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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제발 철학과 원칙부터 바로 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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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재난지원금의 선별/보편지급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을 때, 해당 지원금의 성격이 과연 경제정책인지, 복지의 일환인지, 그렇지 않다면 재난대책의 일환인지 정부에서 명확한 원칙을 먼저 세운 후 집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실제로 해당 자금의 성격이 어떠한지에 따라 재정건전성 문제를 감수하고서라도 보편지급을 시행해야 할 지, 아니면 좌고우면(앞뒤 재고 망설임)하지 않고 차등지급을 시행해야 할 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논쟁’,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 

문제는 이 선별/보편지급 논쟁에서 경제정책의 일종인 일반적인 재정정책으로써의 긴급재난지원금의 성격은 배제되고, 단순히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의 관점 차이에서만 논쟁이 발생했다는 점이며, 그 과정에서 기본소득 개념이 잘못 개입됐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에서의 기본소득 논쟁은 발생한 것 자체에 의미는 있겠으나, 사실상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는 뜻이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4″]#하나:[/dropcap] 먼저 긴급재난지원금이 복지정책이라고 간주해 보자. 이 경우 사실상 선별지급이 더 강한 근거를 지닌다. 복지는 소득재분배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대기업의 총수나 정규직의 경우 자영업자나 일용직에 비해 코로나 판데믹으로 얻는 경제적 피해의 크기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록 작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을 복지의 일환으로 규정하였을 경우 소득재분배 기능의 유지와 효율적인 재원 활용을 위해 선별지급이 온당하다 할 수 있다. 이 경우 기본소득과의 연관은 사라진다. 명시적 선별성을 띠기 때문이다.

[dropcap font=”arial” fontsize=”24″]#둘:[/dropcap]  한편 긴급재난지원금이 재난대책이라고 간주해 보자. 이 경우 보편지급이 온당하다. 이는 대기업의 총수나 정규직이나 자영업자가 일용직이나 판데믹으로 인한 개인의 자유가 침탈당함으로써 각자의 행복추구권이 상실되며 또한 별도의 재산피해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발생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재난대책으로써의 긴급재난금에는 소득재분배 성격은 배제된다. 이는 말 그대로 일회성 재난에 대한 구제의 성격을 지니므로 소득재분배의 기능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복지
긴급재난지원금은 복지정책인가? 재난재책인가?

기본소득 논쟁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이라는 것은 이 둘 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재산과 노동의 유무에 관련없이 지급되어야 하므로 본질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으나, 이 경우 소득재분배 기능이 사라지므로 복지정책으로써의 기능이 희석된다. 반대로 재난대책이라고 생각을 하기에는 기본소득은 미래 사람의 일자리를 컴퓨터와 로봇이 대체하는 특정한 경제적 상황을 상정하고 추진되는 것이므로 기본소득은 재난대책이 될 수 없다.

즉, 긴급재난지원금과 기본소득은 ‘금전을 다수의 사람에게 직접 지급한다’ 라는 형태적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그 철학과 원칙상 서로 아무 관련 없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우리는 긴급재난지원금으로부터 발로된 기본소득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는 이 관련 없는 개념을 단지 형태적 유사성을 활용하여 굳이 연결시켜 이슈화한 언론과 정치권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잘잘못을 논하기에는 우리가 갈 길이 너무 멀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원칙을 바로 세워야 한다.

근본적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것은, 복지정책도 재난대책도 아닌 결국 경기 변동성을 일시적으로 축소하기 위한 단기적 재정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판데믹은 사람과 물산의 이동 및 교류를 극도로 제한함으로써 경제 자체를 위축시키는데, 일정 부분 방역망을 열어 주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전체 경제의 위축도를 낮춰 실업과 자영업자 폐업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긴급재난지원금의 목적인 것이다.

기본소득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차 언급하였듯이 근로장려금 수준의 금전을 쥐어 주고 나서 기본소득이라 홍보하는 것은 그저 침소봉대에 불과하다. 기본소득의 정의는 아직까지 논쟁 중이라고 하지만, 그 출발점 자체가 결국 ‘다수의 인류가 기계에 밀려 직업을 잃은 상황에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점을 우리는 명백하게 상기해야만 한다. 즉 기본소득의 출발점을 확실하게 인식해야만 건전한 토론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관련 추천글: 강정수, 알고리즘 사회,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편집자).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여성 노예의 노동에 기반을 둔 '극소수의 민주주의'였다. 알고리즘과 로봇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할까? 아니면 알고리즘과 로봇으로 인간의 노동은 더 소외되고, 부의 양극화를 고도화하며,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한 '극소수의 민주주의'를 재현할까? 기본소득 논의는 이런 시대적 변혁을 그 배경으로 한다. (편집자, 사진: Hiram S. Powers, 그리스 노예, 1869년 작, 브룩클린박물관 / 보스턴다이나믹스의 신세대 로봇 '펫맨')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여성 노예의 노동에 기반을 둔 ‘극소수의 민주주의’였다. 알고리즘과 로봇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할까? 아니면 알고리즘과 로봇으로 인간의 노동은 더 소외되고, 부의 양극화를 고도화하며,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한 ‘극소수’의 민주주의를 재현할까? 기본소득 논의는 이런 시대적 대변혁을 그 배경으로 한다. (편집자, 사진: Hiram S. Powers, 그리스 노예, 1869년 작, 브룩클린박물관 / 보스턴다이나믹스의 신세대 로봇 ‘펫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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