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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이 원래 그렇지 뭐’

습관은 무섭습니다. 빼앗는 일도 자주 하다 보면 당연한 일이 되고, 빼앗기는 일도 자주 당하다 보니 그게 오히려 상식이 됩니다. 그 뒤집힌 상식과 일상이 된 착취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어린 동기’들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고 했습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님들’ 역시 업계의 현실을 비판하는데 인색했다고 말합니다.

뒤늦게 배운 디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창업을 준비하면서 우선은 활동가로 나서야 했습니다.

패션노조는 지난해 말 (주)이상봉의 인턴 착취 논란을 공론화했습니다. 올해 초 알바노조, 청년유니온과 함께 2014년 청년착취 대상 이벤트를 통해 ‘청년 착취’ 문제를 사회적인 의제로 더욱 부각했습니다. 오늘(2015년 1월 22일)은 인권위원회 앞에서 “몸뚱아리 차별”하는 인턴 디자이너 고용 실태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행한 바 있습니다.

YouTube 동영상

2014년 1월 21일 오후, 패션노조 대표이자 디자이너 ‘배트맨D’를 약 1시간에 걸쳐 인터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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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노조 배트맨D는 누구인가? 

– 패션노조 소개 부탁.

정식 노조는 아니고, 개인 활동가로 시작한 형태다. 사회적으로 반향이 생겨나서 현재 거의 30명 가까이 참여했다. 공식적인 조직화 직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기존 노조와는 달리 재기발랄하게 노조원 개개인의 개성과 아이디어로 사회운동하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조직원들은 실명을 쓰지 않고, 수퍼 히어로 컨셉의 닉네임을 쓴다. 내 닉네임이 ‘배트맨D’인 이유도 그래서다.

패션노조 대표 '배트맨D'
패션노조 대표 ‘배트맨D’

– 외부로 실명이나 얼굴을 밝힌 적은 없나.

없다. 항상 선글라스를 낀다.

– 현실적인 피해나 보복을 피하려는 전략인가.

그렇다. 동시에 이목을 끌 수 있는 새롭고 재밌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1타 2피랄까.

– 배트맨D에서 ‘D’는?

이름의 이니셜이다.

– 당신은 디자이너인가? 

나는 예비 창업자다. 이쪽 계통은 취업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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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패션노조를 할 수밖에 없었나 

– 패션노조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나는 원래 다른 업종에 있다가 패션 쪽으로 왔다. 그러니까 좀 늦게 나이 들어서 패션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함께 공부하는 어린 동기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웠다. 자기권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을 빼앗겼는지조차 모르고,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기성세대들은 ‘원래 이 판이 그렇지’라는 이유로 기득권의 이익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착취는 당연하게 생각하더라.

– 패션노조 최초의 퍼포먼스는 뭐였나.

2014년 10월 17일 동대문 DDP에서 한 오프라인 행사다. 샤넬의 쇼를 패러디했다.

– 준비는 온라인으로 했나? 

그렇다. 네이버 카페와 페이스북으로 했다. 소통 공간을 만들었고, 도와줄 수 있는 단체들로 알바노조와 청년유니온에 컨택했다. 초기에는 알바노조가 많이 힘을 실어줬다.

– 알바노조와 청년유니온, 두 단체가 도움을 줬나.

싸움에 대한 인프라, 노하우 측면에서 인적, 물적 자원에 큰 도움을 받았다. 서로 시너지를 냈다고 본다. 우리 세 단체는 청년 착취에 대항하는 공통분모가 있으니까.

– 디자이너 이상봉 측의 사과가 있었는데 미흡하다고 보나.

이상봉 측은 2014년 11월 초에 근로계약서를 바꾸고 이틀 뒤부터 법을 지키고 있다고 언론 플레이를 했다. 패션노조가 이상봉을 “2014 청년착취 대상”에 대상으로 선정한 직후에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니라, 2014년 10월부터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있었고, 단계적으로 바뀌었다고 봐야 한다.

– 그래서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 

그렇다. 그들의 진정성에 의심이 든다. 이상봉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회장이다. 이상봉의 사과문 내용은 한마디로 “패션에 치중하다 보니 경영에 소홀”했다는 식이다.

이상봉입니다.

