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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좌파는 누구고, 우파는 누구일까?

가령,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주류 우파는 노무현 정권을 좌파 정부라고 비난했다. 한편 민주노동당이나 정의당을 지지하는 진보 지식인은 민주당 정권 시절 이루어진 노동유연화 등을 신자유주의적 정책(우파 정책)이라고 주장하며 진짜 좌파는 자신들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이루어지던 민영화나 노동 유연화 등은 한국 우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박정희 시절에 확립된 제도들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은 우파적 정책을 취했으니 박정희 정권의 유산은 좌파적 유산이 되는 셈인가?

노무현 정부 시절에 부동산이 급등했기 때문에 그 책임이 노무현 정부에 있다는 세간의 인식은 잘못이다. 그 책임은 김대중 정부에 있다.
한국의 진보 지식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진보가 아닌 보수(우파) 정부로 보기도 한다.

적대적 공생: 일제 부역자 vs. 종북 빨갱이 

이렇듯 정파 간 지향점이나 비전에 대한 구별이 잘 안 가다보니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정치경제적 기획이나 사회경제적 비전으로 다투지 않았다. 혹은 다툴 수가 없었다. 대신 그들이 근간을 둔 정체성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면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좌파는 자신을 우파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우파의 근간을 일본 제국주의 시절 지배집단(조선총독부 혹은 만주국)에 협력한 부역자들의 직접적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반면 우파는 그런 정당성을 허무는 도전에 대응하여 민주화 운동 세력이 북한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왔고 또 여전히 북한과 정치적 연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https://flic.kr/p/owu3P David Sim, CC BY
자신의 존재를 세우기 위해 상대방을 부정하는 한국의 좌우파는, 김일성의 북한과 박정희의 남한이 서로에게 그랬듯, 적대적 공생 구조를 만들어냈다. (출처: David Sim, CC BY )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역사 속에서 (민족 혹은 국가를 배반한) 악의 세력임을 입증하고 자신들은 그 악으로부터 사회를 구하기 위한 절대적 선임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서구에서 경제 문제에 대한 태도로 갈라진 좌우가 한국에서는 친일과 종북으로 수렴하게 되었는가? 무엇이 한국에서 좌우 구분을 혼란스럽게 하였나?

한국에서 우파에 관한 인식은 이들이 친기업적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그러나 친기업이라는 것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명시적으로 좌파적인 비전을 천명하지 않는다면 친기업에는 두 가지 방향성이 있을 수 있다. 현대 서구 사회에 익숙한 것은 국가가 단순히 규칙을 정해주고 기업 활동에 있어서 최대한의 자율성을 보장해주고자 하는 자유시장경제다.

개발독재(발전국가 모델)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와 같은 조류와는 구별되는 다른 강력한 힘이 존재했다. 바로 군부와 관료집단이 경제 주체들, 특히 재계의 활동 범위를 통제하되 그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해주는 국가 주도 발전 모델이었다(이른바 박정희식 ‘개발독재’ 혹은 ‘발전국가 모델’).

재계는 국민적 발전을 위해서 서로 간 경쟁을 억제하는 대신 수출시장에서 활약하고 가치사슬의 상위를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야 했다. 개별 기업은 그들이 어떤 산업에 투자해야만 하는지 상세히 지도를 받았고, 많은 경우 집권정당과 관료집단에 상납금을 낼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정치권과 관료집단이 제공해주는 지대를 향유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그리고 이 모두를 함축하는 '개발독재'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그리고 이 모두를 함축하는 ‘개발독재’

이처럼 한국의 재계는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며 성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그에 따를 경우 주어지는 보상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따라서 국가의 통제를 사용할 것인가, 혹은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를 두고 싸워온 서구의 좌·우파와는 다른 모습이 그려진다. 한국의 좌·우파는 국가의 통제력을 재계 지원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재계 통제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를 두고 싸운다.

“파이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국가가 적극적 분배 정책을 시행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장 유능한 경제주체인 재계가 파이를 창출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으므로 계속하여 정치 권력이 이를 지원해야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따라서 일반적인 한국의 좌·우파 사이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 권력의 적극적 사용은 이미 양측 모두 전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서구의 좌·우파와 대비되는 특수성이다.

