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한 장으로 대한민국 정치 지형을 꿰뚫어 본다.
향후 정국에 대한 전망은 덤이다.
선거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행된 여론조사에 다름 아니며 선거 결과에는 새로운 정부의 지지 구조, 각 정당의 현주소, 향후 정계 개편의 방향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당선 확실 판정이 너무 빨리 내려져서 우선 나부터도 개표 방송 시청에 소홀했다.
안희정이 문재인한테 뽀뽀한 것밖에 기억나지 않으니 원… 정신을 차리고 일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제19대 대통령선거 투표구별 개표 자료를 찾아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착시 현상을 지우자 – 카토그램으로 다시 보기
시군구별 최다 득표자를 뽑아서 지도에 표시해보면 홍준표가 선두를 차지한 곳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실제 숫자는 아주 다르다. 문재인 후보는 총 175개 시군구에서 선두를 차지하며 총 1,342만 3,800표를 득표했고, 홍준표 후보는 총 75개 시군구에서 선두를 차지하며 총 785만 2,849표를 득표했다.
시군구 경계를 그냥 날것으로 사용하여 선거 결과를 그려보면 선거인 수 편차를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난다. 자유한국당 입장에서는 이런 착시현상이 정신건강에 이로울지 모르겠지만, 결정적인 전략적 오판을 야기할 수도 있겠다.
카토그램(Cartogram: 변량비례도)은 각 지역의 면적을 인구수 등에 비례하도록 변형하되 상대적인 위치 관계는 유지하는 분석 도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총선 결과 분석 보도 등에 활용된 적이 있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광역시도를 19대 대선의 선거인 수를 기준으로 변형하면 각 지역이 실제 선거 결과에 미치는 중요도를 착시 현상 없이 볼 수 있다.
앞서 본 최다 득표자 지도를 카토그램으로 다시 그려 보면 서울-경기-인천이 팽창하고 강원도가 축소되면서 전체 구도가 많이 달라 보인다. 강원-대구-경북 벨트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문재인 후보가 홍준표 후보에 앞섰다.
각 후보자의 득표율을 기준으로 색상 투명도를 조절하여 겹쳐보면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이 좀 더 자세하게 드러난다. 서울은 모든 구에서 문재인 후보가 득표율 1위를 차지한 가운데 노원구에서는 홍준표보다는 안철수가 우세, 강남구와 서초구에서는 홍준표 후보가 다른 곳에서보다 좀 더 득표한 것이 보인다. 의외로 송파구는 홍준표 후보가 많이 득표하지 못했다. 충청남도의 다채로운 색상도 흥미롭다. 확실히 1등만 표시하는 것보다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문재인 – 다자구도에서 전국을 평정하다
문재인 후보는 1,342만 3,800표(득표율 41.08%)를 얻으며 이번 대선의 승자가 됐다. 지역별로는 서울-수도권 대부분 지역, 부산-울산-경남지역 2/3 이상, 충청권(충남 예산, 금산군 제외)에서 전체 투표자의 35% 내외, 세종-광주-전남 지역에서 투표자의 과반 지지를 확보했다.
가장 득표율이 낮은 시군구인 경상북도 군위군에서조차 12% 이상 득표했다.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25% 내외, 대구에서도 20% 수준의 득표에 성공했다. 양자구도가 아닌 다자구도 – 더구나 야권 내에서 문재인, 안철수가 표를 나누는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표를 다 얻었다고 볼 수 있겠다.
엄중한 국정 상황을 생각해서 샴페인은 터뜨리지 못하더라도 산뜻한 정권교체가 아닐 수 없다. 단일화 같은 구질구질한 조건 없이 단독으로 집권에 성공했기 때문에 권력과 자리 배분과 관련된 부채감 없이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상황이다.
높은 투표율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대체로 높은 투표율이 진보 성향 후보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실제 선거 결과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제18대 대선도 투표율이 높았지만, 박근혜 후보가 과반 득표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투표율 = 진보 후보 유리’라는 미신은 계속된다. 이번 대선에서도 탄핵 정국으로 말미암아 대구-경북 지역의 투표율이 낮아질 것이고, 그로 인해 보수 후보가 불리할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역시나 이번 대선에서도 투표율과 그 영향에 대한 예측은 빗나갔다. 의외로 충청남도의 투표율이 낮았다. 선거 초반에 반기문이 하차하고 안희정이 더민주 경선에서 탈락하며 정치적 효능감이 낮아진 탓이 아닐까 한다. 오히려 경상도 지역은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 상승 국면에 힘입어서인지 투표율이 높았다. 사전투표에서 이 지역의 투표율이 낮았던 것은 막판 단일화 변수에 대한 관망 심리가 작용했던 듯하다.
이번 대선 결과에서 투표율과 득표율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를 보이는 것은 문재인 후보뿐이다. 그러나 이 정도 상관관계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번 대선은 모든 후보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최대한 투표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홍준표의 맹렬한 추격
홍준표 후보는 전국 득표율 24%, 총 785만 2,849표를 득표하여 2위를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공표된 여론조사에서까지 줄곧 3위를 탈출하지 못하다가 한 주 사이에 안철수 후보를 따라잡은 것이다.
선거 기간 내내 이어진 초 강성 발언의 영향일까? 홍준표 후보는 전북, 전남, 광주에서 거의 득표하지 못했다. 아마 기존에 갖고 있던 표도 이번 대선에서 다 소모했으리라. 그러나 잃은 것에 비해 얻은 것이 충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구에서 홍준표의 득표율은 35~55% 수준이고, 경북 일부 지역에서 55%를 넘어섰지만, 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구들이다.