저로 인해 상처받았을 패션업계의 젊은 청년들 그리고 이상봉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디자이너로서 삶에만 집중하다 보니 회사 경영자로서 본분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모두 저의 부족함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들을 통해서 정말 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자숙하겠습니다. (중략) 다시 한 번 깊은 사과를 드립니다.

2014. 1. 14.

이상봉 올림

패션에 치중하다 보니 경영에 소홀했다? 너무 없어 보이는 핑계다. 우선 이상봉 브랜드는 올해가 런칭 30주년이다. 30년 동안 회사를 경영해온 경영자가 패션에 치중하느라 경영에 충실하지 못했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의 입장문은 우리의 문제 제기를 “일군의 청년들이 제기”한 것이라고 썼다. 이미 사회적인 공론으로 자리 잡은 청년 착취 문제, 열정 페이 문제를 그저 ‘일군’의 청년만의 문제로 바라본 것이다. 청년의 간절한 현실 문제와 그 문제 제기를 공식적으로 폄하한 것으로 판단한다.

내가 보기에 연합회 입장은 요약하면 이렇다. 1) 업계도 힘들다. 2) 조금만 기다려 달라. 3) 좋은 날이 오겠지. 4) 준비되면 연락하겠다.

진정성이 의심된다.

디자이너 “몸뚱아리 차별”은 범죄다 

– 디자이너를 모델 뽑듯 뽑는다고 비판했는데? 

자동차도 만드는 사람 따로, 테스트하는 사람 따로다. 음식도 옷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데 패션업계에서는 인건비를 줄이고 싶으니까(‘디자이너는 공급이 많으니까’) 모델같이 날씬한 디자이너를 뽑는다. 40만 원, 50만 원, 80만 원… 이런 식으로 주고 부려 먹는다.

피팅 모델은 시급이 1~2만 원 정도 된다. 기업에서는 피팅 모델을 할 수 있는 (인턴) 디자이너를 뽑으면 일석이조의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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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체 조건을 통한 디자이너 채용, 어떤 점이 문제라고 보나.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외모나 신체조건을 차별하는 것은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는 보지도 않고 자기 회사 옷을 던져주며 안 맞으면 입사가 곤란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저열하게 인격적인 모독과 상처를 준다.

이건 인종차별과 같은 범죄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는 이력서에 증명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 속에 있다.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을 뽑아야지, 일회용 소모품을 뽑으니 인재가 성장할 수 없는 구조다.

– 어떻게 접한 정보인가.

코오롱, 제일모직, 이랜드, 유명 백화점 브랜드조차도 하고 있는 짓이다. 일일이 해당 업체들의 구인정보를 찾아봤다. (패션노조가 57개 패션업체 구인조건을 분석한 결과. 이하 패션노조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일부 가져옴.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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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담한 현실이다. 

인격 모독과 몸뚱아리 차별이다. 많은 패션업계 구인광고에서 직접 공공연하게 표현하고 있던 현실이다.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행위를 숨기지도 않고 떳떳하게 할 생각을 할까? 갑질 계속하면 그게 갑질인 걸 모른다. 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계속하고, 계속 받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긴다.

차별하는 사람도, 차별받는 사람도 그게 당연한 건지 안다.

패션노조의 성과 

– 패션노조의 문제 제기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용노동부에서 실태조사를 이번 주 월요일부터 진행했다. 주식회사 이상봉에서는 30만 원 받던 이가 150만 원 받고 있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근로계약서를 쓰고, 연봉을 올리고 있고. 패션 쪽 구인광고도 ‘추후 협의’라는 모호한 문구 대신 구체적인 근로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늘고 있다.

전반적으로 ‘순풍’이 불고 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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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이 파급할 수 있다면 좋겠다. ‘을의 반란’이라는 기사도 나고, 패션 쪽에서 선도적으로 움직임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았다. ‘코미디 빅리그’에서도 풍자 대상으로 삼아서 적잖은 국민이 인식하게 된 것 같다.

– 특히 미디어 전략, PR 전략이 아주 효과적이었는데. 

활동한 지 3개월이지만, 이색적이고, 인프라가 없어도 할 수 있는 활동을 전략적으로 구상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서 가능했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했고, 언론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사회적으로 제 역할을 해주는 시민단체, 언론, 평범한 이들의 변화에 대한 욕구, 시민들과 국민들의 도움으로 커졌다고 본다.

