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은 근 1년 간 지속되었던 사드 제재를 해제할 의사를 한국에 타진해왔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그렇게 극심하게 한국과 중국의 경제, 문화교류를 뒤흔들어놓고 갑자기 뜬금 없이 이제는 다시 잘 해보자고 하다니. 대체 중국은 왜 저렇게 우악스럽고 종잡을 수 없이 나오는 것일까?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중국이라는 미숙해 보이는 대국에 갖고 있던 껄끄러웠던 감정은 이제 점점 선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중국 내부의 움직임도 사람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는 데 거들고 있다. 이번 제19차 당대회에서 중국 최고지도자인 시진핑이 덩샤오핑 시대 이래로 내려오던 집단지도체제를 끝내고 일인지도체제를 수립한 것으로 보이자, 폭주하는 대국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 것인지 갑론을박이 활발하다. 중국은 어디로 향하는가? 중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당대회
우선 당대회에서 공산당이 천명한 메시지를 살펴보자. 많은 관측자가 ‘시진핑 신시대 사상’이라는 상당히 모호한 슬로건을 당장에 삽입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내용은 모호하지만, ‘신시대’라는 이름에서 중국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대외정책에서, 경제정책에서, 또 정치 구도에서 전방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상식적으로 보자면 굳이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동기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집단지도체제에서 일인지도체제의 전환을 살펴보자. 그동안 공산당은 집단지도체제로 큰 잠재적 위험을 피해가면서 중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해왔다.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이 합의 아래 국정을 결정하는 시스템에서는 특정 권력의 돌출을 견제하고 국정을 예측 가능한 범주에서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만들어내서 위험을 자초하는 걸까?
중국이 세계에서 책임을 더 떠맡겠다고 나서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동안 미국 중심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덕을 누구보다 많이 본 국가는 중국이었는데 말이다. 왜 더 안정되고 발전된 중국으로 가는 길이 어느 정도 보이는 상황에서 왜 불확실한 길을 택하는 걸까? 이 모든 것이 시진핑의 권력욕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머지 중국공산당원들은 대체 왜 저런 비합리적인 발상에 동조하는 걸까? 그래서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저들의 행동이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내재적 접근: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그래서 관점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입장에서 중국을 바라봄과 동시에,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이 어떤 상황 인식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진핑이 추진하는 정책이 옳은지 그른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 접근법은 그들의 행동에서 나름의 동기와 합리성, 논리를 찾아내 행동의 함의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함이다. 그래야만 중국의 전략과 돌출행동에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일찍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표적 중국인인 손자가 한 말이 있지 않은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시진핑은 집권하고 나서 얼마 안 된 2014년에 ‘신창타이'(新常態: 직역하면 ‘새로운 정상상태’)라는 말을 처음으로 주창했다.[footnote]2015년 보아오포럼 연차총회 개막식 기조연설에서 시진핑은 “신창타이에 들어선 중국 경제는 성장률에만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경제의 구조조정을 중요한 위치에 놓고 개혁개발을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조: 중앙일보)[/footnote] 나는 이 슬로건에 문제를 풀어나갈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정상)상태’를 뜻하는 중국어인 신창타이는 말 그대로 이전 상태와는 다른 상태에 진입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한 동안 신창타이라는 말은 중국의 정책 변화를 설명하는 말로 언론에 자주 인용됐다.
그렇지만 이렇게만 진단하는 것은 아쉽다. 새로운 상태가 무엇인지에 관한 관심은 많았지만, 그 뿌리에 해당하는 ‘원 상태’에 관한 논의는 찾기 어려웠다. 새로운 상태를 알기 위해서는 원래 상태를 알아야만 한다.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를 어떤 식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나아갈 길도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찾고자 한다면, 시진핑만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는 현대 중국이 ‘새롭게 출발’한 시점으로 시계를 돌려볼 필요가 있다.
