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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증의 탄생
-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ft. 생각, 말, 글)
- 대화의 파토스와 에토스 vs. 글의 로고스
- 논증이냐 아니냐: 고등학교와 대학 글쓰기의 차이
- 왜 이것은 논증이고, 저것은 논증이 아닌가
- 논증의 다섯 가지 요소: 일상 대화에서 찾는 논증의 원리
- 냉소적인 방관자 ‘독자’ 설득하기: 실용 논증과 개념 논증
- 가치 있는 주장을 위한 세 가지 조건
- 인간이 가장 쉽게 빠지는 생각의 오류 (ft. 비판적 상상력)
- 우리가 원인을 잘못 판단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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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시간이 없거나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때는 얼굴을 마주보며 논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득하고자 하는 상대를 직접 만날 수 없을 때, 논증을 펼치기 위해 먼저 설계하고 검토할 시간이 필요할 때, 상대방이 논증을 검토할 시간을 요구할 때는 글로써 논증해야 한다.
하지만 논증 ‘글’이 제공하는 효용은 이보다 훨씬 크다. 논증 글을 쓰는 것은 비판적 사고를 습관화하고 논증을 익히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글을 쓰는 것이 구체적으로 비판적 사고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살펴보자.
논증 ‘글’의 효용
문득 떠오른 생각을 말로 내뱉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그것을 글로 써서 전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머릿속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들은 대개 흐릿하고 모호하기 마련인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체크리스트를 제공한다
논증 요소들을 글로 쓰다 보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내가 떠올린 이유를 어떤 사실로 뒷받침할 수 있을까? 이에 모순되는 사실은 없을까? 나의 논리는 타당할까?
남들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다고 해서 반드시 혼자 궁리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생각을 고려할 때 더 나은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혼자서 궁리를 할 때도, 다른 이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이유를 제시하고 근거를 찾듯이 논증하면 자연스럽게 비판적인 사고가 발달한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질문을 던짐으로써 나의 사실, 이유, 믿음, 관점을 좀 더 세심하게 조율하고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글로 논증할 때 더 탄탄하고 치밀하게 논증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글에는 본질적인 불리함이 있다. 글로 논증할 때는 설득하고자 하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일지 대부분 알 수 없다. 협력적인 사람인지,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인지, 관대한 사람인지, 까다로운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누가 읽을지 알지 못하면 어떤 어조로 논증을 전개해 나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독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면 독자의 오해도 바로잡아줄 수 없고 의외의 질문이나 반론에도 답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독자를 예측하고, 그러한 예측이 빗나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글이 지닌 치명적인 불리함은 따로 있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에게서 문제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훨씬 쉽다. 표정, 목소리, 몸짓을 이용해 상대방을 자신의 논증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인간의 존재감은 종이 위에 쓴 글로써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상대방의 관심을 이끌어낸다.
글로 논증할 때는, 이러한 ‘존재감의 부재’로 인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해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타당한 이유를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독자를 논증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내 글을 ‘덮어 버리지 않고’ 계속 읽어야 할 타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글에 대한 독자의 가장 치명적인 반응은 ‘악플’이 아니라 ‘무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어떻게 하면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독자가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을까? 독자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증을 잘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문제가 나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는 것을 일깨워줘야 한다. 여기에서도 비판적 사고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독자의 관심을 어떻게 끌 것인가?
독자의 관심을 효과적으로 끌기 위해서는, 논증을 통해서 독자에게 무엇을 끌어내고자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상대방을 설득하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가?).
독자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해결되는 문제 (실용 문제)
- 사회적 갈등
- 권력기관 개편
- 노동시간 단축 등
이런 문제들은 사람들을 화나고 슬프며 불쾌하고 무섭우며 고통스럽고 부끄러우며 떳떳하지 못하게 만들고, 의욕을 꺾는다. 실용 문제는 나를 비롯하여 독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결과의 사슬을 끊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도록’ 설득할 때에만 해결된다.
독자가 생각이나 이해를 바꾸기만 해도 해결되는 문제 (개념 문제)
-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 유럽에는 왜 예수를 기리는 성당보다 마리아를 기리는 성당이 더 많을까?
- 장희빈은 정말 희대의 악녀였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슬프거나 아프거나 화가 나지는 않는다. 다만 세상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좌절감을 안겨줄 뿐이다. 개념 문제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개선하거나 ‘새로운 믿음을 갖도록’ 설득할 때에만 해결된다.
설득의 목적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설득의 목적에 따라 독자를 문제에 끌어들이는 방식도 다르고 논증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자는 기본적으로 냉소적인 방관자다
내가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독자는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그들은 내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거기에 대한 논증을 시간을 내 읽어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심도 없는 주제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관심을 갖게 만들 것인지 전략을 짜야 한다.
독자는 문제를 풀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얼마나 큰 손실이 미치는지 판단한 뒤 글을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한다. 따라서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언제든 독자의 관점에서 풀어 나가야 한다. 독자의 관점을 놓지지 않으려면 독자가 계속해서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묻는다고 상상하라. 마침내 독자 입에서 ‘오, 안돼!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을 반복한다. 그때 비로소 독자는 문제에 대한 해법과 이를 뒷받침하는 논증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이다.
