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2003년 조치원역 앞에 김밥천국을 시작하면서 생극면을 떠나 연기군(현 세종시)으로 이주해왔다. 마이너스 3천만 원으로 빚내고 시작한 김밥천국은 2003년 중부 지방 대폭설 때 조치원역에 발이 묶인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찾으면서 본격적으로 성업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2005년 즈음부터는 주 칠일 밤낮으로 일하시던 어머니도 가게에 아주머니들을 많이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김밥천국의 언니들
그래도 어머니가 주 칠일로 김밥천국에서 온종일 일하신 건 그대로였기에 나는 식사도 김밥천국에서 자주 해결했는데, 그러다 보니 가게 아주머니들과 안면을 트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가게에는 조선족과 한족 아주머니가 각각 들어왔는데, 자랑스러운 반만년 단일민족 국가의 국민으로 10년을 교육 받아온 내가 외국인이라는 존재를 대면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실 그분들은 당시 아주머니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언니’들이었다. 어렸을 때 기억이 자주 그렇듯 그분들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는 사실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조선족 언니가 한국어가 좀 어눌한 한족 언니의 소통을 도와주면서 일하는 모습은 그때도 신기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참고로 그분은 중국어도 연변 사투리가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북경 관화를 구사한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지리에 대해 갓 알기 시작한 내가 “지린이 고향이에요, 헤이룽장이 고향이에요?”하니까 그런 건 어디서 배웠냐고 깔깔대던 것도 기억난다.
그분들은 조치원을 둘러싼 연기군의 농촌 지역에서 활발해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해온 분들이었다. 아마 나이차가 20세는 넘게 나는 농촌 ‘총각’들이 남편이었을 것이다. 그 두 콤비 외에도 가게에는 조선족, 한족, 베트남, 심지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까지도 일하러 오곤 했다. 대부분 국제결혼으로 이주해오신 분들이었는데, 역시 대부분 이혼하고 혼자 살거나 새로 시집가는 경우가 많았다.
웅이 언니
이주민 집단에도 우리는 알기 힘든 나름의 ‘질서’와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나중에 조선족 아주머니 한 분이 엄마랑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들었었다.
“걔 새 신랑 만난 건 알지? 아이고, 근데 걔는 지지리 복도 없지… 한국에 왔으면 한국 남자나 잘 잡을 생각 해야지, 별 볼일 없는 중국 놈팡이랑은 뭐가 좋다고 결혼을 해가지고 쯧쯧쯧…”
그런데 아무래도 이혼한 중국 출신 이주 여성들은 조선족 노동자들하고 많이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건 사실인 모양이다. 물론 잘 풀리는, 그것도 엄청 잘 풀리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2007년 우리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 베트남 ‘웅이 언니’가 대표적인 사례다. 아마 베트남의 가장 흔한 성씨인 응우옌을 편하게 발음한 것 아닌가 싶다. 웅이 언니는 20대 중반에 한국에 시집왔는데 당시 남편은 50대였다. 국제결혼해서 한국어를 가르치면 금세 이혼한다는 말을 들었는지 처음에는 한국어도 제대로 안 가르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다보니 한국어를 못해도 끝끝내 조치원 읍내에서 일하고 싶다고 남편을 설득하여 우리 가게에 들어오게 된다. 성실하고 착한 웅이 언니를 엄마는 정말 좋아했었다. 당시 우리 집은 충청대학 앞에 다른 김밥천국 매장을 하나 차렸었는데, 장사는 잘 되었지만, 관리할 여력이 나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쉽지만, 결국 처분해야겠다고 가닥을 잡을 무렵, 웅이 언니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그거 자기가 인수하면 안 되겠냐고 묻더라는 것 아닌가. 웅이 언니는 4,500만 원이라는 싼값에 점포를 인수했고, 남편과 함께 엄청난 성실성으로 사업을 번창시켜 나중에는 월 수백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사업가로 변신하셨다. 아마 베트남 고향에 궁전 하나 차려줬을 것이다.