‘현대 중국’의 출발점
현대 중국하면 사람들은 첫째로 13억의 인구 대국,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라는 규모를 떠올릴 것이다.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고속철도망, 지하철,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거대도시들, 대륙을 휩쓴 전자상거래의 혁명처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경제성장은 현대 중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한편, 그 성장의 부작용들도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초상이기도 하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거대한 시가지를 떠올린 사람들은 곧바로 다음의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시도때도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짝퉁 ‘메이드 인 차이나’, 화학물질로 오염된 강과 숨도 쉬기 힘든 스모그 도시, 엄청난 인구를 받쳐주지 못하는 부족한 도시 인프라들. 그 다음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와 정치적 억압, 책과 TV 광고에서 인터넷까지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검열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현대 중국을 상징하는 이 모든 변화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생기던 1949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중국의 경제성장에 ‘급속한’, ‘유례없는’, ‘초고속’ 등과 같은 수식어가 으레 붙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이런 모든 상징들의 상당수는 비교적 최근의 현상들이다. 요컨대 20세기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륙을 덮는 고속철도망도 없었고, 인터넷 검열도 없었으며, 도시를 뒤엎는 미세먼지의 바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2의 경제대국은 커녕 국민 대다수가 절대 빈곤선 근처에서 살고 있던 것이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이 ‘신중국’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가 중국에서 일으켰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우리의 시야에 확실히 들어오는 것은 높이 솟아있는 마천루 숲과 햇살을 가리는 매캐한 스모그이기 때문이다.
작은 거인이 일어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중국이 시작된 날은 1978년 12월 22일이어야 한다. 마오쩌둥은 죽은 지 2년이 지나 있었고, 마침내 마오 이후 누가 권력을 이어받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권력투쟁이 마무리 된 날이었다.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은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었다. 사실 덩샤오핑은 마오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아니었다. 여기서 마오 시대의 중국과 어느 정도의 단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실패를 마지못해 인정했지만 그러면서도 문화대혁명이 추구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목표들을 중국이 상실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혁명의 타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상대적으로 상대적으로 젊었고, 마오 자신의 고향인 후난성의 서기를 맡아 눈에 들었던 화궈펑을 후계자로 점찍었다.
화궈펑에 따르면 마오가 죽기 전에 그에게 유언으로 “당신이 맡아주니 내가 안심하오”라는 글자를 적어주었다고 했다. 처음에 화궈펑은 당의 쟁쟁한 정치인들과 연합하였다. 이 때는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주역들인 사인방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없어졌을 때 이들의 권력은 아무것도 아님이 곧바로 드러났다. 사인방은 빠르게 숙청되었고, 화궈펑은 권좌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화궈펑은 혁명 경험도 없었고, 정치적 역량도 일천했다. 한마디로 그는 신참이었다. 대장정,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풍파를 거치고 살아남은 쟁쟁한 혁명 원로들 사이에서 그가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당의 고위 원로들은 마오쩌둥에 의해 두 번째로 숙청당해 재야에 내려가 있던 덩샤오핑을 선택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이 몰고 온 광풍에 참여하라는 유혹을 이겨내고, 차라리 박해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또한, 국공내전 때의 경험으로 군부 전반에 걸쳐 인망을 쌓아 놓았으며, 마오에 의해 잠시 복권되었을 때 뛰어난 행정능력을 입증해보이기도 했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할퀴고 간 기진맥진한 중국을 소생시킬 적임자로 보였고, 이 예상은 머지 않아 사실로 드러난다.
마오 시대의 종말
2년 간의 권력투쟁기에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결정한 것과 지시한 것은 모두 옳다”(이른바 ‘양개범시’; ‘무릇 두 가지는 무조건 옳다’는 뜻)를 정치적 표어로 들고 나왔다. 마오쩌둥은 확실히 당의 통치 정당성의 근간이긴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통치 정당성을 갉아먹었다는 점에서 마오주의를 계속 주창하는 건 그리 현명한 전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남기고 간 권위 외에 화궈펑이 기댈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다.