발전국가론의 기원

그래서 우파의 특수성, 즉 국가 의존성이 생겨난 역사적 기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선 이미 명확한 설명이 존재한다. 바로 한국의 정치경제를 설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박정희가 그 직접적 기원이라는 것이다. 박정희는 국민적 발전을 정권의 정당성으로 삼으며 국가 권력을 경제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박정희와 동료 관료, 정치인들은 어디서 이와 같은 발전국가 아이디어를 가져왔을까? 그 명확한 연결고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흔히 만주국의 경제개발을 이끌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기획이 그 뿌리라고 이야기 된다.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어 총리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1961년 모습)
A급 전범 용의자였으나 기소되지 않고 석방되어 총리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1961년 모습)

기시 노부스케와 그의 동료 ‘혁신 관료’들과 육군의 통제파 관료 등 테크노크라트 집단은 만주국에서 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적극적으로 산업 생산과 투자를 통제하고, 적극적 지원책을 펼치는 모델을 처음으로 실험했다. 이는 세계가 새로운 초광역권으로 재편되고 있고 각 광역권의 경제는 유기적으로 하나의 실체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지정학적 발상, 그리고 소련으로부터 제기되는 군사 안보의 위협과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제기되는 경제 안보의 위협으로 실행이 추동된 아이디어였다.

이후 태평양 전쟁을 맞이하여 이들 만주국 라인은 일본으로 귀국하여 일본 또한 관리주의 혹은 통제경제 모델로 재편하고자 여러 기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신체제 운동’이라고 하며 당시 메이지 시대에 형성된 기성 정치세력은 재계의 자율성을 억누른다는 이유로 신체제 운동에 거센 비판을 가한다.

너무도 매혹적인 스탈린의 공업화 성공 

박정희의 발전국가 전략은 일본 제국의 아이디어를 남한의 정치적 상황에 맞게 적용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과 만주국의 설계자들도 그 아이디어를 진공에서 고안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장경제의 틀을 유지하되 국가 통제를 가미하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국가 권력의 적극적 사용은 본디 좌파의 아이디어임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일본 군부와 혁신 관료에게 국가통제 아이디어를 준 이들은, 놀랍게도 동시에 당연하게도, 좌파였다.

대공황과 그것이 초래한 사회적 혼란은 일본 내에서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큰 불신을 심어주었다. 일본에서는 급속히 성장한 노동계의 갈수록 격렬해지는 쟁의와 재벌의 무분별한 독과점, 이윤추구가 사회의 총화를 해친다는 인식이 점점 확대되어 갔다.

이에 반해 스탈린이 주도하는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은 일본의 신흥 관료집단에게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었다. 당시 대다수 국가가 대공황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안 소련 경제가 이룩한 엄청난 성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념을 앞세운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스탈린은 이념을 앞세운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

1931년 일본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영원한 번영을 자랑할 것 같았던 달러 자본의 아성, 미국이 1929년 가을 주식공황에 의해 최소한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버렸다. 이후 세계 대공황의 충격파가 각국 경제의 근간을 흔들면서 모든 국가들이 적자와 실업에 허덕이게 되었다. 반면 소련의 노동계급은 부러운 생활을 살고 있다.

(중략)

이른바 산업 5개년계획과 농업경영의 집단화 결과, 노동자들은 임금 상승과 완전고용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1928년 10월 1일부터 1931년 9월 30일까지 최근 3년 간 공장 노동자들의 월평균 임금은 24% 증가했고, 금속공업의 경우, 1931년 10월 1일에 23.5%의 임금인상을 발표했으며, 석탄 산업도 12%의 임금 인상을 단행했다. 더불어 5개년계획이 진척됨에 따라 수백만의 노동자가 신규 산업 부분에 흡수되었다.” (국민신문, 1931. 1. 10)

다른 신문은 “5개년 계획의 성공이 많은 산업국가들에게 자본주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냈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931. 4. 30)고 보도하기도 했으며, “현대 세계에서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경제체제가 존재한다. 소련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무계획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했고, 오직 소련만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채택했다. 1929년 가을 이후 전 세계 경제의 회복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가들과 사업가, 학자들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효과적 방안을 찾기 위해 지혜를 모으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이 자본주의 경제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만주일보. 1931.)고 보도했다.