중딩이 만난 세계의 창, 김밥천국
중학교에 올라가고 세계 지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김밥천국은 나한테 세계와 만나는 창과 같은 곳이 되어주었다. 그때쯤 되면 조치원에서 외국인의 존재는 신기한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게 너무 당연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밥천국에 들리는 손님들이 아주 국제적이었다.
역 뒤 연탄공장에서 일하던 잘생긴 파키스탄 형님은 아직도 생각난다. 맨날 ‘햄 뺀 오므라이스’를 시켜먹었는데, 고향에서 경찰관을 하다가 한국으로 왔고, 고향에 목장을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참조: 왜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총을 드는가 ‘지하드의 광시곡’). 정말 잘생겨서 경찰 제복을 입으면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스리랑카, 네팔, 방글라데시 같은 인도권,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이 있는 중앙아시아 손님들도 꾸준히 가게에 들렸다. 대부분 조치원을 거점으로 연기군 인근의 농공단지 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혹은 충청도 다른 지역에 가기 위해 조치원에 들린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러시아어를 독학했는데, 가게 앞에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조치원 버스터미널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는지 길을 묻길래 안 되는 러시아어 써가면서 데려다줬던 적도 있었다. 버스 타고 부여를 간다고 했던가.
우즈벡에서 만난 한국
그 뒤 대학을 서울로 오면서 이런 이주자들과 만나는 경험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었다. 가게에서 일하던 중국 출신 누구 아주머니 소식을 엄마에게 틈틈히 듣긴 했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들은 이제 그냥 너무 당연한 일들이 되어 있었다.
아마 이런 국제화가 대도시와 지방 소도시, 읍면지역에서 굉장히 차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인식한 건 2015년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17일 동안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고 왔는데, 거기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어딜 가나 한국어를 아는 우즈벡인들이 꼭 있는 것이었다.
사마르칸트에서 바가지를 써서 화가 난 상태에서,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고 당당히 “씨X 씨X”하면서 길을 걷다가 “씨X 나쁜 말, 쓰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다른 곳에서는 면목동에서 7년 일하셨다는 분을 뵈었는데 친구가 “사가정?” 하니까 바로 “용마산! 상봉터미널!”이 튀어나오시기도 했고.
어떤 분은 전주의 모 인력사무소에서 7년 일하다가 불법체류자로 추방되었는데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식당을 차리기도 했다. 우리를 보고 한국인이냐고 물어보고 자기 식당으로 불러서 갓 구운 고기빵을 대접해주기도 했는데, 인테리어가 완전 시골 기사식당, 함바집 인테리어였던 것이 또 포인트.
이 같은 일화들을 통해 나는 새삼 한국에서의 이주 노동이라는 경험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조치원에서의 경험들이 오버랩되면서 우즈벡에서의 일화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외국인 식당 = 커뮤니티 센터
2015년은 내가 1년 휴학 하면서 조치원에 머무른 시기도 했는데, 바로 그 때 조치원 풍경이 무언가 많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서울에서 2년 산 경험과 우즈벡 여행을 통해 조치원을 더 ‘낯설게’ 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중 하나가 외국인 식당의 엄청난 증가였다. 처음 발견한 것은 조선족의 양꼬치집이었다. 어느날 조치원역 최대 번화가인 욱일아파트 상권을 걸어다니는데 칙칙하고 이상한 음식 사진들이 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가게가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조선족 언니에게 들어보니 조치원 조선족-한족의 주요 모임 장소로 원래부터 유명하던 식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15년 조치원에는 양꼬치에 더해 베트남 쌀국수집에 우즈베키스탄 음식점까지 생겨났다. 사실 이런 음식점들, 특히 양꼬치나 쌀국수 같은 것은 이전에 서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같은 것은 딱 메뉴뿐이었다. 서울의 외국 음식점들은 주로 젊은층을 대상으로 이미 한국 현지에 맞춰진 음식을 팔았다. 즉 뭘 팔든 결국은 한국 식당이었다.
