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3. 등록금 그리고 장학금…?

1학기 개강일이 가까워져 오자 조교실장이 장학금 회의를 소집했다. 대학원 과정생 조교들이 모두 모였다. 모두 합해 10명쯤 되었다. 조교실장은 장학금 시스템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입학 전 술자리에서 “조교 생활을 하면 등록금이 모두 면제, 연구비를 받으면 용돈까지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만 간단히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조교실장은 ‘이번 학기에 적어도 300만 원씩은 받을 수 있겠다’고 했다.

나는 내색하지 못했지만 뭔가 몸의 피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부모님께 생활비와 등록금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장담해 놓은 뒤였다. 이번 학기 등록금은 450인데 조교 활동으로 보전되는 비용은 300만 원, 그러면 150만 원의 현금을 당장 마련해야 하는 것이었다.

조교를 하면 등록금에 용돈까지 받는다면서…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교수님이 8분인데 대학원 조교는 10명이다. 그러니까 8분은 각 1명의 연구조교를 두고 350만 원 정도의 장학금을 각각 줄 수 있는데, 그걸 모두 모아 2,800만 원을 만들고 10명에게 나누면 280만 원.

그런데 조교실장에게는 등록금만큼의 장학금을 몰아주기 때문에 각 조교의 몫은 그렇게 할당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과에서 개설하는 대형강의가 3개 있었는데, 각 조교비가 80만원씩 240만 원이 나오는 것을 다시 10으로 나누면 각자의 몫은 조금씩 늘어난다. 이 대형강의의 조교는 당연히 신입생인 우리의 몫이었다.

조교 근무는 3월 초부터 8월 말까지라고 했으니까 6개월을 근무하고 300만 원, 한 달로 치면 5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을 받게 된다. 이 돈이 내게 할당된 장학금이자 생활비이자 모든 것이었던 셈이다. 수업이 있는 주 9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침 8시 30분부터 저녁 5시까지 사무실에서 조교근무를 서야 했다.

당연히 최저 시급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교근무를 하지 않으면 이곳 생활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조언인지 협박인지, 그런 것에 이끌려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부모님께는 말씀드릴 수 없었다

나는 회의를 마친 후 룸메이트인 L에게 교수님의 연구를 보조해 드리고 받을 수 있다던 연구 인건비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기존 인건비는 받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고, 신규로 연구 프로젝트를 따내면 순번에 따라 차례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L에게 그도 연구비를 받고 있는지 물었는데, 그는 아직 순번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3학기 선배였다. 적어도 2년 동안은 나에게도 연구 인건비 차례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1년에 버는 돈 600만 원, 1년에 내야 할 등록금 900만 원. 숨 쉬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300만 원이 비었다. 나는 첫 학기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활비 대출 100만 원까지 추가로 받아 그럭저럭 당장 생계를 해결했다. 부모님께는 교수님의 연구를 도와 드리고 충분한 생활비를 받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외로움
출처: bandita, only the lonely (CC BY-SA)

4. 대학과 패스트푸드점

내가 서른이 되던 해, 2012년 어느 여름날에 어느 교수님의 연구실 이전을 위해 여러 대학원생이 모였다. 보통 연구실에는 5천 권 내외의 책이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노끈으로 포장해 밀차에 쌓아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나른다. 그리고 새로운 연구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예쁘게 책을 꽂아 넣는다. 책을 나르는 데만 한나절이 소요된다.

서른 여름, 연구소 일을 하다 다쳤다

우리는 아침 일찍 모여 점심까지 책을 날랐다. 교수는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에게 연구실 이전을 책임지게 했고, 자신은 나오지 않았다. 점심이 되자 몇 판의 피자가 배달되었고, 우리는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 옆에 쌓아 뒀던 책 무더기가 내게 쏟아졌다. 두꺼운 양장본들이었다. 그 책들이 꽤 높은 높이에서 내 다리를 향해 모두 쏟아졌다.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마침, 내 3학기 위 선배 S가 그 꼴을 보았는데, 그는 책을 급히 치우고 나를 부축했다. 나는 앉은 상태로 바지를 걷었다. 책에 찍힌 다리는 그 부분이 뭉개져 있었는데 빨갛다기보다는 하얀… 선배는 나를 보고 “야, 너 저거 뼈 아냐?!” 라고 외쳤다.

나는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책임 강사를 찾아가 조금 다쳤으니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상처를 본 그는 놀라며 빨리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는데, 나는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집 근처의 정형외과에 가는 길에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이제야 피가 펑펑 나고 있었다.

정형외과엔 사람이 많았다. 양말로 상처 부위의 피를 막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응급실에 가도 되었겠지만, 응급비용을 부담할 자신이 없었다. 의사는 내가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수술준비 해!”라고 하고 나를 수술대에 눕혔다. 아마 10바늘 정도 꿰맸을 것이다. 대략 5만 원 내외의 비용이 나왔던 것 같다.