덩샤오핑은 다른 표어를 들고 나왔다. 역시 마오쩌둥이 남긴 말인 “실사구시”가 덩샤오핑의 표어였다. 마오쩌둥은 대체로 옳지만 그의 말 중에 현실에 부합하고 실리를 안겨줄 수 있는 것만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함의가 담겨 있었다. 이는 마오쩌둥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정책과 비전을 펼쳐나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대기근과 문화대혁명, 인구 폭증과 식량부족, 가난으로 점철된 중국에 염증을 느끼던 당원들은 개혁개방을 암시하는 덩샤오핑의 실사구시에 열광했다. 그렇게 대권은 덩샤오핑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그가 중국을 통치하게 됨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자리가 바로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였다. 흔히 ’78년 3중전회’로 불리우는 역사적인 행사였다. 이 회의는 12월 22일에 폐막했고, 덩샤오핑과 이제 그의 가장 큰 라이벌이 될 천윈이 함께 개혁개방을 선포하게 되며 중국은 자본주의로 향하는 발걸음을 띄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은 이 날 시작되었다.
위기에 빠진 공산당
중국 지도부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재건이었다. 1958년에 대약진운동이 시작된 이래로 20년의 기간 동안 중국은 사실상 정체해 있었고, 서방 세계의 가파른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체만 했으면 다행이었다. 3천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대약진 운동과 당조직과 중국의 인적자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문화대혁명이 겹쳐 중국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동안 당의 구심점이 되어주던 원로들인 저우언라이, 주더도 모두 죽어 당은 정치적으로도 위기를 맞이했다.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철도는 제 시간에 운행하지 못했고 산업의 근간이라는 제철산업은 노후했고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1950년대 소련 시절에 도입한 기술로 만들어진 공장은 서방 기준에 비하면 놀랍도록 낙후한 상태였는데, 이마저도 운영할 능력이 안 되어 중국 기술인력들의 임시변통으로 간신히 가동하고 있던 것이 현실이었다.
한편, 사람들은 점차 공산당 통치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을 믿고 공산당의 비전을 따라왔다. 그러나 나라는 헝클어졌고 삶은 파괴되었으며 무엇보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움직임은 1976년 저우언라이가 죽었을 때 그 장례식에서 처음 엿보였다. 마오쩌둥에게 의심을 사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장례식을 당국은 축소해서 진행하고자 했으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저우를 추모하며 정권에 항의를 시작한 것이었다.
1979년에는 베이징 시단 거리에 ‘민주의 벽’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거리의 벽에 대자보를 붙여 당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앞으로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서 물었다. 덩샤오핑은 이런 움직임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 때 화궈펑과의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의 벽이 자신의 권위마저도 위협할 기미를 보이자 이를 바로 철거하고 관련자들을 투옥하기로 했다.
혁명에 끌려다니지 말고 혁명을 이끌라
비록 이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덩샤오핑과 당지도부는 이런 꿈틀거림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잘 알았다. 당은 인민의 의지 하에 통치한다고 외치고 있었으나 그 인민의 의지가 당을 떠나고 있던 것이다. 다시 인민의 지지를 되찾아오기 위해서는 무언가 빠른 조치가 취해져야만 했다. 당은 인민과 사회계약을 새로이 갱신해야 했던 것이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약속하던 마오쩌둥의 사회계약은 경제적, 사회적 자유로 지지를 사는 덩샤오핑의 사회계약으로 빠르게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이를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세 가지 중요한 유산을 남겨놓았다.
1. 선부론: 먼저 부자가 돼라
덩샤오핑과 그의 측근들은 당 내 보수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개혁 조치들을 도입했다. 농업 생산의 주체를 집단농장에서 개별 농가로 전환하는 포산도호 정책이 시범적으로 시행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선전을 필두로 주하이, 산터우, 샤먼 경제특구가 세워져 화교 자본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제자유화 정책은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야기시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불평등은 공산주의가 증오해 마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덩샤오핑은 “먼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부자가 되면, 그들이 뒤에 남아 있는 자들을 도와줄 것”(선부론)이라며 맞받아쳤다. 중국은 이제 경제발전을 위해 달리는 기관차로 변신해야만 했다.