한국 우파의 역사적 기원

초기 만주국의 싱크탱크였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과 관동군도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만철의 러시아계에서는 소련의 산업, 재정, 무역, 농업, 노동, 광산 등의 각 주제에 관한 막대한 정보를 즉각 수집하여 분석하기도 했으며, 이 조사의 성과물들은 만주국의 통제경제를 설계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만철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만철의 상징 ‘특급 아시아호’

후에 만주국으로 부임해온 기시 노부스케는 상공성 과장인 당시 소련이 가져다준 충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그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던 자유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의욕과 아이디어에 상당한 위협을 느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기원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박정희의 설계 하에 만들어진 남한 우파가 재계의 상대적 자율성 대신 강력한 국가 권력의 지원과 통제에 우호적인 모습은 이제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그 기원은 바로 좌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스탈린 주도하에 이루어진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 경제적 기획에 있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에 형성된 일본의 전통적 우파는 통제정책을 좌파적이라 비난했고,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들이 행하고자 하는 정책이 좌파적이지 않다고 끊임없이 변호해야 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기시 노부스키의 국가주도 경제의 뿌리, 소비에트 계획경제

발전국가 모델의 쇠락과 개혁가의 출현  

그런데 이런 발전국가 모델은 1980년대 이후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발전국가들이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들어서고, 민간 부문이 추동하는 혁신과 생산성 향상에 경제발전을 의존하게 되자 기존의 투입식 모델은 그 적실성을 잃었다고 주로 평가받는다. 남한과 일본 정치경제의 머나먼 기원을 형성하는 소련 모델은 바로 그 때문에 남한이나 일본 수준으로 성장해보지도 못하고 주저앉고 자원 의존 경제로 후퇴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따라서 각각 정치인과 관료의 강력한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한 몇몇 개혁가가 등장했는데, 전두환 정권 시기의 김재익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등이 그러했다. 또한, 남한은 IMF가 강제하는 구조개혁을 통해서 국가 권력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 후퇴시키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활동하며 '경제대통령'으로 불린 김재익(1938년~1983)은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 정책, 수입 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했다. 아웅산 테러로 사망.
전두환 정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활동하며 ‘경제대통령’으로 불린 김재익은 금융실명제, 물가 안정화 정책, 수입 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했다.  1938년 생으로 1983년 아웅산 테러로 사망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장 2016년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알린 주요한 사건인 미르 재단 사태는 과거 형성된 정치경제의 경로의존성과 관련이 깊었다. 박근혜 정권은 전경련을 통해 재벌을 압박함으로써 사적인 이득을 부당하게 취할 수 있었다. 이는 군부 정권이 만든 발전국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단기적인 정치적 이득을 위해 통치 정당성을 너무 깎아 먹고 신뢰 자원을 파탄시킨 우파가 분열하면서 지금 한국은 정치경제 구도의 재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파는 자신의 이념적 지향성을 발전국가의 그것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국가 권력을 경제 주체들을 통제, 지원하는 데 사용하여 필연적인 유착 관계를 만들어내는 반시장적 기획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이는 정치적 비전의 차원에서 좌파와의 차이점을 흐리게 하여 불필요한 정체성 공세로 자원을 집중하게끔 한다.

한국의 우파가 새롭게 소생하려면… 

한국의 우파가 새로이 소생하기 위해서는 이제 발전국가의 비전을 벗어던지고 반공주의적 흑색선전에 집착하는 것을 포기해야한다. 반공주의적 선전이 그간 우파에 있어서 꽃놀이패로 기능한 것이 분명 사실이기에 이것을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유능한 좌파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유능한 우파가 필요하며, 승리한 자보다는 패배한 자가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훨씬 쉽다.

한국 우파는 시장주의가 과해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시장주의의 결여가 우파를 취약하게 한다. 이제 우파는 공정한 규칙을 제정하고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창조적 파괴를 용인하고 때로는 추동하는 포용적 경제 제도를 창출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세계관의 조정부터 필요할 것이다. 박정희는 상징적인 존재로 계속 남겨두더라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소구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른 상징들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김재익 같은 개혁가가 있을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김대중의 시장주의적 조치도 우파의 지향점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일관성과 설득력을 갖출 수 있다.

박정희 스탈린 김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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