가적인 통합의 프로그램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히틀러가 민족을 학살하고 스탈린이 ‘인구 교환’을 행하면서, 유럽 각국은 ‘단일 민족 국가’로 재구획할 수 있었다. 전후 유럽에는 40년 동안 전례 없는 안정이 찾아왔다.
그렇게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꾸려가는 ‘사회적 합의’가 성립할 수 있었다. 한국도 일본 제국 해체, 한국전쟁, 화교 억압, 고도의 통합과 단일화된 인구 집단이 선(先) 산업화, 후(後) 민주화 프로젝트를 성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었다고 본다.
역사적 맥락을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1945년에 펼쳐진 난장판에서 2002년까지는 이 단일한 사회적 원리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유지됐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시대적 과제, 통합의 원리
세대, 성별, 자산, 위치에 따라 한국 안에서도 다원화가 진행하고 있다. 이주민에 의한 다원화는 이중적 다원화의 조건이다. 한국인이라고 할 때 그 모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분화가 이뤄졌는데, 여전히 정치인의 언어를 보면, 산업화 시대처럼 하나의 단일한 목표를 제시하면 따라올 것 같이 행동한다.
그러니까 우파에선 반공, 반중, 반북. 좌파에선 적폐 청산, 사법개혁… 이런 (기만적, 허구적) 구호로 깃발 올리면 국민이 따라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구호로는 이미 한국 사회가 너무 많이 분화했다. 정의당 등이 시도한 정치와 삶이 서로 밀착한 미시적 접근은 실패했다. 전체를 통합하는 원리가 없으니까. 다른 하나는 중산층을 ‘국민 대표’로 설정한 뒤에 중산층 지원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이었는데, 여기에도 지금 균열이 심하게 진행한 상태다.
앞서 두 가지가 다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통합 원리가 부재하고 작동하지 않는다는다는 것은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그 피해,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 중산층을 넘어서는 통합의 원리를 발굴해야 할 텐데, 내 경우는 나리마노프가 이슬람에 천착해서 언어를 입히고 표현하는 그 실천을 주목한다. 한국의 전통이 어떻게 형성했고, 어떤 가치를 제시하는가. 문화적 무의식을 찾는 걸 선결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리학(주자학)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 번째는 외교적인 문제가 될 텐데, 한국이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라서, 균형 외교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미국에 더 붙어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모두 불안을 공유하는 것 같다. 국제적인 혼란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가. 아시아 주변국(일본, 아세안까지를 포괄) 공통의 역사적 경험, 문화적 문명적 유산을 함께 복원하고 공유해야 하는가. 어느 쪽이 됐든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에서 통합 원리를 모색하고 찾아아 한다는 시대적 과제는 명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