2. ‘도광양회’를 백년 간 지속하라
덩샤오핑에게는 우호적인 대외환경도 필수적이었다. 특히 선진산업국인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들은 한 때 형제국가였으나 이제 가장 위협적 적성국이 된 소련의 위협에 맞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과 미국은 가장 선진적인 산업 경제를 보유한 나라들로서 중국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자본을 줄 수 있었다.
과거 중국은 소련을 통해서 기술과 산업 경제를 배우고자 하였지만,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낙후되어 있다는 것은 1980년 시점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다. 심지어 출발 조건이 훨씬 열악한 남한마저도 중국보다 훨씬 더 선진적인 제조업 대국으로 거듭나 있었다. 이제 중국의 새로운 스승은 일본의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와 포항제철의 박태준으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서방 국가들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제창한 구호가 ‘도광양회'(韜光養晦)였다. 직역하면 ‘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실력을 기른다’는 뜻인데, ‘자기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기다린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중국이 서방 국가들과 맞서기엔 한참 멀었으니 조용히 힘을 먼저 길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덩샤오핑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집권하자마자 대외 순방부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절대 하지 않던 일이었다. 그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순방하여 화교들을 선동하는 마오주의 혁명방송 송출을 중단하겠다고 공약하고, 베트남의 지역 패권주의를 같이 막아내자고 결의했다. 또한,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여 수교를 이끌어내고 산업협력 체결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대만에 미국이 계속 무기를 공급하는 것 때문에 덩샤오핑은 수교를 마지막까지 망설였으나, 그는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3. 집단지도체제: 견제와 균형의 정치학
개혁개방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국내 정치는 개혁개방의 속도와 종착지에 관해서 10여년에 걸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천윈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수많은 정책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부딛혔다. 1980년대 중국에서는 의도치 않게 보수파와 개혁파가 주도권을 주고 받게 되는데, 역설적으로 이것이 안정적으로 개혁을 지속할 수 있는 토대가 되어주었다. 개혁개방이 과열되었을 무렵에 보수파가 그 열기를 식혀주면서 더 안정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80년대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불안정의 정치였다. 두 계파가 정권을 주고 받을 때마다 긴장은 점차 심해졌다. 마침내 80년대 말에 학생시위가 점차 격화되자 보수파는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지목한 후야오방을 실각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반작용을 불러왔다. 건강악화로 후야오방이 죽자 학생들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모였고, 1989년의 천안문 사태로 가는 길이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세계인 모두가 천안문을 주목하고 있는 와중에 당은 이 ‘철부지 학생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놓고 분열되었다. 후야오방 다음의 후계자로 지목된 자오쯔양은 대화로 학생들을 해산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덩샤오핑의 최측근으로 농업개혁을 이끌었던 완리도 마찬가지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당내 보수파들은 오직 피를 흘리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차세대 지도자로 내세운 리펑이 필두로 나섰다. 덩샤오핑도 이제 강경진압만이 답이라는 쪽으로 기울었고, 그 뒤의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이다. 모두가 중국을 지켜보는 가운데 인민해방군이 바로 그 인민을 쏜 것이다.
천안문 사태는 당시 중국 최고위 정치가 갖고 있던 구조적 결함들을 선명하게 드러내주었다. 일단 당이 분열하면 대외적 모양새도 굉장히 안 좋아질뿐 아니라 실질적 지도력도 확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대의 광기를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몰고 온 폭풍 속에서 그는 좌천되어 공장 노동에 종사해야 했고, 아들은 건물에서 떨어져 평생 불구가 되어야만 했다.