수술 장면

나는 오른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자취방에 들어갔다.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몰라 침대까지 기어가 간신히 누웠다. 다친 시간은 오후 2시, 집에 들어와 누우니 5시쯤 되었다. 그때까지 나에겐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내가 다친 사실을 그 강사와 선배, 그리고 그 자리의 모두가 대략은 알았을 것이다. 나는 둘에게 문자를 남겼다. “몇 바늘을 꿰맸고 당분간 연구실에 나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마침 방학이어서 강의는 없었다. 둘에게 모두 답장이 왔다. 푹 쉬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S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과자와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적당히 사왔다. 나는 함께 온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세탁기 안의 빨래를 좀 널어줘요.” 하고 부탁했고, 그는 빨래를 널어주고 돌아갔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나는 외로웠다

누군가의 일을 돕다가 크게 다쳤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교수든, 강사든 나에게 전화해 많이 다쳤는지, 몸은 좀 어떤지, 자기 일을 도와주다 그랬으니 정말 유감이라든지, 그러한 말을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모든 치료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했고, 여름 내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내 직장이라면, 내 청춘을 바치고 있는 곳이라면, 나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해주길 바랐다. 군대에서 작업하던 이등병이 다쳐도, 일용직 노동자가 현장에서 다쳐도, 사람을, 노동자를, 이렇게 대접하지는 않는다. 내가 연구실 이전에 기꺼이 응한 것은 물론 그러한 ‘잡일’이 관행이기는 했으나, 제자의 도리라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학과 교수님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 나는 너무나 외로웠다.

대학 vs. 햄버거 가게 

지금 나는 강의를 하며 주 3일은 학교에서 떨어진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한다. 거기에서 ‘딜리’라는 업무를 한다. 아침 일찍 배달되는 냉동, 냉장 음식을 받아 창고에 올리는 일이다. 강의가 없는 날, 아침 7시에 출근해 점심까지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곳이다.

나는 며칠 전 냉동감자를 옮기다가 빗길에 넘어져 팔이 골절됐다. 팔꿈치가 갑자기 야구공 크기만큼 부풀어 올랐다. 그 자리에는 크루 동생들이 있었고 매니저가 있었다. 매니저는 침착하게 나를 근처 병원으로 데려갔고 모든 병원비를 부담해 주었다.

그리고 2주간 스케줄을 빼줄 테니 언제든 낫는 대로 나오라고 웃으며 말해 주었다. 원한다면 산재 신청으로 70%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패스트푸드점의 대처에는 이처럼 노동자를 위한 ‘매뉴얼’이 있었다. 대학의 대처와 비교하며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대학은 시간강사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 대학은 ‘대학원생’과 ‘시간강사’를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대학 행정과 강의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대단히 가혹한 처사다. 4대 보험에조차 관심이 없다. 대부분 시간강사들은 지역가입자로 건강보험료를 온전히 부담해 낸다.

그런데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월 60시간 내외를 일하고 있을 뿐인 내게 건강보험을 포함한 4대 보험을 모두 등록해 주었다. 오히려 나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주는 명목상의 직장은 대학이 아닌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다. 지식을 만드는 대학보다 햄버거를 만드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오히려 나를 노동자로 대접해 준다.

나는 지금 한 달에 12,000원의 건강보험료를 낸다. 30대 남성이 부담하는 액수로는 지나치게 적다. 내 주변을 기준으로 10만 원 내외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퇴직한 부모님 두 분이 피부양으로 묶여 있다. 얼마 전 주민센터에 제출할 서류가 있어 건강보험료 납입액을 12,000원으로 적었더니 어제는 전화가 와서 “0을 하나 빼먹으신 듯하다”고 했다. 그래서 “정확히 적은 것이 맞다”고 하자 “아…” 하고 뭔가 횡설수설하다가 “실례지만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하고 물었다.

“저는 대학교 시간강사이고 건강보험료를 등록해 준 곳은 패스트푸드점입니다.”

“아니, 대학에서 건강보험이 되시잖아요.”

“죄송합니다. 대학에서 안 해줘요.”

“그럴 리가요…”

“정말 그렇습니다.”

시간강사들은 대부분 지역가입자로, 혹은 부모님의 피부양자로 건강보험에 등록되어 있다. 내가 흔치 않은 직장가입자가 된 것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월 60시간 이상 노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증

나를 ‘노동자’로 인정해 준 패스트푸드점 

일주일에 3일, 7시부터 13시까지 패스트푸드점에 나가 냉동감자를 나르고 설거지를 하고 테이블을 닦는다. 아침 6시면 일어나 주섬주섬 아침을 챙겨 먹고 출근길에 나선다. 춥다, 더 자고 싶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온몸을 감싼다. 그래도 매장에 도착해 일하다 보면 그저 감사하다.

최저 시급 5,210원의 육체노동이지만, 적어도 나를 사회적으로 보장, 보호해 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덕분에 나는 건강보험 직장가입자가 되어 월 50만 원이 채 안 되는 월급에서 공제된 남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액수의 건강보험료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내 부모님까지 그 혜택을 받게 되었다.

내 부모님께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들어오세요.”라고 하자 두 분은 무척 반가워했다. 대학에서 이제 건강보험을 해주는 거냐고 물으셔서 나는 “지도교수님이 연구원으로 등록해 주어 그동안 건강보험료가 나올 거예요.”라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도저히 “저,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해요.” 하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한평생 열심히 일해 모든 가족을 피부양자로 든든히 품어준 내 아버지를 ‘부양’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고, 서럽고… 그저 너덜너덜하다.

언젠가 12,000원의 건강보험료를 내며 30대를 보낸 이 시기를 내 후배들에게 웃으며, 술자리 안주 삼아 이야기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 후배들은 적어도 부모님의 든든한 부양자가 되어 웃으며 건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계속) 

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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