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엔 K-POP이란 말이 없었다. 그냥 ‘가요’ 혹은 ‘대중음악’이라고 했다. Korea의 K를 붙일 이유가 없었던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국경 바깥으로 나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카세트테이프와 CD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내 음반시장은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무려 28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된 김건모의 3집 앨범 “잘못된 만남”이 발매된 것도 1995년의 일이다.
이 무렵의 한국 대중음악은 훗날 ‘문화 빅뱅’이라는 자랑스러운 수식어와 함께 호시절(好時節)로 역사에 기록된다.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고, 대중들도 거기에 호의적이었다. 21세기 K-POP의 성공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둬야 할 구간 또한 바로 이 무렵이다.
그때의 한국인들은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뉴스를 접하며 어떤 세상을 살았을까. 1995년 출생한 갓난아기가 대학생이 된 지금, ‘응답하라 1995’라는 기획을 통해 1995년의 대중가요와 그 당시 우리의 삶을 반추해 본다. 1995년 1월은 어떤 세상이었던가.
YS “부동산실명제 실시” … 명의신탁 시대의 종언
1995년 1월 6일. 3년 차에 접어든 문민정부의 수장 김영삼 대통령은 돌연 내외신 연두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1993년 8월 전격적으로 단행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금융실명제의 ‘후속작’을 발표했다. 또 하나의 파격(破格), 부동산실명제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우리는 물가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정부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협력을 해 주어야 됩니다.
특히 언론인 여러분이 자꾸 오른다, 오른다 하면 올라갑니다. 부동산도 자꾸 오를 것이다, 이렇게 보도를 하는데요, 부동산이 절대 오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동산의 실명제를 하도록 지시를 했습니다. 부동산실명제는 곧 단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동산의 가격이 올라갈 이유는 없어질 것입니다.”
출처: 김영삼 대통령의 1995년 연두 기자회견 (1995년 1월 6일)
부동산실명제의 골자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명의신탁’의 시대를 종식하는 것이었다. 등기부에 올라있는 이름과 실제 주인이 다른 관행을 바로잡는다는 의도였다. 부동산실명제는 1993년 8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거래 실명제가 도입된 시점에서 이미 예견된 제도이기도 했다. 부동산시장에 대해서만 차명 거래를 허용할 경우 비실명금융자금이 부동산시장에 흘러들어 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을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새해 벽두에 단행했다. 1994년 늦가을 경제부총리 홍재형에게 지시하고 두어 달 비밀 작업을 거쳐 기자회견으로 ‘폭탄선언’을 했던 것이다. 시장은 요동쳤다. 여론은 비등했다. 2015년 현재로써는 이런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어졌을 만큼 당연한 제도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의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실명제로 밝혀진 거대 비리들
우연은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실명제 폭탄’ 두 방은 또 다른 핵폭탄으로 꼬리를 물게 된다. 1995년 하반기 정국을 충격으로 몰아넣는 전두환, 노태우 前 대통령의 수천억 원 비자금 사건은 두 개의 실명제 없이는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씨 또한 실명제 개혁의 뒤안길에서 불명예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만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부정부패’를 척결해 ‘갱제’를 살리겠다고 선언하길 좋아했던 김영삼 대통령. 호기롭게 부동산실명제 카드를 꺼내 든 이 무렵의 그는 훗날의 폭풍을 과연 예상하고 있었을까.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오로지 김영삼 대통령만이 할 수 있었을 개혁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대통령의 경제학’을 저술한 이장규의 말을 들어보자.