덩샤오핑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폭주했을 때 나타날 참혹한 결과를 우려했다. 그 결과 중국에서는 독특한 집단지도체제가 거의 제도화된 관행으로 자리잡는다.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간략히 설명하면 이렇다. 우선 7인으로 이루어진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국가를 통치한다. 상무위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는 최대한으로 자율성을 누리지만, 국가의 중요한 결정은 상무위원회에서 반드시 합의를 거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런 제도 아래에서는 천안문 사태에서 당이 직면한 분열도, 마오쩌둥 시대에 벌어진 폭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칠상팔하, 7은 올리고 8은 내려라
덩샤오핑은 마지막으로 후계 구도를 설계해야 했다. ‘젊은 피’ 화궈펑이 물러난 과정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듯이 이 시대의 정치는 사실 근본적으로는 원로정치였다. 최소한 대장정 때부터 당과 함께 시작한 70대, 80대의 정치인들이 여전히 당을 맡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지도부의 고령화를 방지하고, 세대교체할 필요성을 느꼈고, 자신의 혁명동지들에게 모두 언젠가 은퇴할 준비를 해야한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순조로운 은퇴를 위해 설치된 것이 중앙고문위원회였다. 그러나 80년대 말에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후계구도를 준비할 때 이 중앙고문위원회는 계속 후속 세대를 간섭하는 상왕정치의 기구의 역할만을 충실히 했다. 중앙고문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덩샤오핑 때문이었다.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이 은퇴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원로들이 은퇴한다는 것은 그가 절대적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그래서 1992년 남순강화를 통해 세 번째 후계자로 지목한 장쩌민이 개혁개방 말고 다른 선택을 할 여지를 없애버리고, 마침내 정치에서 은퇴한다. 원로정치의 청산과 안정적 세대교체를 위한 덩샤오핑의 의지는 장쩌민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장쩌민은 2002년 16차 당 대회에서 67세까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수 있지만, 68세 이상은 은퇴해야 한다는 이른바 ‘칠상팔하(七上八下)의 불문율을 만들고, 당시(당 대회 기준) 68세였던 리루이환 정국정치협상회의 주석의 상무위원 연임을 막는다. 이 고위 인사원칙의 불문율은 이후 17차, 18차, 그리고 ‘시진핑의 1인지도체제’를 천명한 지난 19차 당 대회(’17. 10. 18~24)까지 이어진다.
격대지정의 20년 대계
그리고 덩샤오핑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헌법과 자유선거, 삼권분립으로 견제를 받는 시스템이 아닌 중국공산당에서 권력의 독주를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더 많은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원로들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함과 동시에 정반대 방식으로 현직 지도자의 권력을 제약했다.
원로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지금의 현직 지도자(이 경우 장쩌민)에게 막대한 권한을 실어주었지만, 막상 이 현직 지도자가 은퇴하고 나서 새로운 원로 정치를 할 가능성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이를 우려하여 차기 장쩌민 다음의 차차기 지도자까지도 지명하면서 격대지정의 관행을 세웠다. 그가 바로 후진타오이다. 그래서 지금의 시진핑은 사실 장쩌민이 결정권을 행사한 셈이 된다.
요약하면, 덩샤오핑의 유산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경제발전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선부론이다. 경제성장은 단순한 수단을 넘어서 중국공산당의 생존 그 자체와 결부된 것이다. 둘째로 대외 관계의 잠재적 위험을 제거하고 서방 선진국들과 협력하여 자본과 기술을 최대한 받아내려고 했던 ‘도광양회’다. 덩샤오핑이 보기엔 중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거역할 능력도 안 되었고,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으며, 치뤄야 하는 대가도 너무나 막대했다. 셋째로 문화대혁명의 폭주와 천안문의 분열을 모두 피해갈 수 있도록, 권력의 집중과 견제가 정교하게 균형을 이루게끔 해준 집단지도체제 정립이다.
진정한 ‘대약진’과 중국의 귀환
선부론, 도광양회, 집단지도체제의 삼두마차는 이후 장쩌민 시대에도 놀랍도록 잘 작동했다. 천안문 사태 때는 미국과의 관계가 잠시 악화되긴 했었지만, 장쩌민은 어떻게든 이를 다시 살려내었다. 사실 바로 이것 때문에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최고지도자로 낙점했다. 천안문에서 피를 묻힌 리펑 같은 지도자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장쩌민은 달랐다.