실용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나한테 무슨 손실이 있을까?
- 오늘날 수많은 공장들이 온실가스를 방출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 온실가스는 대기 상층부의 오존층에 구멍을 낸다. (그런데 뭐?)
- 오존층이 줄어들수록 지표면에 자외선이 더 많이 내려 쬔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 자외선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피부암에 걸리기 쉽다. (??!!)
→ 여기서 또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까지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고자 한다면 좀 더 인내해야 한다. - 피부암이 늘어나면 건강 관리 비용이 치솟고, 많은 이들이 죽을 수 있다. 너도 죽을 수 있다!
→ 이렇게 손실을 제시했음에도 지구온난화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설득할 상대를 잘못 찾은 것이다. (혹은 손실의 초점을 처음부터 잘못 잡은 것이다.) 어쨌든 상대방 입에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말이 나와야만 독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궁금해 할 것이다.
개념 문제를 풀지 못하면 나한테 무슨 손실이 있을까?
- 하늘에 별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거 알아서 뭐하려고?)
- 그러면 우주 전체를 하나로 붙잡아줄 수 있는 중력을 만들어 낼 만한 질량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
독자가 두 번째 질문(더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한다면, 첫번째 질문이 가치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 해답과 이를 뒷받침하는 논증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대부분 ‘그래서 어쩌라고?’ 또다시 물을 것이다.
- 그러면 우주 전체를 하나로 붙잡아줄 수 있는 중력을 만들어 낼 만한 질량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우주의 질량을 알아내서 뭐하려고? 뭐 큰일이라도 나?)
- 우주 전체를 하나로 붙잡아 줄 수 있는 중력을 만들어 낼 만한 질량이 얼마인지 대답하지 못하면, “우리가 사는 우주가 언제 사라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 이렇게 물었는데도 또 ‘그래서 뭐?’라고 묻는다면 논증에 끌어들이기 어렵다.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 사실 개념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손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개념 논증에 관심을 갖는 독자는 실용 논증에 관심을 갖는 독자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순수 학문 vs 응용 학문
대학에서 다루는 학문 역시 어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탐구하는 것인데, 개념 문제를 다루는 학문은 ‘순수 학문’이라고 부르고, 실용 문제를 다루는 학문은 ‘응용 학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순수 학문이든 응용 학문이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논증은 대부분 ‘개념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들이 이런 불평을 한다.
-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더 나은 회계사가 되는 데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대학 교수들은 고리타분한 답을 내놓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학점을 딸 수 없다고 협박하지만, 실제로 대학을 졸업한 뒤 엔지니어나 회계사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삶의 현장을 누비는 무수한 전문직 종사자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역사, 문화, 커뮤니케이션, 심리학, 철학 등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과목들을 대학시절 왜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까 후회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바쁘거든요. 대학생 여러분 열심히 공부하세요.
하지만 정치인 중에는 개념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 인문학 같은 걸 대학 4년, 심지어 대학원까지 가서 공부할 필요가 있어요? (참고 기사)
시카고 대학의 어떤 학자는 깡통을 흔들면 알갱이가 큰 땅콩들이 위로 올라오는 현상에 호기심을 느껴 이 문제를 해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이 연구에 대해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에 많은 정치인들이 반대했다.
땅콩이 가득 담긴 깡통을 흔들면 큰 땅콩이 맨 위로 올라가는 이유를 연구한다고?
그거 알아낸다고 해서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런 거 연구하는 데 국민이 낸 세금을 왜 지원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가 찾아낸 해답은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실용적으로’ 활용되었다. 운송회사에서는 알갱이로 된 물건을 효율적으로 포장하는 법, 건설회사에서는 길을 튼튼하게 다지는 법, 제약회사에서는 알약을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 법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어쨌든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독자의 관심을 끄는 작업은 글의 첫머리, 서론에서 해야 한다. (그래야 글을 계속 읽어나갈지, 덮을지 독자가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앞선 에피소드에서 ‘학생을 고객으로 대해야 한다’ 주장을 펼치는 글을 살펴보았는데, 그 글의 서론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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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드웨스트대학 학생회는 학교생활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을 조사했다. 장학과가 오후 2시에 문을 닫는 것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불만을 제기한 학생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들이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는 학생들은 매우 많았다. (독자도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실)
이러한 문제는 대학이 학생의 요구에 거의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학생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학교에 다니려면 돈을 내라. 그밖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말라.’는 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제기)
이러한 상황을 모른 체 그냥 넘기면 우리 학교는 ‘학생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대학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 명성은 점점 떨어질 것이며 궁극적으로 교육의 질도 떨어질 것이다. (손실)
대학은 우리를 단순히 학생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좋은 학교로 성공하려면 우리를 고객으로 대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해법과 주장)
서비스를 받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은, 당연히 기업이 고객을 대하듯이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 (전제)
학생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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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와의 협의 하에 [논증의 탄생: 21세기 민주시민을 위한 비판적 사고, 토론, 글쓰기 매뉴얼] (조셉 윌리엄스)에서 발췌한 내용을 슬로우뉴스 원칙에 맞게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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