“세상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경제정책 과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로 미뤄져 오던 금융실명제가 막상 경제를 가장 모른다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다. (…)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 역시 같은 상황에서 과연 김영삼 대통령처럼 금융실명제 실시의 결단을 내렸을까. 결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경제에 미칠 충격을 비롯해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결국 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대통령의 경제학] (이장규)
때로는 ‘선무당’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존재하는 걸까. 어쩌면 당시의 한국인들이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밀어준 이유도 비슷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복잡한 이론이나 재미없는 원칙론은 지겹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이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와 같은 관점으로 바라보면 김영삼 이후의 대통령이 ‘정권교체’의 김대중이었다는 점도, ‘막말의 아이콘’ 노무현이 그 뒤를 이었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돌발행동을 하길 좋아했던 대통령 김영삼은 당시 한국인들의 구미에 제법 잘 맞는 ‘이벤트 메이커’였던 것이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었던 그때, 한국인들은 뭔가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룰라의 히트곡 제목처럼 ‘비밀은 없어’진 세상
금기가 깨지고 권위가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기 좋아했던 1995년의 사회상은 대중문화 분야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부동산실명제가 발표됐던 1995년 1월, 4주 내내 KBS ‘가요톱텐’ 1위를 차지한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당시 신인이었던 4인조 댄스그룹 룰라의 “비밀은 없어”(박선만 작사/작곡)다. 결국, 이들은 1월 넷째 주, 5주 연속 1위를 수상한 곡에 수여되는 ‘골든컵’을 획득한다.
“우우 정말이야 이제 그대에게 비밀은 없어
우우 알고 있지 사랑한단 말은 안 해도….”
http://www.youtube.com/watch?v=Ath3GNGVE5o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와 독특한 퍼포먼스는 데뷔곡 “100일째 만남”으로 존재감을 획득한 룰라를 인기가수의 반열에 안착시켰다. 룰라의 폭발적인 인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멤버는 여성보컬 김지현이었다. 세 남자와 뇌쇄적인 춤을 추며 “비밀은 없어”라고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이 바로 ‘X세대’ 그 자체였다.
X세대, 비밀의 시대와 이별하다
자신의 감정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사랑과 이별 앞에 솔직한 X세대의 모습은 영화계에서도 관찰이 가능했다. 영화 [싱글즈] (2003), [뜨거운 것이 좋아] (2007) 등으로 유명한 권칠인 감독의 데뷔작 [사랑하기 좋은 날]은 1995년 1월 14일 극장가에서 개봉했다. 시나리오는 2015년의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파격적이다.
공인회계사 형준(최민수)은 스튜어디스 시정(지수원)과 비행기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형준의 오피스텔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허나 오해로 이내 서먹해지고 불과 5개월 뒤 시정은 결혼한다. 그러나 형준과 시정의 과거를 알게 된 신랑의 분노로 인해 시정은 이혼녀가 되고 형준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결국, 18개월 후 형준이 이혼을 함으로써 둘의 사랑은 다시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혼전순결, 이혼, 재혼 등 당시로선 쉽게 언급하기 힘들었던 금기를 산산조각내는 이러한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많은 것이 설명되는 듯하다. 1995년은 바로 그런 시기였다. ‘비밀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암시
다시 음악계로 돌아오자. “이유 같지 않은 이유”(김창환 작사, 천성일 작곡)로 데뷔해 먼저 이별을 선언하는 당당한 여성상을 노래했던 박미경, “슈퍼맨의 비애”(강은경·김현수 작사, 김창권·박선주 작곡)로 데뷔해 신선한 악동 이미지를 구축한 DJ.DOC 또한 비슷한 사회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다시는 나도 돌아가지 않아 너를 위해 더 이상 나 슬퍼지긴 싫어”라고 노래한 박미경과 “변명도 제대로 못 한 우리 아빠 무슨 잘못 하신 게 아닌가 걱정이네”라고 노래한 DJ.DOC의 가사는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시대상을 노래하는 것 같다.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성중심 사회의 붕괴와 함께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ZzrPw9wST2M
http://www.youtube.com/watch?v=I0aQ47zf3-A
표절 – 한국 대중음악의 비밀이자 ‘뇌관’
물론 모든 비밀이 남김없이 까발려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대중음악 분야에 관행처럼 퍼져 있었던 표절 문제는 이 무렵 폭발하기 직전의 수위까지 차올라 있었다.