’96년엔 리덩후이 총통이 본격적으로 대만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역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으나 미국의 항공모함 파견에 중국이 굴복해 없던 일로 돌아갔다. 그러니 대 중국 투자가 마를 일은 사실상 없었다. 화교자본을 시작으로 미국, 일본, 한국, 독일을 비롯한 유럽연합의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역 당조직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더 많은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움직였다. 지방정부는 이제 하나의 거대한 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한가로운 어촌에서 세계 제조업의 중심으로 떠오른 선전은 80년대 중국 신화의 상징이었다. 이제 미천했던 중국이 비상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장쩌민 시대 새로이 경제 특구로 지정된 상하이는 90년대 중국 신화의 상징이 되었다. 상하이는 최초의 개항지 중 하나로 공산주의 시대 이전 근대 중국을 상징했다. 상하이의 부활은 이제 중국이 머나먼 길을 돌아와 다시 그 시대로 합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장쩌민 시대의 성과
사람이 무한히 남아도는 농촌은 도시로 인력을 계속 수출했다. 그리고 세계 경제가 순항을 거듭하고 중국에 세계의 생산공장들이 끝없이 아웃소싱되는 한 도시는 인력을 무한히 빨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다. 도시 범죄가 늘었고 인프라는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도시 인구를 감당하기 힘들어 했다.
도시 경제에 익숙해진 중국인들은 시민이 되고자 했고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갈망했으며, 새로 진입한 중산층들은 이제 더 안전한 삶을 원했다. 집단지도체제는 당에 가해지는 이런 사회적 압력에 대해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이 아직 죽기 전인 장쩌민 집권 1기는 보수파와 개혁파의 균형이 맞았다. 천안문의 학살자 리펑은 2인자로서 총리를 맡았고 대표적인 개혁파 차오스는 3인자로서 전국인민대표회의 의장을 맡았다. 중도파인 장쩌민은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었다.
장쩌민 집권 2기는 잘 조율된 집단지도체제의 이상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차오스는 덩샤오핑이 마련한 임기 규정에 걸려 은퇴할 수밖에 없었고, 리펑이 그 자리로 옮겨갔다. 새로이 총리에 오른 사람은 상하이 시절부터 장쩌민의 심복으로 활약한 주룽지였다. 주룽지는 중국 경제의 컨트롤 타워를 맡아서 역사상 최대규모의 국영기업 구조조정을 해내면서도 사회안정을 확보했다.
아시아 금융위기로 훨씬 더 선진적 산업국인 한국이 비틀거리는 동안 중국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내기도 했다. 물론 당이 언제나 웃는 얼굴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 조직은 언제나 억압을 멈추지 않았다. 중국인의 사회 혼란을 파고든 신흥종교 파룬궁을 탄압할 때 당은 야차의 얼굴을 했다.
중국 언론인들은 개혁개방 후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애매한 자유에 대해서 “족쇄를 차고 춤을 춘다”고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개혁파와 보수파가 공존하는 집단지도체제 하에서 공산당 또한 해빙과 억압 사이에서 종잡을 수 없는 춤을 춰야만 했다.
덩샤오핑의 선부론은 그렇게 성과를 숫자로 입증해보였다. 78년 3중전회를 시작할 때 GDP는 1,50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덩샤오핑이 죽은 다음 해인 1998년 중국의 GDP는 1조 달러를 최초로 넘겼다. 덩샤오핑이 죽은 지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GDP는 11조 달러가 넘는다.
성공의 이면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 덩샤오핑 체제는 그대로 계속 갈 것으로 보였다. 마오쩌둥 체제는 마오쩌둥 스스로의 실정으로 자멸할 수밖에 없던 체제였다. 반면 덩샤오핑 체제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사람들이 원하던 것을 만족시켜주었고, 공산당도 원하는 권력과 부를 챙길 수 있었다.
시진핑 시대를 알기 위해 덩샤오핑 시대를 살펴보니 다시 중국이라는 미궁으로 들어선 느낌이다. 대체 왜 이 체제는 신창타이로 접어들어야만 했던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거대한 성공은 위기의 씨앗도 뿌린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제 장쩌민의 시대를 보내고 후진타오 시대를 살펴보기로 하자.
⇒ 이 글은 후진타오의 기적과 혼란(2003-2012)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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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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