전체적으로 홍준표 후보가 선전한 지역에서도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가 상당한 득표율을 올리면서 자유한국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을 잠식했다. 지금 상태라면 향후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자유한국당의 세력이 어느 정도 유지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문재인 후보와 홍준표 후보 득표율의 정확히 반비례 관계로, 결정 계수(R2) 값이 무려 0.91이다. 문재인 후보 득표율이 48% 이상 되는 구간에서는 아예 홍준표 후보의 득표율이 거의 0에 가깝다. 홍준표 후보는 시종일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정책을 폄훼하고 경상도 스트롱맨의 가부장적이고 거칠 것 없는 이미지를 앞세웠다.
적을 명확히 함으로써 전통적 지지 세력의 선택을 강제하는 전략이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2등을 목표로 싸운 것으로 보이니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눈물겹지만 아성을 지키는 데 성공한 것.
안철수와 문재인의 공생 관계
안철수 후보는 전국에서 총 699만 8,342표를 득표했다(득표율 21.4%). 아마도 선거 운동 기간 초반에는 이것보다 훨씬 큰 꿈을 꾸었으리라. 그러나 안철수의 짧은 정치 이력, 또한 정치적 중도층 공략의 어려움을 생각해 봤을 때 무시하지 못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길지 않은 한국 정치사에서 진정한 3자+ 구도로 대선이 치러진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안철수 후보가 거둔 성적은 좀 더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철수 후보의 지역별 득표율을 살펴보면. 득표율 하위 그룹은 경상도 전역, 중위 그룹은 수도권-강원-충청 지역, 상위 그룹은 전라도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문재인 후보와 유사한 패턴이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로 산포도를 작성해보면 아주 흥미로운 그림이 나온다. 문재인 득표율 50% 정도를 전후로 이하 구간에서는 문-안 지지율이 동반 상승하고, 그 이상에서는 문재인의 지지율이 증가하면 안철수의 지지율이 급감한다.
이를 보면, 두 후보는 대체로 유사한 정치 성향의 유권자에게 지지를 받고 있으며, 호남 지역에서는 국민의당이 보유한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안철수와 문재인의 제로섬 게임이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호남이 문재인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문재인 후보는 1위를 차지하고, 안철수 후보는 3위로 밀려났다. 이 점에서 국민의당은 향후 깊은 고민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안철수와 홍준표 – 결국은 대결구도
안철수와 홍준표의 득표율을 비교해 보면, 문재인과 홍준표 득표율의 상관관계와 거의 같은 패턴을 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진짜 보수 유권자들은 홍준표에게 다 돌아갔다. 그래도 홍준표 후보가 안철수 후보 강세 지역에서 거둔 성적에 비하면 안철수 후보가 홍준표 후보 강세 지역에서 거둔 성적은 꽤 준수하다.
안철수와 유승민 – 아직은 건널 수 없는 강
선거 막판에 안철수가 유승민, 심상정과의 연계를 살짝 도모했던 장면이 있었다. 선거 결과만 놓고 보면 성공적인 전략은 아니었다. 안철수 – 유승민의 득표율 관계는 안철수-홍준표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다. 물론 반비례 관계의 강도는 훨씬 약하다. 그러나 유승민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갈수록 안철수 후보는 내려가는 관계다. 중도 개혁과 중도 보수의 사이에 흐르는 강물도 꽤나 깊은 모양이다.
안철수와 심상정 – 우린 통하는 줄 알았는데…
안철수와 심상정의 관계는 괴상하다. 두 후보의 득표율은 상관계수가 제로(0)다. 통계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무상관 산포도이다. 안철수 후보는 자본가 출신으로 진보에서 중도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심상정 후보는 노동운동가로서 반대 방향의 길을 꿋꿋하게 나아간다. 두 정치인의 지지 세력이 교차할 일은 글쎄…? (그런데 문재인 후보 득표율과 심상정 후보 득표율도 무상관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간단한 전망, 소망, 궁금증
문재인 정부는 당분간 안정적인 국민 지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건 전망이 아니라 소망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래도 문재인-안철수가 박빙의 승부가 아니라 상당한 격차로 승패가 정해졌기에 더민주-국민의당은 수평적 연대(라고 쓰고 수직 계열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대선 과정의 앙금을 털어내고 강력한 연대를 이룬다면 자유한국당이 지금 맞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은 시작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내년 지방선거와 총선을 거치면서 자유한국당의 정치적 기반이 얼마나 유지될지 의문이다.
그러나 당내 친박 세력이 여전히 건재한 상황이기 때문에 남은 기간 동안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정당 정비가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홍준표 후보조차도 친박에 비해서는 양반인데 어이없게도 당내 비주류다. 한숨만 나온다.
바른정당이 이번 대선에 기치로 내걸었던 보수 개혁의 길은 아직 그 미래가 불분명해 보인다. 바른정당은 전통적인 지지 기반에서 외면받고 있으며, 중도 보수층 내지는 개혁적 보수층은 실존하는지조차 의문인 상황이다.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보수층이 강력한 결집을 일으켜서 원래 존재하던 개혁 보수 성향의 유권자층이 잠시 몸을 숨긴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중도 성향 유권자의 뿌리는 진보·개혁 성향 유권자층에 있는 것인지가 명확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우리 국민들 지난 몇 개월간 마음고생 많으셨습니다.
당분간 나라 걱정은 새 대통령에게 맡기고 우리는 발 뻗고 잠 좀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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