하지만 조치원의 외국 음식점들은 그 공간만큼은 ‘그냥 외국’이었다. 한국인 고객은 사실상 나 뺴고는 없었고(시골 사람들, 특히 장년층부터는 입맛이 굉장히 보수적이다) 손님 대부분은 그 나라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런 식당들은 조치원의 특정 문화 커뮤니티 센터처럼 기능했던 것 같다.
거기에 더해 꼭 손님들이 쉽게 사갈 수 있도록 냉장고에 현지 식자재를 꽉꽉 채워넣고 있었다. 예컨대 베트남 쌀국수집에는 라이스 페이퍼랑 고수가 가득 있고, 우즈벡 음식점에는 냉동 양고기와 우즈벡 빵도 사갈 수 있는 식이다.
‘국제도시’ 성환
이 같은 변화는 아마 2000년대에 성숙하기 시작한 한국 내의 이민자들 사이에서 부를 축적한 소자본가들이 나왔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지 않나 싶다. 요양, 청소, 건설, 식당, 공장 등 한국인들은 가지 않기 시작한 하층 노동의 현장에서 억척스럽게 부를 모은 사람들이 한국에 기어코 뿌리를 내리고 정착했다는 증거가 바로 식당이었다. 특히 양꼬치 같은 아이템들은 한국인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어 사업 확장성까지 더해졌다.
물론 식당 같은 ‘양지의 사업’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지역의 중국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음지에는 마작방이 성행하였는데, 듣기로는 중국인이 모이는 곳에 다른 건 없어도 마작방만큼은 꼭 있을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 커뮤니티나 우즈벡 커뮤니티에는 또 우리가 모르는 뭐가 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2010년대를 지나며 중국인 외에도 몇몇 민족집단은 성공적으로 한국에 디아스포라(특정 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느낀 것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천안시 성환읍에서 공익 근무를 하면서였다. 평택부터 당진까지 이어지는 공업지대에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고용되었는데, 성환도 그 한 가운데에 있던지라 나와도 종종 인연이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지적장애인 생활시설 ‘등대의집’ 옆에는 사료공장이 있었는데, 그곳의 구소련 출신 노동자들과 퇴근을 종종 같이하며 러시아어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러시아 이바노보에서 태어난 우즈벡 노동자, 키르기스스탄 오쉬에서 온 우즈벡 노동자, 볼고그라드 출신의 고려인 노동자, 뭐 이런 식이었다.
언젠가 하루는 친구 만나러 평택역에 갔는데 그때 퇴근길에 만났던 우즈벡 노동자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일도 있었다. 어느 하루는 장애인분들 취업지원을 위해 인근 공장에서 하루 일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도 우즈벡 언니 두 명이서 나의 느려터진 속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난 작업 속도로 일하고 있었다. 러시아어로 이것저것 물어보니 타슈켄트 출신이라고 하셨다(아, 그리고 이런 동네에서 한국인이 러시아어 하면 일단 놀라고 시작하는 게 기본이다!).
[adsense]하여간 그래서인지 성환역에는 ‘카페 보디’라고 하는 우즈벡 음식점도 있었다. 내가 공익 근무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개업했었다. 개업을 하자마자 이곳은 지역의 러시아어권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할랄 음식(‘hallal’은 ‘허락된’이라는 뜻. 할랄 음식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처리된 음식)을 취급한다는 특성 때문인지 식문화가 전혀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와서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했다.
특히 이슬람의 휴일인 금요일 저녁에 이 식당에 가면 가끔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여기도 당연히 냉동 양고기나 빵 같은 식자재를 취급했다. 화덕에서 직접 구운 우즈벡 빵이 참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각설하고, 아마 구소련 출신으로 평택 인근에 정착하고자 하면 이런 곳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더 쉽게 정착하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성환은 그 밖에도 중국-조선족, 베트남, 캄보디아, 심지어 라이베리아나 에티오피아 출신 노동자들도 집결하던 진정한 국제도시였다.
우리 옆에 와있는 이주노동자
경험담 회고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하자.