룰라가 “비밀은 없어”로 1위 퍼레이드를 벌이는 동안 2위권에 머물러 있었던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정답은 김원준의 “짧은 다짐”(김원준 작사/작곡)이다. 이 무렵 귀여운 외모의 하이틴 스타 김원준은 현재의 엑소(EXO)에 견줄만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1994년 10월 발매된 3집 앨범 “너 없는 동안”은 김원준 인기의 정점이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QOvNEe8Wu4g
문제는 후속곡 “짧은 다짐”이다. 이 곡은 자신의 노래를 스스로 작곡하기 시작했던 김원준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짧은 다짐”이 일본 록밴드 WANDS의 ‘孤獨へのTARGET(고독으로의 타깃)’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표절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던 시절
당시는 지금과 달랐다. 표절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법적 기반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몇몇이 있어도 그 의견들을 모아줄 구심점이 없는 채로 논란은 잊히기 일쑤였다. 표절 논란이 있었다 한들 대중들이 WANDS의 원곡과 김원준의 노래를 비교할 수 있는 여건도 전혀 아니었다. 인터넷 이전 시대였을뿐더러 일본음악이 전혀 개방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음악(J-POP)을 듣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일본에 가서 음반을 구매하거나 서울 명동 등지에 판을 벌인 노점에서 소위 ‘빽판’을 구매하는 일밖에는 없었다. 결국, 이 논란은 김원준 측이 “짧은 다짐”의 후렴구를 음반과 다른 멜로디로 교체해 활동함으로써 잦아들게 된다.
진실이 ‘저 너머’로 사라져 버린 셈이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으로써는 두 곡의 유사성이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후렴구 멜로디를 교체해 활동했다는 사실은 김원준 측도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절반쯤 인정했다는 의미다. 두 곡은 비단 멜로디만이 아니라 편곡에서도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한다. 이 곡을 편곡한 것은 현재까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는 작곡가 김형석이다. 표절 논란이 전혀 없는 것으로도 유명한 김형석에게 “짧은 다짐”은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X세대답게, 일본음악을 표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해 나가겠다는 한국 대중음악의 포부는 언제나 “짧은 다짐”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굳게 닫힌 한일 간의 문화 장벽은 어쩌면 그런 나쁜 버릇을 끊지 못하게 만드는 유혹의 매개로 작용했는지 모른다.
박진영, 등장하다 – 목소리부터 등장한 K-POP의 아이콘
1995년 1월의 가요계를 반추하면서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박진영이다. K-POP의 아이콘, 비와 원더걸스와 2PM의 제작자,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한 작곡가, 싸이의 “강남스타일” 이전까지 K-POP을 세계에 알리는 데 가장 많이 공헌한 문화예술가…
이 수많은 수식어를 독식하게 된 박진영의 데뷔가 바로 이 무렵 이뤄졌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데뷔하게 된 정황이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박진영의 첫 시작은 1992년 가수 김수철의 눈에 띄어 ‘박진영과 신세대’로 음반을 낸 것이었다.
별 반응이 없었다. 이후 솔로로 전향해 데뷔곡 “날 떠나지마”(박진영 작사/작곡)를 발표한 1994년에도 천지가 개벽할 이변은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사건은 의외의 곳에서부터 시작됐다. 긴 팔과 긴 다리로 격렬한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지만 놀랍게도 박진영의 시작은 ‘얼굴 없는 가수’였다. 음반만으론 별 반응을 얻지 못했던 ‘날 떠나지마’가 오리온에서 출시한 신제품 껌 ‘센스민트’의 광고에 삽입되며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얼굴 없는 가수, 껌 광고로 인기를 얻다
광고의 주인공은 배우 정우성. 여자친구가 센스민트 포장 위에 남겨놓은 “난 널 좋아하지 않아, 널 사랑해…”라는 메모를 보고 환호하는 정우성의 모습. ‘날 떠나지마’는 바로 이 상큼한 광고에 삽입되며 박진영의 ‘무명 설움’을 종식하는 효자 노릇을 하게 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삽입된 노래의 목소리를 정우성의 것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1995년 1월 첫째 주 ‘가요톱텐’에서 ‘날 떠나지마’의 성적은 13위였다. 이미 대중들이 박진영의 파격적인 무대 매너와 춤 솜씨를 각인하게 된 이후였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1994)와 ‘농구대잔치’의 히트 이후 쿨한 이미지를 획득한 연세대학교 출신이란 것도 박진영의 매력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다.
“졸업하면 일반적인 샐러리맨이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이 대학생 춤꾼이 향후 K-POP이란 이름의 한국 대중음악을 좌지우지하게 되리라는 걸 예감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도 1995년 1월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싹을 움트기 시작한 문화 빅뱅의 초입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