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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12. 맥도날드 인문학

맥도날드 카운터 업무는 주로 나이 어린 직원이 도맡아 한다. 나는 물류하차 업무를 하고 있기에 카운터에 설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의 목소리는 매장 여기저기에 잘 울려 퍼진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빅맥 세트 하나 주문하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운터에서 이루어지는 흔한 대화다.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카운터 직원뿐 아니라 거의 모든 매니저가 손님과 햄버거에 함께 존대한다. “빅맥 세트 나왔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맥도날드뿐 아니라 그 어떤 매장에서든 사람과 물건을 함께 높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아메리카노’도, ‘도넛’도, 매장에서 취급하는 그 무엇도 존대의 대상이 된다.

아르바이트생의 문법은 분명히 잘못이다. 나는 국어학 전공 수업에서 그 문법 오류를 이미 배웠다. 교수는 아르바이트할 때 절대 물건을 높이는 실수를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 ‘무식한’ 아르바이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모두 웃었다.

"햄버거 나오셨습니다."
“햄버거 나오셨습니다.”

‘을’의 공간에서 바라본 풍경 

그런데 책을 덮고 강의실 밖으로 나와 보니, 그 문법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었다. 카운터를 마주하며 손님은 ‘갑’이 되고 아르바이트생은 ‘을’이 된다.

나는 맥도날드에서 노동하기 이전까지 대개 갑의 공간에 존재하면서 어떤 냉소만을 보내 왔다. 강의실의 문법을 적용하며 아르바이트생의 무식을 탓했고, 혹은 어떤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을의 공간에서 바라본 풍경은 많이 달랐다.

을의 공간은 사람을 무척 작게 만들었다. 어떤 말썽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고, 그에 따라 손님에게 최상급 존대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나 역시 언젠가부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강의실의 문법 vs. 거리의 문법 

그 잘못된 문법은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게 갑에게 가서 닿았다. 그러고 보면 카운터 위에서 갑의 소유가 된 햄버거 역시,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갑과 을 사이에 끼어든 ‘갑의 소유물’은 어떻게든 을보다는 높은 자리를 점유했다. 그래서 “빅맥 세트 나오셨습니다.” 하고 외치며 갑의 소유물마저 높여 주고 나는 그 아래로 자진해서 내려가야 했다.

‘갑 ≧ 갑의 소유물 > 을’ 

이런 구도가 마련되는 것이다. 카운터 위의 햄버거를 높이는 문법의 오류는 역설적으로 최상급의 존대어를 만들어 냈다. 강의실의 문법과 거리의 문법에는 이처럼 차이가 있었다.

시간강사 강의실 강의 대학

최근 우리 사회는 ‘갑질’ 논란으로 뜨거웠다. ‘땅콩 회항’이나 백화점 모녀 사건이 모두 갑질이라는 신조어로 요약되었다. 그런데 맥도날드의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 역시 갑질의 주체였음을 알았다. 그 이전까지 나는 갑의 공간에서 을의 입장이 되어 사유해 본 바가 없었다. 그들에게 잘못된 문법을 강요한 것은 누구인지, 이 시대는 대체 어떤 관념에 포위되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안에 내재한 ‘갑’을 발견하게 해 준 공간은, 강의실이 아닌 맥도날드였다.

‘갑의 위치’에 선 햄버거와 커피

강의실에서 나는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하고 칠판에 썼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이 문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 저거 알아!’ 하는 표정으로 여러 학생이 웃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손을 든 학생이 “아메리카노를 높이는 잘못된 표현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고 “또 다른 해석은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어떤 학생이 장난 가득한 얼굴로 손을 들고는 “스타벅스의 커피가 아르바이트생 시급보다 비싸니까 당연히 존대해야 합니다.”하고 말했다. 이미 최저 시급의 풍자 소재로 인터넷에 흔하게 등장하는 해석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네 그렇죠.” 하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제치고 '갑의 위치'에 올라선 커피
인간을 제치고 ‘갑의 위치’에 올라선 커피

더는 새로운 해석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올바른 높임법에 대해, 그러니까 왜 아메리카노가 ‘주체’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강의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메리카노가 어떻게 인간을 제치고 갑의 위치에 서게 되는지, 그리고 우리를 포위한 갑질이 얼마나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했다.

특히 단 한 번이라도 잘못된 문법에 냉소를 보낸 경험이 있거나, 어떤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 ‘땅콩’과 다를 바 없는 갑질의 주체일 것이라 덧붙였다.

존재의 좌표 인식의 좌표 

나는 ‘강사’이고, 그래서 교재의 문법을 충실히 가르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강의실의 문법이 거리에서도 의미를 가질 수 있게, 그것이 강의실에서 머물지 않고 바깥에서 더욱 넓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존대하는 노동자를 탓하는 대신, 어째서 그러한 시대의 문법이 구축되었는가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돌아보고 싶다. 저마다 내재한 갑의 실체와 마주하도록 돕고, 누군가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을 성찰할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싶다.

갑질은 대기업, 재벌, 점주 등 어떤 특별한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흔히 인식되기 쉽지만, 우리는 여러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하루에도 몇 번씩 갑과 을의 공간을 넘나든다. 그 움직임을 인식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좌표를 명확히 하지 못할 때 우리는 스스로가 혐오해 마지않았던, 갑이 되기 쉽다.

나침반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물론 ‘갑’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성찰하고, 어디에서든 건강한 갑으로 사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라는 거리의 문법으로도 자연스럽게 굳어질 수 있어야 한다.

고된 생계의 공간 하지만 즐거운 성찰의 공간 

지금 나에게 맥도날드는 하나의 생계 수단이자, 무엇보다도 성찰의 공간이다. 처음에는 강의/연구와 육체노동을 병행할 수 있을까 싶어 망설이기도 했고, 실제로 많이 힘들었지만, 지금은 내 삶의 가장 좋은 선택 중 하나로 남았다. 그저 건강보험 보장을 위한 노동으로 시작한 것치고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물론 일은 고되고, 얼마 전에는 물류 차량에서 빵 더미를 내리다가 다쳐 며칠간 입원하기도 했다. 매장에서 학생들과 마주치는 일 역시 여전히 두렵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계단 길목에 앉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물류 엘리베이터(덤웨이터)를 타고 몰래 내려간 일도 있다. 노동이 부끄럽다기보다는, 학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의 삶과 계속 즐겁게 마주하려 한다. 언젠가 한 번 밝혔듯,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가든 몸이 허락하는 만큼의 육체노동을 반드시 해 나갈 것이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렵게 배운 삶의 태도를 곧 잃어버릴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 삶을 자랑스럽게, 누구나 성장을 위해 겪어야 할 ‘아픔’으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자리에 초대할 수 있도록 

젊어서 아파봐야 성장할 수 있다는 닳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 대신 내가 뒤늦게나마 배운 연구실과 거리의 인문학을 함께 전하고 싶다.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 학생들이 맥도날드 인문학보다 더욱 나은, 저마다의 인문학을 마련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갑의 자리에 섰을 때 단순히 을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넘어 그를 자신에게 초대할 수 있는, 그렇게 손을 내밀어 다정다감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생계를 위해, 내일도 다시 맥도날드에 출근한다.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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