요지는 이미 이주민들은 지방도시의 고용과 생산의 주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으며, 몇몇 민족집단은 자체적인 생태계까지 갖추면서 한국 사회에 깊숙하게 뿌리박았다는 것이다. 몇몇 이주자들은 자기도 한국에서 가게 사장님이 되는 신분 상승을 꿈꿀 것이다. 몇몇은 본국으로 금의환향할 날을 기다릴 것이다.
또 몇몇은 이 ‘한심한 놈팡이’와 빨리 이혼하고, 새살림 알아보고 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다문화’라고 놀림 받는 자녀를 보며 속을 썩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읍면 단위 지방에서 살았다면 나 같은 경험을,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어느 정도는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방에 살면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도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이를 실감한 것도 역시 공익 근무를 하면서였다. 훈련소에서 생활관을 같이 쓴 동기들에게도 이런 얘기를 종종 들었다. 특히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중국이나 캄보디아 등지의 노동자들과 있던 에피소드들을 풀어놓았다. 예컨대 캄보디아 출신 동료들이 단체로 사는 집에 초청받아서 고수 냄새 풀풀 나는 음식 먹어봤다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들. 공익 근무를 같이 했던 친구는 자기네 집이 키르기스스탄 출신 노동자들을 몇몇 고용하는데, 가끔 자기랑도 같이 술도 먹는다는 얘기를 했다.
두 개의 세계화
이런 경험들을 반추하다보니 어느 순간 내가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름 데 블레이의 [공간의 힘], 폴 콜리어의 [엑소더스], 마누엘 카스텔의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은 더 구체화되었다. 그렇게 많은 해외여행 경험이 있고, 서울대 안에서도 유학생들과 열심히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큰 틀에서는 비슷비슷한 면들이 많았다.
일단 대부분은 구미권 백인이었고, 그들의 소통 언어는 거의 무조건 영어였다. 소위 ‘제3세계’에서 왔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년에 나는 예멘에서 온 학생과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 그 학생의 영어 실력은 정말 훌륭했다. 한편 예멘이 내전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걸 감안할 때 그의 계층이 어느 위치에 있을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정리하자면 ‘세계화’는 세계 도시를 오가며 영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사람들의 세계, 그리고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부대끼는 사람들의 세계로 나뉘어서 진행되고 있다.
‘백인 다문화 가정은 예능에 나오고, 동남아 다문화 가정은 다큐에 나온다.’
이 말은 ‘두 개의 세계화’가 보여주는 씁쓸한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문제는 두 종류의 세계화를 전부 경험해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 위화감을 조치원, 서울, 성환 등을 오가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포착해낼 수 있었다.
세계화의 양극화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가 살던 환경에서 크게 벗어날 일이 없다. 외국어고나 국제고를 나와 미국에서 1년 정도 생활하고 SKY를 다니며 구미로 교환학생도 한 학기쯤 다녀오는 사람이 지방도시 공단과 무슨 연이 있겠는가. 조치원 같은 곳에서 나고 자라 뿌리 박고 사는 사람은 자기가 가는 식당의 조선족 아주머니와 자기가 일하는 곳의 베트남 동료는 알아도 노르웨이나 미국 출신 교환학생과 친구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간극은 점점 더 커져만 갈 것이다. 한국의 대도시 중산층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더 국제적으로 키우고자 할 것이고, 매력적인 도시 서울은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일 것이다. 반면 지방 대부분은 ‘소멸’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서 생명 연장을 위한 마지막 카드로 점점 더 외국 인력에 많이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상층의 세계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층의 세계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벌어지는 갈등이 점점 커지지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예멘 난민 사태가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당시 인터넷에서 보여진 극단적 제노포비아(Xenophobia; 외국인 혐오)발언까지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너희들 사는 동네에 정착하겠냐, 차라리 우리 옆 집에 들어오려고 하겠지’라고 말하는 그 불안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그런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을 단순히 외국인 혐오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당신들도 결국 영어 잘 쓰는 구미권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3세계’ 사람들과 진심으로 어울려보라고 하면 잘 하지도 못할 사람들 아닌가.’
이상 충청도 시골 사람의 회고 겸 넋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