지속 가능한 재밌고 신 나는 활동을 위해서

– 향후 계획은?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대화합시다.”라고 했고, 그쪽에선 “기다려 봐”라고 했으니, 우리는 대화하자고 재촉을 할 거다. 장하나, 이인영 의원 등 정치권에서도 관심이 있다. 언론과 퍼포먼스를 통해 압박할 거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상봉 사퇴 투쟁까지 할 수도 있다. 사회적인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당장은 패션업계 최초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실태조사’를 하려고 한다. 이제까지는 산발적으로 제보만 받았는데, 실태조사를 통해 제대로 ‘이슈 메이킹’을 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 조사 결과는 제도화를 위한 소중한 자료로 쓰일 것이다.

최종적으론 제도화하는 작업을 생각하고 있다. 궁극적으론 교육이 없어 그렇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노동법’ 강의를 한 시간이라도 하면 시민단체나 노조가 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 노조 의무교육? 

프랑스에서는 의무교육으로 노사교섭을 하는 교육과정이 있다. 사측 입장에서도 서 보고, 노동자 입장에서도 서 보고. 한쪽 입장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상생하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학습한다.

단 한 시간 만이라도 사회에 나오기 전에 이런 교육을 받는다면, 굉장히 많은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사라질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도 바로 이런 가장 기본이 되는 교육에 닿아 있다.

이 사회적 갈등을 보라.
교육은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

– 패션노조 하는 기회비용과 지속가능성은. (= 돈 생기는 일도 아니고, 힘들지 않나?) 

저번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이 망했지 않나. 호나우두가 아무리 잘해도 함께 해야 잘하지. 내가 호나우두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왜 포르투갈이 깨졌나. 함께 하는 선수들이 없어서 예선 탈락하지 않았나.

‘의인이 사라지는 시대’라는 기사를 접했다.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다는 지적이 있더라. 돈이 창고에 들어가서 순환하지 않는다.

상생, 같이 살자는 가치가 중요하다. 공동체 의식이 중요하다. 함께 해줘야 오래간다.

– 주변에 몸빵, 돈빵하는 분 많나?

몸빵하는 사람은 있는 것 같다. 주변에 다들 돈 없는 청년들이라서. (웃음)

돈빵하는 분들은, 재정사업을 지금 막 시작해서… 별로 없다. 그전에는 사비로 했는데, 지금은 후원을 받아서 하고 있다. 사회적 인지도는 커졌는데, 재정은 크게 부족하다. 소셜펀치에 펀딩했는데, 아는 지인 두 분만 후원했더라. (허허)

말 그대로 응원만 한다. 정말 힘들다. 숨 쉬는 것 빼고는 다 돈인데, 최소한 활동자금이 있어야 기운을 낼 텐데… 사비 털어서 지탱하고 있다. 마이너스다.

소셜펀치-패션노조 소셜 모금함 http://www.socialfunch.org/gorightfashion
소셜펀치-패션노조 소셜 모금함

– 2만 2천 원… 안타깝다기보다는 민망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한다.

침묵하지 말자. 침묵하는 게 착하고 순한 게 아니라 사회가 진전하는 데 걸림돌이다. 부당한 게 있으면 의견을 내고, 여론화시켜서 개선하자.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게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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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1. 구인광고 몇개는 피팅업무라고 써있는데, 피팅업무라면 몸매를 볼수있는거 아닌가요? 디자이너/인턴을 뽑는데 신체조건을 따지는것은 인권침해지만 피팅업무라고 명시되어있는 상황에서 신체조건을 보고 뽑는게 인권침해라고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2. 비단, 어느 분야에서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 평생 불의나 부정이 옳지 않음을 배우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모른다. 정말로 연대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좀 슬프고 한스럽다

  3. 구인광고에 피팅모델+디자인입니다. 이건 피팅모델만을 구하는게 아니라 디자인하면서(잡무라 예상) 피팅모델을 병행(공짜)할 사람을 뽑는거라 예상되는군요. 인권침해 맞습니다.

  4. 피팅 모델을 구해야지 왜 막내 디자이너를 구하냐? 어차피 가봐야 동대문제일 시장 돌아댕기는 일이랑 피팅밖에 못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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